▲ 28일 오전 일본 교토시 외곽에 위치한 '망간탄광기념관'을 찾아 이용식 관장을 만났다.
사진은 당시 함바(노동자 숙소) 내부 모습. 식사는 보리밥 한사발에 거친 반찬이 전부였고, 이 관장 뒷쪽 잠자리에는 20명 정도가 비좁게 기거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일본 교토 시내를 벗어나 굽이굽이 산길을 한참이나 에돌아가다 ‘단바망간기념관’이라는 표식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표식들마저 깨지고 넘어져 있어 기념관에 관람객의 발길이 끊겼음을 웅변해주고 있었다.

깊숙한 숲속에 자리잡은 ‘단바망간기념관’. 일제시대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조선인들이 군수물자 생산에 필수적인 망간 채취를 위해 망간탄광에서 혹독한 노동 끝에 진폐증으로 목숨을 잃었던 사연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곳이자, 지금은 고인이 된 이정호 선생과 그 유지를 이어받아 기념관을 운영해온 아들 용식(50) 씨의 혼이 담겨 있는 곳이다.

28일 오전, 기념관을 방문한 기자에게 내민 이용식 관장의 손은 10년 간의 탄광일로 다져진 굳은살이 도드라졌다. 우람한 체구에 굳은살 박힌 솥뚜껑같은 손을 지닌 그가 최근 한국에도 번역 소개된 『재일조선인 아리랑』을 쓴 저자라는 사실이 잘 믿기지 않았다.

일본인 저널리스트 다나카 사카이(田中宇)가 『망간 파라다이스』라는 책을 통해 1930년대에 조선인들이 ‘객지로의 돈벌이’를 위해 일본 단바지역 망간탄광에 자발적으로 몰려들었다고 기록한 내용을 반박하기 위해 10년에 걸쳐 경남 보양군 대덕면을 직접 방문하는 등 각고의 노력 끝에 ‘강제연행’의 역사를 밝혀낸 지적 탐구력을 갖춘 작가라는 인상과 맞아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 굴진기가 보급되기 전까지 정과 망치를 이용한 수작업으로 망간석을 채굴했다. 원래는 앞쪽을 보고 굴진해 들어갔지만 관람객을 위해 방향을 바꾸어 전시했다. 폭 30센티미터에 높이 60센티미터로 누워서 채굴하는 곳까지 있었다고 한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그의 안내로 둘러본 800m 가량의 탄광 갱도 내에 꾸며져 있는 전시장은 여러 설명이 필요없이 ‘살아있는 역사교육의 현장’이 어떤 것인지를 절감케 했다.

물이 흘러내리고 낙반사고의 위험이 상존하는 비좁은 갱도 내에서 허리조차 제대로 펴지 못한 채 채굴과 운반의 중노동을 감당하고 있는 강제연행 조선인들의 마네킹 모형은 전율을 불러일으켰다. 그마저도 관람객들을 위해 갱도의 폭과 높이를 훨씬 넓혔다는 곳이 이러하다니...

1986년께 이용식 관장의 아버지 이정호 선생은 “일본이 저지른 죄행의 역사를 우리가 남겨야 한다”며 “10만 엔의 현금도 없는” 조건에서 박물관 건립을 제기했고, 이 관장은 “처음에는 찬성 못했다”지만 결국 3년 만인 1989년 기념관을 건립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해설을 듣고 나서도 “그럴 리가 없다”는 일본인들을 상대로 그들의 어두운 침략의 역사를 가르쳤고, 개관 20년 만인 지난해(2009년) 5월 ‘7300일’의 기록을 뒤로 하고 재정난으로 폐관해야만 했다.

그러나 최근 기념관 폐관을 안타까워하는 이들이 재개관을 추진하고 있으며, 기자가 방문하기 하루 전인 27일 ‘망간탄광기념관 재건위원회’가 발족돼 내년 4월 재개관을 목표로 오는 9월부터 개보수를 시작하기로 했으며, 당면해 850만 엔을 모금하기로 결정했다.

이용식 관장은 “일본이 가해자로서의 역사를 인정해야 재일교포들에 대한 차별이 없어지고 동남아시아의 평화로도 이어진다”며 “기념관을 지켜나가기 위해서 협력을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한다고 해서 못해낸 일은 없다”며 “일본 사람 한사람 한사람에게 이 역사를 알리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고 결의를 다졌다.

기념관을 나서며 머나먼 이녘 땅에서도 우리 민족의 수난사를 통해 동북아의 평화를 설파해 나가고 있는 그의 널찍한 어깨를 껴안으면서 이 시대의 ‘살아있는 신념의 강자’를 만났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은 교토시 노인복지시설 '에루화'에서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는 남순현 씨의 통역 도움을 받아 이용식 관장과 나눈 인터뷰 내용 전문이다. 

“내가 한다고 해서 못  해낸 일은 없다”

▲ 망간탄광기념관 설립을 제안했던 고 이정호 선생. 진폐증을 심하게 앓고 있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통일뉴스 : 처음 부친 이정호 선생이 이 기념관을 세우자고 한 취지는?

■ 이용식 관장 : “한이 있어서 그렇다. 일본이 저지른 죄행의 역사를 우리가 남겨야 한다. 폐병으로 죽어도 아무 것도 안 남는다. 우리가 남겨야 할 것이 있지 않은가. 귀화하면 좋은가? 자기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일본이 달라져야 한다. 나는 레지스탕스다”라고 말씀하셨다.

피해자로서의 기념관은 많이 있지만 일본이 저지른 죄행을 폭로하는 가해자로서의 기념관이 없다는 것을 아버님이 일찍이 말씀하셨다.

그러나 가족들은 박물관 지을 돈이 있다면 노인 됐을 때 쓸 돈, 무덤 만들 돈을 남겨두자는 이야기도 했다. 그러나 당신은 “폐병이 있으니까 오래 살 수 없다. 그렇지만 일본에 무덤은 필요 없다. 바다에 수장시켜 달라”고 했다. 한국에 어머니가 계시니까 바다를 통해서 당신이 어머니 곁으로 떠난다. 무덤도 필요 없고 재산도 필요 없으니까 무덤을 대신해서 박물관을 세우자고 하셨다.

일본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일본 사람들에게 가해자로서의 역사인식을 시켜야 된다는 그런 사명감 같은 것을 갖고 계셨다. 당신 주변에 계신 분들이 다 폐병이기 때문에 조만간 죽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분들을 보고 역사를 남겨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셨던 것이다.

□ 그 같은 아버지의 결심에 대해 아들로서 어떻게 받아들였나?

■ 처음에는 찬성 못했다. 지금 10만 엔의 현금도 없는 사람이 몇 억 엔 박물관을 지을 수 있겠는가.

당시 저는 탄광일을 10년 정도 한 후에 동포 1세들, 글 못쓰는 분들의 행정신청을 돕는 자원봉사자로 일하고 있었다. 그런 자원봉사 활동 중에 그분들의 경력, 인생역사를 알게 됐다. 일본 때문에 어떤 처지에 놓이게 됐는지 알게 됐다.

한달쯤 고민하다가 “알겠다”고 했다.

□ 기념관은 실제로 언제 건립되고 폐관됐나?

■ 1986년에 결심을 가졌고 1989년에 개관했다. 이후 아버지가 6년간, 내가 14년간 관장을 했다. 2009년 5월에 폐관했다.

▲ 여러 가지 망간석 표본. 망간은 총 800여 종이 있으며, 이곳은 총 700여 종을 소장, 560여 종을 전시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기념관을 지을 때 가장 어려웠던 점은?

■ 갱속 안을 꾸미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 아버지가 계획도 없이 “내년 5월에 개관을 하겠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100m까지 올라가는 갱도가 있는데 거기는 폭파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폭파하면 산 자체가 무너진다. 작은 정으로 파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내년 5월까지 개관하겠다고 선언했는데 그때까지는 시간이 모자랐다. 그래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판단하지 못했다. 그때 아버님은 폐병으로 힘들어서 갱 속으로 들어 갈 수 없었다. 나도 10년간 탄광일을 했지만 거기를 어떻게 공사하면 좋은지 그 부분만은 아버님 지시가 없으면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버님을 그 안에까지 모셔 가서 직접 보여드렸더니 폭파가 무리라고 하셨다.

그래서 밤에도 잠을 안자고 정을 이용해 손으로 파냈다. 그때 아버지를 갱에 모신 것이 마지막이다. 아버지는 이 갱 전체를 다 구경해보신 적이 없다. 그때가 가장 힘들었다. 나머지는 돈 때문에 고생이 많았다.

□ 그러면 건립 자금은 어떻게 해결 했나?

■ 자재를 쌓아뒀던 토지가 조금 있었다. 그래서 많이 팔아넘겼다. 또한 팔수 있는 것은 전부 다 팔았다.

□ 2009년 폐관 때까지 운영했는데, 주로 어떤 사람들이 보러 왔나?

■ 시민단체, 행정 관계자, 학교 관계자, 일반 사람 등 다양하게 왔다.

□ 기념관을 견학한 분들의 반응은?

■ 그들은 인권학습을 하러 왔다. 일본 학생들은 자기나라의 가해자로서의 역사를 전혀 모르고 성장한다. ‘일본은 나쁜 일을 안 했다’, 그렇게 아는 학생들이 찾아온다. 그러니까 해설을 들어도 그럴 리가 없다고 한다. 자기들은 안 배웠다는 것이다. 이런 소리를 하는 학생들이 하도 많아서 신문기사들을 전시하기로 했다.

60대 넘는 노인들도 일본인들의 경우 믿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일본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일본 사람들이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나도 알았다. 교과서를 통해서도 대중매체를 통해서도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기념관을 시작한 당시는 “과거 일을 언제까지 그렇게 집요하게 이야기하는가”라는 일본사람들이 많았다. 그때 나는 “피폭자, 피해자로서의 정신은 남아 있죠?”라는 말로 반박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자폭탄 피해를 받았다는 피해자 정신을 당신들은 포기하는가? 그거와 똑같다”고 이야기했다.

“같은 시대 이야기인데 그 이야기는 남기고 싶고 이 이야기는 남기고 싶지 않은가. 원폭도 강제연행도 똑같은 이야기다. 그러니까 양쪽 다 남겨야 할 역사다”라고 주장했다.

▲ 50킬로그램 정도의 등짐을 지고 40미터 가량의 수직 갱도를 아슬아슬하게 오르고 있는 모습을 재현했다. 밖에서 지게에 질 때는 200킬로그램 이상을 졌다고 하니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지난해 폐관을 결정했는데, 굉장히 마음 아팠을텐데, 왜 폐관했는가?

■ 다나카 사카이라는 일본 사람이 『망간 파라다이스』라는 책을 썼는데, 강제연행이 없다는 거짓말을 썼다. 그러나 내가 실제로 거기 가보니까 강제연행 마을이었다. 그 거짓말을 쓴 책 『망간 파라다이스』는 틀렸다.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책과 미디어를 통해서 냈으니까 큰일은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돈이 없으니까 폐관은 빨리하고 싶었지만 그 책과 미디어를 낼 때까지는 유지하자 그래서 힘겨운 속에서도 유지해왔지만 그 책을 내고 결단을 내렸다. 유지할 돈이 없으니까 폐관했다.

원래는 강제연행 박물관 같은 것은 일본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개인이 박물관을 운영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다. 박물관은 공공성이 강한데 개인이 운영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나?

일본에 5천 개의 박물관이 있지만 강제연행이라든지 가해자로서의 박물관은 하나도 없다. 그런 것을 자신들이 인정을 안 하니까 정부도 거부한다. 유일하게 조선사람들이 만들고 유지하고 있는 박물관에 대해서는 단 한 푼의 돈도 내지 않는다.

가해자로서의 역사를 남기는 박물관이 따로 있다. 일본 목사가 큐슈의 나가사키에 박물관을 냈다. 거기에도 일본 정부는 돈을 안 낸다. 오사카에는 교과서 박물관이 있는데 역시 정부가 한 푼도 안 낸다. 철저히 감추자는 것이다. 방해해서 부서지기를 기다리고 있다.(웃음)

□ 폐관 후 일각에서 재개관 움직임이 있는 것으로 안다.

■ 재개관 하려고 한다. 20년 전, 운영하고 있을 때도 힘들었다. 20년 전이 지금보다 더 힘들었다.

어제 재건위원회 발전모임도 했는데, 거기서도 참가자들로부터 “할 수 있는가. 한번 폐관했는데 또다시 재건할 수 있는가”를 질문 받았다. 그래서 “내가 한다고 해서 못 해낸 일은 없다”고 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교토만 아니라 일본 여러 곳에서 재일교포들이 “이곳은 폐관하면 안 된다. 도와주자”는 소리가 많이 나와서 나도 하자는 결심을 가지게 됐다.

20년간 운영하면서 일본 정부는 가해자들의 역사를 감추자, 없애자 해왔지만 일반 시민들 속에서는 이걸 폭로하고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사람들이 20년간의 활동을 통해서 조금씩이라도 드러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 일본 사람들의 협력도 있어서 이번 재건 결심을 하게 됐다.

▲ 이용식 관장이 망간이 들어간 제품들을 설명하며 맥주병을 들어보이고 있다. 망간은 철의 강도를 높여주기 때문에 철도 레일과 포신 등 군수물자 생산에도 필수품이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한국 국민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 일본이 가해자로서의 역사를 인정해야 재일교포들에 대한 차별이 없어지고 동남아시아의 평화로도 이어진다. 그러니까 기념관을 지켜나가기 위해서 협력을 부탁드린다. 그 것 뿐이다.

한국에 있는 독립박물관 같은 것을 일본에도 세워서 일본 사람에게도 알려야 한다. 일본 사람은 역사를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다. 역시 알려야 동남아시아의 평화가 유지된다.

교과서에서도 매스컴에서도 알리지 않았으니까 재일동포 차별이 없어지지 않고 동남아 평화도 실현되지 않았다. 일본 사람 한사람 한사람에게 이 역사를 알리는 것이 나의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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