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오후 2시, 국회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엄수됐다. [사진-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 늦더위가 기승을 부렸지만, 1만 8천여 명의 조문객들이 고인의 가는 길을 배웅했다. [사진-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김대중 대통령님, 그리고 선생님. '행동하는 양심이 되라'는 마지막 말씀을 새기겠습니다. 말씀대로 깨어 있겠습니다. 우리들이 깨어 있으면 당신이 곁에 계실 것을 믿습니다."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8월. 민주화와 민족화해의 '역사적 인물'이 된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을 떠나보내는 추도사가 '국장' 영결식이 엄수 된 국회광장에 울려퍼졌다.

'6일 국장'의 마지막날인 23일 오후 2시,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국회광장에 모여든 1만 8천여 추모객들은 김 전 대통령이 창당한 평화민주당에서 부총재와 총재권한대행을 지냈던 박영숙 미래포럼이사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낭독한 추도사를 들으며 고인이 걸어온 가시밭길을 따라갔다. [추도사 보기]

"김대중 대통령님, 그리고 선생님. 독재정권 아래에서 숨쉬기조차 힘들 때, 김대중이라는 이름은 그대로 희망이었습니다. 모두가 침묵하고 있을 때, 총과 칼이 가슴을 겨누어도 님께서는 의연하게 일어나셨습니다. 숱한 투옥, 망명, 연금을 당하시고 늘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지만 뜻을 꺾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내일을 준비하셨습니다. 대통령님께서는 역사와 국민을 믿으셨습니다."

추도사에는 85년의 일기로 이승을 떠난 김 전 대통령의 삶의 족적이 꾹꾹 눌러담겼다. '진정한 민주투사' '불굴의 정치인' '준비된 대통령' '민족의 지도자'... 김 이사장은 김 전 대통령이 사선을 다섯 번이나 넘나들고 온갖 정치적 박해와 시련을 받으면서도 민주화에 투신해 역사상 처음으로 수평적 교체를 이뤄낸 것과 사상 초유의 외환 위기를 극복하고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어낸 업적을 열거하면서 이같이 평했다.

김 이사장은 "저희가 이렇게 모여 대통령님의 업적을 헤아린다는 것이 어찌 보면 어리석은 일"이라며 "그 크기와 무게를 가늠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김 전 대통령의 재임시절 영상을 보며 이희호 여사와 김윤옥 여사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장의위원장인 한승수 국무총리는 조사에서 "김대중 대통령님은 국내 뿐만 아니라 국제사회도 높이 평가하는 우리 현대사의 위대한 지도자 가운데 한 분"이라며 "지금 세계 각국이 대통령님의 서거를 애도하며 우리 국민과 슬픔을 함께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라고 추모했다. [조사 보기]

한 총리는 이어 "대통령님은 평생 동안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와 민족화해를 실현하기 위해 헌신해 왔습니다"며 "대통령님이 이루고자 했던 민주주의 발전과 평화적 통일 그리고 국민 통합에 대한 열망은 우리의 미래를 열어가는 소중한 길잡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 총리는 "대통령님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우리 사회의 화해와 통합에 크나큰 역할을 했습니다. 대통령님은 생전에도 늘 '남북으로 갈라진 것도 모자라 동서로 갈라지고 계층간에 대립하고 세대간에 갈등해서는 우리의 미래는 없다'고 강조했습니다"고 상기하며 "우리는 이러한 대통령님의 유지를 받들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고 다짐했다.

▲ 가장 먼저 헌화를 한 이희호 여사가 주위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로 돌아오고 있다. [사진-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이희호 여사 등 김 전 대통령 쪽이 국장이 화해와 통합의 자리가 되기를 바랐듯이 영결식장에는 반목과 경쟁을 넘어 고인의 영면을 기원하는 인사들이 줄지어 자리했다. 고인이 병상에 있을 때 극적 화해를 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시종 엄숙한 표정으로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고, 김 전 대통령으로부터 '사면'을 받았던 전두환 전 대통령도 영정 앞에 고개를 숙여 애도를 표했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도 검은색 정장 차림으로 영결식에 참석해 애도의 뜻을 표했다.

이밖에도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와 민주당 정세균 대표,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 민주노동당 강기갑 대표, 창조한국당 문국현 대표,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 등이 나란히 자리했다.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장에서 김 전 대통령과 손을 맞잡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던 권양숙 여사도 전두환.김영삼 전 대통령 옆에 앉아 '전직 대통령' 예우를 받으며 고인을 추모했다.

미국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 중국 탕자쉬안(唐家璇) 전 외교담당 국무위원, 일본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전 중의원 의장 등 11개국 조문사절단도 영결식에 참석했다.

영결식은 천주교.불교.기독교.원불교 순으로 종교의식을 치르며 시종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엄수됐지만, 김 전 대통령의 대통령 재임시절 모습이 담긴 영상이 상영되자 끝내 곳곳에서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특히 김 전 대통령이 "우리는 지금 모두 땀과 눈물과...(목이 메이는 듯) 고통을 요구받고 있습니다"며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온 국민이 힘을 모을 것을 강조하는 대목에선 추모객들도 함께 눈시울을 붉혔다.

성악가 김영미, 평화방송소년소녀합창단의 추모공연과 3군 조총대의 조총발사에 이어 영구차가 장내를 빠져나갈 땐 스피커를 타고, 사회를 맡았던 연극인 손숙 전 환경부 장관의 울먹임도 흘러나왔다.

▲ 영결식이 끝나고 운구행렬이 국회 의원회관 방향으로 빠져나오고 있다. [사진-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영결식 내내 고개를 떨구고 연신 눈물을 훔친 이희호 여사도 고인의 대형 영정과 영구차가 지나가자 흐느꼈다. 이 여사는 고인의 영정 앞에 헌화하고 존경의 뜻을 담은 듯 허리를 깊이 굽혀 예를 표했다. 이어 이명박 대통령과 전두환.김영삼 전 대통령도 국화꽃을 내려놓으며 고인의 영면을 기원했다.

파킨슨 병을 앓고 있는 장남 홍일 씨는 뙤약볕 아래서도 힘겹게 아버지의 마지막 길을 지키려 했으나, 결국 영결식이 시작된 지 30분이 지날때 쯤 그늘로 몸을 피해 친지 등의 간호를 받는 모습이 목격돼 주변을 안타깝게 했다.

영구차가 여의도 민주당 당사로 향하기 위해 국회 출구 쪽으로 다다르자 이를 지켜보던 시민들 사이에서 나즈막한 흐느낌들이 흘러나왔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이들도 있었고,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 산천초목이 다 울 것이다. 대통령님, 편히 쉬십시오"라고 고별인사를 전하는 시민도 있었다.

전남 광주에서 이른 아침에 올라왔다는 박명자(57) 씨는 "호남의 인물이고 나라의 인물이며 세계적인 인물인 대통령님이 가시는 게 너무나 슬프다"면서 "늘 가슴에 화합하자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한 번은 가는 것이지만 이렇게 가니 가슴이 아프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 이날 국회 곳곳의 삼엄한 경계 속에서 영결식이 엄수됐다. [사진-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함께 사회를 본 조순용 전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은 1시간 10분간의 영결식을 마치고 고인을 배웅하며 '마지막 일기'를 낭독했다.

"2009년 1월 6일 오늘은 나의 85회 생일이다. 돌아보면 파란만장의 일생이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투쟁한 일생이었고, 경제를 살리고 남북 화해의 길을 여는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일생이었다. 내가 살아온 길에 미흡한 점은 있으나 후회는 없다."

"2009년 1월 7일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역사는 앞으로 발전한다."


김 전 대통령은 3번의 낙선 끝에 대통령에 당선돼 취임식을 했던 국회를 빠져나가 여의도 민주당 당사와 동교동 사저, 서울광장과 서울역을 거쳐 동작동 국립현충원에서 영면에 든다.

한편, 이날 영결식장에선 3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한 남성이 이명박 대통령이 헌화를 할 때 "위선자"라고 외치다 경호원들에게 끌려나가기도 했다.

한 낮의 서울 지역 기온이 최고 31도까지 올라갔던 이날, 일부 조문객들은 뙤약볕을 피해 인근 나무그늘에서 땀을 식히며 영결식을 지켜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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