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재 글에서 1990년대 중반 이후의 북한영화에 대해 연구한 이명자의 글에 대하여 다시한번 서술하면 그의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북은 그 동안 계급 차별을 통한 통제의 사회였는데, 위기에 처한 1990년대 이후는 체제 위기에 대응하여 내부 통합을 유도하는 광폭정치를 하고 있다. 이러한 것이 영화 속에서는 지난 시절 적대계급으로 분류되었던 사람들을 가족이라는 테두리로 끌어들이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이제는 지난 시기와 달리 혈연적 대가족은 해체되고 있다.
셋째, 이러한 혈육으로서의 가족 해체는 이종인물, 이종집단 간의 새로운 가족 만들기로 나타난다. 이러한 경향은 영화 속에서 결손가정의 아동들을 양자로 받아들이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주장에 대하여 첫 번째 것은 지난 번 글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하였고, 이번 글에서는 그 두 번째와 세 번째 주장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2) '대가족 해체'라는 성급한 결론

이명자가 주장하듯 현재의 북한영화 속에서 혈연으로서의 대가족은 해체되어 나타나고 있는가를 보도록 하자. 먼저 대가족은 영화 속에서 해체되었는가를 보자.

예술영화 <가족롱구선수단>(1998)에서 아버지 윤상구는 체육을 중시하는 당 정책에 따라 결혼한 3남 3녀의 자식 내외와 고등중학생인 큰손자 선남이까지 모두 농구연습에 몰두시킨다. 그리하여 가족농구선수단을 꾸려 도 농구대회에 참가하게 되고, 여기서 결국 기계공장농구팀을 이기고 우승을 함으로써 인민들이 생활 속에서 체육활동을 할 수 있도록 계몽하기 위한 영화이다.

여기서 비록 시집간 딸들은 따로 살지만 모두 한 마을에 살며 농구경기를 통하여 영화 속에서는 한 가족처럼 형상화되어 있다. 이러한 것은 농구연습과 경기뿐만 아니라 노동에 있어서도 모두 함께 움직인다. 그야말로 대가족 그 자체인 것이다.

▲ 예술영화 <가족롱구선수단>(1998) : 주인공 윤상구(김광렬 분)의 집에 온 가족이 모두 모여 체육운동의 일환으로써 농구의 중요성을 논하는 가족회의 모습 [자료사진 - 유영호]

뿐만 아니라 가장 최근(2005~2008년 사이)에 창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텔레비전 연속극 <행복은 어디에>(6부작)는 주인공 경순이 시부모님 외에 시동생 8명이나 있는 집으로 시집을 오는 데, 여기서 둘째 시동생은 이미 결혼한 상태여서 시집에는 아랫동서까지 함께 지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엄청난 대가족을 이끄는 맏며느리로 들어오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되며, 그 속에서도 서해안 바닷가 양식사업에 성공을 거두는 이야기다.

<행복은 어디에>가 <로동계급편>과 다른 것은 이미 아랫동서가 있는 집으로 시집을 왔다는 것 정도이며, 최근 북의 가정에서 결혼순서에 형제간 서열에 굳이 억매이지 않는다는 현실을 보여줄 뿐이다. 이것은 <로동계급편> 시대배경과 다른 데서 오는 지극히 사실주의적인 묘사일 뿐이다.

▲ 텔레비전 연속극 <행복은 어디에>(2005~2008 추정:6부작) : 주인공 경순(리은향 분)이 동철의 집 맏며느리로 시집와서 시부모님과 9남매의 형제들에게 인사를 나누는 장면 [자료사진 - 유영호]

위 두 편의 영화를 통해 살펴본 바와 같이, 제작시기는 물론 그 내용면에서 최근을 시대배경으로 한 위의 <가족롱구선수단>과 <행복은 어디에> 두 영화에서 나타나는 '혈연적 대가족'의 모습은 그것이 전면적으로 해체되지 않았으며, 아직도 상당부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따라서 필자가 하고 싶은 말은 이명자의 글과 같이 한 두 편의 영화에서 나타나는 일면적 모습으로 그것이 마치 북한영화 전체의 새로운 경향인 양 일반화하는 위험한 결론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3) '새로운 가족 만들기'라는 이상한 분석

마지막으로, 이명자는 혈육으로서의 가족은 해체되고 이종인물, 이종집단 간의 새로운 가족 만들기에 나섰다고 주장하며, 그 사례로 최근의 영화에서 결손가정의 아이들을 자기 가족으로 편입시키는 이야기가 많이 전개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러한 결론이 성립하려면 그 이전의 영화에서는 이러한 이야기의 전개가 전혀, 내지는 거의 없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조사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새로운 가족 만들기의 하나인 결손가정의 아이들을 자기 가족으로 받아들여 그들에게 가족이라는 혈친적 집단애정을 쏟아 넣는 장면은 이전의 영화에도 '수없이 많이' 있어 왔다. 그러한 사례로 1990년대 이전의 작품 가운데 필자가 파악한 영화만 하여도 <정방공>(1963), <금녀에 대한 이야기>(1969~1970), <금희와 은희의 운명>(1974), <숲은 설레인다>(1982), <녀교원>(1986), <두 그루의 백양나무>(1989), <흰 저고리>(1990) 등이 있다(아래 표 참조).

따라서 고아가 된 아이들을 당 비서가 아버지처럼 돌봐주는 이야기인 <나의 아버지>는 결코 1990년대 북이 사회주의 위기를 맞이하여 새롭게 창작하고 있는 영화의 내용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이명자가 주장하듯 '북이 위기에 직면하여 광폭정치로 이종인물, 이종집단 간의 새로운 가족 만들기에 나섰다'는 논리는 시대변화를 정확히 읽은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고아 등 이종인물을 가족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내용의 영화들>  

영화제목

제작년도

내용

정방공

1963

해방이 되었지만 일제 때 고아가 된 주인공 옥림과 복순을 당 비서가 데려가 가족처럼 키우며 방직공장 노동자로 키우는 내용. 또 전후에는 은실이라는 아이도 데려와 그 역시 언니들 밑에서 노동자로 키운다. 그 후 주인공 옥림은 천리마영웅이 되고, 최고대의원에 입후보까지 하게 된다.

금녀에 대한 이야기
(2부작)

1969~1970

일제 때 유격대에 들어간 아버지와 헤어진 딸 4살짜리 금녀가 그 뒤 어느 한 여인에 의해 키워지고 대학까지 나와 설계사가 되어 해방과 전쟁을 겪은 뒤 발전소 건설장에서 그곳의 신임 지배인으로 온 아버지를 감격적으로 만나는 이야기.

금희와 은희의 운명

1974

미군정 시기 쌍둥이를 데리고 월북하다 사망하고, 그 순간 우연히  같이 있었던 두 남자가 쌍둥이를 나누어 키우기로 하고 헤어지는데, 이렇게 남북으로 갈려 쌍둥이 자매들이 이산가족이 된 이야기.

새 세대를 위하여

1974

전쟁시기 남반부 적후에서 고아가 된 아이들을 적후공작원 명숙과 인민군 분대장 박진석 등이 혁명의 미래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전선을 넘어 북으로 데려와 그들을 수령과 당의 품에 안아 들이는 모습을 형상한 이야기.

숲은 설레인다

1982

전쟁 때 전사한 전우의 부탁으로 그의 부인에게 찾아갔다가 전우의 부인마저 죽고 어린 딸만 있는 것을 보고 그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주고, 산림보호원이었던 전우의 유언을 지켜 자신이 매령산 산림보호원이 되어 그 딸과 함께 수림을 아름답게 가꾸는 이야기.

녀교원

1986

해방 후 마을 훈장이 지주에게 사살되고, 그의 딸 향순이가 아버지의 뜻을 이어 반동들과 싸우며 아이들을 교육하는 이야기로 이 과정에서 협동농장의 화재로 고아가 된 3명의 아이들을 자기 자식으로 받아들여 함께 살아간다.

두 그루의 백양나무(전후편)

1989

전우의 어린 두 아들 대혁, 대철을 데려다 자기의 자식으로 삼으며 키워오는데, 성인이 된 뒤 형인 대혁이가 개인주의적이고 보신주의적 행태를 보이는 것을 올바르게 교양하고 이끌어주는 이야기.

나의 어머니

1990

정녀는 일제 때 가난 속에 어린 딸 금옥을 버렸고, 이렇게 버려진 금옥은 룡천집 녀인에 의해 어렵게 키워지다 그가 배를 타고 나갔다 풍랑으로 또 다시 고아가 된다. 그 후 해방이 되고 당에 의하여 키워졌던 금옥은 훗날 생모 정녀와 자신을 키워주었던 금천집 녀인 등 모두를 다시 만나게 되는 이야기.

흰 저고리

1990

옥정은 처녀의 몸으로 인민위원장의 아이 둘을 키우는데, 그의 언니는 동생을 시집 보내려고 아이들을 애육원으로 보내 떼놓지만 다시 그들을 찾으러 갔다가 따라붙은 다른 아이 5명을 더 데려와 7명의 양어머니가 되어준다. 그 뒤 결혼을 하고 남편 성근은 또 다른 아이 4명을 데려오기까지 한다. 뿐만 아니라 주인공 옥정은 이렇게 데려온 아이의 안구수술에 자신의 구결막까지 제공해주는 애정을 베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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