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연재글에서 살펴본 것처럼 남쪽의 연구자들은 북쪽 인물이 남쪽에서 누구나 알 수 있는 공개적인 활동이 안보이면 너무도 쉽게 이에 대하여 '처형'이나 '숙청'이란 무시무시하고 선동적인 단어를 붙이는 경향이 있다.

이로써 북쪽 인물은 그곳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에 상관없이 그야말로 남쪽에서만큼은 확실히 숙청되고 마는 웃지못할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분석이 얼마나 황당하고 무책임한 분석인가에 대하여 여기서 조금 더 살펴보도록 하자.

이미 앞부분에서 인민배우 우인희와 박미화의 처형 및 숙청에 대하여 [관련 기사 보기] 그리고 이곳에서는 인민배우 문예봉에 대해서 [관련 기사 보기] 살펴보았고, 그러한 분석의 문제점에 대하여서도 언급하였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좀 더 확실히 이런 무책임한 연구자들의 자세를 고치기 위하여 이에 대한 조사를 좀 더 해보자.

여기서는 남쪽에서 북한영화 연구자들이 상당히 많이 인용할 만큼 선구자적 기여를 한 이우영의 글 가운데 북의 문학예술정책의 변화에 대한 연구에서 홍석중에 대한 언급을 보도록 하겠다.

“김일성 사후 북한의 문예정책은 이념을 중시하는 수령형상문학 시대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있다. 작품에서뿐만 아니라 북한에서는 김일성 사후 개혁적 성향의 작가와 보수적 성향의 작가 사이의 긴장이 극대화되어 보수화되는 문학예술계의 흐름에 동참하지 않거나 반발하는 작가는 숙청되었다. 개혁적인 성향을 보였던 「높새바람」의 작가 홍석중은 보수화 흐름에 동참하지 않았기 때문에 숙청되었고(밑줄 필자), 「벗」의 작가 백남룡은 「향도의 총서」중 「동해천리」를 집필하여 보수화 흐름에 동참함으로써 작품 창작 방향을 전환하였다.” (이우영, 『김정일 문예정책의 지속과 변화』(민족통일연구원:1997), p.60)

먼저, 위의 글에서 이우영은 “김일성 사후 북한의 문예정책은 이념을 중시하는 수령형상문학 시대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에 대하여서는 앞서 이러한 분석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였으므로 이곳에서 다시 그것을 언급하지는 않겠다.

다음으로 그는 그러한 잘못된 전제 하에 자신의 논리를 전개시키는 과정에서 장편소설 『높새바람』의 작가 홍석중이 북의 정책적 흐름인 보수화에 동참하지 않아 그만 숙청되고 말았다고 전한다.

그러나 남쪽 연구자들의 글 속에서 북쪽 인물의 숙청을 이야기할 때 항상 그렇듯이 이우영 역시 그의 글 어디서도 홍석중이 숙청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객관적 근거자료를 제시하고 있지는 못하고 있다. 단지 남쪽의 시야에서 그가 보이지 않았을 뿐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경우 좀 더 정확한 표현은 ‘남쪽에서는 쉽게 그의 활동이 포착되고 있지 못하다’는 말이 보다 정확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홍석중이 숙청당했다고 이우영이 주장하는 그 시간에 그는 남쪽에서도 널리 알려진 장편소설 『황진희』(2002)와 『폭풍이 큰 돛을 펼친다』(2005) 를 창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그의 창작행위를 남쪽에서 몰랐을 뿐인 것이다.

홍석중은 1989년 장편소설 『높새바람』을 발표하고 13년 동안이나 창작활동을 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그 후 평양의 어느 책상에 앉아 소설 『황진희』와 『폭풍이 큰 돛을 펼친다』를 창작하고 있었음을 남쪽의 연구자들에게 보고하지 않음으로써 그의 창작행위와는 무관하게 남쪽에서는 그만 안타깝게도 숙청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북에서 숙청당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남쪽에서 숙청당한 꼴이 되고 만 것이다. 남편의 사망 등 여러 이유로 11년간 남쪽에 자신의 활동을 드러내지 않은 인민배우 문예봉이 남쪽에서 숙청되었으니, 13년 동안이나 남쪽에 활동이 드러나지 않은 소설가 김석중이 숙청되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하지 모르겠다.

소설가 홍석중

1941년 서울에서 출생, 1948년 남북연석회의를 계기로 할아버지 홍명희을 따라 북으로 들어감. 1957년부터 인민군 복무, 김일성종합대학 어문학부(지금의 문학대학)를 졸업,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회에서 사업, 1984년과 1989년에 장편소설 『높새바람』(상, 하권), 2002년 장편소설 『황진이』, 2005년 장편소설 『폭풍이 큰 돛을 펼친다』 등 저술.

하지만 남쪽 학자들에 의하여 숙청된 홍석중이 소설 『황진이』를 2002년에 완성하자, 남쪽은 그에 대하여 2004년 그에게 만해문학상(제19회)을 수여하였으며, 2005년에는 북에서 열린 남북민족문학작가대회에 가서 북측 인사로 나온 그를 직접 만났다.

또 2006년에는 그의 소설 『황진이』를 남쪽에서 출판하였다. 뿐만 아니라 2007년에는 이것을 원작으로 하여 남쪽에서 영화도 개봉하는 등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위의 인용글을 다시 보면 북측 작가들은 자신의 정체성과 상관없이 당 지도부의 정책에 따라 성과물이 집필될 때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즉 그들은 당의 꼭두각시인 것이다. 글 속에서 당 정책에 따른 백남룡은 살아남았고, 그 것에 거스른 홍석중은 숙청되었음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러한 분석이 얼마나 황당한 것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남쪽의 연구자들이 너무도 쉽게 꺼내는 ‘숙청’ 또는 ‘추방’이란 어휘는 그들의 연구경험과 지위에 비하여 너무도 무책임한 발언인 것이다. 이들은 어쩌면 이러한 사태에 대하여 문예봉에게 적용했던 것과 똑같이 또 다시 관성적으로 ‘복권’이란 어휘를 꺼내 들지는 모르겠다. 물론 여기서도 복권의 근거자료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숙청의 근거자료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남쪽의 연구자들에게 북쪽 인물을 연구하는데 있어 ‘숙청’과 ‘복권’이란 어휘는 자신의 무지와 게으름에 대한 그야 말로 ‘만병통치약’으로 작용해 왔던 것이다.

▲ 남쪽에서 출판된 홍석중의 소설 『황진이』(2006)와 남쪽에서 황석중의 소설 『황진이』를 각색하여 창작한 영화 <황진이>(2007) [자료사진-유영호]

▲ 2005년 민족문학작가대회. 백두산에서 해가 솟아오르자 남의 고은 시인(우)과 북의 홍석중 작가(좌)가 뜨겁게 포옹하고 있다. [자료사진-유영호]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