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영화에 대한 글들을 보다 보면 많은 남쪽의 연구자들은 북쪽 영화제작자들 가운데 유독 배우들에 대하여 관심이 높다. 특히 그것도 여성배우에 대하여서만 그 관심은 집중된다. 이는 연구자들의 성별과 무관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경향성은 연구자들의 개인적 관심사항이니 이곳에서는 논의를 피하고, 그 가운데 꽤 많은 연구자들의 글 속에 등장하는 월북 여배우 문예봉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인민배우 문예봉의 젊은 시절 [자료사진-유영호]
먼저 문예봉은 일제 식민지시대인 1932년 16살의 어린 나이에 무성영화 <임자없는 나룻배>에서 나운규와 함께 주인공으로 출연하여 일약 스타덤에 오른 배우이다. 그 후 특히 1935년 우리나라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의 주인공으로 출연하여 해방 전 최고의 여배우로서 그 지위를 굳혔다.

이후 1937년 젊은 극작가 림선규와 결혼하였으며, 그 뒤 문예봉은 일제말기인 1944년 조선일보에 <나는 영화계를 은퇴한다>라는 성명서를 내고 시골로 내려갔다. 그러던 가운데 1945년 해방을 맞이하고 격동기를 보낸다.

그러던 중 남편 림선규와 함께 민족주의적 민족문화를 발전시킬데 대한 선전을 벌리었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어 문예봉은 미군정 하에서 현상금까지 걸린 수배자가 되어 도피생활을 하다 1948년 3월 남편과 함께 월북을 하였다.

해방 후 남쪽에서 있을 때 이러한 격동기를 보낸 뒤 문예봉과 남편 림선규는 북에서 각각 영화배우와 극작가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1948년 북에 정권이 들어서면서 최초의 북한영화 <내고향>(1949)에서 주인공 관필(유원준 분)의 애인 역을 맡아 열연하였고, 영화제작이 완성 된 뒤 김일성 주석으로부터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셨오. 처음으로 만든 예술 영화인데 이만하면 대단하오"(홍정자,『내가 만난 북녘사람들』, 코리아미디어, 2005) 라는 말로 크게 칭찬을 받게 된다.

또 <빨치산 처녀>(1954), <다시 찾은 이름>(1963), <성장의 길에서>(1966) 등 60여 편에 출연하였을 뿐만 아니라 1952년에는 북에서 최초로 공훈배우 칭호 및 국기훈장 제3급을 수훈하였으며, 1961년에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중앙위원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그야말로 당시 북에서 최고의 여배우였다.

그런데 문제는 1967년 북의 권력투쟁인 종파투쟁 이후부터 남쪽 연구자들의 견해는 그의 비극적 운명에 대하여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연구자들에 따라 약간의 시차가 존재할 뿐 거의 대부분 연구자들은 문예봉이 1965년 『조선영화』 4월호에 쓴 나운규를 칭송하는 글이 문제가 되어 있던 차에 1967년 복고주의자.감상주의자.허무주의자라는 꼬리표가 달려 모든 공직 및 영화계에서 은퇴하고, 안주협동농장으로 추방되며 숙청당했다가 1980년 <춘향전>으로 복귀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모든 연구자들은 그녀가 '숙청' 또는 '추방'되었다고 확정적인 표현을 쓴다. (이명자, 전영선, 최척호, 이기봉, 김하경 등)

▲ 예술영화 <춘향전>(1980) : 변사또의 대부인의 역으로 출연한 문예봉 [자료사진-유영호]

뿐만 아니라 연구자 이기봉은 이러한 배우들의 숙청을 문예봉에 국한시키지 않고 당시 월북 여배우인 김련실, 김선영, 문정숙 등으로 확장하여 이야기를 펴고 있다.

이기봉은 그 논리가 터무니 없는 거짓과 왜곡에 근거했음은 앞서 이야기했기에 여기서는 생략하고, 간단히 이기봉의 글에서 숙청되었다고 말한 김련실은 1970년 작품인 <처녀리발사>와 <아름다운 거리> 그리고 1974년 작품인 <잔칫날:도시편>에도 출연하였다.

또한 김선영은 1972년 <꽃파는 처녀>에서 지주의 어머니역으로 출연한 것으로 보아 그의 글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 것인가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으로 그치기로 한다.

문제는 다른 모든 연구자들이 북의 인민배우 문예봉이 1967년 종파투쟁으로 숙청당했고 약 10년간 농장으로 추방당하였다가 1980년 예술영화 <춘향전>에서 대부인 역을 맡으면서 복권되었다고 확정적으로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이하 이들을 '숙청론자'로 약칭함)

그러면서도 어느 누구도 인민배우 문예봉의 숙청과 복권에 관한 명확한 근거자료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즉 그가 영화계에서 활동이 없었으니 그것은 곧 숙청이고, 그러다 다시 출연하였으니 복권이라고 판단하는 듯하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공개적인 활동이 남쪽에 드러나지 않으면 그야말로 그 무서운 '숙청'이란 딱지를 붙이는 것이 남쪽 연구자들의 특징이다. 자신들의 무지와 정보부족이 이렇게 보호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문에 필자는 나름대로 관련 자료들을 찾아보았지만 숙청에 관한 진위 여부를 증명할 만한 결정적인 자료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숙청론자들의 주장에 그 논리적 결점을 찾아내는 한 두 가지 근거를 찾아냈기에 그 의문은 더욱 깊어졌을 뿐이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당시 문예봉이 1969년도에 제작이 완성된 예술영화 <금강산처녀>에 출연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문예봉이 숙청당하였다는 1967년은 거짓이 성립된다는 것이다. 숙청론자들은 1967년 종파투쟁과 유일체제 성립에서 숙청의 근거를 찾으려 하였지만 최소한 그는 그 뒤 2년이란 기간 동안 영화계에서 활동하였음이 밝혀진 것이다.

두 번째로 이들 숙청론자들은 문예봉 숙청의 근거로 제시한 1965년 4월 <조선예술>에 기고한 그의 나운규를 칭송하는 글이 문제시 되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도대체 나운규는 북에서 과연 어떤 평가를 받는 영화인이기에 그의 제자인 문예봉이 자기 스승을 칭송한 글이 문제가 되어 숙청당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물론 필자는 북의 문학예술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라 그저 나운규가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 <아리랑>(1926)을 창작한 사람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문외한인 터인지라 이 기회에 나운규에 관한 자료를 접하게 되었다.

그런데 나운규를 칭송했다는 이유로 그의 제자 문예봉이 추방되었다는 정보를 접하고 그에 관련된 자료를 읽어 본 필자에게 나운규에 관한 북의 평가는 놀라웠다. 남북이 나누어진 뒤로도 계속해서 "남북한이 모두 나운규를 '위대한 영화인'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조희문,「남북한의 '나운규 연구' 현황과 비교」,『영화연구』16호, 한국영화학회, 2001.2)

그리고 특히 나운규에 대한 칭송문제로 문예봉이 숙청당하였다는 시기에서 그리 멀지 않은 1972년도에 만들어진 북의 『문학예술사전』에서는 나운규가 3.1운동에 참가하고 그 후 1년 남짓 머슴살이를 하고, 1920년에는 일제에 체포되어 2년간 감옥생활을 하였다고 그의 영화계 투신 이전의 이력을 서술하고 있으며, 그의 영화이력에 대하여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해 두고 있었다.

"그는 이 기간(필자 주:1923~1926년)에 당시 우리 나라 영화예술분야에서 지배적이였던 반사실주의적영화예술조류를 반대하는 립장을 견지하였으며 진보적인 예술영화≪아리랑≫을 창작하였다. … 그의 이 시기(필자 주:1920년대 후반) 작품들에는 모순에 찬 1920년대 우리 나라 현실과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한 증오와 개인주의적인 항거의 정신, 자유로울 미래에 대한 지향이 반영되여있다. … ≪아리랑후편≫을 창작한 때로부터 1937년 사망하기까지는 그의 창작에서 저조기라고 말할 수 있다. … 1930년대에 들어와 사실주의적인 창작원칙을 계속 고수하지 못하고 사상예술적으로 저조한 퇴폐적인 작품들을 창작함으로써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기였다. … 라운규는 창작에서 이러한 제한성을 가지고 있으나 일제통치시기 우리 인민의 처참한 생활을 보여준 영화≪아리랑≫을 비롯하여 진보적경향성을 가진 영화들에서 직접 주역을 담당연출함으로써 우리 나라에서의 사실주의적인 영화예술의 발전에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문학예술사전』(평양 사회과학출판사:1972)

북에서 나운규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 조차 그의 이름을 거명하며 공개적인 지지를 표명하고 있기에 나운규에 대한 북의 지지는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 여기에 각각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의 나운규에 대한 언급을 옮겨본다.

"우리 나라의 애국적 예술인들과 선각자들은 일본도 영화업을 발전시키고 있는데 조선사람이라고 해서 영화를 못 만들 것이 무엇이냐, 우리도 선진국들처럼 영화를 꽝꽝 만들어서 민중을 위해 봉사하자, 그리고 영화예술에서도 자립할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세계만방에 시위하자는 배심을 가지고 영화예술건설의 간고한 초행길을 개척해나갔다. 라운규를 비롯한 량심적인 예술인들은 ≪아리랑≫을 비롯한 민족적 향취가 강한 영화들을 제작하여 우리 나라 예술인들의 실력을 과시하였다."(김일성, 『세기와 더불어』제5권, 조선로동당출판사, 1994)

▲ 위 사진은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5권에 실려져 있는 것으로 나운규와 문예봉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임자없는 나룻배>의 한 장면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김일성 주석의 나운규와 문예봉에 대한 신뢰는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자료사진-유영호]

"우리는 이 밖에도 일제시기에 진보적인 작품을 창작한 신채호, 한룡운, 김억, 김소월, 정지용과 ≪카프≫의 ≪동반자≫라고 불리운 소설과 심훈, 리효석, 근대아동문학을 개척하고 발전시키는데 이바지한 작가 방정환, ≪노들강변≫을 비롯하여 민요풍의 노래를 많이 창작한 문호월, ≪아리랑≫을 비롯하여 여러 편의 경향이 좋은 예술영화를 만든 라운규와 같은 작가, 예술인들을 문학사와 예술사에서 공정하게 평가하도록 하였다."(김정일, 『주체문학론』, 조선로동당출판사, 1992)

북에서 우리나라에 있어서 영화선구자인 나운규에 대한 평가가 이 정도이고 또 그것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크게 바뀌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를 칭송한 글이 문제가 되어 숙청당했다는 숙청론자들의 주장을 필자는 납득하기 어렵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그의 복권에 대하여서도 숙청론자들은 그저 그가 예술영화 <춘향전>에 출연하였으니 복권되었다는 말만 하였지 어떠한 이유로 복권되었는지에 대하여서는 한 마디의 근거도 제시하고 있지 않다.

논리적으로 1965년도에 문예봉이 썼다는 나운규 칭송에 관한 글이 숙청의 이유였다면 그의 복권 직전에 나운규에 대한 북의 평가가 수정되었다는 근거를 제시하여야 그의 숙청과 복권은 논리적 정합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숙청론자들은 이러한 부분에 대하여 단 한 줄의 언급도 없다.

이 정도로 인민배우 문예봉의 숙청과 복권에 관한 이야기를 줄이기로 하며, 더 이상 북의 유명인사가 공개적인 자리에 얼굴을 비추지 않는다고 하여 어떠한 근거도 없이 무조건 '숙청'이라는 무시무시한 딱지를 붙이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특히 정치가도 아닌 학문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더욱 그러한 객관성이 요구된다고 할 것이다.

(참고로 이것은 물론 무척 개인적이고 감상적 추측이 될지 모르겠지만 문예봉의 남편 림선규가 1968년 사망하여 당시 촬영하던 예술영화 <금강산처녀>를 마무리 짓고 꽤 오랜 기간 영화계를 떠나 있었던 것은 아닐까라는 추측을 해본다. 물론 이러한 사실은 그저 참고자료일 뿐 그 어떠한 근거자료로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당의 신뢰에 특별한 문제가 없이 다른 이유로 휴지기에 들어갔기에 그는 1980년 예술영화 <춘향전>에 등장하고 또 바로 1982년 인민배우 칭호를 얻게 되고 국기훈장 1급을 받게 되었으며 이후 노년임에도 불구하고 <은비녀> <봄날의 눈석이> <생명수> <위대한 품> 등 여러 편의 영화에 출연하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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