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를 시작하며>

연재되는 글은 북한영화를 소개하는 글이 아니다. 북한영화를 소개하는 글을 써도 원활하게 그 영상물을 관람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글은 그저 호기심만 야기시킬 뿐 독자들에게 어떠한 효과도 없다고 생각되어서다.

따라서 이 연재물에서는 그 동안 북한영화를 연구해 왔던 많은 연구자들의 글에 대한 비판적 분석이 주를 이룰 것이다. 그 동안 북한영화에 대한 연구의 거짓과 왜곡 등을 사례를 들며 비판할 것이기 때문에 직접 북한영화를 관람하지 않고서도 충분히 일반인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한편, 필자가 이러한 글을 쓰는 목적은 북한영화를 선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동안 북한영화가 우리 남쪽 사회에서 얼마나 왜곡되게 선전되어 왔는가를 알리고 싶기 때문이다. 이러한 거짓과 왜곡은 비단 60~70년대의 냉전시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최근 스스로 ‘제2세대 북한영화연구자들’이라며 지난 연구자들과 자신들을 구분하여 말하는 젊은 층의 연구자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굳이 말하자면 지난날 ‘맹목적 반북’이 좀 더 전문용어를 쓰는 ‘세련된 반북’으로 바뀌었을 뿐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연재 글에서 밝히기로 한다.

그리고 연재 글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 첫 번째는 북한영화 연구자들이 많이 인용하는 탈북자, 특히 영화 관련 탈북자들의 증언에 대한 구체적 자료와 연구에 입각한 비판이고, 두 번째는 남쪽 북한영화 연구자들의 북한영화에 관한 글들에 대한 비판이다.


들어가는 말

필자는 영화가 여타의 문화 매체와 마찬가지로 그 사회를 거울처럼 반영한다는 ‘반영론적 접근’에 따라 북한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써 영화를 선택했다. 그런데 최근 북한영화에 대한 남쪽 연구자들의 글들을 읽으면서 필자가 처음 북한영화를 보면서 놀란 것보다 더 많이 놀라고 있다.

북에서 영화가 가지고 있는 인민교양 수단으로써의 의미로 볼 때 그것에 대한 분석은 필연코 북에 대한 정치사상적 접근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된다. 따라서 북한영화 연구자들이 자신의 시각에서 북한영화를 분석하는 것이야 당연하고 정당한 것이지만 이들 연구자들이 사물을 분석하기 위한 최소한의 전제조건조차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에 놀란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북한영화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북한영화 그 자체보다는 그것을 해석하는 도구로 이용된 방법론 내지는 사물을 바라보는 세계관의 문제이기 때문에 영화 그 자체와는 별개의 방법론 및 세계관에 대한 논쟁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자기 주장을 위하여 그들이 영화 화면 속에서 끌어내는 근거가 거짓이거나 조작일 경우에 그것은 정의와 불의의 문제가 아니라 진실과 허위의 문제인 것이다.

즉 이들 남쪽의 영화연구자들의 글 속에는 북한영화에 대하여 상당히 많은 거짓 정보들이 난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해당 영화 속에 있지도 않은 사실을 있다고 전제하고 자기의 주장을 펴는가 하면, 영화 속에 보여지는 것을 왜곡하거나 과장하여 자기주장에 맞게 재구성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릇된 북한영화에 대한 정보와 분석은 북한영화라는 1차 자료를 일반인들이 누구나 쉽게 볼 수 없다는 이유로 광범위한 비판과 반비판이 이루어지지 못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문제는 이후 연구자들에 의하여 이러한 선행 연구자들의 거짓정보가 무비판적으로 그대로 승계되고 있다는 것이다.

나름대로 적지 않은 연구물들을 보았지만 필자가 본 연구물들 가운데 선행 연구를 비판한 글들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았다. 북한영화에 대한 거의 모든 연구가 해당 분야에 대한 최초의 연구이기 때문이다. 선행 연구자료는 그저 참고자료일 뿐 비판자료로 이용된 경우는 거의 없다.

이처럼 제2세대 북한영화 연구자들의 자료가 선행 연구자료에 대한 검증과 비판 속에서 창조된 것들이 아니라 제1세대 북한영화 연구자들과 다른 시각에서 바라봤을 뿐이며, 그들 연구성과를 재구성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선행연구에 대한 무비판적 승계는 탈북자들과의 접견 등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며 그들의 증언이 아무런 비판적 검토 없이 그대로 인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최소한 지난 냉전시대는 그렇다 치더라도 탈냉전의 현 시대에 이르러서도 그러한 관행은 여전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앞으로 이러한 북한영화 연구에 대하여 필자가 연구한 범위 내에서 구체적 비판을 전개하도록 하겠다. 물론 필자가 영화학을 전공한 전문가가 아닌 관계로 영화이론적인 비판은 없을 것이며, 단지 이들 북한영화 연구자들이 범하고 있는 객관적 사실 왜곡 여부에 대하여서만 논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들이 주장하는 북한영화의 변화 등에 대하여 다른 각도에서의 문제제기 등도 제기할 것이다.

참고로 이 글이 6.15 공동선언 이후 활발하게 북한영화를 연구하고 있는 분들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앞으로 더욱 활발하고 광범위하게 연구해 나가는데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기대를 가져본다.

여배우, 스캔들 나면 숙청당한다?

현재 많은 북한영화 연구자들의 연구방법을 보면 그 이론적 근거를 상당부분 탈북자들의 증언에서 끌어오고 있는 현실이다. 여기서 필자는 제일 먼저 탈북자들의 증언은 과연 어느 정도 신뢰할 만한가에 대하여 살펴 볼 것이다. 물론 이 글에서는 탈북자들의 여러 증언 가운데 영화와 관련된 언급들에만 국한한다.

먼저 그들이 북쪽에서 살았던 현실적인 경험이 있는 관계로 연구자들이 그들의 증언을 참조하는 것은 당연하고도 합당한 것이다. 하지만 탈북자들은 이미 북쪽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그 사회를 이탈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연구자들이 청취할 만한 ‘객관적 증언이 될 수 있겠는가’라는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으며, 따라서 이들 증언에 대한 충분한 실증적 검토가 이루어진 상태에서 참고자료로 인용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영화 연구분야의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들 증언을 아무런 검증절차도 없이 그냥 인용함으로써 독자들에게는 탈북자 증언에 남쪽 전문가들의 권위가 덧붙여지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 증언들이 모두 사실인 것처럼 몰아가는 경향이 있다.

또 그러한 글들이 발표된 이후 이 분야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은 앞선 연구자들의 성과물에서 또 다시 인용하게 되고, 이러면서 어느새 그것은 더 이상 인용이 아닌 객관적 사실로 굳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럼 이제 탈북자 증언의 몇 가지 사례를 검증해 봄으로써 그러한 무비판적인 인용의 위험성을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아마도 남쪽 사회에서 가장 유명한 탈북자 가운데 한명이 바로 신상옥, 최은희 부부일 것이다. 특히 이들이 영화인이라는 점에서 북한영화 연구자들에게는 가장 많이 참고되고, 또 인용되고 있다. 일단 이들의 증언 가운데 필자의 능력으로 검증할 수 없는 부분은 제외하고 필자가 나름대로 확보할 수 있는 객관적 자료를 통해 이들의 증언을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1978년 당시 영화감독 신상옥은 그 해 1월에 납북되었다고 보도된 부인이자 배우 최은희를 구출하기 위해 홍콩에 갔다가 같은 해 7월 19일 그도 납북된 것으로 언론에 보도되었다. 그 후 그는 북에서 영화사 ‘신필림’을 설립하고 북의 지원 속에서 영화를 창작하다가 1986년 3월 탈북하여 미국에 정착한 뒤 2006년 사망하였다.

당시 납북 직전에 신상옥이 경영하고 있던 영화사 ‘신필림’이 홍콩과 공동으로 만든 <장미와 들개>의 예고편에서 검열을 받지 않은 장면을 넣었다는 이유로 영화사 등록이 말소되어 영화 제작이 중단된 상태였다. 이러한 이유로 신상옥이 납북되었다는 것은 거짓이며 당시 경영상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자진 월북이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한편, 북의 『조선중앙년감』(1985)에 따르면 ‘신필림’은 평양이 아닌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존재하며, 1984년 그가 만들었다는 예술영화 <돌아오지 않은 밀사>, <탈출기>, <철길을 따라 천만리>, <길> 등 4편을 간단히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신필림’이 창작한 영화는 공식적인 북의 예술영화 목록에서는 제외시키고 있다.

따라서 북에서 공식적으로는 ‘신필림’이 북에 소속된 공식적인 영화촬영소가 아니며, 또 그 위치도 북이 아닌 제3국 헝가리에 있는 망명한 남쪽 영화인이 설립한 영화사라는 이야기가 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북의 『조선영화년감』을 보면 ‘신필림’에서 창작된 예술영화들은 창작영화목록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신상옥은 북의 경우 영화계에서 스캔들이 나면 숙청당한다고 증언한다. 그러면서 당시 ‘신필림’에 박미화(당시 19세)라는 주연급 신인여배우가 있었는데 신상옥은 그녀를 이산가족 이야기를 다룬 영화 <헤어져 언제까지>에서 주연으로 출연시켰는데 그녀는 앞으로 대성할 수 있는 조건들을 구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자신이 사는 예술인 독신아파트 옆 동에 사는 바이올리니스트 총각과 눈이 맞아 임신 중이라는 게 발각되고 이 소문이 차츰 퍼지자 그녀는 당에 불려가 비판 받고 쫓겨났다고 한다.(신상옥 최은희,『내레 김정일입네다』하권, 행림출판, 1994, pp.298~302)

한편 최은희는 70년대 톱스타였던 인민배우 우인희가 수 차례에 걸친 스캔들로 결국 그는 공개총살까지 당했는데 “그 당시 공개처형 현장에는 영화인들 이외에도 어디서 무얼하는 사람들인지는 몰라도 5천 여명의 군중들이 동원되어 이 끔찍한 장면을 목격했다”는 북쪽 한 인민의 말을 전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원시적이며 끔직한 이야기가 쉽게 전해지지 않는 것은 당시 그 공개처형을 지켜봤던 현장 목격자들에게는 이에 대한 함구령이 내려졌고 또 이를 누설할 경우 같은 죄명으로 다스려진다는 엄포가 내려졌기 때문이라 한다.(신상옥 최은희, 위의 책, pp.465~469) 이 외에도 여러 여배우들의 스캔들과 그 이후의 참상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다.

필자의 판단으로 볼 때 여기서 그들이 남쪽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북쪽 사회에서는 남녀의 사랑 같은 매우 사적인 일까지 모든 것이 집단의 감시와 통제 속에서 억압되고 있으며, 그것에서 일탈할 경우 가혹한 형벌이 따른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성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특히 약자인 여성들이 더욱 피해를 보고 있음을 이야기하여 그 심각성과 이로부터 발생하는 반북 정서를 더욱 확대시키고자 한다.

여기서 필자는 나름대로 이러한 증언들을 확인해보려고 자료들을 찾아 보았지만 쉽지 않았다. 현재 남쪽에서 북의 1차 자료가 가장 많이 소장된 통일부 산하의 <북한자료센타>(http://unibook.unikorea.go.kr)에도 북의 영화배우들을 묶어 놓은 자료집이 없었기 때문에 영화에 많이 노출되지 않은 배우는 일단 쉽게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 특히 우인희의 경우 최은희가 주장하듯 그가 70년대 톱스타였고 더구나 ‘인민배우’였다면 어느 정도 자료에 쉽게 노출되었을 터인데도 필자는 찾지 못하였다. 한편 5천 여명의 목격자들 앞에서 우인희를 공개처형을 했다면 그의 죄행을 널리 알려 다시는 그러한 범죄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대중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자 함이 목적일 터인데 어찌 된 것이 그러한 공개처형을 누설하면 똑같이 처형한다는 것은 뭔가 논리적으로 안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 인민배우

북의 영화배우는 남쪽과 달리 인민배우, 공훈배우, 일반배우 등으로 나뉘는데 그 구체적 지위나 대우 등에 대해서는 문건 상 추상적 표현으로 쉽게 예측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남쪽 여러 자료들은 ‘남쪽의 차관급 대우’라고 소개한다. 어쨌든 ‘인민배우’라는 지위가 대단한 것만은 사실이다. 물론 모든 인민배우가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최근에 사망한 인민배우 유원준과 오미란이 북의 ‘애국렬사릉’에 안치되었다는 사실은 이를 증명한다.

아래는 북의 『문학예술사전』에 포함된 인민배우에 관한 내용이다.

인민배우 : 예술인들에게 수여되는 최고의 국가명예칭호. 인민배우칭호는 영화, 음악, 무용, 연극 분양에서 특출한 공훈을 세우고 인민들속에서 광범한 지지와 존경을 받으며 국가 및 사회 사업분야에서 애국적이며 헌신적인 활동을 하는 예술가들에게 수여된다. 우리 나라에서 인민배우칭호는 1952년 6월 4일에 제정되였다. 인민배우칭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으로 발표하고 수여한다. 인민배우칭호를 수여받는 사람에게는 명예칭호증서와 국기훈장 제1급이 수여된다.

<출처 - 『문학예술사전』(1993)>

이처럼 우인희의 공개처형에 대한 증언은 더 이상 확인과 추론이 불가능했고, 최은희가 스캔들로 추방당했다고 증언하는 박미화라는 여배우는 쉽게 그의 활동을 찾아 볼 수 있었다. 박미화는 최은희가 추방되었다는 그 시기 이후에도 활발한 활동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추방되었다는 시점 이후에도 예술영화 <광주는 부른다>(1986), <위대한 품>(1986), <민족의 태양 제1부 준엄한 시련>(1987), <우리가 만나는 곳>(1987), <공청원들>(1989) 등에 출연하였으며, 2006년에는 8부작으로 이루어진 ‘텔레비죤련속극’ <수업은 계속된다>(2006)에도 출연하였다. 특히, <광주는 부른다>에서는 소연으로, <우리가 만나는 곳>에서는 인혜로, <수업은 계속된다>에서는 고급부 담임선생님 박윤실로 연기하며 영화 속의 여주인공으로 등장한다.

▲ 예술영화 <광주는 부른다>(1986)에서 여주인공 소연 역을 맡은 박미화. 이 영화는 1929년 광주학생의거운동을 다룬 것으로 당시 광주보고에 다니던 애국학생 세운이와 민족주의자의 딸인 소연과 사랑을 이야기하며, 그 속에서 일제 무력에 의한 광주학생운동의 실패와 이후 그들이 함께 만주로 항일운동을 하러 떠나는 내용을 담은 것이다. [자료사진 - 유영호]

▲ 8부작 '텔레비죤련속극' <수업은 계속된다>(2006)에서 여주인공 박윤실 역을 맡은 박미화. 이 영화는 새로 부임되어온 담임선생 박윤실이 자신의 학급 학생들과의 어려웠던 관계를 개선하고, 그들이 졸업 후 고치농장을 자원하여 떠나는 학생들과 함께 가서 그들을 이끌어주는 내용으로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학교를 졸업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님을 일깨워주는 내용이다. [자료사진 - 유영호]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최은희의 증언내용을 시차 순으로 배열해 볼 때 박미화는 1985년 작품인 <헤어져 언제까지>에 여주인공으로 출연하였고 그 뒤 스캔들로 추방되었다. 그 추방시기는 최소한 최은희가 탈북한 1986년 3월 이전인 것이다.

그런데 최은희에 의하여 추방되었다고 주장된 박미화는 당장 1986년에 만도 예술영화<광주는 부른다>와 <위대한 품> 등 두 편의 영화에 출연하였고, 그 다음 해인 1987년에도 <우리가 만나는 곳>과 대표적 수령형상 영화인 <민족의 태양 제1부 준엄한 시련>에 출연하는 등 그의 활동은 활발하였다.

박미화가 마지막 출연했다는 예술영화 <헤어져 언제까지>가 1985년 작품임을 고려할 때 이후 출연 작품들의 제작 년도로 보아 그가 스캔들을 일으켰는지는 확인 불가능하지만 영화계에서 추방당하였다는 증언은 거짓임이 확실하다고 판단된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