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정책 새로운 패러다임 정립했다"

“지난 1년 남북관계 정립 토대가 마련됐다고 생각한다”, “대북정책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정립했다”.

11일 이명박 정부의 첫 통일부 장관을 마치고 떠나는 김하중 장관은 기자단과의 마지막 오찬간담회와 이임식장에서 자신의 장관 재임 기간에 대해 이같이 평가했다.

김하중 장관은 이임사에서 “국제 정세가 바뀌고 정권이 변화되며, 국민들의 요구가 달라지는 큰 변화의 바람 앞에서 통일부는 이명박 대통령의 국정철학에 따라 대북정책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정립했다”며 “대한민국이 지향하는 바와 대통령께서 추구하는 남북관계는 상생과 공영의 관계이다”고 ‘상생공영’의 대북정책 수립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기자단 간담회에 배석한 통일부 김천식 통일정책국장은 “상생공영의 의미가 통일정책 역사에서 대단히 큰 의미를 갖고 있다”며 “80년대 말 냉전이 해체되면서 화해협력을 통해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남북공동체를 구성해 통일로 나아가자는 큰 전략 세우고 정책을 추진해왔는데, 이명박 정부도 그런 일관성을 유지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것”이라고 부연 설명했다.

실제로 대선 기간과 인수위 시절 ‘비핵.개방.3000’과 ‘통일부 폐지론’으로 대표되는 대북 강경정책이 김하중 장관의 손을 거쳐 ‘상생공영의 대북정책’으로 무난하게 수정된 것은 사실이다.

‘상생공영’의 대북정책은 3월 26일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처음 선보였지만 7월 1일 김 장관의 기자간담회에 이르러서야 이명박 정부의 공식 대북정책으로 대외에 명백하게 천명됐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을 오랫동안 조용히 지켜보던 북한은 3월 27일 남북경협사무소 남측 당국인원 추방을 시작으로 대립각을 분명히 세웠다. 이미 시기적으로 실기한 정책전환이었던 셈이다.

이를 입증이나 하듯 김 장관은 ‘재임중 가장 어려웠던 순간이 언제였느냐’는 질문에 “3월 27일에 남북경제협력협의사무소 우리 직원들을 철수시켰을 때, 그때 막 우리가 상생공영 정책을 보고했는데 그날 새벽에 일이 생기니까 좀 당황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김 장관이 통일부 공식 건배구호로까지 애용한 ‘상생공영’ 정책은 북한에 의해서만 퇴짜를 맞은 것이 아니라 ‘비핵.개방.3000’을 입안하고 주창해온 인사들에 의해 끊임없이 내부의 도전에 시달려왔다.

대표적 사례를 들면, 대통령직 인수위원을 거쳐 통일연구원장이 된 서재진 원장은 8월 21일 기자간담회에서 공개적으로 “상생공영의 대북정책은 ‘비핵.개방.3000’에 모자를 씌운 것”이라고 주장하고 『남북 상생.공영을 위한 비핵.개방.3000 정책의 이론적 체계』라는 책자를 만들어 대대적으로 배포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대선 시기부터 인수위 시절까지 이명박 대통령의 외교안보전략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맡았고, 특히 ‘비핵.개방.3000’ 정책의 주요 입안자로 알려진 현인택 고려대 교수가 경질된 김 장관의 후임으로 온다는 사실이야말로 김 장관의 평가를 무색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남북관계 ‘안정적 관리’, 성과 없는 건 ‘북한 탓’

김 장관은 또한 남북관계에 대해 “눈에 띠는 성과는 없었다”고 자인하면서도 “상생공영 기조 하에서 어떤 일이 있어도 원칙을 견지하면서 상황 발생시 의연하게 대처함으로써 남북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해왔다고 생각한다”고 평했다. “상황이 어렵고 결과가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상황을 잘 관리해나가고 있다는 보람 느낄 때는 많이 있다”는 것.

물론 “우리 맘 속에는 조정기 보다는 결과를 내고 싶었다”고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남북관계가 막혀 있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지만, 작년에는 실질적인 측면에서 남북간에 교류협력이 시작된 이후 최대의 인적왕래와 협력이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어려운 여건에서 ‘의연한 대처’와 ‘안정적 관리’를 추진해 ‘최대의 인적왕래와 협력’을 성사시킨데 대해선 자부심을 갖는 데는 일견 수긍할만한 대목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당국간 관계의 완전 단절 외에도 금강산과 개성관광 길이 막혔고, 개성공단 사업마저 위태로워진 상황에 비추어 주관적 평가라는 비판을 면키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말로만 외쳐온 ‘조건 없는 인도적 대북지원’도 제대로 실행되지 못했고, 이산가족들의 애타는 바람도 수용할 수 없었다.

6.15공동선언 발표 이후 통일부 장관에 취임해 북녘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의미있는 남북대화를 한 번도 추진해보지 못한 유일한 장관으로 남게 되었고, 2008년은 대북 쌀.비료 지원과 이산가족 상봉이 '0'이라는 깰 수 없는 기록을 남겼다.

김 장관은 이처럼 남북관계가 어려워진 근본 이유를 북한의 대남 강경정책 탓으로 돌렸다. “우리는 남북관계를 처음부터 발전시키려고 굉장히 노력했다. 그랬는데 북한이 그걸 안 듣고 우리를 계속 압박했다”는 것. 그러나 김 장관은 북측이 대남 강경정책으로 돌아선 이유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대통령 대북강경론자 아니다”, “공직자는 초봄에 얼음 위 걷는 것”

김 장관은 기자간담회에서 “많은 분들이 이명박 대통령이 상당히 강경하다 생각하지만 내가 본 이 대통령은 강경한 분이 아니다”며 “항상 내 입장을 이해하고 항상 지지해줬다... 이 대통령이 남북관계 발전의지를 갖고 있다는 점을 떠나는 입장에서 말씀드린다”고 밝혔다. “다만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었고 환경이 여의치 않아 결과가 나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

또한 “모든 대통령은 남북관계 돌파구 열어 획기적 전기 마련하고 싶다는 생각 다 갖고 있다”며 “김대중, 이명박 대통령 모두 남북관계에 대한 지향점은 다 똑같다고 생각한다”고도 말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언론에 알려진 이명박 대통령의 북한 관련 발언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로의 통일’ 등 북측으로서는 수용하기 어려운 발언들이 많았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아무리 대통령이 남북관계 발전의지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제대로 된 철학과 일관된 정책이 없다면 그것은 주관적 희망사항에 불과할 것이다.

김 장관은 “외교부에서 35년 근무하다가 통일부 장관을 11개월 하고 이번에 이렇게 떠나게 되니 너무 감사하고, 내가 생각했던 방식으로 공직 떠나게 돼서 아주 감사하다”고 말하고 “공직자라는 건 공직에 몸을 담고 있는 한 초봄에 얼음 위를 걷는 것과 같다”는 소회를 피력하기도 했다.

일개 공무원으로 출발해 30여년 만에 장관까지 역임하고 공직을 마무리한 보람을 담은 발언이지만 ‘초봄에 얼음 위를 걷는’ 행보를 해온 관료출신 장관의 조심성이 드러난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장관 재직 기간 김 장관은 언론 전면에 나서지 않고 일관되게 김호년 대변인을 내세웠고, 이임 기자간담회에서도 말을 아끼는 몸에 배인 습관대로 기자들을 대했다.

김대중 정부시절부터 화해협력정책에 앞장섰던 전력 탓에 현 정부의 주류에서는 밀렸다는 평가도 있지만 김 장관은 “자세히 말씀 안 드리겠지만 장관으로서 대통령과 언제든지 어떤 문제든지 깊이 있게 말씀 드렸고 대통령도 생각을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어려운 시절 관료출신의 관리형 장관으로 몸을 낮추며 일해온 김하중 장관이 "어려운 환경에서도 소신껏 내 일 할 수 있었던 것을 아주 기쁘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물러났지만 정작 그의 재임 1년간 남북관계는 지난 10년의 성과를 거의 무너뜨렸고, 앞을 내다보기도 힘든 상황에 처해있다.

다만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김 장관이 "특히, 우리는 남북관계를 다루는 사람으로서, 북한을 사랑하고 북한 주민을 사랑해야 한다"는 통일부 직원들에 대한 당부는 언제나 유효할 것으로 보인다. 굳이 "언젠가 북한이 반드시 우리의 진정성을 이해할 것"이라는 토를 달지 않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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