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호 (본지 연재물 ‘정관호의 풀 친구 나무 친구’ 필자)
이 땅의 언중(言衆)은 일상의 말글살이에서 우리 집, 우리 아이, 우리 남편(아내), 우리 겨레, 우리 나라……이렇게 써왔다. 여기서 ‘우리’란 나와 너를 아우르는 말이고 서로를 끌어안아 하나를 이루는 개념이다. 그 말 안에는 이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전통 윤리와 공동운명체적 연대성이 살아 있다. 위 쓰임에서 ‘우리’를 ‘나’로 바꾸면 말이 잘 안 되거나 어색하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살아온 터다.
‘우리’가 짓밟히는 ‘나’의 폭거로 시작된 2008년
그런데 지난해 벽두 이명박 신임 대통령이 정부 내각과 청와대 인사체계를 짜면서 강부자ㆍ고소영ㆍ에스(S)라인 등 생소한 말이 등장했다. 이것들은 ‘우리’와 맞서는 말인 ‘나’를 챙긴 데서 빚어진 것들이다. 여기서 ‘나’란 너를 울타리 밖으로 밀어내는 개념이므로 홀로이며 배타성을 띠고 있다. 누가 처음 그렇게 말하기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시국을 반영하는 말이 되었다.
그 말이 퍼지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여론이 들끓으면서 촛불이 타올라 들불처럼 번졌다. 그리고 그 열기와 질서를 통해 일찍이 현대사에서 유례가 없는 ‘우리’의 표상을 보지 않았던가. 그것은 사회연대의 상징이요, 이웃을 서로 아우르는 유기성(有機性)이 엄연히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그것은 다시 ‘나’의 표시인 명박산성에 가로막히고 물대포와 소화기의 세례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쥐명박이니 2MB니 하는 듣기에도 민망한 새 말이 더 보태어졌다.
지난해는 이렇듯 ‘우리’가 파괴되고 짓밟히는 ‘나’의 폭거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에프티에이(FTA) 밀어붙이기, 미군 기지 이전 확장, 타종교에 대한 편견성 오만, 한국방송(KBS) 사장 해임과 와이티엔(YTN) 사장 낙하산 인사로 시작된 언론사물화 정책, 진보적 인사와 학생 집단 및 전교조에 대한 투옥 탄압 등으로 번져 을씨년스러운 세한 추위를 더 얼어붙게 만들었다.
시멘트 바닥에 친 천막 속에서, 살을 에이는 칼바람이 세차게 휘몰아치는 높은 굴뚝 위에서, 일할 권리를 위해 힘겨운 주장을 외치고 있는 해고노동자들과 비정규직노동자들. 애써 지은 농작물을 갈 엎어야 하는 농민들, 민간단체의 도움으로 연탄을 얻어 때는 도시 빈민들, 철창에 갇혀 구속살이를 하는 양심수들. 그들도 ‘우리’ 성원이고, ‘우리’ 가족의 일원이다. ‘나’라는 틀에 갇혀 비인간적 방법으로 부(富)를 독점하는 이들에게 말한다. 영원할 것 같은 그 ‘나’는 결국 영원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것을.
오랜 갈등과 그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 끝에 얻어진 6.15 공동선언 및 10.4 선언 모르쇠 정책, 한미 군사동맹의 강화, 이북에 대한 침략 의도를 담은 한미일 군사연습, 금강산 관광사업 중단과 개성공단 일부 인원 철수 등은 모처럼 서광을 보이던 남북 화해 협력의 토대를 의심스럽고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뿐만 아이라 이미 녹슬고 시대정신에 걸맞지 않는 국가보안법의 서슬을 갈고 나와서 다시 박해의 유령처럼 횡행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와 같은 것들 모두가 ‘우리’를 저버리고 ‘나’만을 챙기는 데서 발생 확대되는 모순과 악의 흐름들이다.
‘우리’를 저버리고 ‘나’만을 챙기는 데서 발생된 나쁜 흐름들
이런 상황에서 “남과 갈이 해서는 남의 위에 설 수 없다”는 표어가 버젓이 돌비석에 새겨졌고, 어린 자녀를 가진 부모들은 사교육비 부담에 허리를 못 펴고 있잖은가. 한창 모국어를 익히기도 버거운 아이들의 ‘혀를 잘라가면서’ 영어배우기 질곡으로 몰아넣었고, ‘어륀지’ 발언은 그 단적인 일면을 드러낸 해프닝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제 나라 역사를 바로 세우려는 역사학자들을 또 다시 좌익-빨갱이로 낙인찍으면서 몰염치한 교과서 개악작업에 손을 대고 있다.
그런 것들이 쌓이고 덧쌓여서 동족 간의 공존의식은 매장되었고, 그토록 애써 이룩한 통일의 이정표는 뒷걸음질을 치고 있다. 외국 원조기관이 이북 식량사정을 언급하면서 180만톤의 식량이 모자란다는 보고서를 발표하였지만, 현 정부는 딴전만 부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민간구호단체들이 성의껏 모은 식량조차도 선뜻 보내려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북한 인권’ 운운하고만 있다.
굶는다는 것 이상으로 참혹한 인간사가 없고, 기아로부터의 해방은 인간이 누려야 할 기본 자유권인데도 말이다. 수채 구멍으로 허옇게 쓸려나가는 밥티와 남아서 버리는 먹을거리가 썩어가고 있는 이 땅의 양심은 다 이디서 잠자고 있는가.
하여 말하고자 한다. 미국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은 부시가 내건 명분이 거짓이요 날조였음이 밝혀졌고, 그럼으로써 이라크에서 받은 구두던지기 세례는 미국의 의도가 군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완전히 실패했음을 희화적으로 보여준다. 부시는 취임 초에, 클린턴 행정부가 이룩해놓은 북미 화해의 초석을 여지없이 무너뜨렸고, 8년 동안이나 이북 정권을 압박하는 정책들을 시종 강요했다. 그러나 국제금융자본의 대리인 노릇으로 일관하던 그의 일극주의적(一極主義的) 모험은 그들 자신의 파산과 수백만 노동자를 거리로 내몰아야 하는 위기를 맞고 있다.
그리하여 미국을 진원지로 하는 금융파탄의 해일은 전 세계로 파급되어 국제기축통화 구실을 하던 달러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고, 신자유주의 물결을 타고 발전도상국에 침투했던 투기자본들이 빠져나감으로써 아이슬란드를 비롯한 발트삼국, 우크라이나, 동유럽 수개국은 국가파산 지경에 몰려 아이엠에프(IMF) 구제금융에 구걸의 손을 내밀고 있는 형편이다. 그 여파는 아시아 여러 나라에도 미치어, 이 나라도 제2의 환대란과 대량해고의 예진(豫震) 앞에서 불안에 떨고 있다.
온 국토를 토목공사장으로 만들려던 대운하 건설계획은 4대강 물길 정비라는 이름으로 변질되어 이미 하천을 파헤치는 공사에 들어가고 있다.
‘민의의 전당’ 국회도, 이 해 벽두에 보였던 ‘나’의 폭거를 본받아, 여당의원들은 숙성되지도 않은 법률을 무더기로 통과시키려 하고 있다. 그 가운데는 방송통신법 개악 등 이른바 MB악법들이 들어 있어, 통과 저지를 내건 언론노조원들과 그에 동조하는 민간단체 성원들의 저항에 부딪치고 있다.
새해 2009년의 화두 ‘우리’란 스스로 자기 운명을 개척하는 자주를 말한다
이렇듯 어수선한 정경으로 저물어가는 지난해를 돌아보면서, 기축년 새해에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할 차례다. 하여 서두에서 내건 화두로 되돌아가려 한다.
금년의 화두로 내건 그 ‘우리’란 우리 스스로 자기 운명을 개척 결정하는 자주(自主), 즉 우리 겨레의 운명을 남에게 맡기거나 빌붙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또 그 ‘우리’는 우리 끼리, 우리 문제를 남북이 서로 손을 맞잡고 이 땅에서 전쟁을 영원히 종식시키고, 6.25 이후 설정된 군사분계선을 평화공원으로 만들기 위해 허심탄회 협력하여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 ‘우리’는 이 땅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
또 그 ‘우리’는 냉전의 잔재인 국토 분단을 청산하고, 조금씩 그러나 확고한 걸음으로 통일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외세의 침략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버티는 북녘 동포들을 ‘나’를 배제한 ‘우리’의 눈으로 바라보며, 가능한 모든 길과 수단을 빌어 통일 조국을 이룩하는 통로를 열어야 한다.
그리하여 자주ㆍ평화ㆍ통일은 이 땅에 사는 당대인들의 당면 최고이념이요 최고 가치다. 이 세 가지가 다 담겨 있는 것이 6.15 공동선언이고, 그 실천을 한 걸음 더 내디딘 것이 10.4 선언이다. 이 두 가지 커다란 민족행동강령을 바로 우리의 행동지침으로 삼자는 것이 화두인 ‘우리’의 의미요 주장이다.
이 땅의 비핵화를 다루는 6자회담도 남과 북이 서로 손을 맞잡고 이견을 조율해 나감으로써 회담 진행의 주도권을 잡아야 하며, 그렇게 해야만 우리의 주장에 맞는 회담 결과를 끌어낼 수 있다. 6자회담은 결국 ‘우리’의 회담이니까 말이다.
우리는 선대에게서 물려받은 이 땅을 잠시 빌어서 살다가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하는 가운데 토막 처지에 있다. 우리가 받았던 그 고난의 삶을 다시 후손들에게 물려준다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이고 배신이다. ‘우리’의 구성원들은 그 연령ㆍ성별ㆍ사회적 자립도, 그 소속의 여하에 관계없이 그 역사적 사명을 수행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마다 ‘나’를 벗어던지고 ‘우리’라는 공동체의식 속에 자신을 두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 소중하고 값진 가치를 각자의 것으로 만들자는 다짐을 굳히면서 새해를 맞자.
우리가 정말 ‘우리’다우면, 우리 앞에 닥친 어떤 난관도 다 극복할 수 있고, 더 나아가 밝은 내일도 기약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2009년의 화두가 되어야 하며 열쇳말이 되어야 한다.


외세의 보호로 특권유지되는 언론, 문화, 군사, 경제, 외교, 정치인들 날려버리고, 고려자주연방의 자주중립노선을 우리 정권으로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