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사 김양희 기자가 ‘평화3000’(이사장 신명자)이 주최한 북측 지원사업장 방문단 일원으로 9월 27일부터 30일까지 3박4일간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평화3000’은 주요 대북 협력사업 중의 하나인 장충성당에 있는 콩우유공장을 현장방문했으며, 아울러 평양시내-백두산-묘향산을 참관하였다. 김양희 기자가 ‘평화3000’과 모든 일정을 함께 하면서 느낀 방북기를 일기식으로 10여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김 기자는 이전에도 두 차례에 걸쳐 평양일기를 작성한 적이 있기에 이번 방북기 제목은 구별을 위해 ‘김양희 기자의 다시 쓰는 평양일기’로 한다. / 편집자 주


쑥섬, 통일전선탑

▲ 쑥섬에 있는 통일전선탑.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다음 참관일정은 쑥섬 사적지이다. 쑥섬은 대동강 내에 삼각형 모양의 섬으로 면적은 38만 평방미터이다. 예로부터 쑥이 많아 봉래섬이라고도 불린 이곳은 1948년 4월 19일부터 23일까지 평양모란봉극장에서 역사적인 대민족회의인 남북연석회의가 진행된 뒤 지도부 성원들과 구체적인 실행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모여 회의를 진행한 곳이다.

남북연석회의에는 북녘의 15개 정당 사회단체들과 남녘의 40개 정당 사회단체, 해외의 1개 사회단체 등 총 56개 정당, 사회 단체인사 695명이 참가를 했다.

해설강사는 “남녘에서는 40개 정당과 사회단체가 참가를 했는데 이는 거의 모든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모두 참여한 것이다”며 “1948년 5월 11일 남녘의 단독선거로 그동안 한강토 한민족이었던 땅이 영원히 두 개로 분열되려는 것을 막기 위해 지도부들이 5월 2일에 이곳에 모여 협의를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쑥섬 사적지에는 남북연석회의를 기념하기 위한 통일전선탑과 당시 대표자들이 타고 건넜던 나룻배, 당시 회의를 했던 장소 등이 보존돼 있다.

해설강사에 따르면 통일전선탑은 조국해방 45돌을 맞아 처음 진행했던 범민족대회를 맞아 1990년 8월 11일에 제막식을 했단다.

기념탑은 탑신, 기단, 비문판으로 구성돼 있는데 탑신에는 김일성 주석의 친필로 ‘통일전선탑’이라는 친필이 새겨져 있고 기단 맨 위에는 42년 만에 기념비가 만들어진 것을 기념하기 위해 42송이의 목란꽃이 그려져 있다.

기단은 56개의 화강석이 모여 만들어진 것인데 이는 당시 참석했던 56개의 정당과 사회 단체를 의미한다. 이 탑은 높이 13.5m에 무게는 550톤에 이른다.

김일성 주석은 1989년 10월 7일 이곳을 현지지도 하면서 40여 년 전을 가볍게 회고, 당시 참석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면서 “나라의 통일에 기여한 이들을 모두 후대에 알리기 위해 기록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탑의 뒷면에는 참여 정당, 사회단체들과 주요 참석자들의 명단이 적혀 있다. 이들 중 홍명희, 백남운 선생은 회의가 끝난 후 북에 남았고 나머지 인사들은 모두 남으로 내려왔다가 1950년 9월 북녘의 후퇴 당시 모두 입북을 했다. 이들은 대부분 북녘 애국열사릉에 묻혔으며 조국통일상을 수상했다고 해설강사는 설명했다.

비문 판에는 김 주석의 이름으로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정견이 서로 다른 수많은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들이 모여 조국과 민족의 운명에 대해 논의하고 견해의 일치를 본 바가 일찍이 없었습니다. 남북연석회의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 국토 안정과 민족 통일의 기치 하에 각계각층의 민족적 인사들을 묶어세운 위대한 화합으로 기록될 것입니다’라고 적혀있다.

▲ 김규식 선생의 증손자인 김희상 씨(왼쪽). 그는 우사 김규식 연구회에서 일하고 있다. 통일전선탑 뒷면 '김규식' 이름을 배경으로 우사 김규식 연구회 장은기 사무국장(오른쪽)과 함께 섰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우연일까? 몇 번 평양을 방문한 나도 쑥섬은 처음인데 마침 김규식 선생의 증손자인 김희상 씨가 참가한 이번 참관단이 쑥섬을 방문한 것이다.

그는 “주변의 권유로 오게 됐다”며 “북녘에서 증조할아버지가 애국열사릉에 묻히는 등 높이 평가되고 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자세한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었지만 바쁜 일정에 이후 남녘에 돌아가서 이야기를 한번 나눴으면 좋겠다는 약속을 했다. 나중에라도 인터뷰를 꼭 추진할 참이다.

지금의 통일 노력보다 훨씬 나은 48년 남북연석회의

▲ 1948년 당시 남북연석회의 대표자들이 쑥섬에 타고 들어왔던 나룻배.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당시 쑥섬을 연결하는 다리가 없어 평천리 나룻터에서 이곳까지 타고 왔다는 나룻배도 그대로 전시돼 있다. 나룻배는 20명 정도가 탈 수 있다고 한다.

또 편안하게 모여 앉아 회의를 했다는 돗자리, 잠시 휴식을 즐긴 원두막 등도 그대로 보존돼 있다.

당시 회의는 웃옷까지 벗은 채로 편안하게 진행됐다는데 김 주석은 “조국과 민족이 있어야 당파도 있고 주의 주장이 있는 것이다”며 “애국 애족의 마음이 모인다면 이루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느냐”고 말했단다.

최근에는 사람들이 흑이 아니면 무조건 백이어야 하고 내 편이 아니면 무조건 적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때문에 대통령을 하는 동안 무조건 내 사람을 심어 놓기에 급급하고 또 새 정권이 들어설 경우 내 사람이 아닌 사람들은 실력이나 직책, 임기 등에 관계없이 무조건 배척하고만 본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이 있지만 어느 샌가 우리는 편 가르기에 정신이 팔려있는 것이다.

예전에 한 <통일뉴스> 기자가 결혼을 하는데 시골에서 대절버스가 한 대 왔다. 그 버스 이름은 다름 아닌 ‘통일관광’이었는데, 별 것도 아니지만 난 그 사실이 너무 재밌고 신기했었다.

“아 통일뉴스 기자가 통일관광 타고 와서 이렇게 결혼을 하니 통일에 대한 신심이 드높겠다” 뭐 이런 식으로 떠들며 사람들과 익살을 떨었었다.

그런데 한 분이 하시는 말. “그런데 이 버스의 통일은 좀 다른 냄새가 나지 않냐?”
그러고 보니 필체하며 글씨색이 소위 보수적인 느낌을 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고도 또 놀란 것은 똑같은 통일이라는 단어인데 글씨체나 모양만 보고 진보적이다, 보수적이다 라고 가르는 것이다. 그것은 특별히 배워서 그런 것도 아니고 아주 오래 전부터 저절로 학습이 된 것이라 아주 미묘한 차이로도 금방 구분해낼 수 있다.

그러나 일반인이 본다면? 난 통일이라는 단어에 민감한 사람들이 아니라면 그것을 구분해 내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남북민간교류협의회, 민족문화교류재단, 민족통일중앙협의회,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민족화합운동연합, 통일교육문화원, 민족통일촉진회, 통일을 여는 사람들, 통일코리아21 등, 통일 관련 단체가 어찌나 많은지 단체의 성격을 구분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심지어는 보수단체와 진보단체의 이름이 비슷한 경우도 흔하다. 이들 단체는 이름도 비슷하고 통일이라는 단어가 그대로 쓰이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모두 통일을 위해 일하는 단체인가보다 하는 것이다.

물론 각자가 바라는 대로 통일을 위해 노력을 하는 것이지만 일반인들이 보기에 정말 황당한 것은 똑같이 통일을 하자는 단체가 허구한 날 싸우니 정말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진보와 보수의 갈등뿐만이 아니라 소위 진보세력 간에도 자신들의 이해주장에 따라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지난 대선 때 나는 민주노동당의 의석이 대폭 준 것이 너무 아까웠다. 물론 진보신당은 또 나름의 입장이 있었겠지만 그래도 진보정당으로 ‘세상을 바꾸자’는 기치를 내걸고 보수정당들과 싸우는데 힘을 합쳐도 모자란 판에 그것을 또 나누다니 세상을 바꾸긴 하겠지만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나눠진 만큼 이들이 말하는 좋은 세상이 오기까지는 두 배 이상의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이런 가운데 남북연석회의는 사상과 정당, 당파를 떠나 조국과 민족이 먼저라며 큰 틀에서 합의를 이루었다니 지금의 통일을 위한 노력보다 몇 십 배는 낫지 않나 싶다.

“대규모 방북단을 갑자기 보내는 이유가 뭐냐”

▲ 남북연석회의 당시 대표자들이 모여 앉아 회의를 했던 돗자리(왼쪽)와 참가자들이 휴식을 즐긴 원두막(오른쪽) 등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회의장소 건너편에는 142년 됐다는 버드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의 쌍 가지 그늘아래서 남북연석회의의 참석자들이 오찬을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이 나무는 지난해 있었던 큰물 피해로 가지가 하나 잘려 이제는 외가지가 되었다.

대동강숭어회, 어죽, 녹두묵 등으로 대접을 받은 가운데 김구 선생은 환담 중 “만경대에 방문해보니 (김 주석의) 부모 묘비에 갓이 없더라”고 말했단다.

이에 김 주석은 “아버지는 중국의 무송, 어머니는 안도 등에서 돌아가시는 바람에 통일이 되기 전에는 조국에 안치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며 “조국이 분열되고 혁명투쟁 당시 산에서 함께 싸우던 동지들과 그 가족들이 낮선 나라에서조차 제대로 묻히지 못했는데 어찌 우리 부모만 모셔오느냐”며 고집을 부렸다고 한다.

그래도 주변의 만류에 만경대로 모셔오긴 했으나 무덤을 화려하게 꾸미자는 의견을 따를 수 없어 “그것은 부모님들의 뜻과도 맞지 않으니 검소하게 꾸며라”고 지시했다는 것이 해설강사의 설명이다.

설명을 한참 듣는데 이제 겨우 방문 첫날이지만 새벽부터 모였기 때문인지 참관단 일행도 지쳤고, 지난 20일 정도부터 남녘 참관단들이 들어오는 것을 일일이 안내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안내원 선생들도 지쳐보였다.

안내원들은 “이명박 정부 들어서서 대규모의 참관단이 단 한 차례도 북녘에 들어오지 못했는데 갑자기 20일부터 매일같이 들여보내는 의도가 뭐냐”고 묻기도 했다.

전교조, 민주노총 등 사회단체들은 물론 민주노동당까지 방북이 불허 났으며 금강산관광까지 막혀 인도주의적인 대북지원 단체들의 방북도 어려운 것이 아니냐 하는 와중에 9월 20일부터 단체들이 갑자기 몰아치듯 들어오니까 남녘 참관단의 안내를 담당하는 민화협 성원들의 피로가 극에 달했을 것이다.

“북녘에서는 집안일을 모두 여성들이 합니다”

▲ 북측 장윤철 안내원(앞 왼쪽). 한 살 난 아이가 있는 그는 남측 참관단과의 대화에서 집안일을 하나도 안 한다고 해서 곤욕을 치렀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참관단의 취재도 취재지만 북녘 사람들의 삶이 궁금한 나는 내 옆에 앉은 안내원에게 말을 걸었다.

“언제 나오고 집에 못 들어 가셨어요?”
“난 22일부터 나왔고 어제 잠깐 집에 들어갔다 왔습니다.”
“에이 다른 분들은 20일부터 나오셨다는데 그럼 덜 피곤하시겠어요.”
“통일사업 다니는 길이 뭐 피곤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보다 한 살 난 아이가 있는데 아이가 눈에 밟힙니다.”

그의 이름은 장윤철. 북녘 나이로 35세(북녘은 만 나이로 치기 때문에 우리보다 1살 어리게 친다)인 민화협 소속 안내원이다. 한 살 난 아이를 보고 싶어 하는 것을 보니 참 가정적이고 보기 좋다 싶어서 “평소 아내도 많이 도와주세요?” 물었다.

그랬더니 돌아오는 말. “북녘은 남녘에 비해서 남편 사업을 위해 희생하는 게 있습니다.”
내가 잘 알아듣지 못하는 표정을 짓자 그는 “북녘에서는 밖에서 고생한 남편들을 위해 집안일을 모두 여성들이 합니다”라고 답한다.

“여기 리어금 안내원도 그렇고 사회활동을 하는 여성들도 많은데 그런 분들도 집안일을 혼자서 해요?”
“요즘에는 가끔씩 식료품점에서 물건을 사다주는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집안일은 여성이 하지요.”
“헐~그럼 백수 남편이라도 부인이 밖에서 일을 다 하고 집에 돌아와서 또 집안일을 다하는 것 이예요?”
누군가 옆에서 북녘에는 “백수가 없지”한다.

“아! 그럼 남편이 일을 안 해도 부인이 일도 하고 집안일도 하나요?”
“우리도 그런 사례가 있습니다. 용해군인(상이군인을 말함)이라고 몸이 좋지 않은 사람은 나라에서 나오는 돈으로 사는데 이때는 부인이 밖에서도 일하고 집안일도 하고 그러지.”
“아니 그런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 어쩜 그렇게 여성들이 집안일을 모두 도맡냐구요.”

때 아닌 불꽃 튀는 설전에 주변에 북녘 안내원들도 남녘 참관단도 몇이 모였다.

남녘 어르신 몇 분이 “남쪽에서는 그런 사람을 보고 ‘간 큰 남자’라고 하고 다 도와줘야 한다”고 말하자 그는 “북녘은 아직 사회적인 합의가 그 수준까지 도달하지 않았다”며 “북과 남의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나와 같은 방을 쓰는 서울대의 정은미 박사는 “차이도 차이지만 아내가 밖에서 고생하고 들어왔는데 집안일까지 하는 것이 애처롭지 않아요? 우리도 한 이십년 전에는 그랬지만 이제는 남편들이 도와줘야 하는 것이 당연하게 됐어요. 여기도 천천히 바뀌겠지만 앞서 나가서 도와주세요” 하고 말했다.

우리들이 몰아세우고 사람들이 몰리자 좀 당황을 했는지 장윤철 안내원은 다른 남성 안내원을 향해 “도와 달라”고 했다.
그러나 사태 파악을 한 안내원들이 “아니 조금은 도와주지!, 그리 안 도와주나?” 하고 도리어 장 안내원을 역공격한다.
안내원들의 익살스런 장난에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 말이 있듯, 그는 오히려 더 당당해지기로 했나보다.

“장 안내원님은 식료품점에도 안 가주시는 거예요?”
“안 가주지.”
“에이 말로는 이렇지만 집에서 사실 좀 도와주곤 하시죠?”
“전혀 손 하나 까딱 안한다.”
“그럼 정말 배가 고픈데 아내가 집에 오지 않으면 밥은 차려 드시는 거예요?”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버틴다.”

장윤철 안내원님! 지금은 잘 버티고 계시지만 아이가 스무 살이 될 즈음이면 이혼 당할지 모르니 가끔씩 아내 일도 도와주고 하세요. 남녘도 황혼 이혼이라고 늘그막에 이혼당하는 할아버지들 많다니까요. 그땐 밥 한 끼 때우지도 못하고 딱 굶어죽는다니까요.ㅋㅋ

웃고 넘기긴 했지만 통일이 된다고 해도 북녘 남자들과의 결혼은 좀 곤란하겠다. 가뜩이나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고 회사에 다니는 것도 힘들다고 투정인데, 일은 일대로 하고서도 집안일은 모두 아내가 해야 한다고? 이 사실을 알면 남녘 남자들이 어서 빨리 통일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기도를 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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