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사 김양희 객원기자가, <겨레하나>가 주최한 북측 협력사업장 방문단 일원으로 5월4일부터 7일까지 3박4일간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지난해 11월달 이후 두 번째다. 평양방문 신청부터 소감을 정리한 김양희 객원기자의 평양방문기를 일기식으로 순차적으로 싣는다. 제목을 편의상 지난해와 구분하기 위해 <김양희 기자의 평양일기 Ⅱ>로 한다. / 편집자 주

‘평양과의 인연이 계속 이어지다’
2007년 4월15일


지난해 11월11일부터 14일까지 3박4일 간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겨레하나, 위원장 최병모) 방문단의 일원으로 평양에 취재 다녀온 이야기를 담은 평양일기를 쓰면서 마지막 부분에서 앞으로도 제2, 제3의 평양일기를 쓰겠다고 했었다. 당시에는 꿈이려니 하면서 그 꿈을 향해 별다른 노력도 하지 않았기에 그것이 언제쯤 이뤄질지 가늠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혹한이 깊어질수록 봄은 빨리 찾아온다는 말이 있듯, 미사일발사, 핵실험 등으로 금강산 관광마저 중단될 위기까지 처해있던 남북관계는 2.13합의 이후 어느덧 훈풍이 불고 있다. 특히 올해는 지난해 북측의 대규모 수해 등으로 취소되었던 아리랑 공연이 있다고 해 2005년처럼 대대적인 방북단 모집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고, 그럼 그때 또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그저 생각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6개월도 되지 않아 내게 또 방북 기회가 왔다. 오는 4월20일부터 24일까지 3박4일 간 평양을 가게 된 것이다.

흠~이런 것을 인연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난 평양과 인연이 있다고, 인연이 아니라면 도저히 또 이런 기회가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설명하고 싶다.

인연의 시작은 지난 3월24일로 거슬러간다. 그날은 한미FTA 반대투쟁이 한참이었던 시기로 민주노동당의 문성현 대표가 열흘이 넘는 단식으로 입술이 터지고 초췌한 모습으로 청와대 앞을 지키고 있었고 오종렬, 한상렬 한미FTA체결 저지를 위한 공동 대표들이 광화문 열린 공원에서 천막을 치고 단식 농성 중이었다.

나는 그날 농성장의 하루를 취재하기 위해 그곳을 찾았다. 아침 일찍 나선다고는 했지만 오종렬, 한상렬 대표뿐 아니라 추모연대 박중기 의장, 통일연대 김영옥 선생 등이 이미 자리를 함께 하고 있었다.

이날 김영옥 선생은 “또 평양에 가게 됐다”고 했다.

지난 가을 함께 방북을 했던 선생의 방북 계획이 부러웠다. 그렇지만 차마 ‘가고 싶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있었는데 내 마음을 읽었는지 김영옥 선생은 “내가 한 번 자리가 있는지 알아봐 줄까” 하신다.

이래서 예부터 어른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하나 생긴다고 하던가, 그렇게 나는 선생의 도움으로 기회를 얻었고 통일뉴스에서도 평양 취재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평양을 가는 것인데도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또 마감 이후에 자리를 얻은 나는 부랴부랴 비용을 입금하고 평양에 갈 준비를 하는 것이다.

다음번엔 이렇게 좋은 기회가 또 오지 않아 이번이 마지막 방북이 될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난 평양과의 인연을 믿고 싶다.

“평양아 너 나 좋아하는 거지?”

지난번 평양에 갔을 때 ‘1년에 한 번씩은 취재를 와, 보고 느낀 것을 전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나의 바람보다 훨씬 더 빨리 이루어지는 것은 나와 평양이 서로 인연이 있는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평양이 날 더 생각해서가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누가 더 좋아하건 간에 난 이렇게 두 번째 평양일기를 시작하며 평양과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야호~생일을 평양에서 맞는다’
2007년 4월16일

아침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김양희 기자님 겨레하나인데요, 북측이 내부 사정으로 인해 갑자기 방북 일정을 5월4일부터 7일까지로 늦추자고 연락이 왔는데 그때 가능하십니까?”

지난해 가을에 방북할 때도 일정이 미뤄졌는데 이번에도 일정이 미뤄진 것이다. 전해들은 이야기로는 북측이 올해 95돌의 태양절과 75돌의 군창건 기념식으로 바빠 4월 중순 이후에 잡힌 남녘 평양 참관단의 일정을 대부분 5월 초로 옮긴다고 한다.

“아 예, 그래도 가야죠.”

난 두 번 생각도 않고 가겠다고 했다. 사실 두 번, 세 번 생각하면 가지 못할 일이 하나 둘 떠오르게 되고 그러다보면 가기에도 가지 않기에도 마음이 무거워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막상 가겠다고 하고보니 쉽지 않은 일정이다.

5월은 우리 회사가 가장 바쁜 창간특집이 한 달 내내 기획되어 있다. 4월20일부터 23일까지는 바쁘기 직전이라 가장 좋은 기간이었고 또 일정에 맞게 나름의 취재 계획도 세운 터였다.

회사에도 아직 휴가원을 쓰지만 않았지, 벌써 20일부터 24일까지 휴가를 내겠다고 말을 해 놓았다. 한 참 바쁜 기간에 내는 휴가라 “부모님 생신에 맞춰 시집 장가간 동생들 가족까지 함께 해외여행을 간다”고 말해두었다.

우선 전화를 끊고 바로 위 선배에게 “저희 집 여행 예약이 잘못돼 5월4일부터 7일까지 가는 것으로 일정이 바뀌었다고 하는데요, 그때 가도 되나요?”하니 돌아오는 대답은 어느 정도 예상을 한 “그땐 가장 바쁠 때 아냐? 특집 계획표 나오면 그때 다시 말하겠지만 안 될 수도 있어!” 한다.

그래도 어떻게든 가야겠다, 회사도 바쁘고 또 다녀와서 평양 기사를 쓰기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겠지만 그래도 난 가기로 결심을 했다. 최악의 상황에서는 회사를 그만둔다고 배짱 좋게 한 번 튕겨볼까도 생각해본다. 설마 나 같은 훌륭한 사원을 짜르겠어?ㅋㅋ

걱정을 하는 한편으로는 또 너무 행복한 생각도 가져본다.

사실, 서른도 넘은 말만한 처녀가 내 입으로 내 생일이다 하기도 부끄럽지만 내 생일은 5월5일 어린이날이다. 북녘에서 맞는 생일은 또 평생을 잊지 못할 기억이 될 것이다.

여자라면 누구나 고대하는 스무 살 생일. 스무 살 성년이 되면 남자친구에게 장미꽃 스무 송이와 향수, 그리고 키스를 선물을 받는 것이라는 이야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난 스무 살 생일을 한총련 출범식에서 맞았다.

대학 1학년 당시 아무 것도 모르면서 선배를 따라 간 한총련 출범식. 낮선 광경이 신기했지만 이내 실망이 앞섰다. 아무리 맞는 이야기라 할지라도 학교 내에서 구호 몇 마디 외친다고 그 구호가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괜히 시간 낭비에 에너지 낭비라는 생각이 들어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이틀째 되는 날은 빠듯한 일정에 잠도 제대로 못자고 밥도 제대로 못 먹어 한낮 뜨거운 볕에 모두들 지쳐 구호 외치는 소리는 모기만 해지고 팔뚝질도 제대로 하지 않기에 이르렀다. 나의 실망은 더욱 커지고 얼른 집에 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당시 지역을 중심으로 여러 학교가 모여 앉아 있는데 옆 학교 부총학생회장이 앞으로 벌떡 나와 “여러분 웃으며 합시다”하며 익살스럽게 춤을 추는 거였다.

순간 그 학교 사람들은 재미있는 그의 모습에 박장대소하며 신나게 그 춤을 따라했고, 우리 학교 총학생회장의 “여러분 우리도 함께 합시다” 하는 소리에 우리도, 또 그 옆의 학교들도 모두 신나게 춤과 노래를 따라했다.

한 사람의 노력이 수많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장면을 목격한 것이다. 그러면서 여기 모인 사람들이 노력하면 뭐든지 이룰 수 있겠구나하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3학년에 맞은 스무 살 생일. 10만 명은 족히 모였을 출범식에서 사회자가 ‘오늘 생일을 맞은 사람을 축하를 해주자’고 하자 수 만개의 라이터 불이 깜박이는 장관이란, 10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 설레는 광경이었다.

그리고 지난해 생일은 대추리에서 맞았다.

대추리 분들은 경찰이건, 집회 참가자이건, 기자건 간에 혹시라도 싹을 밟기라도 하면 “눈을 뜨고 다니는 거여? 싹 나잖아” 하시면서 몽둥이로 때리셨다. 그렇게 땅을 사랑하고 농사를 짓고 싶어 하시던 분들인데... 어느 순간 철조망이 쳐지면서 자신의 땅임에도 들어가 농작물을 살필 수 없게 됐음은 물론 마을에 들어가려해도 빙 둘러 먼 길로 돌아가야 했고 그나마도 군인들에게 일일이 신분증을 보여야 했다.

그러나 2006년 5월5일은, 결국 많은 사람들이 총을 든 군인들에게 끌려나오고 경찰들에게 잡히곤 했지만 잠시나마 대추리를 마구 휘감아 놓았던 철조망이 뚫리던 날이었다. 날이 저물고도 한참이 지나도록 하루 종일 대추리 일대를 뛰어다니며 취재를 하느라 밥 한 끼 먹지 못하고 지칠 대로 지쳐 잠시 쉬고 있을 때였다.

그 때 마을회관에서 할머니 한 분이 수북이 담은 쌀밥 한 그릇과 김치 한 사발을 내주시면서 “아이고 이리 고생해서 어쩌나? 근데 반찬도 없고 부끄럽네” 한다.

수년째 자신의 땅을 지키기 위해 온 몸을 다해 싸우는 정말 고생하고 계신 그 분은 오히려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물 한 사발, 수북이 쌓인 밥과 알맞게 익은 김치 그리고 진심어린 마음, 난 너무 행복한 생일상을 받고 목이 메여 왔지만 꾸역꾸역 밥 한 그릇을 말끔히 다 비워냈다. 그리고는 그 밥을 평생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평양에서 맞는 나의 생일도 새로운 다짐이 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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