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우 (사진가, www.siwoo.pe.kr)

평화활동가이자 사진작가인 이시우 씨가 지난해인 2006년 6월1일부터 '한강하구'에 대해 천착하기 시작해 그간 비정기적으로 다음과 같은 순서로 연재를 해 왔다.

1. 한강하구의 근본문제-관할권
2. 정전협정의 한강하구 규정에 대한 해석
3. 한강하구에서의 민용선박 항행에 관한 규칙 및 관계사항에 대한 해석
    (1953. 10. 3. 군정위 제22차 회의 비준)
4. 한강하구의 비행과 ‘100톤급 바지선’
5. 한강하구 항행의 역사-시선배와 수인선
6. 한강하구 군사사① - 대몽전쟁시기
7. 한강하구 군사사② - 병인,신미양요
8. 한강하구 군사사③-한국전쟁기
9. 한강하구의 갯벌과 간척

그리고 이번에 마지막으로 <10. 한강하구 숲의 역사>를 연재한다. 원래 연재 계획에는 <11. 한강하구와 전쟁의 생활사-양민학살>, <12. 한강하구의 유라시아 지정학> 등 두 꼭지가 남아 있지만 작가는 이를 '차후의 과제'로 남겨두기로 했다. 장기간에 걸쳐 많은 분량의 원고를 쓴 저자께 격려와 함께 감사를 드리면서, 독자 여러분의 성원을 기대한다.

이번 <10. 한강하구 숲의 역사>도 다음과 같은 순서로 10차례에 걸쳐 연재한다./편집자 주

(1)들어가며/고대 한강하구의 숲/신석기시대 한강하구의 숲
(2)
고조선(청동기)시대 한강하구의 숲/점토대토기문화/고조선의 의식주와 숲
(3)
고조선(철기시대) 한강하구의 숲
(4)
백제시대 한강하구의 숲/고구려시대의 숲/신라
(5)
고려시대 한강하구의 숲
(6)
조선시대 한강하구의 숲 /석회/화약/광업
(7)
병선/땔나무/식목/금벌
(8)
일제기 한강하구의 숲
(9)
한국전쟁 이후 한강하구의 숲
(10)
한강하구 숲의 미래/녹색댐/숲의 공적소유화/한강하구 통일의 숲 가꾸기/유엔사와 한강하구 숲

조선시대 한강하구의 숲

시골에서 발견되는 돌판에 ‘棄灰者 杖三十, 棄糞者 杖五十’, 즉 재를 버리는 자는 곤장 30대, 똥을 버리는 자는 곤장 50대 라는 글귀가 발견되기도 한다. 곳에 따라서는 재를 버리는 데에 대한 형벌이 곤장 오십대, 똥을 버리는데 대해서는 팔십대와 같이 더 엄한 벌을 내리는 곳도 있었다. 똥과 재를 버린다는 것은 이들이 다 유용한 거름자원인데 이 자원을 낭비하고 강이나 길에 버려 환경을 오염시킨다는 뜻이다.

그리고 가축을 방목하여 산림을 훼손하는 행위도 곤장 100대에 해당할 만큼 엄한 벌로 다스려졌었다. 소나무 한 그루를 불법으로 베어내는 대가는 곤장이 100대, 두 그루면 곤장 100대를 친 후에 군복무를 시키고, 열 그루면 곤장 100대를 친 후 오랑캐 지역으로 추방하기도 했었다. 모세의 율법에는 곤장을 40대 이상 때리면 사람이 영영 다친다하여 이를 금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의 형벌이 얼마나 가혹한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산림정책을 포함한 각종제도와 법전의 제정이 이뤄졌는데 1기는 건국에서부터 제도를 완성하여 경국대전을 편찬할 때까지인 1392년부터 1469년까지 77년간이고, 2기는 대법전이후부터 속대전이 편성된 1470년부터 1744년까지 274년간, 3기는 속대전 이후 1745년부터 고종즉위년인 1863년까지의 118년간이다. 시기별로는 다음과 같다.

1기 : 지방관으로 하여금 산림을 순찰하여 산불을 방지하도록 하였다. 가뭄에 대한 기우제때도 명목산림에 대한 벌채를 금하였으며 당시 왕도의 성 안팎의 하천가에 둑을 쌓고 나무를 심었다. 한편 개간이 성행하면서 임분이 많이 제거되고 임야에는 화전이 점증하였다. 특히 강원도 지방에서는 산악지대이므로 산림의 연소가 많았다. 경국대전에 하천둑은 수령이 매년 봄가을로 관찰사에게 보고하여 개수하고, 신축은 견고히 쌓도록 하였으며 읍의 하천둑 내외면은 잡목을 식재하여 훼손을 방지토록 하였다. 하천둑과 중요한 개소에서는 나무를 베고 밭을 일구는 개간을 엄금하고 사점을 금지하였다. 당시 서울에서는 4대산을 획정하여 보호림을 설정하고 지방에서는 봉산을 설정하였다.

2기 : 서울내외의 산림내 경작을 금하고 잡목을 심어 물의근원, 즉 수원을 함양토록 하였으며 하천양안에 식재를 하거나 혹은 축재를 하고 방수림을 조성하였다. 하천연안의 벌목을 금하고 경작지도 경작을 금하여 수해방지책을 마련하였고 보호림의 산불에 대해 특별단속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유민이 계속 늘고 화전에 의한 피해가 심해졌으므로 1650년부터는 정책도 구체화되고 강화된다. 제언사(提言司)를 임명하여 하천둑 등 수리시설을 관리하도록 하고, 산허리 이상의 벌목이나 신규벌목은 금지했으나 산허리이하의 옛밭은 경작토록 함으로서 개간을 막진 못하였다. 화전정리법으로 일정지역을 정해서 금양(경작금지)를 단행하고 지역적으로 정리대상을 정하였다. 산불이나 도벌을 단속하고 산림관으로 하여금 순찰토록 했다. 각도와 읍에 있는 소나무 숲의 보호취체규정을 제정하고 금산표주내에서는 경작을 금지하였다. 이러한 노력에도 화전 등 산림훼손은 더욱 증가했으며 이는 조선말 각종 풍수해 빈발의 원인이 되었다.

3기 : 서울주위의 4대산림에 1680년경 솔나방의 피해로 산림이 쇠퇴하고 토사유출이 심해졌다. 이로 인해 성내의 냇물과 하천의 수로가 막히게 되고 강우시에는 하천이 범람하는 피해를 당하게 되었다. 이시기 숲정책에서 특기할 점은 금산, 봉산 기타의 관공용 임지이외의 일반임야에 대한 조림을 장려한 점이었다.

이제 한강하구의 숲을 중심으로 항목별로 살펴보자.

▲ 해안방어시설 한강하구의 해안방어시설에는 대량의 석회가 필요했고 이를 위해서는 더 많은 양의 나무가 베어져야 했다. [사진 제공-김길화]
석회

석회석은 우리나라에 무진장하게 매장되어 있었으나 15-16세기경까지는 석회를 굽는데 드는 나무가 무성한 곳에서만 광상이 개발되었다. 임원16지(예규지 8역물산)에 의하면 당시의 석회광상소재지로 강화가 등장한다. 또한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석회석광상으로서 강화와 풍덕(개성) 두 곳을 들고 있다. 한편 문종실록에는 ‘수도를 옮긴 이후 석회구이장으로 양주와 강화 두 고을만한 곳이 없었다’고 하였다(문종실록권4, 즉위년10월 경진조). 이미 태조대에 충청과 황해좌우도의 장정 천2백명을 징발하여 강화에서 석회를 굽게 하였다(태조8권 4년 9월17일(무신) 원전1집 83면). 석회광상이 있다 해도 나무가 풍부한 곳이 아니면 석회가마를 운영할 수 없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태조때 강화도는 석회광상과 더불어 풍부한 숲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려시대 이후 황폐화 됐던 숲이 시간이 흐름과 함께 복원되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종대에 이르러서는 강화의 숲 형편이 열악해져서 한강하구인근인 파주교하에서 시목(땔나무)을 운반하기에 이르고 이는 백성들에 대한 가혹한 착취를 초래했다.

전 현령(縣令) 김승비(金承庇)가 상서(上書)하기를,

“옛날에는 석회를 구워 만드는 데는 돌이 좋고 나무가 무성한 곳을 골랐기 때문에 들어가는 힘은 적으나 이루어지는 공효는 많았습니다. 요즈음에는 나무가 부족하고 그 돌이 좋지 않으므로, 이에 교하(交河)에서 백성들을 독촉하여 그 시목(柴木)을 운수하기 때문에 바야흐로 봄철 농사일이 바쁜 때에 파리하고 피곤한 소가 쉽게 밭을 갈지 못합니다. 그 가격으로 말한다면 1바리[駄]의 가격이 쌀 2, 30두斗에 이르니, 부자는 좋지만 가난한 사람은 불쌍합니다(문종4권, 즉위년, 10월 10일(경진) 원전6집 299면).

석회구이는 비교적 간단한 방법으로 진행되었으므로 큰 토목공사가 진행될 때에는 어디에서나 그 생산이 진행되었다. 석회는 건축공사장에 필요한 건재를 보장하고 회회청을 비롯한 각종 도료의 생산에 이용되어 건축의 장식성을 높이는데 이바지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조선광업사2, 리태영외, 공업종합출판사, 199,1 p104).

공공건물 등에 쓰일 석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석회석을 900℃까지 구워야 했으므로 막대한 양의 나무가 필요했다. 게다가 건축용으로 쓰게끔 점착성을 지니게 하려면 장시간 고온에서 석회를 가열해야 했다. 로마의 기록에 의하면 석회가마 하나당 보통 하루에 약7,300킬로그램의 땔나무를 소비했다(숲의서사시, 존펄린, 따님출판사, 2002, p121).

강화의 석회가마에서 매일 7,000kg의 나무만이 소비됐다고 가정해도 한달이면 21톤, 10개월이면 210톤이다. 계산의 편리를 위해 1년 소비량을 210톤으로 가정하면 비중이 0.7이고 직경이 50cm이고 길이가 1m인 나무의 경우 1천2백만 그루가 태워 없어진 것이다. 지름이 50cm인 나무가 만드는 공간의 지름을 약 5m로만 잡아도 1년 사이에 3억평방미터의 숲이 사라진 것이 된다.

임원16지에 의하면 강화도를 비롯한 36개 고을에서 특산물로 석회가 많이 생산되었다. 18세기말 수원성을 건설하는데 든 86,422섬의 석회는 8,211량의 돈으로 사들였는데 그 가운데서 60,097섬 2말은 1섬당 6푼8리의 값으로 황해도 금천에서, 6,013섬은 1섬당 8푼7리의 값으로 경기 안산에서, 1,545섬은 1섬당 5푼5리의 값으로 경기 풍덕(개성)에서, 4,425섬은 1섬당 1돈7푼2리의 값으로 충청 평신진에서, 6,479섬은 1섬당 2돈 6푼 6리의 값으로 수원에서 사들인 것이었다(화성성역의궤, 권5, 조비, 석회/조선광업사2, p211재인용).

화성을 짓는데 들어간 석회의 부피는 86,422섬(15,752,000리터)이고 생석회의 비중이 3.4이므로 그 질량은 535,568,000kg, 즉 약50만톤이다. 1톤의 석회를 생산하는데 1.6톤의 석회석이 필요하므로 50만톤의 석회를 생산하기 위해선 80만톤의 석회석이 필요하다. 정확한 통계를 알 수 없지만 만약 석회생산에 구리와 같은 양의 숯과 나무를 필요로 한다면 구리 3kg에 6톤의 숯과 120그루의 나무와 500평방미터의 숲이 사라지므로 50만톤의 석회를 위해서는 10억톤의 숯과 200억그루의 나무와 8백억평방미터의 숲이 사라진다. 한편 북한성 건축에는 석회가 9,638석, 숯이 14,859석이 들어갔다(숙종50권, 37년10월19일(갑술), 원전40집, 416면).

태조때부터 석회구이장으로 이름을 날리던 강화가 정조대에 석회생산지에서 사라진 것은 숲의 황폐화와 나무자원의 고갈이 그 원인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강화도 대신 풍덕(개성)과 금천이 석회구이장으로 변화된 것은 나무연료 공급지를 찾아 석회가마가 이동한 결과로 판단된다. 숙종대에 강화도의 49돈대를 건설하는데 이때 조달해야할 물자 중에서 가장 심각한 것이 석회였다. 심지어 석회를 대주는데 공을 세우는 자는 수령까지 관직을 제수하는 조치를 취할 정도이다.

행병조판사 민암이 아뢰기를,

석회는 1만여 석이 들어가야 하는데 비록 사사로 매매하는 곳이 있기는 하나 제때에 제 수량을 다 구해 쓸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또 직접 구어내 보려고 하면 돌을 뜨는 일이나 나무를 구해올 때에 아주 많은 인력이 쓰이며 구어 낸 뒤에도 실어 나르기가 곤란합니다. 지금 만일 일을 성취할 만한 사람을 감관으로 정하여 물력을 주어 조달하게 하고 그 중에서 비용은 적게 들이고 성과는 많이 올린 자는 그 처지에 알맞도록 혹은 첨사와 만호를 제수하고 혹은 수령을 제수하며 혹은 가자(加資)하여 지금처럼 순례대로 승전을 받아 거행하는 관습을 버리고 이조와 병조(兩銓)로 하여금 즉시 수용(收用)하게 하면 혹 일을 성사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국역비변사등록, 숙종16년(1690) 11월24일).

1만석은 1,800,000리터로 6,120,000kg, 즉 6,120톤이다. 그러나 그 다음에 이어진 강화성곽수축은 3만석 즉 18,360톤의 석회를 필요로 했다. 숙종대에 이미 강화도내에서 성곽 수축 등에 필요한 석회는 물론 나무도 자급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49돈대를 만든 후 해안을 따라 관방시설을 축성하기 위해 들어가는 석회, 지렛대나무, 장목, 말목, 밥 짓는데 쓸 나무바가지, 땔감, 아름드리재목 등을 모두 외부로부터 조달하도록 지시한 비변사의 지시내용을 보자.

여장(女墻)에 쓰일 석회는 3만석을 한정하여 경기·황해 양도로 하여금 해변의 각 읍에 분정하여 미리 구어 두었다가 얼음이 풀리는 즉시 강도에 실어다 납입한다. 성문과 성을 쌓을 때에 쓰일 지렛대나무 3천개와 돌을 운반할 때 엮을 나무 8천개, 가가(假家)를 짓는데 쓰일 각종 장목(長木) 6천개, 말목 6천개는 성을 쌓을 때의 예대로 차원(差員)을 따로 정하여 장산곶(長山串)에서 베어내어 얼음이 풀리는 즉시 강도에 실어다 바친다. 말목 3천개는 충청도에도 똑같이 분정한다. 많은 숫자의 공장(工匠)과 역군의 밥을 짓는데 쓰일 나무바가지는 1천5백개를 한정하여 강춘도(강원도)의 생산할 수 있는 각 읍에 분정한다. 공장과 역군의 밥을 지을 땔감은 불가불 미리 마련해야 하나 강화 전역은 모두가 민둥산이고 마니산의 나무는 뜻한 바가 있는 것이므로 가져다가 쓸 수 없으니 자연도(紫燕島)의 벌레먹은나무(虫損木)중에서 가려서 가가를 짓는 데와 말목과 엮을 나무로 쓰고 끝단과 지엽枝葉은 전부 가져다 쓰도록 한다. 자연도 이남의 여러 섬에 있는 땔감도 1만동을 한정하여 부근의 각 읍과 각 진포에 분정하여 얼음이 얼기 전에 베어내어 얼음이 풀리는 즉시 강도에 실어다 바친다. 성을 쌓을 때에 쓰일 동거(童車), 썰매(雪馬), 원다고(圓多古), 고패(轆轤) 등은 각 영문에서 배를 만들고 남은 재료로 만들게 한다. 성을 쌓고 돌을 배치할 때 쓰일 큰 몽둥이는 성을 쌓을 때의 예대로 서울주변 사산(四山)의 공이가 많은 소나무를 가려서 베어다가 잘라서 쓰게 한다. 성을 쌓을 때에 조수가 들락거리는 항구나 갯가에는 각기 대소에 따라 수로(水路)를 내야 하는데 큰 곳은 돌로 쌓고 작은 곳은 흠통(桶)을 써야 하니 흠통감으로 아름드리재목(大不等) 30주(株)와 성문에 가로지를 장목 3주는 값을 잘라 강춘도의 생산되는 각 읍에 분정한다(국역비변사등록, 숙종16년(1690)11월14일, 후록).

위 기사는 마니산을 제외한 강화전역이 민둥산임을 공식적으로 확인시켜주고 있다. 석회와 소나무를 공급하던 강화도는 이제 외부로부터 무리할 만큼 공급을 받아야하는 최대의 소비처로 바뀌어 있었다.

▲ 비격진천뢰 우리나라 전통 대포 종류인 대완구(大碗口)에 사용하는 포탄이다.비격진천뢰는 내부에 화약을 충전하기 때문에 적 위치에 도달할 때쯤 자체폭발을 일으켜 파편으로 적을 직접 살상할 수 있었다.
화약

염초는 화약재료이다. 따라서 국가에서는 유황과 더불어 매우 중요한 군수물자였다. 대마도의 좌위문대랑이 객인을 보내어 부산포에서 배만들기를 청하고는 유황2천근을 바치므로 조선이 청을 들었다(세종08.07.07, (무술)원전3집35면, 수군자료1집, p320 재인용)는 기사에서 보듯 왜인에겐 단 한 그루의 소나무도 허용치 않던 금기를 깨고 유황을 바치자 선박제조용 소나무의 벌채를 허용하였을 정도로 화약재료는 중요한 것이다.

1477년 1월 경연지사 강희맹이 ‘화약고에 석류황 23만7000여근과 염초4만근이 있다’(성종실록 권75, 8년 1월정묘)고 하였다. 1596년 5월 충청도 서천에 사는 임몽이라는 사람은 사람과 말들이 밟고 다닌 바다흙을 가지고 염초를 생산하였다. 이런 흙에는 특별히 질산암모늄이 많기 때문에 염초생산에 적절했다. 선조 때 훈련도감의 제의에 ‘서천의 봉족인 임몽이 염초제조법을 여러 가지로 시험하여 성공한 다음...남양의 바닷가에서 5일 동안 바다흙으로 염초 1근을 구워냈고 짠흙 2푼중, 바다흙 1푼중을 가지고 염초 3근을 구워 바쳤다. 그것을 제조하여 폭발시켰더니 정하고 위력이 있어 쓸 만하므로 두가지 색깔의 화약을 각각 봉해서 올린다. 바다흙은 반드시 사람과 말들이 밟고 다니는 소금구이장에서 파내야 하는 것인 만큼 바다가의 나무가 무성한 곳에 가서 많은 량을 구워내면 힘을 덜 들이고도 많은 화약을 얻을 것이다’고 하였다(선조실록 권63, 28년 5월, 정유조).

임몽의 가마에서 5일 동안 주위 숲의 땔나무를 지펴 염초 1근을 생산했으므로 300일을 불을 떼도 겨우 염초 60근 밖에는 생산하지 못한다. 임몽의 발명이후 염초생산은 더욱 활기를 띄어 15세기 중엽 예성강가의 개성 한 고을에서는 염초 1000여근을 생산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겸군기감 민계가 개성부에 가서 염초 1000여근을 제조하였다’(문종실록권5, 즉위년12월, 무인조).

임몽식가마를 기준으로 한다면 염초 1000근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약 17년간 불질을 해야 한다. 강희맹의 보고처럼 화약고에 이미 염초 4만근이 있었으니 이것이 생산되려면 임몽식가마 1개에서 550년 불질을 해야 한다.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는 임몽식가마를 늘리는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전국에 염초제조만을 위한 약 5백개의 가마가 있어야 1년 안에 과업을 완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임몽의 가마에서 염초 1근의 생산에 소용되는 땔나무의 양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7년분의 땔나무양이라면 개성주변 숲의 황폐정도를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땔나무가 고갈되면 더 이상 염초를 생산할 수 없으므로 나무가 있는 장소를 찾아 염초가마를 옮겨야 했을 것이다.

임진란 이후 병자호란과 효종의 북벌정책에 의해 강화를 군사요새로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염초생산량을 늘렸을 것은 자명하다. 임진란으로 이들 화약이 모두 소비되면 다시 그 정도의 화약을 생산 비축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숲이 파괴되어야 했다. 따라서 전쟁으로 인한 숲의 피해는 눈에 보이는 숲의 파괴 뿐아니라 국가 물자를 다시 충당하기위해 파괴되어야할 숲까지 계산되어야 한다. 전쟁은 그래서 가장 괄목한 만한 숲의 파괴자였다. 화약은 전쟁을 위해 국가만이 제조하는 단계를 넘어 암암리에 민간인들 사이에서도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17세기 초부터 갱건설에 화약발파법이 도입되었다. ‘동점별곡’에 ‘한번치고 두번치면 석수갈피 날아들제 눈에들고 목이메니 화연내에 기막힌다’고 한 화연은 화약을 발파시켰을 때 나는 연기를 말한다. 18세기 초에 널리 알려진 흑색화약제조법은 1744년 김지남이 저술한 ‘신전자초방’에서 더 한층 발전하였다. 이 시기 봉건국가의 금지조치에도 불구하고 민간에 화약제조법이 널리 퍼져 갱건설과 광물채취에 화약이 널리 이용되었다(조선광업사2, 리태영외, 공업종합출판사, 1991, p182).

1811-1812년 평안도농민전쟁때 농민군의 최후의 보루였던 정주성벽을 파괴하기 위해 토벌군이 운산광산의 화약수를 강제로 끌어온 데서도 민간광산에서 이미 화약발파법이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812년4월19일 토벌군은 화약 수천근을(천근은 600kg)폭파하여 성벽10여칸을 파괴하였다.(위책 p180) 토벌군이 보유했던 화약을 3천근으로 가정하면 임몽의 가마에서 약 50년 동안 불질을 해야 할 양이다.

18-19세기에 들어와서 유황생산도 계속 증대되었으며 그 상품화과정도 촉진되었다. 개인 상인들 가운데는 유황을 몰래 생산하여 화승총총탄을 만들어 파는 자들이 나타났다..(위책 p212). 민간포수 중에는 호랑이 잡는 강계포수가 유명했는데 이들은 병인, 신미양요 당시 참전하는 민간포수가 되지만 국가가 아닌 민간에서도 화약제조에 열광하면서 숯과 나무의 파괴는 더욱 가속화 되었을 것이다.

광업

19세기 초에 편찬된 만기요람에 ‘숙종정묘1687년에 홍조로 하여금 광산들을 책임지고 관리하게 하며 별장들을 파견하여 광세를 징수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각도에 은광이 많이 개발되었는데 전후 개발된 고을은 68개에 이르렀다’고 하였다(만기요람 재용편, 4금은동연조). 이중 한강하구와 연관된 은광상은 파주, 교하, 삭녕, 신계, 이천, 평강, 정선, 영월, 춘천, 단양, 양주 등이다(조선광업사2, 리태영외, 공업종합출판사, 1991, p160-161).

1771년 4월 당시 호조판서였던 채제공이 정조에게 “각도의 은광상으로서 개발할 만한 것은 모두 아문과 군문 궁방들의 소유로 되었습니다. 혹시 광상을 개발한다 하여도 호조에 소속시키지 않으니 이것이 어찌 옛날 제도와 같겠습니까?”(영조실록, 권116, 47년 4월 기축)라고 보고 한 것을 보면 이미 관영은광이 쇠퇴하고 민영은광이 발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740년 1월 우의정 유척기는 “은점의 폐해는 이루다 말할 수 없다. 은점을 모두 깊은 산과 큰 골짜기에 설치하였는데 산전체를 파고 들어가 마치 벌이둥지 같다. 자그마한 풀도 남지 않고 온 산이 벌거숭이가 되었다. 근래에 와서 강줄기가 말라들었는데 그 원인은 절반은 화전 때문이고 절반은 광산을 설치한 때문이다.”(비변사등록영조 16년1월20일/조선광업사2, p177 재인용)

유척기는 강줄기가 마르는 원인을 숲에서 찾고 있다. 화전은 일반적으로 숲 황폐의 원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광산을 숲 황폐의 원인으로 본 것은 예리한 관찰력으로 평가된다. 해마다 1000량 즉 37.5kg의 은을 뽑아내자면 적어도 그의 1000배 즉 37.5톤의 은광석이 요구되었다(위책 p177). 은광석중 방연석(비중7.4-7.6)을 가정하면 그 부피는 약5000리터이다. 이 정도에서 은을 제련하려면 어느 정도의 나무가 필요할까?

1606년 호조의 보고에 ‘양주의 축석령은 갱에서 14명의 광부로 하루에 은이 섞인 흙 1말을 파내여 참나무숯 1섬과 관솔(송진이엉긴 옹이)400근, 숯4섬으로 18명의 로력이 5돈중의 은조각을 제련하였다(선조실록, 권201, 39년(1606년), 7월신사)고 하였다. 즉 은 5돈중 생산에 필요한 광석을 채굴하는데 14명, 제련하는데 18명, 모두 32명의 광부가 요구되었으며 관솔400근, 즉 240kg과 숯5섬이 들었다. 이중 숯만을 따로 계산하면 숯1섬은 180리터이므로 총900리터의 숯이 소요됐고, 숯의 비중은 1.9이므로 1710kg, 즉 은 5돈중을 생산하기 위해 1.7톤의 숯이 소요되며 다시 이 숯을 만들기 위해선 34그루의 나무가 소요된다.

1말은 18리터이므로 1년치 방연석요구량인 5000리터는 277말이고, 여기에서 1,385돈중의 은이 생산된다. 이 정도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473,670kg 즉 473톤의 숯이 필요하며, 결국 천량의 은을 생산하는데는 나무946그루의 희생이 필요한 셈이다.

19세기의 ‘오만동연점록’에는 ‘납100근에서 은5량을 제련한다’고 하였다. 즉 납1kg에서 은 3.1g을 생산하였다. 오만동납광산에서는 하루에 납130근(78kg)과 241.8g의 은을 제련하였다. 납1근의 값이 1량이었으므로 하루에 상평통보 130량 값의 납을 생산한 것이 된다. 이 광산의 광주는 하루의 제련에 숯값 60량(2000근)과 임금24량(연군12명의 품삯), 식사비15량 모두 99량을 지불하고 나머지 31량을 순소득으로 차지하였다. 광주는 이 밖에 연(납)을 제련하여 그의 0.31%에 해당하는 양의 은을 차지하였다. 오만동광산에서는 일차제련 후 남은 찌꺼기도 상품화되었다. ‘현재 은을 제련하고 남은 찌꺼기인 손주적으로 연(납)을 제련하게 되면 30만 내지 40만근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연을 제련하는 데는 숯이 필요하니 숯으로 제련하는데 드는 비용 5만-6만량이 먼저 필요하다.’ 이 납광산에서 하루의 제련에 드는 숯값이 60량(2000근)이었으므로 5만-6만량의 숯 값이면 1000일 동안 연(납)을 제련할 수 있다. 광산주는 1000일 동안 제련할 수 있을만한 양의 찌꺼기를 팔려고 하였다(조선광업사2, 리태영외, 공업종합출판사, 1991, p203).

한강하구유역에 속하는 예성강의 상류 수안 홀골에는 금광이 있었다. 정약용의 ‘대동수경’에 따르면 ‘언진산의 남쪽 홀골 안에서 황금이 난다. 수원유수 서유린이 금점주로서 감독하는 관리를 임명하고 광세를 거두었는데 금100량에 달하였고 금점주는 한해에 수천근을 얻었다. 굴을 파서 집을 만들고 사는 자들이 1만여호나 되었으며 산줄기를 자르고 파들어가서 아래로 황천까지 달하였다’고 하였다(대동수경, 권4, 패수의3저수(예성강)조).

18세기경 은광산도시로서는 강계 운파가 가장 컸다면 금광산도시로서는 수안의 홀골이었다. 1798년 10월 황해감사 이희준의 보고에 의하면 수안금광산에는 본래 5개의 금광이 있었는데 2개는 광맥이 끊어지고 3개는 광맥이 매우 풍부하였다고 한다. 그해 여름에 새로 39개의 갱을 팠는데 장마로 하여 채굴을 일단 중지한 것이 99개에 달하였다. 이렇게 갱이 줄어든 조건에서도 550여명의 연군이 있었다고 한다. 홀골금광산에서 광주가 차지하는 몫만 하여도 금 수천근으로 대략 1.2t의 금을 해마다 생산한 것으로 보인다(조선광업사2, p217). 홀골금광 역시 많은 양의 나무와 숲을 희생시켰을 것이며 그 피해는 그대로 하천과 강에 토사로 밀려 내려와 한강하구에 정사초와 같은 큰 사구에 퇴적되었을 것이다.

한편 철광상은 이미 15-16세기에 나라의 거의 모든 지질구에서 널리 개발되었고 17세기 이후에는 더 많이 개발되었다. 러시아인들이 조선을 둘러보고 쓴 ‘조선지’에 의하면 한강하구와 연관된 철광상소재지는 강화도와 예성강 상류의 황해도 신계, 한강상류의 경기도 여주, 충북 충주, 강원도 홍천, 한탄강상류의 강원도 김화, 철원 등이다(조선광업사2, p159).

만기요람(재용편4금은동조)에 의하면 효종신묘년(1651년)에 경기의 파주와 교하, 황해도의 곡산, 강원도의 춘천, 충청도의 공주등지에 설점수세(개인에게도 광산을 설치케 하고 세금을 받음)하는 은광산이 나타났으며, 숙종 정묘년(1687년) 당시 개발된 68개의 설점수세은점중 한강하구와 관련 있는 지역은 황해도 곡산 수안, 강원도 금성, 평강, 홍천, 영월, 춘천, 경기도의 충주, 단양 등이다. 당시의 위정자들은 잠채광산(정부 몰래 개인이 캐는 광산)을 없애는 것이 상책이지만 없애지 못할 바치고는 설점수세제라도 하는 것이 국가에 유익하다고 생각하였다. 18세기 이후 잠채광산과 설점수세광산에서의 광물생산의 장성과 그 상품화과정의 확대는 자본주의로의 발전을 촉진하는 조건들을 구비하고 있었다.

첫째, 당시 사회적 분업이 발전하고 임금노동이 급속히 보급된 조건에서 광산에 진출한 상업자본은 소생산자들을 임금노동자로 쉽게 전화시킬 수 있었다. 둘째, 수공업과 농업생산의 발전을 위한 유리한 조건을 조성하였다. 셋째, 광산도시의 형성과 광산을 중심으로 한 근대적 도로망의 형성에 유리한 조건을 조성하였다(조선광업사2, p213).

자본주의적 관계의 발전은 다른 한편 새롭게 등장한 노동자들에 대한 가혹한 착취를 동반하는 과정이었다. 18세기말 영풍동광산의 광석채취형편에 대하여 전하는 ‘풍요삼선’에 실린 김락서의 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있다.

만명의 광부들이/ 가래들고 삽들고/ 천길을 파고들어/ 구뎅이가 까맣구나/ 꺽이고 도는 고비/ 사다리로 길을 내나/ 혼자도 위태커니/ 둘이 나란히 갈수없네/ 한삼태의 광석을/ 밖으로 캐내려면/ 제아무리 기를 써야/ 빨라서 반나절일세/ 와지끈 우르릉/ 구멍이 무너진대도/ 광임자영감에겐/ 아무상관 없다네/ 광임자영감이/ 제 아니 죽었으니/ 다른사람도 함께/ 불행을 당할 밖에...

시는 노동자들의 생사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채 광석채취로만 내모는 광산주의 냉혹함을 폭로하고 있다. 한편 ‘동점별곡’은 19세기 들어 급속히 확대발전하기 시작한 갑산동광산도시의 형편에 대하여 ‘억조창생 모여들어 수천가에 잠겼으니 조석연기 창천하니 현운무가 자욱한데 계명성이 자로나니 별유천지 여기로다’라고 하였다(가사전집, 조선문학예술동맹출판사, p325.1964/조선광업사2, p216 재인용). 이 가사는 동광산도시에 수천호의 민가가 운집해 있고 현운무 즉 제련소에서 내뿜는 검은 연기가 구름을 이루고 있는 형상을 표현하고 있다. 대기오염이 시작된 것이다. 결국 잠채광산과 설점수세광산은 자본주의를 몰고 오는 신호탄이었으며, 한편으로는 노동자를 착취하고, 한편으로는 대기와 숲을 착취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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