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 2003년 10월 21일 저녁 7시 30분
장소 : 제주시 고성화 선생 자택
인터뷰 : 송정미 기자
동영상 : 이철화 기자
사 진  : 김규종 기자


민족통일평화체육문화축전이 열리기 이틀전인 지난 10월 21일 축전 취재 차 내려간 제주도. 우리들 일행을 맨 처음 반겨준 제주 국제공항은 바다를 끼고 있어 사뭇 다른 이국적 정취를 풍기고 있었다.

▶10월 21일 최고령 비전향 장기수 고성화 선생과 제주시 자택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공항에서 짐을 챙겨 나서자 마자, 기자의 마음은 급하기만 했다. 축전 취재도 취재지만, 제주도는 늘 언제가 한번은 가봐야 할 곳이었기 때문이다. 평소에 오기 힘든 제주는 고려시대 삼별초의 항쟁은 물론 현대사에 지울 수 없는 4.3항쟁의 역사가 숨쉬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또한 2차 송환을 기다리는 최고령 비전향 장기수가 있는 곳.

마침, 북측에서는 지난 12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 비전향 장기수의 2차 송환을 남측 정부에 공식적으로 제기하기도 해 그와의 만남은 어느새 기정사실화 돼 있기도 했다.

더구나 얼마전 비전향 장기수를 다룬 영화 `선택`이 개봉됐고 최장기수였던 김선명 선생은 "선택은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하나를 포기하는 것"임을 알았다고 했던가.

기자가 제주 땅에 짐 풀기가 바쁘게 찾아가 만난 이는 2차 송환 신청자중 최고령자이면서 남측 장기수중에서도 최고령자인 고성화 선생이다.

고성화 선생은 제주도 옆 `우도`라는 섬에서 1916년에 태어났으니 올해 87세인 셈이다. 선생을 찾아나서는 길에 `혹시 너무 연세가 많아 대화조차 힘든 것이 아닐까`하는 걱정이 은근히 앞서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우리 일행 앞에 서 있는 선생은 도저히 87세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어 보였다. 우리 일행을 만나기 전날에도 선생은 젊은 사람도 힘든 20킬로 이상을 걸었다니...

선생과 가볍게 저녁을 지어먹고 우리 일행은 그의 삶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다소 어색하게 시작됐던 `인생` 선후배의 만남은 차츰차츰 깊어져 갔다.  

□ 선생님의 살아오신 얘기를 듣고 싶은데요.

▶87세의 나이에 비해 훨씬 건강해 보인
고성화 선생[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 비전향장기수는 63명 외에도 더 있었는데 가지 못한 것은 여러 가지 조건도 있었고, 그 사람들의 가정환경에서도 갈 수 없는 입장이었어. 또 여기서 가정을 가지게 되면서 재차 이산가족이 되고 싶지 않아서 못간 사람도 있어. 지역적으로 볼 때 이북 출신이 아닌 사람들은 대개 가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지 못했지.

또 저쪽에 가정을 가졌다 하더라도 전향했다는 조건 때문에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었던 사람도 있고. 그 사람들은 비전향 장기수들을 꺼리게 됐고, 비전향이라는 조건 때문에 전향한 사람들을 만나기도 싫어하는 경향도 있었고.

내가 생각하건대 그건 잘못된 생각이 아닌가 싶어. 그 사람들이 전향은 했다고 하지만 나와서 민주화 운동에 대한 적개심을 갖거나 한 게 아니고 부지런히 종사도 하고 집회 때마다 참가도 하고 그랬는데... 우리가 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전향을 해서도 전향의 본색을 사회에 나와서도 끝까지 표현한 사람들을 적으로 생각해야지 전향을 했다하더라도 전향 때문에 미워할 필요는 없는 거야.

왜냐면 평상시 우리가 대중 속으로 들어가서 통일을 위한 대중계몽운동을 한다고 하자, 그 사람들은 전향을 했다하더라도 이미 통일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이거든. 저쪽에 올라간 사람들 대부분이 그 사람들 만나기를 꺼려하고 싫어하는 경향이 있었어. 그것은 반드시 우리 마음속에서 청산해야 할 부분이지.

내 자신은 부산에서 활동할 당시 (1949년) 6월 15일에 2년형을 받았고, 그때도 전향하지 않고 그냥 나왔어. 또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된 후에 일본 적십자사와 공화국(북한) 적십자사가 인도에서 회담을 갖고 인도적인 측면에서 재일 동포들이 공화국을 가고 싶다고 하면 그것은 수용해야 한다고 타협을 봤어. 때문에 재일 동포 송환이 59년 `니이가다`에서 행해졌는데 그때 나는 당에 들어가고 나온 후에 그 당시 당으로서 송환된 아무런 조치가 없었고, 해서 나는 개(별)적으로 일본의 아는 사람들을 통해 그 사람들에 대한 공작을 꾸준히 했지. 내가 일선에서 싸울 때 일본으로 간 사람들이 많거든... 그래서 니이가다에서 송환시킨 사람도 많고, 그 이후 송환을 시작하고 나서 그 사업을 중단하고 북에서 머물렀는데 68년도에 정식으로 당에 소환이 됐어.

그때 다시 당일을 시작했지. 59년부터 68년 사이에는 국내적으로 머무르면서 여러 가지 고심을 했던 때이고, 조직적으로는 연결이 되지 않았지만 개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당일을 계속하긴 했어. 68년에 (당에) 소환이 돼서 (일을 하다) 73년 3월 16일 검속됐어.

□ 68년 당에 소환된 것은 북에 갔다 온 것인가요?

■ 아니야. 북에 갔다오면 곧 잡히게 되는데 그런 짓은 할 수 없지. 그러기 때문에 한 5년, 3년을 투쟁을 하고 있었지, 그러지 않으면 벌써 잡혔지. 당에서 소환 오면 그 지역에서 활동하라고 지시 내리고, 지시 내려오면 그대로 활동하고 해야 하는 거거든.

□ 무슨 죄목으로 검속되셨는지.

■ 국가보안법이지. 그때 북에서 밤 12시가 지나면 숫자 방송을 했었는데 누구는 19, 누구는 10. 나는 19에 해당돼 있었기 때문에 19방송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청취해야됐어. 그 방송은 전부 숫자로 나열돼 나오는데 그 숫자를 전부 기록한 후 분석해서 보면 지령이 나오게 되는 거지.

내가 당에 소환돼 갔을 때 무전기와 무인 포스트 같은 것을 사용할 수 있겠냐고 하길래, 그때는 구태의연한 방식을 사용했었거든, 대한민국은 고도로 발전해 가지고 미국의 CIA의 지령을 받고 있고 여기서 무전을 치면 어디서 치는 지 다 안다고...(해서 사용하지 않았어.)

북에서 지령을 받고 해석해서 일본으로 가서 일본에서 (북으로) 안부편지를 보내는 거야. 그 편지 내용은 별것 없이 보통편지로 보내는 거지. 그 편지 내용을 그쪽에서 다시 분석하면 여기서 활동한 사항이 다 나와 있고. 그때 평양까지 편지는 왕래를 했으니까. 나를 담당한 공작원은 내 활동 내용을 다 알 수 있지. 그래서 그때 검속을 당했지.

"통일사업은 인간 사업이다"

□ 그럼, 68년부터 73년 검속될 때까지 당 활동을 하셨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

■ 그건 여기서 말할 수는 없지만은, 당원을 포섭하는 것이지. 다시 말하면 통일 사업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발견해서 그 사람을 공작대상으로 삼고 그래서 당 일꾼으로 양성하는 것이야. 내가 포섭하는 과정에서 (한 사람이) 같이 재판을 받았는데, 그분은 보석으로 집행유예로 나왔는데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고 들었어. 그 사람은 부산 분인데 내가 나온 후에도 안타깝게도 만나지도 않았어. 나를 주시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선생이 저술한 『나의 비망록-애국의 길(한울사)』을 보면 68년 당의 소환을 받고 73년 3월 16일 구속될 때까지 일본을 수시로 드나들며 당 사업을 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감옥에서의 일은 폭압 속에서 (보냈지). 물론 저쪽에 가신 분(북송 장기수)들은 다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우리 사업에 있어서, 통일사업에 있어서 인간이 포함되지 않은 사업은 있을 수 없다. 누구든 같은 동포로서 같은 민족으로서 사랑해야 한다. 설령 그 사람이 본의 아니게 전향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더더욱 그 사람에게는 친밀감을 가지고 더 굳게 `내가 잘못했구나` 하는 신념을 심어주어야 하거든. 근데 그렇게 일방적으로 미워하고, 전향자라고 해 가지고 편가르기로 해 버린다면 우리 사업은 망쳐버리게 되는 거야.

□ 정부의 전향작업은 언제부터였는가.

■ 전향작업은 70년대부터 시작했지. (72년)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후에 박정희가 어떻게 하면 통일을 할 수 있느냐, 그 통일은 민주주의 통일이 아니라 박정희식 통일인데, 통일을 하려면 사상범을 없애야 한다, (이런 생각 하에) 국가보안법을 가지고 폭압이 진행된 거여.

그래서 지난 시기 형을 살고 다 나간 사람들, 전향하지 않은 사람들을, 그 사람들은 지난 시기 나가서 결혼도 했고 아이들도 낳고 가정생활도 하고 있는 사람들인데, 사회안전법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전향을 하지 않으면 징역을 살아야 한다는 악법을 75년에 만들었어. 그 법이 만들어지고 나니 전향에 대한 탄압이 시작됐어. 전향을 하지 않으면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식으로 공작이 시작된 거지. 그 때 아마 예비 검속당한 사람들이 약 120명 가량, 사회에 나가서 살림살이를 하는 사람들을 전부 붙들어다가 전부 6사에 수용시켰으니까. 그 사람들 때문에 우리가 5사로 쫓겨났어.

□ 선생님이 계셨던 곳이.

■ 대전 감옥 6사였는데, 그분들이 많아 6사로 가고 우리는 5사로 갔지.

□ 처음부터 대전교도소에 계셨나요.

■ 그렇지. 어디 가보지도 않았어. 73년 검속돼 93년(당시 77세) 3월 6일까지 20년간 주욱 대전교도소에 있었지.

□ 그럼 대전 교도소는 전향 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겠네요.

■ 그렇지. 하나 특기 할만한 것은 하루는 교회당이라고 하는데 우리를 전향시키기 위해서 공작하기 위한 곳이었지. 사람들을 앉게 만들어 놓았는데 다 나오라고 해서 가보니까 아주 악질인 김치연 교무과장이 앉아있고, 책상 위에 권총이 놓여있어. 또 (사람들이) 갈라서서 양쪽으로 앉아 있더라구. 그래서 나는 (그 권총이) 누가 공화국에서 내려온 소위 공작원들이 가지고 내려온 것으로 착각을 했어. 그게 아니야. 내 상상이 빗나갔어. `오늘 니들이 전향하고 안하는 것에 대한 마지막 기회다`고 선언을 한 거야. 죽어도 전향을 못하겠다 하는 사람은 왼쪽으로 가고, 살고 보고자 하는 사람이 있거든 오른쪽으로 서라고. 많이 나갔지.

대전 교도소에 있었던 수용자중에 6사에 수용된 사람들만 70명. 6사 감방이 40방뿐이 없었으니까 독방으로 (하면) 30명이 남거든. 그 30명은 각 방에 분산해 가지고 자기들이 앞으로 공작대상이 된다는 사람들은 서로 합방을 시켜주고, 소용이 없다고 분류된 사람들은 그냥 독방으로 가둬놓고. 그리고 그때 권총을 놓고 우리를 협박한 거야. 그때 많이들 갈려져 나간거야.

"동지의 죽음에 대해 항의조차 못한 동지들은 자기 비판을 해야 한다"

그 일이 있은 후에 전부 감방으로 들어갔는데, 그때부터 제 2단계의 폭압이 내린 거야. 개(별)적으로 공작대상이 `저놈은 약한 놈이다`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불러다가 폭압을 가하면은 가능하다 생각되는 사람은 불러다가 두둘겨 패기도 하고, 고문도 하고... 그 당시 징역살이하는 깡패들을 시켜 가지고 전향공작을 하기 시작한 거야.

내가 아는 분중에 최석기라는 분이 깡패들에 의해 돌아가셨어. 밥 시간이 됐는데 밥을 주지 않았지. 깡패가 있는 방에 그 분을 가둬 놓은 거야. 밥은 받아 놨는데 밥을 주지 않은 거야. (최석기 선생이) `니가 누구인데 밥을 안 주느냐, 범법을 해 가지고 들어왔으면 밥은 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하니, `전향서 쓰면 밥 주지`라고 말한거지. 그래 깡패가 그렇게 말하는데 전향을 할 수 있어? 최석기 동지가 반항을 하니까 발길질을 하고 구타를 해서 결국엔 사망을 한 거야. 원래 그분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
 
그리고 내가 6사에 있는 동안 이돈융이라는 소지가 있었는데, 밥 주고 심부름하는 그 놈도 범법자지. 그놈은 남편이 일본인인 조선여자가 낳은 아들인데, 남자는 일본으로 가버리고 제대로 키워지지 못하면서 깡패질 하다가 들어오게 됐거든. 그래서 여러 가지로 공작하면서(살았지). 박융서라는 분이 있었는데 소화가 잘 안돼서 밥 먹고 나서 0.75평의 방에서 살살 왔다갔다 하다가 이돈웅이 한테 걸렸어. 이돈웅이 바로 `나와!`해서 끌려갔는데 난타를 당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매를 맞았단 말야. 아침이면 교대부장이 점검을 나왔는데 (박융서 선생의 감방) 문을 열었는데도 아무런 소식이 없는 거야.

그때는 깨진 유리조각이 각 방에 있었는데 40방 쪽에서 깨진 유리조각을 가지고 지켜보니까 사람이 죽어 가지고 나가는 것을 목격한 거야. 박융서 동지가 이돈웅 한테 얻어맞아 죽은 거야. 그때만 해도 박융서 동지가 돌아가신데 대해 동지들이 항의를 하지 못했어. 항의를 하면 항의하는 것 자체가 `꺼리`가 되니까. 그게 그 동지가 죽은 데 대해 항의를 하지 못한 조건에서 우리가 자기 비판을 해 보면 다 살려고 하는 욕망 때문에 동지가 죽은 데 대한 인도적인 면에서 항의라는 건 할 수가 없었던 거지. 그래서 내 자신도 부끄럽고 다시 말하면 항의하지 못한 동지들은 다 비판을 해야 하는 거야.

▶제주 민족축전에 참가한 통일광장 소속 장기수 선생들과 사회단체 원로들과 자리를
함께 하고 있는 고성화 선생.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당 활동에 있어서는 동지는 나와 같은 신분이라고 한글로 돼 있거든. 그러면 동지의 죽음을 보고 그대로 있을 수 없는 것이 나의 입장이야. 같은 뜻을 가지고 싸우는 동지라고 하면 같이 죽어야 해, 죽는 한이 있더라도 거기에 대해 항의를 해야 돼. 전향을 안 했다고 해서 우쭐댈 것이 아니고 다 비판을 해야 한다. 왜 비판해야 하냐면 동지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 사람이야. 동지없이 어떻게 당조직을 운영할 수 있느냐 말이야.

여담으로 하는 말인데 전향을 안 했다고 해서 올라간 사람들, 그 사람들이 과연 주위를 위해서 목숨을 아낌없이 바친 사람들인가를 생각 안 할 수가 없어. 내가 볼 땐 절대 용인할 수 없는 사람들이야, 동지가 죽었는데 동지의 죽음에 대해 항의도 없는데, 그러면 그때 같이 다 죽었어야 하는데, 그것을 각오할 수 있는 사람...

그러한 일 때문에 좀더 생각이 있는 동지들은 가슴 아파했고, 또 자기 비판을 했어. 감방 생활을 하면서도 `아, 내가 잘못했구나!`하고 느꼈던 사람들이 몇이나 있겠는가. 전혀 없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땐 동지가 아닌 타인의 죽음으로 평범하게 본 것만은 틀림없어!

그때 대전 교도소 생활은 폭압 속에서 (진행됐지만), 전부가 한번씩 붙들려 두들겨 팬 것이 아니고 자기들이 볼 때 때리면 전향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만 데려다 팬 것이지. 나도 맞긴 맞았지만 혹독하게 맞거나 그런 것은 없었어. 나이가 칠십이 지난 사람을 자기 아버지뻘 되는 사람을 함부로 다루겠어.

□ 당시 연세가 많으셨네요.

■ 많았지. 93년 내가 나왔을 때가 77살쯤 됐을 거야. 70세 이상은 김영삼이가 무조건 내주라고 그런 거야. 그때 형집행정지로 나왔거든. 70세 이상은 30년 이상 징역을 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전부 내주어야 한다고 해서. 김영삼이 그때 그렇게 해서 내가 나왔기 때문에 김영삼이를 내가 미워할 수가 없어...(웃음)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 나석규라는 교회관이 있었는데 하루는 나를 불러 가지고 `전향을 하는 게 좋을 건데`라고 말을 해, 내가 `뭣 때문에 전향을 강요하는가` 라고 말했더니 `생명이 귀중하니까 참고로 얘기한 건데 살고 싶지 않소?`라고 되물어, 그래 내가 `살고 싶소. 살고 싶기 때문에 징역살고 있는 것 아니오, 살고 싶지 않으면 벌써 자결해서 죽었지`라고 말했지.

그 사람 다리 한 짝이 절름발이여. 나석규라고 하면 대전교도소에서 전향 공작반에서는 아주 지독한 사람으로 유명했거든. 다음에 내가 나온 뒤 들으니 과장으로 있다가 나왔다고 하더군. 그때 내가 일본 책 중에서 `조르다노 브루노`라고 이태리 신부 얘기가 담긴 책을, 지동설 주장을 해서 불구덩이 속에서 삶을 마감한 사람이거든. 내가 그 얘길 했어. 조르다노 브루노가 지동설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지지했기 때문에 재판을 받아서 죽었거든. 내가 그 역사를 다 말했어. 그 재판정에서는 당장 사형을 할 수가 없으니까 지하 감옥에 가두고, 그 사람을 8년 후에 다시 불러 나와 지금도 지동설을 주장하느냐고 물었어. 근데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활동할 그 시기에 브루노가 같은 연령대거든.

내가 감옥에서 가장 중요하게 느낀 대목은 `사람을 아낄줄 알아야 한다`는 것

그가 `지금 지구가 태양주변을 돌고 있는데 내가 뭐가 잘못이냐, 이것은 천문학적으로 볼 때 종교를 배반한 것이 아니라 종교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사물이 움직이는 동향을 말한 것뿐인데 이게 어떻게 죽을 죄를 지었느냐`라고 말하자, 하느님 말을 거역한 사람이라고 해서 8년형을 살고 난 후 그때 불구덩이 속에 집어넣은 것이야.

그 후 갈릴레이가 70살 된 해에 이 사람(갈릴레이)도 지동설을 주장한 자라고 해서 호출을 당했다. 갈릴레이도 내일 재판정에 나가 성서에 맹세를 하고 난 후 잘못됐다고 회개하니 죽이지 않고 금고형을 처했단 말이야. 브루노는 신부이면서도 올바른 지동설을 사람들에게 알리다가 죽었고, 갈릴레이는 자기가 지동설을 지지하면서도 `아니다`고 부정했기 때문에 살았거든. 그 사람이 그냥 나왔다면 이 얘기를 할 가치가 없지만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돌고 있다`고 한 한마디가 갈릴레이를 왕자로 만든 거야.

그게 바로 전향자와 비전향자의 차이야. 갈릴레이의 그 명언이, 지동설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내가 살기 위해서, 더 많은 일을 하기 위해서 그 말을 한 것이거든. 내가 그래서 나석규에게 그런 말을 했단 말이야. 나석규가 나보고 하는 말이 `이 사람은 안되겠다`며 그냥 돌려보냈어. 그 후에는 여러 번 불러내도 나에게 손지검 한 번 한적 없고, 공갈협박을 한 바가 없고 했어.

불행히도 돌아가신 분들은 나와 같은 처지에 있으면서도 불러 나가 협박을 당하고 테러를 당하고 해서 죽은 사람들이야. 그런 걸로 보면 전향했던 사람들이 지금 통일사업을 열심히 하고 있으니 미워할 수 없다는 말이지.

그전에 서울에 올라가서 보면 확연히 구분해 가지고 `만남의 집`은 김석형 같은 분이 있어 전향했다 하면 오지도 말라고 했다고. 그렇게 해서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야. 통일 일꾼도 아니야. 어쨌거나 통일사업을 하는 사람들, 우리나라의 진정한 평화를 갈망하는 사람이라면 사람에 대해 사람을 아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구. 나와 같은 사상을 갖지 않은 사람이라도 어떻게 하면 나와 같은 실행의 인간으로 만들 수 있느냐에 몰입을 해야지. 그렇게 싫어해 버린다면 지금 같은 시기에 통일운동 할 사람이 누가 있어. 그것을 감옥생활을 하면서 느낀 것 중 가장 중요한 대목이야.

□ 선생님이 출소한 후 6.15공동선언이 발표됐고, 비전향장기수 1차 송환이 있지 않았나요?

■ 그땐 여기가 중요하기 때문에 안 간 거지요. 신청을 아예 하지 않았어. 내가 있었던 곳이 여기였고, 4.3이 일어나기 전에 여기서 내가 도피를 한 거야.

여기서 당 일꾼으로서 일하다가 서북청년단이 갑자기 들어와 가지고 탄압이 계속되니까 한 45일 동안 방황을 하며 돌아다니다가 결국 상무위원회를 소집해서 말했어.
`우리를 사물에 비유하면 고기라고 하자, 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수 있느냐, 살수 없다. 그러면 당이라는 게 어떤 것이냐, 군중을 조직하는 것 아니냐, 군중을 떠나서 살수 없는 것인데 우리가 군중을 조직하지 못하는데 이 조직이 살아날 수 있냐, 그러니까 부산, 서울, 목포, 광주, 대구 등지에서 활발히 통일투쟁이 전개되고 있는데...`

▶고성화 선생은 부산시당 책임자를 지내다
검거됐다.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여기서(제주도) 47년 3월 1일 사건이 일어나 가지고 부산에 도착한 해가 47년 4월 16(5)일이 될 거야. 그래서 당 결정에 의해서 육지에 나가서 활동할 수 있는 사람들은 섬이라고 하는 조건에 얽매어 있지 말고 군중을 조직할 수 있는 지역으로 우리는 가야 되겠다. 여기서 우리는 한계선에 부딪혔다. 도저히 안되겠다 해서 그때 결정을 한 것이지.

부산에 가서 일할 수 있는 사람, 목포에 가서 일할 수 있는 사람 등은 나가도 좋다 이렇게 결정한 거야. 그것은 도당이 결정한 것이 아니라 면당이 결정한 거야. 그래서 그때 부산으로 나왔는데 바로 그 뒷날 당 선(線)이 닿은 거야. `제주도에서 나오신 동지들은 무조건 채용해야 된다. 무조건 일을 주어야 된다`고 해서.

그래서 16일 나는 벌써 당 오르그(조직자)로 채택된 거야. 부산시 당이 4개 지구당으로 구성돼 있었는데 내가 4지구당 오르그로 채택된 거야. 구당이 있으면 구당에는 구당 책임자가 있고, 조직 책임자가 있고, 선전 책임자가 있고, 대중 단체 책임자, 노동단체 책임자가 있지. 그런데 그 책임자 중에 구당 책임자 중에 조직부에 속한 오르그, 다시 말하면 조직 책임자는 따로 있고 그 밑에 오르그가 있어. 당의 명령을 받들어 각 지역 세포를 맡지. 가두 세포, 직장 세포 등이 있는데 내가 그 당시 11개 세포를 맡게 돼 혼이 났지. 그 성과가 있었기 때문에 다음에 선전부를 거쳐 조직부도 거치지 않고 구 책임자로 등용이 됐어. 그 다음에 세포가 가장 많은 제1 지구당 책임자로 됐고.

1지구당 책임자로 가서 48년 `여순 사건`이 나자 11월 30일경에 여순사건 지지 투쟁을 한다고 해서 당 조직이 실패해서 다음에 내가 1지구당을 떠나게 되고 다른 책임자가 들어와서 인계를 하게 됐어. 인계 사업이 한 1개월 정도 걸렸을 거야. 그리고 나서 시당 책임자로 등용된 거지. 시당 책임자로 있으면서 6,7개월 정도 지났을 때, 49년 6월 25일 때 검속 돼 2년형을 선고를 받았지.

□ 그럼 언제부터 당 활동을 시작한 것인지.

■ 성장 과정에서 벌써 `혁우동맹`에 조직돼 있었다. 제주도에서 해녀 사건을 주도한 것이 혁우동맹이야. 그때 혁우동맹원은 아니지만은 초등학교 3학년 때 야학선생으로 등용돼 가지고 갔어.

(`혁우동맹`은 1930년 3월 1일 제주도에서 공산주의 선전을 목적으로 결성된 조직이다. 혁우동맹은 결성 후 야학을 통해 해녀들을 가르치며 이후 제주도 `해녀투쟁`에 영향을 미쳤다. 이후 목적수행상의 어려움 등으로 결국 `조선 공산당 제주도 야체이카`가 결성된 후 해산하게 된다.)

□ 언제 공산당에 가입하셨지요?

■ 내 정치적인 것은 혁우동맹 때 여기 제주도에서 유명한 강창보 선생이 조직한 `야체이카`(세포)의 영향을 받아 가지고 교육을 받았어.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영향을 받았고, 3학년 때 제주 해녀들 교사로 임명돼 가지고 교육을 했지. 그때가 10살 때지. 어릴때는 한문서당에서 한문공부를 한 후, 8살 돼서 학교에 들어갔는데 20살, 21살 이런 학생들이 있었는데 다 장가를 간 학생들이지. 이들하고 같이 공부했어. 그때야 제주도에서는 교육선풍이 일어났어.

왜냐면 `3.1만세` 사건이 일어난 뒤에 제주도에서도 `우리는 민족으로서 알아야 한다`는 기풍이 유행돼 가지고 선각자들이 발생했고, 서울, 광주 등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학교를 설립하고 했던 때였어.

"14살 되던 해 본격적인 (공산주의) 교양 받아"

□ 선생님 댁이 상당히 부유했나 보네요.

■ 부유하지는 않았어. 아버지는 내가 나서 8개월만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어머니 혼자 고생을 많이 했지. 또 아버지가 유지로 있으면서 사업을 한다고 해서 빚을 많이 져 어머니가 참 고생 많았지. 그래서 내가 14살 때 하도 사립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갔어. 그때부터 14살 되던 해부터 본격적인 교양을 받게되지.

□ 일본에서 만나신 분은.

■ 자형.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김태권이라고 있었어. 지금 통일보상금도 받고 있을 거야. 일제 때 노동운동을 하시다 여기서 폐병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일본에서 1년 동안 김태권 선생님의 영향을 받고 심부름을 열심히 했어. 여기서 말하기는 좀 거북한데 고바야시 다키지(小林多喜二) 라고 일본 공산당 당원인데, 그 사람이 일본 공산당이 전부 검속되고 나서도 검속되지 않고 문학가로서 활동하면서 조직가로서 훌륭한 분이었지. 그 분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기 보다...

`반제동맹`(1935년, 19세때)에 가입해 가지고 문서가 발각되는 통에 상업학교 5학년 때 졸업 5개월을 남겨 두고 사건이 터져 숨어 돌아다니다가 고향으로 돌아와서 3일만에 체포됐지. 그때 일본 경찰망이 확실했어. 성산포 주재소에 당장 호출당해서 한 2주일 동안 고생을 했어. `난 겁쟁이라서 그런 일 못한다고, 공산당이 뭐하는 건지도 모른다`고 우겨서 나왔지.

□ 그러다가 1959년까지는 무슨 일을 하셨어요.

■ 그래 가지고 51년에 나와서 59년까지는 개(별)적인 활동이지. 그때는 저쪽 북에서는 건설사업이 한창이었고, 51년에 내가 나올 때는 휴전협정이 안 될 때이니까.

□ 그럼 49년에 검속 돼 2년 감옥생활을 한 뒤 51년에 출감해서는요.

■ 51년에 나와서 그 후에 내가 제주도에 있었으면 죽었지. 나는 함경북도 청진에서 살았거든. 그리고 당 책임자로 있을 때도 신문 기자증을 가지고 있었어. 이름도 고인철로 돼 있었고. 검속 왔다가 (신문 기자증을 보고)도망치던 형사들도 있었다고.

□ 당에 가입한 건 정확히 언제죠.

■ 내가 휴전협정이 안된, 51년 4월 10일날 나와서 6.25 마감일인 (53년) 7월 27일날 휴전협정이 됐지. 그 후부터 일본에 다닌 거야. 이름을 속였기 때문에 다닐 수 있었지. (그때)제주 출신들은 많이 죽었어. 제주도라고 해서 부산에서 많이 잡혀서 죽었어.

□ 감옥에 계실 때는 어떻게 생활하셨는지. 감옥에서도 조직생활을 하셨나요.

■ 그때는 조직이라는 것은 없고, 그냥 전체를 대변한 감방장, 각 방마다 있는 벽을 두들겨서 누가 통솔을 해야 하느냐하는 문제 같은 것을 제기해서 누구를 추천하면, 추천한 사람이 괜찮으면 그대로 하도록 했던 행동방법이 있었지. 또 징역을 오래 산 사람이 감방장을 맡는 경우가 많았고, 또 저쪽에서 대학이나 다니고 한 사람이 감방장을 맡은 사람들이 있었어.

내가 언뜻 보면 다 영웅주의적인 경향들이 많았던 것 같애. 나는 그것을 비판이라기보다도 그때 내 느낌을 그렇게 가졌기 때문에 솔직히 얘기하는 것인데. 진정으로 독립을 사랑하고, 진정으로 조국을 사랑하고, 진정으로 자기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데 대한 책임감, 이런 문제에 대한 `고뇌`, 다시 말하면 고민이라는 것을 느껴보는 사람을 나는 한 번도 눈에 보지를 못했어. `자기가 책임진 일에 대한 일을 완수하지 못하고 검속됐다. 그래서 징역을 산다`는 것은 당원으로서 솔직히 말하면 이것은 `말짱`이야. 일을 시켰는데 일도 하지 못하고 바로 검속당한 사람이 뭐 (할말이 있겠어).

지난번에 (북으로) 소환된 사람들, 그분들 다 비전향이라는 감투를 쓰고, 또 장기수들이라고 해서 조국으로부터 부름을 받아 가지고 대우를 받은 것뿐이지 솔직히 말해서 수준하고 원단은 별로 감당한 구절이 없다고 생각해.

□ 20년간 수감생활을 하셨는데 그 긴 시간을 어떻게 견디실 수 있으셨는지.

■ 다른 사람은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내 경우엔 항상 자기 비판이야. `무엇이 잘못돼서 여기에 들어왔느냐, 그 잘못을 어떻게 청산해야 하느냐, 그리고 동지들 상호간에 일어나는 사건들, 이것을 어떻게 봐야 되느냐`, 그런 자책감 속에서 하루 하루를 살았어.

또 거기서 제일 감명 깊게 읽은 책이 `군림`이라고. 민중의 머리 위에서 민중을 휘잡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데 일본어로 돼 있어. 그 책이 들어왔어. 그 책에는 6.25동란에 대한 내용이 써 있어, 맥아더가 일본 통치를 하는 과정이 반이고, 반은 6.25전쟁까지를 묘사한 것이야. 그 책을 감옥 안에서도 읽은 사람이 없어. 단 한 사람 고병철이 있는데, 그 사람한테 그 책이 들어왔는데 나에게 보내준 것이여.

"6.25전쟁은 맥아더와 이승만의 합작품"

6.25는 맥아더와 이승만의 합작품이여. 왜냐면 50년 4월 18일 맥아더 전용인 `빠당호`(바탄호)라는 비행기가 있었어. 그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들어간 거여. 50년이 이승만이 70세 나던 해인데, 그때 맥아더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주변 사람들을 다 내쫓고 맥아더에게 뭐라고 하소연을 했는고 하니, `내 일생에 조국을 통일을 해야 하는데 장군께서 어떻게 해서 저를 좀 도와주소` 했단 말이야. 그때 우리나라 통치는 맥아더 손을 거칠 때가 아니예요. 맥아더가 손을 뗀 때였어.

맥아더가 가만히 이승만을 쳐다보면서 드는 생각이 있었어. 그때가 트루만 대통령 때였거든. 그러니 `내가 요 다음에 조선을 통일한다고 하면은 미국에서 내 이미지가 좋아져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힌 것이지. `왜 일찍 내가 이용하지 못했는가`하는 생각이 든 거여. 여기에 쓰였던 작전이 뭐냐면 `먼저 쳐라, 치고 후퇴해라, 후퇴를 하되 깊숙이 후퇴하라, 낙동강 전선 이남으로 후퇴하라`, 이렇게 된 거여.

그러니 인민군 무력부대가 그냥 몽땅 내려오게 된 거야. 이북에는 없고.
그때 미군 해군 참모총장, 육군 참모총장, 공군 참모총장 등이 회의를 하게 된 거야. 그 사람들은 몰랐어. 이승만과 맥아더가 작전을 수립한 것을 몰라. 이 사람들이 다 모여서 어떻게 해야 되는가. 그러니 육군 참모총장이 목포 상륙작전을 제기한 거야. `노오!` 해군 참모총장이 군산으로 갑시다, 그것도 `노오!` (인민군이) 전부 낙동강 전선까지 몰려 왔으니까 그러니 인천으로 싹 자른거야. 그러니 저쪽은 무인지경으로 가서 압록강 전선까지 막 뛰어들어간 거여.

맥아더도 모택동이 지원군을 보낼지는 몰랐거든. 그래서 트루만이 알고 맥아더 모가지를 자른거야. 일국의 원수고, 그래도 육군을 책임진 사령관인데, 그리고 일본을 점령했던 위대한 업적을 가진 사람인데 자기가 일국의 대통령보다 아무리 지위가 높다하더라도 일본까지 와서 얘기를 하던지, 아니면 본국으로 소환을 해서 얘기를 하던지 해야 되는데 괌도에서 불러 가지고 모가지를 자른 거야. 이것은 확실해.

인천상륙작전이 어떻게 일어났느냐는 이 하나만 가지고도 증명할 수 있는 거야. 그리고 이승만이 말하기를 `우리 군대는 완벽한 준비가 돼 있습니다`라고 했거든. 그 완벽한 군대가 왜 낙동강 이남으로 포항까지 인민군에 밀려 내려가잖아. 그러니까 인민군 보급부대가 끝까지 내려갔으니까 저쪽에는 무인지경이야. 저쪽에는 사람이 없어. (연합군이) 그냥 가면서 생매장하고 그냥 죽이고 이러면서 비전투원들을...

지난번에 신문에 났대. 황해도에서 지하에 사람들을 파묻어 가지고 총살해 버리고. 그때는 저쪽에는 병력이 없어. 그러니까 모택동이 `항미원조 보가위국`(抗美援朝 保家衛國)을 내세우고, 즉 `미국을 대항해서 싸우는 조선을 원조하는 것은 우리 집을 지키는 것이고 우리나라를 지키는 것이다`라고 하는 여덟자의 구호를 가지고 지원군을 보내 복구시킨 것 아니야. 이것은 여러분이 알아야 돼. 여기서 6.25는 이북에서 쳐들어 왔다고 하는데 천만에 말씀이야. 그게 아니야.

6.25가 터지고 나서 부산 형무소 내에서 간수들을 조직해서 살아 있었어. 안동에도 살아있었고, 부산에도 살아있었고. 당에서 조직이 어떻게 됐냐고 하니까, 특별 세포라고 하는 게 있는데 약자로 `특세`라고 했는데, 특세 책임자는 특별한 지위에 있기 때문에 당에서도 절대 아무도 몰라요. 지령한 사람만 알지. 관공서 세포를 조직한 사람이야. 그러니 검찰청에도 사람이 있고, 각 교도소에도 있고. 지방 관청 전부, 정부 관청 전역에 걸쳐서 조직한 것인데.

6.25가 터진 날에 우리가 교회당에 나갔어요. 부산 형무소 소장이 불러서 전부 나오라고 해서 나가니까, 그때는 좌익수들만 불러서 나갔는데. 오늘 4시에 김삼룡, 이주하를 조만식 선생하고 삼팔선에서 교환하기로 했다고. 근데 그말을 듣고 교회보고 감방으로 돌아와서 암만 생각해도 이해를 못하겠어. 그렇게 될 수 있을 건가. 그때 이주하가 서대문 형무소에 들어가 있을 때거든. 그래, 들어가 있으니 가능할 수도 있다고 봤지. 그리고 조만식은 교인이고 더구나 일제 때부터 민족운동 한답시고 했던 사람이니까 교환하자고 했으니까 가능하다고 생각했지.

"해주 점령은 전쟁 유발을 위한 작전이었다"

그날 들어와서 저녁을 먹고 누워서 잘려고 하는데 검은 천으로 만든 등 가리는 `방공망`이라고 있어, 그걸 하나씩 감방에다 전기를 가리라고 넣어주는 거야. 그걸 가리는데 이상하다 생각이 드는 거야. 사람을 구부리게 하고 올라가서 그것을 씌웠다고. 방공망을 씌우라고 하니 참 이상하다고, 한 분이 의문을 제기한 거야. 교환하기로 했는데 왜 그 시간에 전기 등을 가리느냐고... 그게 바로 전쟁이 일어난 거야.

다음에 알고 보니 해주가 먼저 점령당한 거야, 해주를 점령해놓고 저쪽에서 미군이 합치니까 후퇴하고 후퇴한 거야. 그건 하나의 전술이었어. 해주를 점령한 것은 전쟁을 유발하기 위한 작전이었어. 그래서 후퇴하고 후퇴하고 해서 밑으로 내려간 거야. 생각해봐, 인천상륙이라는 게 어떻게 일어난 거냐 말야. 다른 사람들은 목포 상륙, 군산 상륙을 얘기하는데 맥아더가 왜 인천 상륙을 했냐 말야. 그러니까 인민군 주력부대가 이남으로 다 내려온 후에 (치게 되면)일사천리로 밀어붙일 수 있고, 비행기는 가볍게 폭격하겠다, 문제 없지. 그런데 모택동이 지원을 해서 삼팔선으로 갈라진거야. 어디 가서 말할 수 없는 얘기지만 그건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어.

□ 감옥에 계신 동안 가족들이 고생을 많이 하셨겠네요.

■ 가족들 고생한 것도 물론 있었겠지만, 큰 아들 죽은 놈이 내 사상에 대해 이해하는 놈이었는데... 그 아들이 부산일보 기자로 있다가 죽었거든. 내가 감옥에 있을 때도 한 번 면회왔어. 우리 가족에서는 나를 지원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거든.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교회당에 나갔다가 목사 얘기를 듣다가 고향사람을 만났어. 고병택이라고. 그분은 야체이카를 조직한 강창보 선생의 조카한테 장가간 사람이야. 여기서 고등학교 졸업해서 밀항으로 일본으로 가서 동경대학교 경제학부를 나온 사람이야. 어쨌든 일본 정부에서 관할하는 기술자협회에 취직해 가지고 아주 중요한 포스트에서 일한 사람이지. 같은 종씨고, 같은 할아버지 자손이고. 고병택이가 6년 살고 나가서 나한테 돈을 보내기 시작한 거야. 1년에 네 번씩 나눠서 한번에 10만원, 12만원, 많을 땐 여기 돈으로 13만원을 보내왔는데, 그 돈을 가지고 동지들하고 나눠 썼지.

원래 조직원은 어딜 가든 모풀(지원)이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 그것을 조직할 줄 모르면 안되지. 내가 부산 당에서 절실하게 느꼈는데, 각 오르그들이 나하고 같이 일하던 친구들인데 이 사람들이 가정을 가지고 있는데 자기가 떠나버리면 가정을 위할 사람이 없어. 가정도 돌보지 못하는 사람들이지. 이 사람들이 나와서 일을 하는데 점심값도 안되는 거야. 그래서 어떻게 해, 얼마 있다가 떠나 버리고 떠나 버리고 했어.

그래서 `개(별)적으로 모풀을 해야 되겠다. 재정 지원을 받아야 한다. 그것 없이는 우리가 사업을 하지 못한다`라고 생각해서 (상부에) 건의도 했고, `내 자신은 내가 먹고 잘 수 있도록 지원 받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나야 되겠다`고 생각했어. 마침 거기서 고향친구가 밀수를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나하고 동갑내기인데 굉장히 돈을 많이 벌었어. 내가 그런 일을 하는 줄 아니까, 나에게 한 달에 얼마씩 정기적으로 주는 거야. 이것도 나 혼자 쓰지는 않아. 내가 자본가가 되기 위해서 지원 받는 것이 아니니까. 동료들과 시당에 가면 팥죽 같은 것을 사서 갈라먹기도 했는데...

그러니 조직가는 첫째 경제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그것을 튼튼하게 하나 마련해야 한다구. 그것 없으면 조직 사업은 절대 못해. 돈을 일본으로 보내서 배를 하나 사와서 여기 와서 등록을 해서 그것을 이용해 (일본과) 원산간에 명태를 실어 나르는 교역을 한 거야. 부산 시당에 있을 때는 그렇게 해서 사업을 원만히 꾸려갈 수 있었어. 그때는 재미있었어. 머리만 잘 쓰면 재미가 있었는데. 어쩌다 지령을 잘못 받아 가지고...

□ 지령을 잘못 받았다고요?

■ 당 지령을 잘못 받아서. 여순 반란사건을 뭣 때문에 지원 투쟁을 하라고 해 가지고 다 살려 놓은 (조직을 파괴하냐구). 그때 1지구당 세포가 1백 다섯이나 되었어. 직장세포가 70개, 가두세포가 35개, 백 다섯 세포를 거느린 거대한 당 책임자였거든.

▶빛바랜 사진 한 장. [사진 제공 - 고성화 선생]

□ 앞서 여순반란 사건에 남로당이 정세 판단을 잘못했다고 하셨고 했는데...

■ 여순반란 사건이 잘못된 것이 아니고 그 반란 사건을 지지하라는 투쟁을 한 것을 잘못했다는 거지. 왜 잘못됐냐면, 그 당시 조직을 잘 만들어놓고 대중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될 순간에 동원할 수 있는 그런 조직을 꾸려놨다고 하자. 그럼 불필요한 투쟁에 투쟁을 할 필요는 없잖아. 승리하지 못할 투쟁에 대중을 동원할 수는 없는 거야.

그때 하나 참고로 할만한 것이, 소련혁명이 1917년에 레닌의 주도에 의해서 일어나 가지고 성공을 했지? 그때 폴란드의 투사로 1871년 생인 로자 룩셈부르크라는 여자가 1919년에 한 유명한 말이 있어. `군중을 의식화하고 결정적인 시기에 동원할 수 있는 조직이 아닌 이상은 혁명은 절대 성공할 수 없다`고. 여성 동지이지만 (대단한 분이지). 그분이 그런 말을 남기고 1919년에 사형대의 이슬로서 사라졌어. 1919년에 스파르타쿠스단을 조직해 가지고, 맨발로서 투쟁한 사람들이야. 용감한 사람들이야. 그것을 조직해가지고 칼 리프크네히트와 둘이서 독일에서 혁명을 일으켰는데 사형을 받았어. 사형 받으면서 그 얘기를 한 거야. 그건 우리 조직에서도 큰 의미가 있지. 평소에 지지하는 사람, 대중이 동원됐다고 해서 그걸 다 지지하는 것은 아니야.

효순이.미선이 촛불 시위때 (어떤 사람이)지나가다가 `이게 무슨 시위냐?`, `미국놈들에게 어린 학생들이 깔려죽었습니다`, `그래 그럼 나도 하나 다오`. 그건 하나의 임시 돌출적으로 발생한 감정에서 우러나는 것이지 두 여중생이 죽은 이유를 깊이 알아서 참가하는 사람은 아니거든. 그런 사람들을 믿어 가지고 혁명했다가는 다 망해버리는 거야. 확실히 알고 하는 사람과 지나가다가 동정으로 촛불시위에 참가하는 사람과는 다르잖아. 로자 룩셈부르크가 그걸 말한 거야. 혁명투쟁에 있어서 가장 옳은 얘기를 한 사람이예요.

□ 결정적인 실수 중에 하나로 평가하시는지요?

■ 결정적인 실수라기 보다 그 담당 분자들이 많이 있었으니까. 조직해놓고 망가뜨리고, 조직해놓고 망가뜨리고 그렇게 했어. 그러니까 망가뜨리고 한 사람들, 형 살고, 또 이남에 있는 사람들이 50만이라고 한 것이 바로 그거야. 그게 진짜 당원들이거든. 이북에 가서도 호언한 게 `남조선에는 혁명이 일어난다고 하면 50만명이다`라고. 내가 6월 25일에 왜 잡힌 줄 알아? 그게 49년 9월 20일 `9.20 지하선거` 때문에 잡혀들어간 거야.

□ 지하선거요?

■ 대한민국 정부는 수립됐는데 지하에서 하나하나 공작을 하면서 `대한민국 반대하고 통일정부 지지한다`는 도장을 받았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나, 그런 기발한 생각이 어떻게 나와. 그 때문에 고생을 한 거야.

□ 왜 문제제기를 하지 않으셨나요?

■ 당원은 당의 지시에 절대 복종할 의무가 있는 것이야. 자기 밑에 있는 당원에게 당 지령에 대해서 불평을 할 수가 없어. 하지만 자기는 생각할 수는 있는 것이거든. `이거 옳지 못한 짓이다`라는 생각은 할 수가 있잖아. 지금 책임자로서 조직의 환경을 보면은 도저히 이게 불가능하다, 불가능한 조직 상태에서 동원을 시키려고 하면 어려운 거야, 파괴되는 것 밖에 안 되는 거야. 내가 그 당시 검속된 것은 내 잘못이 아니고 잡아 씌운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야.

선전부에 사람이 없다고 했거든. `앞으로의 일은 산더미같이 많은데, 지하 선거를 치루려면 삐라니 뭐니 할 일이 많은데 인원이 없습니다`라고 선전책임자가 나에게 그런 얘기를 한 거야. 나도 생각해보니 적정한 인물도 없고, 그 당시는 사람 구하기가 참 힘들었다고. 그래 내가 `아는 사람 없소?`라고 물으니, `과거 일하다가 잡혔다가 2년인가 살다 나온 사람인데...`라고 말해. 그런데 당에서는 일단 징역 산 사람은 곧 채용을 안해요. 그는 왜냐면은 두고두고 그 사람의 생활상태를 감시해서 다 보고, `이 사람은 굳은 신념을 가진 사람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재 채용을 하는 거지.

그래서 책임자로서 말을 안 할 수도 없고, 또 사람이 없는데도 묵과할 수도 없고, `그럼 낼 데려와 보시요`라고 이렇게 된 거야. 그 놈이 가서 형사한테 밀고를 해서 선전 책임자하고 나하고 (잡혔지). 이놈이 해 가지고 간 후에 선전 책임자가 먼저 잡혔거든. 그 이튿날 내가 아지트에 들어갔어 선전 책임자가 등산모자를 아주 근사한 것을 쓰고, 한쪽에는 알듯말듯한 한 사람이 하나 앉아 있어. `어디서 본 듯한 사람인데...` 일단 말했으니 데리고 온 사람이겠지 하고 그냥 아무 의심 없이 들어간 거여. 그래 들어가자마자 옆구리에서 무엇을 들이대면서 `꼼짝 말라`고 하는 거여. 가만히 보니 언젠가 만난 형사인거여. 그렇게 된 거여.

□ 그때가 남로당 때죠?

■ 통일된 남로당, 남조선 로동당이 아니고 조선 로동당. 그때는 합방 될 때이지만 남반부에서 일어난 일은 남반부에서 일어났던 조직 책임자들이 책임을 맡아야 하거든. 김삼룡, 이주하 등이 책임을 맡아서 했거든, 이북에서 내려온 지령이 아니고. 그 정세 오판으로 해 가지고 결국은 당을 망가뜨렸어.

그러니까 감옥에 들어가는 사람들, 또 바깥에서 당을 배반한 사람들 이 사람들이 `보도연맹`이라는 것을 조직을 해서 그 당시 진짜 남반부에서만 (당원이) 50만명이 됐는데 다 죽이지 않았나! 내가 알기로는 그 50만명 완전히 다 사라진 거야. 내가 나와서 보니 부산 시당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아. 다음에 조사해보니 전부 다 죽었어. 보도연맹이라는 것을 조직해 가지고 그 사람들이 내가 감방에 있을 때 전향한 사람 다 보도연맹에 가입을 시켰는데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은 재판도 안하고 전부 석방이야. 석방을 시켜놓고 6.25가 터지니까 다 모여 가지고 보도연맹원이 소집할 때 다 나와야 되거든. 그래서 몽땅 데려다가 다 죽인 거야.

"보도연맹만 아니었다면 그때 혁명이 가능했다"

(국가)보안법은 그저 된 것이 아니고, 이승만이 영구집권하기 위해서는 공산당의 존재를 완전히 없애 버려야 됐거든. 그때부터 생각한 것이야. 이승만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고 미국도 51년부터 `매카시` 선풍이라는 것이 미국에서 일어나지 않았어. 공무원, 미국 정부 내에서도 공산당이 있다고 해서 미국 내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거든. 죽고, 직장에서 목이 잘리고 나갔는데. 그 바람에 이남에서도 그것을 본떠서 매카시 선풍이 여기에도 분 거야. 보도연맹만 아니면, 확실히 혁명대열에서 우리나라의 혁명을 일으키려고 했다면 그 사람들만 살아있어도 충분했어요. 그 보도연맹 관계가 우리 조직에서 참 깊은 상처입니다. 지금 하나도 증명한 사람도 없고, 나는 그러나 확실히 알았어요. 그것만은 떳떳하게 증명할 수 있는 근거가 있으니까.

□ 그 근거를 지금 얘기 해주시죠.

■ 그건 지금 말할 수 없고. 보도연맹은 담당 분자들이 조직한 것이거든. 자기네가 살기 위해서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거기서 한 두사람 살고 조직한 사람 그 자체도 다 죽었어. 부산  시당에서만 해서도 강대홍이 주된 관계자고, 내가 출소해서 나와보니 김일립이 혼자 살았더만. 강대홍이 어떤 말을 했는가 하면, 49년 12월 31일 부산 형무소에 나타나서, 그때 서대문 감옥에 갇혀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와 가지고 `공산주의로는 인류를 구할 수 없다, 공산주의로는 조국을 해방할 수 없다`고 여러 사람들 앞에 스피커를 통해 얘기를 했어. 그 후에 좌익전선에 있던 사람들이 막 전향을 했거든. 우리는 차가운 북쪽 방에 가뒀고, 남쪽의 따뜻한 방에는 전부 그 사람(전향한 사람)들이 몰렸고, 얼마 후에 그 사람들이 몽땅 석방시켜서 나갔지. 그리고 6.25 전쟁난 후에 50년 7월 29일, 그때 3년 이상 자리가 전부 나가서 총살당했어. 총살도 당하고, 바다에 목이 새끼줄에 매여서 죽었고...

□ 그럼, 선생님은 93년 출소하시고 어떻게 생활하셨나요?

■ 출소하고 집에 와서 한 1년 사니까, 아들놈이 무슨 구장, 요즘에는 이장인데 그런 것도 하고, 며느리는 시아버지의 존재가 자기들 장래를 망치는 것 같은 인상을 가졌고 해서 안되겠다 해서 그냥 나왔지. 전민련에 있었던 박용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선생님 만나 뵈러 오면은 자꾸 아드님이 귀찮게 우리에게 말을 한다`면서 `제주시에 안 나오시겠냐`고 물어봐, 그때는 내가 6.15(공동선언)는 생각도 안 했으니까 어떻게 하면 내가 제주도에서 죽을 때까지 보람있는 일을 해야 되나, 아무래도 우도라고 하는 지역적인 한계도 있고, 또 청년단체도 별로 없고, 우도에 사는 청년들이 전부 다 여기 나왔는데 우도에 본거지를 두고 여기에 나왔는데 여기 나온 사람들이 오히려 우도 도민보다 많아요. 여기에 현재 3천명이 나와 살아요.

□ 우도는 몇 명이나 살아요?

■ 지금 우도가 1천 8,90명 정도 밖에 안돼요.
그래서 나왔는데 나와서 `장전`이라고 하는 산골짜기에 있었어. 그때는 (형사가) 평생을 어디가면 귀찮게 할 땐데, 나와서 보면 70세 이상 형집행정지로 나온 영감한테 뭐라고 하지도 못하고 `잘 계십니까`라고 물어보고 가버리고 (했어).

그때 보사부 장관 앞으로 진정서를 낸 거야. 가족 있는 사람은 보사부에서 돌봐주지를 않거든. 처음에는 증명서를 김영삼 정부 때 보사부 장관에게 진정서를 냈더니 도로 연락이 와서 도에서 아들에게 가니까 가족 있는 사람은 안되는데 어떻게 아버지가 나갔냐고 물으니, `우리는 내쫓은 적 없고 스스로 나갔다`고 하니 별 수 있어요? 안됐지.

그 다음에는 `서울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여행을 왔다. 며느리가 자꾸 아버지 모시기를 싫어하고 남편 된 사람도 고통스럽고 해서 일단 선수를 써 가지고 제주도까지 여행을 왔다. 제주도 와서 여관에 아버지 혼자 남겨놓고 돌아가 버렸다. 그러면 자식이 없는데 이 아버지가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라는 내용으로 진정서를 냈더니 그 다음에는 무조건 내주더라고. 그래서 1급으로 받았지. 지금 전향한 사람은 다 그것 받고 있어요. 전화도 무료고 다 무료야.

□ 가족 사항은 어떻게 되시는지.

■ 7남매를 낳았는데 부산에 딸이 둘이 살고, 아들이 5형제였는데 큰 아들은 내가 감옥생활을 하는 동안에 간암으로 86년도 경 죽어서 본인이 자기 동생들 보고 재로 만들어서 뿌려달라고 해서 묘소가 없어. 그 다음 아들은 군대에 가서 70년대에 전사했고, 또 한 아들은 요 몇 달 전에 경기도 남양주군에 있다가 죽었어. 그 아들은 어릴 적부터 몸이 좋지 않았는데, 또 한 아들은 행방불명이고, 아들 5형제 중에 다 없어지고 고향인 우도에 사는 아들 하나 남았지.

□ 왜 같이 안 사시고...

■ 내가 있으면 자식들이 불편해 할까 해서 집을 떠난 것이여. 그리고 우도는 내가 있을 곳도 아니고.  

□ 결혼은 언제 하셨어요?

■ 그때 내가 19살 되던 해에 했던가. 그때 19살은 늙은 총각이거든. 그런 시대에 난 자란 사람이야.

□ 한달 보조비는 얼마씩이나 나오나요.

■ 한달 보조비가 25-30만원 나와. 서울에도 받는 사람 많을 거야. 전향한 사람도 상관없이 이북 사람은 다 주게 돼 있어.

□ 해녀사건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해 주세요.

■ 그건 내가 일본에 간 후에 일어난 사건이니까. 그건 31년 말경부터 32년 초까지 일어난 사건이거든. 알긴 하지만 내가 참가한 투쟁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여기서 말할 순 없고.

□ 93년 출소한 후 지역활동은 같이 하신 건가요.

■ 내가 나왔다고 하니 우선 대학가에서 찾아온 사람이 많았고, 그래서 차츰 발판을 만들어 놨지. 사람을 알고 나에 대한 사상적인 얘기, 또 `어떤 게 진리고, 오늘날 우리에게 부과된 민족적인 과업이 무엇이다` 등에 대해 얘기하고 상대편 의사도 묻고, 그러면서 우리가 뭔가를 할 것인가. 비합적인 것 말고 이제는 합법적으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통일운동이 많으니까.

□ 출소했을 때 제주의 분위기는 어땠는지요. 특히 4.3항쟁의 영향으로....

▶현대사의 산 증인인 고성화 선생.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 4.3으로 인해서 제주도는 사상적으로 완전히 비참한 상황이었지. 지금 4.3연구소가 있다고 하지만 4.3연구소도 4.3이라는 것을 가지고 어쨌든 운동을 전개했으니까 애쓰긴 했지만, 돈도 없고 하니 어쩌겠어. 사무실 비용도 들어가야 하고. 그 당시 4.3 활동을 했던 사람들이 아니고 그 후에 출생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료를 수집하는데도 적잖게 애를 썼고. 4.3의 영향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 제주도에서 4.3이라고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큰 사건이기 때문에 영향도 있었고.

그러나 그것이 4.3을 진짜 통일로 연결시키는 조직은 하지 못한 거야. 4.3연구소라는 것만 가지고 일을 한 것뿐이지, 그 사람들이 `어떤 조직을 가졌다, 조직을 확장한다`는 것은 없었거든. 내가 여기 나온 후에 4.3에 대한 깊은 얘기, `4.3은 어떻게 해서 일어났다`는 것과 `제주도의 자랑은 4.3이다`고 (이야기했어).

그 당시에 다른 곳에서는 선거를 다 했는데, 제주도만은 `이것은 반통일 선거다` 라고 해서 사수했던 거야. 반통일 선거를 반대해서 사수한 곳이 제주도만이야. 더구나 그게 섬 지역이구. 그래서 그때부터 여기를 `4.3의 성지`라고 부르기로 했거든. 그때부터 하나하나 조직을 해 들어가는 과정이었지. 내가 일선에 나서서 `뭘 했느냐` 하고 물으면 곤란한 문제지만은, 내가 그때 사면도 복권도 안 된 때, 그렇지 않아도 그놈들이 뭔가 꼬투리만 잡으면 다시 집어넣으려고 하는 상황에서 앞에 나설 수는 없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나고 하면서, 점차 개봉을 한 거지.

□ 4.3에 대해 설명을 해 줄 수 있는지.

■ 4.3에 대해선 당 관계로서는 대략 알고는 있었지만은 나로서는 말하기가 거북해요. 자기가 직접 관여를 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47년 부산 시당에 나가서 일할 때 7.27이라고 있었거든. 47년 7월 27일 전국적으로 스티코프하고 만나서 모스크바 협정을 어떻게 이행할 것이냐 하는 회담을 할려고 한 때거든. 그래서 그 날을 택해 가지고 남쪽 전역에 일어난 대세가 있었어. 그때 부산의 인구가 50만 정도였는데, 그때 20만이 구덕운동장에 모였어. 그곳에 빽빽하게 모여 가지고 비가 오는데도 사람들이 꼼짝도 안 했어. 참, 그때는 `통일이 다 됐다`하는 생각이 들었다구.

서울에서는 서울운동장과 남산으로 갈려져 있었지. 남산에서는 우리측인 조선 민주주의 민족전선(민전)이 주최한 게 남산에서 했어. 남산이 참 많았어. 그때 삽화를 보면 어린 계집아이가 꽃다발을 가지고 스티코프 장군에게 드리니까 장군이 그 어린애를 안아서 볼에 키스를 했는데, 하지는 받고 그냥 덤덤하게 받고만 있었다고 하는 얘기가 나왔어. 하나는 통일을 지원하는 쪽이었고, 하나는 통일을 반대하는 쪽이었으니 태도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지. 그게 또 유행어였고.

7.27일 군중 모임으로서는 `이만하면 통일은 되지 않았느냐`하는 그런 모임이었는데, 그걸 보고서 미 군정이 그냥 좌익세력을 막 탄압한 거야. 7.27이후에는 우리가 아지트 하나 구할려고 해도, `와서 써주십시오`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구할 수가 없었어. 그게 이제 폭압이 내려오니까 어림도 없어. 방 하나 빌리고 장소 하나 빌리는 게 참 힘들었다구. 그때 해봤지만 조직이란 참말로 잘하면 위력도 크거니와 못하면 참 비참한 거여.

"(48년) 8월 15일 이전까지의 살인사건은 용병이 한 거다"

□ 그럼, 4.3이 어떻게 정리가 돼야 할까요.

■ 이건 내 개인적인 의견이고. 48년 4월 3일까지 일어난 일은 경찰이고 군대고 할 것 없이 다 미국의 용병으로 취급해야 해. 내가 4.3연구소에 가서도 그렇게 말해. 정부가 수립되지 않은 군대가 어딨어? 정부가 수립되지 않았는데 대한민국 경찰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느냐 말이야. 4.3은 선거 이전이거든. 5월 10일 선거 이전에, 한달 이상 남았거든, 선거 37일전에 그런 거거든. 선거 한 후에도 8월 15일에 정부 수립을 선포했거든.

그러니 그 전에 한 것은 전부 미국의 용병이지. 경찰이고 군대고 대한민국 군대고 경찰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거지. 이것을 분명히 해야 한단 말야. 미 군정 하에서 급료를 받아 가지고 용병 노릇을 한 사람들이 아니냐. 그런데 오늘날 그 사람들이 `4.3때 죽창을 맞아서 죽었다, 돌에 맞아 죽었다, 칼에 맞아 죽었다` 하는 사람들은 여기서 4.3진압이라고 하는 의미가 사그라든거야, 있을 수 없지. 그래 그 사람들은 애국자로 등용이 되고, 죽은 사람은 `빨갱이`라고 해 가지고 내쳐버리고. 용병한테 죽은 사람은 헐값으로 이름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미국놈 급료 받아 가지고 사람 죽인 놈한테는 다시 급료를 주고, 이게 말이 돼?

8월 15일 이전까지의 살인사건은 용병이 한 거다. 이것을 알아야 해. 그래서 이렇게 얘기하니 그곳에서는 `알고는 있지만 사실은 말하기가 참 딱합니다` 라고 하더라구. 그때 죽은 군경들 가족들이 반대해 가지고 한때 실갱이가 일어났거든. 우리가 지금 말로 할 수 있는 것은 한 8만 정도 돼. 3만여 명이라고 얘기하는 모양인데 실제 얘기하면 8만이 정확한 숫자야. 25만의 3분의 1이 죽었어. 저기 한림면 명월리 같은 곳에 가보면 집터가 있는데 집터에 돌담으로 선만 그어져 있어. 참 봄에 가보면 봄풀은 나고...(잠시 회상을 하며 말을 잇지 못하고) 그게 전부 불살라 없어졌거든. 그리고 그 가족들이 다 불타 죽었는데 누가 신청을 해, 신청한 사람이 없거든. 그러니 4.3 희생자라고, 양민이라고 돈 받을 수가 있어? 신청할 사람이 없는데.

□ 6.15공동선언이 발표됐는데 그 의미는?

■ 그 의미는 그대로지.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했다. 두 번째는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남쪽의 연합제안과 북쪽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통일을 이 방향으로 지향시켜 나가겠다고 하였다. 이 두 가지만 그대로만 하면 아무 일이 없어. 넷째가 남과 북은 경제 협력을 통하여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 문화, 체육, 보건, 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의 이해를 증진시키기로 하였다. 이것 세 가지만 그대로 하면 돼. 셋째는 비전향 장기수 문제와 흩어진 가족 관계니까, 내가 그걸 바라는 것은 정세현 장관이 비전향 장기수가 없다고 그런 소리를 했는데... (정부에) 항의서 올려야지. 알고는 있는데 물론 정세현은 자기 입장이 있겠지만 그렇게 얘기하는 게 아니야.

□ 6.15공동선언은 잘 이행되고 있다고 보는지.

■ 어렵긴 어렵지만... 노무현이 외교가 좀 서투른 것 같애. 그 난관을 어떻게 잘 뚫고 나갈 수 있는 방법도 있기도 한데. 노무현 그 자신은 내가 보기엔 통일 일꾼이야. 그 사람은 통일을 반대하는 사람은 아니야. 통일을 하려고 하는데 자기 주변에 모인 사람들이 너무나 적어, 그 인원수로는 도저히 그것을 뚫고 나갈 수가 없단 말이야. 그러니 이번 4월 15일 선거 때는 몽땅 신당 찍어줘야 돼, 그래야 노무현이 살아나지.

□ 제주도에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어떤지요?

■ 제주 분위기는 난 모르겠는데, 노무현 개인에 대한 평은 좋아.

□ 일부에서는 노 대통령의 정책에 `민족`이라는 개념이 없다는 비판을 하기도 하는데.

■ 동북아를 말하는 것은, 노무현으로서는 지금 우리나라 문제를 바로 거론할 수 없는 입장이야. 미국이라는 강대국이 제네바 합의를 해놓고도 바로 묵살해 버리고, 그 정부는 어떤 정부인지 몰라도 대통령이 바뀌면 전 대통령이 약속한 것도 그냥 없애 버린다, 이런 식으로 하니 그 사람을 어떻게 믿어. 그 안되지. 그러니 우리나라 문제를 동북아 전체의 문제로 보면서 그 일부를 보고 해결해 나가도록 하는 외교적인 태도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어.

또 지금 이라크 파병 문제도 (북핵) 6자 회담, 노무현 개인의 생각인지, 아니면 정부의 틀에서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비서관들이 의견을 종합한 것인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이 사람들이 6자 회담을 성공시키려고 하는 목적을 두고 이라크 파병하고 핵문제를 교환한 것 같애.

그러나 그게 하나 잘못된 것은 이북의 입장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아리송한 문제가 대두되지 않느냐? 이북은 불가침조약 아니면 절대 이것을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거든. (미국의) 이라크 전쟁도 유엔이 반대해 가지고 세계 모든 나라가 반대한 전쟁을 침략한 것이니, 그렇게 하는 나라를 어떻게 믿어. 지금 신문에는 부시가 `다자틀 내에서 안전보장`을 해준다고 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믿어. 우리가 불가침 조약이 아니면 안된다고 하는 확고한 것을 노 대통령이 알고 있다면 그런 결정을 할 수가 없는 거야. 반대를 해야돼. 북이 주장하고 있는 것을 잘 이해를 못하고 있는 거야. 불가침조약이 아니면 우리는 통일을 할 수가 없는 거야. 6.15선언과 불가침조약을 결부시키지 않으면 안된다고.

`개성공단, 경의선 등 연결은 불가침조약의 일환`

이북이 개성공단을 개방한다는 것은 이것도 불가침조약의 일환이야. 개성공단이 이렇게 개방했는데 미국이 때릴 수 없다는 거야. 또 신의주하고 연결하는 경의선, 원산하고 연결되는 경원선 등도 다 그런 맥락으로 봐야 해. 경제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것은 천만의 말씀이야. 저기 굶어죽은 사람이 몇 십만이나 몇 만이 나온다고 하면 그 정권은 벌써 쓰러지는 거야. 생각해 봐요. 10만이 굶주리는 사람이 있고 허덕이고 죽어가고 있는데 그 정권이 서겠어요? 그건 절대 아니예요. 미국이 조작한 것이지. 탈북자들이 1,2백명 와 봐야 소용없어요. 여기에서 올라가는 사람도 많아요. 천만의 말씀이야. 2000년 전까지는 올라간 사람이 더 많았어요. 여기서는 발표할 수 없으니까 발표를 못 한거라.

□ 황장엽 전 비서가 방미했는데 그 자체로 우려를 하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 그 사람 얘기는 하지도 말어. 황장엽이 하나 가지고는 안돼요. 황장엽이 그 자체가 아리송한 인간이기 때문에. 경제 부서에서 일한 김덕홍이라는 사람과 같이 왔지. 자기가 (권력을)남용해 가지고 국가 재산을 먹었기 때문에 그런 놈은 모가지가 아니고 사형이야. 중국에서도 그런 건 사형하고 있잖아.

그런데 김덕홍이가 빠져 나올 수 있는 구멍은, 그 자리에 자기를 추천한 사람이 황장엽이야, 그 추천한 사람도 걸리는 거야. 당적으로 뭘 먹으면, 엄연히 미뤄질 수도 없고,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조건이거든 그래서 둘이 망명한 거야. 이러쿵저러쿵 말하지만 자기네는 다 먹어놓고 국가적으로 문제를 일으켜 가지고 온 사람들이 주체사상이 어떻고 하는 말을 하는데... 천만의 말씀이야.

□ 북이 외무성 발표를 통해 미국의 `다자틀내 안전보장`을 고려할 용의가 있다고 했는데.

■ 그건 내 생각이지만, 불가침조약 체결하기 전에는 절대 헤어나지 못해. 우리는 그런 신념을 가지고 있어. 일본의 군사전문가 김명철이도 (그렇게 말하고 있잖아). (김명철은) 우도 사람으로 고향사람인데, 그 사람이 44년에 일본에서 태어났어. 그 어머니가 해녀야. 명철이는 일본에서 나서 공부해서... 대단한 사람이야. 명철이 이야기가 절대 허언이 아니야.

4대 군사노선이 뭐야, 전인민의 무장화지. 김 주석이 6.25를 치러보고 느낀 것이 뭐냐면 제국주의는 그냥 혁명으로는 안된다. 제국주의를 상대해서 존재할 수 있는 길은 군을 양성해야 된다. 소련은 그것을 못했기에 그렇게 된 거야. 4대 군사노선이 전 인민의 무장화, 전 군의 간부화, 전 국토 요새화, 전군의 과학화가 아닌가. 4대 군사노선이 김정일 시대에 와서는 선군정치야. 군대가 완전히 나라를 지킬 수 있는 사상으로 무장하지 않는 한 우리는 사회주의를 고수할 수 없다는 김정일 위원장의 생각이라고.

지금 그런 명시 속에서 안목을 내다보고 미국이라는 강대국을 상대로 해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그 길 밖에 없는 거야. 달리 생각할 방법이 없어. 그래서 영변에 5메가와트짜리 흑연 원자로를 건설한 것도, 말만 흑연 원자로지 그게 무엇을 만들어서 무엇을 저장했는지 우린 알 수 없고, 그것만은 군 비밀이니까 할 수가 없는 거야. 그리고 지난번 일본 열도를 나와서 하와이까지 떨어뜨린 미사일이 있잖아. 일본도 미국도 모르고, 작년부터 말썽이 되고 했는데. 지금 원자 무기가 백 개만 있으면 MD(미사일방어) 아무리 해도 날아가는 것 어떻게 명중하겠어. 백 개만 있으면 미국 본토를 전부 전멸시킬 수 있어. 미국이 아무리 강대국이라고 해도 견디질 못할 것이야. 부시가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 주저주저하고 있는 것이야.

이라크가 뭘 잘못 했길래 다 때려 부셔버리지? 남북경협, 6.15선언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 `우리는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만일 미국이 쳐들어오면 미국이 쳐들어온 댓가를 우리가 지원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는 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민족의 생명.재산을 애껴서 우리는 우리대로 평화적으로 해결한다` 하는 것이다. 경의선.경원선 철도,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 이게 다 이유 없는 게 아니야. 우리가 다 평화통일을 하기 위한 하나의 발판인 거야. 이걸 알아야 해. 누가 뭐라고 해도 이것은 확실하게 알고 있다.

□ 이번에 제주에서 민족평화축전이 개최되는 데 북측 대표단이 축소되기도 했다. 이번 축전이 갖는 의미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제주민족축전에서 아리랑 응원단과 함께 단일기를 흔들며 응원하고 있는 고성화 선생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 (수구세력들이) `4.3의 성지`고, (굳이) 반대할 의사도 없을 거고. 일부 대구 유니버시아드 대회 때처럼 일부 분자들의 일이 발생할 지도 모르지만. 이번에(12차 장관급회담) 정세현 장관이 가서 보수 진영을 해산시키라는 대목을 기술적으로 넘길 수도 있었는데 그것을 유야무야로 해서 못하게 하니까 이번에 (북측대표단) 2백명은 못 오는 것이지.

□ 이번 축전이 어떤 의미로는 4.3항쟁과 연결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 4.3항쟁과 연결되기보다는 4.3연구소, 또는 일반 관광객, 일본서 온 분들에게도 얘기를 했는데, 제주도를 그냥 보지말고 `4.3의 성지`, `4.3은 왜 일어났나`, `4.3을 왜 4.3이라고 하는지`에 대해 얘기를 많이 했어. 그래서 일본에서 온 분들도 4.3의 역사에 대해 잘 알아. 그러면 4.3은 무엇이냐? 통일을 하기 위한 4.3이다, 그러면 `통일의 성지`가 아니냐 말야. 우리나라의 38선이 없어지고 통일을 위한 성지로 해석해야 되겠지. 이에 대해 많이 알고 있고.

(북측이) 전국적으로 볼 때 대한민국에서 개최하는 국제대회에는 다 왔지. 부산 아시안 게임과 대구 유니버시아드 대회는 우리 대한민국에서 행해졌지만 그것은 국제대회이기 때문에 국제대회에 참가할 수 있고. 이번의 축전은 대한민국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4.3의 성지에서 일어났다는데 그 의의가 깊은 것이고, 그에 대한 생각도 달리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 말씀을 많이 해주셨는데 앞의 역사부분에서 구체적인 얘기를 해주시지 않으셔서... 언제 다 풀어 주실건가요?

■ 이 비망록이 완성되면은 다 될 것이여. 금년은 좀 어려울 것 같고 명년이면 인쇄가 다 될 거여.

(고성화 선생은 지난 2001년 자서전 격인 『나의 비망록-애국의 길(한울사)』을 출간한 바 있으며, 내년에는 이를 좀더 보완해 새로운 `비망록`을 출간할 계획이라고 한다.)

□ 박헌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 나로서는 말하기 곤란한데, 그 사람이 걸어온 길이라고 하는 것이 나쁜 일을 걸어온 건 아니었어. 최후에 가서 좀 이상한 생각을 가진 것 같애. 이것은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당을 운영하다 보니까 이승만대 박헌영이라는 것이 나왔어. 그런데 분단이 확실한 후에는 김일성 대 박헌영 대 이승만이라고 나왔거든. 그러니까 박헌영이 지금까지 살아온 그 길이 자기는 옳다고 생각해서 그 길을 걸었는데 최후에 가서 결국 자기만이 혁명을 일으켜도 소련의 레닌처럼 되야 되는데 되지 못했다는 것이지.

`박헌영은 미군정 프락치였다`

그러면 이승만이를 떨어뜨리는 길은 무엇이냐, `하지`하고의 타협이었어. 그 다음은 김일성 주석을 꺾어뜨리는 일이었고. 다시 말하면 헤게모니의 쟁탈전이야. 이건 절대 공산주의로서는 있어서는 안될 이런 과오를 범한 거야. 박헌영이가. 그래서 거기에 모인 이강국을 비롯해 예술분야에 있는 사람들, 당 분야에 있는 사람들 다 그렇게 되었어. 그러나 최후까지 여기에 남은 김삼룡과 이주하는 그런 건 없었고, 그들은 끝끝내 남조선에서 조국통일을 힘쓰다가 돌아가신 분들이니까. 그분들에게 다소 과오가 있다하더라도 확실하지 못한 것 가지고 이러니 저러니 논할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박헌영이는 다 드러난 거야. 왜 그러냐면 신의주에서 일어난 제 1차 공산당 사건의 역사를 보면 3년 동안 자기 똥을 먹고살았다는 말이 있거든.

`형무소에서 밥 주는 것을 먹지 않고 자기 똥을 먹어 가지고 살았다, 그걸 간수 앞에서 씹어 먹었다`. 똥이니까 밥을 소화시켜서 한 것이니까 그게 그거니까 소화가 잘 될런지는 모르지...(웃음) 그래서 정신 감정을 한 결과 `사람이 어떻게 똥을 먹을 수가 있느냐?`, `먹었다`고 하니까 정신과 의사도 `정신 이상이다`고 (결론을 내린거야). 일본 경찰이, 일본정부가 정신병자를 가둬야 하는 것은 필요 없는 짓이거든. 콩 한 알이라도 줄 필요가 없어. 그래 석방을 시켰어.

그런데 이것이 3년간 계속됐다 하는 말을 남겼거든. 과연 인간으로서 똥을 3년간 먹을 수 있느냐 이거지, 벌써 이것부터가 해괴한 것이고. 박헌영 추종자들은 그걸 아주 대단히 옳게 주장을 했어. 광신자들이여 그 사람들은. 사람이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아. 소위 인분을 어떻게 먹느냐 하는 말이야. 그 사람이 소련에 가서 교육도 받고, 지하에서 운동도 한 사람인데, 검속된 후에 똥을 3년이나 먹었다, 믿어지지도 않는 얘기지만, 의사도 황당무계한 진찰을 했고...

또 하나는 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인민항쟁이 일어난 후에 그때 박정희 바로 위의 형인 박상희라고 있었어. 그 사람이 경북 도당 간부였거든. 그때 10월 인민항쟁을 지도한 분이었어. 그때 학살당했거든. 학살당하기 전에는 박헌영이의 프락치로 있었지만. 그 인민항쟁 후에 미군정이 조선공산당을 해체시켜버린 거야. 해체시켜버리니까 3당을 합당해 가지고 남로당을 조직했거든. 연안의 신민당, 여운형 선생이 지도하던 인민당, 박헌영이가 쥐고 있던 공산당, 이 3당이 합당해서 `남조선 노동당`이라고 이름을 지었단 말이여. 근데 남조선 노동당을 조직하고 이름짓고 한 후에 하지가 비합법 조직으로서 몰아 세웠단 말이지. 그래서 46년은 넘겼어.

그 전에 한 가지 얘기할 게 46년 `조선 공산당 정판사 사건`이라고 위조지폐사건이 있었지. 지금 그건 아무도 말하는 사람이 없어요.

□ 구체적으로 얘기해주시죠.

■ `정판사`라고 하는 것이 뭔가 하니 인쇄소야, 조선 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를 찍어내는 인쇄소야. 미 군정에서 기술자를 하나 보내 가지고 위조지폐를 만들어라, 그러니까 써 보지도 않은 `위조지폐사건` 가지고 그 사람이 가서 위조지폐를 만들었다는 말 한마디로 결국 간부 여덟 명이 체포됐거든.

박낙종, 이관술 선생 등을 비롯해 여덟 명이 46년 3월에 재판받아 사형을 받았어요. 그 사건을 지금 아무도 들먹이는 사람이 없어. 오직 나만이 알아 지금, 참말이여. 이를 들먹인 사람이 없는데 그 당시 8명의 검사가 누구인고 하니 조재천이야. 지금은 죽어버렸지만 민주당 계열에 있던 사람. 그래서 이 8명이 박헌영이와 연관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지금 추상적으로 생각해봐도 연관이 있다는 말이지. 이 사람들은 일제시대에 참말로 용감하게 싸운 사람들이여. 전향도 하지 않고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용감히 싸운 사람들이여.

박헌영이는 3년 동안 똥 먹었다고 해서 서울 형무소 나온 후에 한 3일 동안 길거리에서 돌아다녔다고 해. 돌아다니다가 광주 벽돌공장으로 숨어 들어가서 벽돌공으로 일하게 되면서, 이관술 선생 누이동생 이순금이 일주일에 한번씩 쇠고기 등을 사 가지고 가서 몸보신을 하도록 해서 해방 후에 박헌영이가 나왔거든. 근데 그 여덟 사람 죽은 사람들이 박헌영이보다 훨씬 지조가 더 분명한 사람들이거든.

지금 생각하면 박헌영이 때문에 죽은 것 같애. 왜냐하면 위조지폐 사건 그게 지폐공을 미 군정에서 들여보냈다고 하지만 지폐를 만들어 본 바도 없고, 그래서 여덟 사람이 지폐를 만들어서 경제를 혼란시키기 위해서 했다고 해서 미군정에서 사형시키라고 해, 결국은 사형시켜 버렸거든.

근데 이 여덟 사람 전부가 아주 훌륭한 공산주의자이거든. 중앙당에서 싹 없애버린거야. 근데 이승엽이가 어떤 놈이냐면, 일제 때 공산당원으로 5년 징역을 받아 가지고 전향을 했던 사람이야. 그놈이 인천 마차조합 이사로 있었어. 그러면 전향해서 마차조합 이사로 있던 놈이 조선공산당 중앙당 조직부장으로 있을 수 있느냐 말이지, 말이 되지 않는 소리여. 그런 전향자를 중앙당 조직부장, 가장 중요한 조직부장 자리에 앉힐 수가 없는 거여. 이때부터 박헌영이 자체가 생각이 다른 거야. 김일성 주석하고 생각이 완전히 다른 거야.

박헌영이가 이북 갈 때 그 당시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은 `명동에 박헌영이가 숨었다`하는 사실을 알고 미군정의 용병들인 경찰이 포위를 해 가지고 있는 그 마당에 가방을 들고 경위복을 입고 나온 사람이 있었다 그러거든. 그때 박헌영이를 잡지 못했어. 그럼 경위복을 입은 그 사람이 바로 박헌영이다, 그래서 나와 가지고 이북으로 갔다, 이렇게 돼 있는데...

그 중간에 내가 부산 시당에서 들은 얘기는 미 군정 출입기자가 탁 들어가서 보니까, 유리창으로 가리워져 있는데 박헌영이와 하지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고 해. 그때가 체포령을 내린 후거든. 근데 어떻게 체포령을 내린 사람하고, 하지가 체포령을 내렸는데 어떻게 대화를 할 수 있느냐 말이여. 그 신문기자한테 물어보니까, `에이, 그거 잘못 본 거다!`, `아니 내가 확실히 봤다!` 그림자만 보이는 유리창이 아니고 아무것도 칠하지 않은 환한 유리창에서 출입 기자가 확실히 봤다는 거야.

그 일이 있은 후에 6.25가 터졌고, 또 고등계 형사로 있던 한 놈이 있었는데, 그놈을 데리고 입북했다고 해. 그놈이 무전도 잘 치고 일본 경찰 출신이거든. 그런데 그때가 6.25때 얘기인데 평양시가 폭격을 당해 가지고 아주 가물어지고 한 그런 시기에 그 집 근처에 살던 사람이 일하는 직장까지 왔다 갔다 하는 그 때마다 이상한 소리가 자꾸 들리거든. 무전치는 소리 `뚜뚜...` 하는 소리가 계속 들리거든. 그걸 며칠동안 듣다가 당에 보고를 한 거야. `이상한 소리가 들립니다`, `어디냐`고 해서 그곳을 알려줬지. 가서 보니까 백형석인가 하는 놈이 무전을 치고 있더라는 거야. 바로 그놈이 박헌영이가 북에 갈 때 데리고간 형사야. 그놈도 재판정에서 사형을 받았지만. 그렇게 해서 관련이 돼서 죽었고. 박헌영이에 대해선 그런 정도면 어떤 인물인가를 알거야.

□ 전향하신 선생님들이 1차 송환된 후 전향에 대한 무효 선언을 하고 2차 송환을 요청하고 있는데요.

■ 1차 송환에는 갈 수가 없는 게, 그때 (6.15공동선언) 3항에 남과 북은 올해 8.15를 즈음하여 흩어진 가족, 친척 상봉단을 교환하고 비전향장기수 문제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나가자고 한 대목이 있는데 그것도 (남측 정부는) 수행을 안하고 있어. 흩어진 가족, 친척 상봉단을 교환하고 비전향 장기수 문제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나가자고 했는데, 비전향 장기수의 다른 가족들, 흩어진 가족을 만나는 것과 마찬가지고 해줘야 하는데 왜 이것을 안하냐 말이야.

이번(12차 장관급회담)에 정세현 장관이 `비전향 장기수는 이남에는 없다`는 식으로 얘기를 했어. 결국 그렇게 되면 흩어진 가족이나 친척을 만날 수 없잖아. 3항을 올바르게 실천하려고 한다면 송환해야지.

□ 정부에서는 비전향 장기수가 없다는 얘기는 전향서를 다 썼다는 얘기인데.

■ 내가 언제 전향서를 써서 냈는가. 지금 남쪽에 남은 비전향장기수가 17명이야. 전향한 분들이 2,30명이 되거든. 그 분들도 다 북쪽에 가족들이 있는 분들이거든. 문상봉, 김영식, 정순택 등 지금 낙성대 만남의 집에 있는 그 세 분이 다 전향자야. 그분들이 성명을 발표하고 `무효선언`을 했거든. 정순택 선생은 아들이 저쪽(북쪽)에서 중요한 직책에서 활동하고 있거든. 귀도 먹고 손도 떨리고 해서... `보안관찰자의 꿈`인가를 책으로 냈을 거야.
 
실제 비합법 체계 속에서 목숨을 걸고 활동한 사람들이 진짜 당원이니, 저쪽에서 있던 사람들 여기 내려와서는 잡히고, 잡히고 했지. 여기 내려와서 당 사업을 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어. 그 이전에는 다 합법 속에서 배우고 일한 사람들이야. 그러다가 훈련받아 가지고 적진으로 보내진 거지. 적진으로 보내자마자 그냥 보낸 끄트머리에 다 체포돼서 들어왔거든. 내가 보기엔 이남에서 비합법 체계에서 자기 생명을 걸고 투쟁한 이 사람들이야말로 참말로 안타까운 사람들이지. 이 사람들이야말로 정말로 조국을 사랑하고 조국의 통일을 염원한 사람들이란 말이야.

"나는 아직도 통일과업을 수행 중"

□ 앞서 얘기하기도 했는데. 이번 장관급 회담에서 북에서 비전향 장기수 송환 문제 등을 정식으로 요구했는데 이에 대해선 어떻게 보시는지.

■ 보낼 수 있는 사람은 보내야지. 나의 경우는 제일 먼저 신청은 했는데 천주교 통일후원회 노진민 씨가 2001년 전향한 분들도 모시고 간다고 가시고 싶다는 사람들은 전부 신청을 하라고 했어. 나는 나이가 가장 많으니 먼저 쓰라고 해서 먼저 신청을 했고. 통일전선에서 꼭 해야 할 일들, 통일이 아니면 생명을 걸어놓고라도 싸워야 한다는 것을 인식한 사람은 저쪽에 갈 필요가 없어요. 당적으로 소환된다면 문제는 다르지만은. 당 소환에는 절대 응할 수 있는 의무와 책임을 가질 수 있지만은, 그냥 비전향이다 해서 가는 것은 내가 가는 장소가 `과연 통일과업을 수행할 수 있는 곳인가 아닌가, 내가 가장 필요로 한 지역이 어디이냐` 해서 내가 이곳을 선택한 것이야. 내 고향이기 때문에.

□ 그럼 이번에도 안 가시나요?

■ 글쎄. 여러 가지로 생각하고 여기서도 지금 가야된다고 자꾸 얘기를 하고 (있고). 여기 혼자 있어 가지고 뭐 (하겠냐고). 그래서 내가 이렇게 말했지, `니들 지금 내가 여기서 죽으면 뒷치닥거리 하기 싫어서 그런 거지`라고... (웃음)

□ 아직도 통일과업을 수행중이신가요?

▶고성화 선생은 비전향 장기수 1차송환 시 북행을 선택하지 않았다.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 그렇지. 여긴 내가 나와 가지고 전국연합은 내가 나온 후 93년도에 환영행사를 하고 머리 싸움을 하다가 해산됐는데, 그 이후에 정세를 판단해보니 `과연 내가 지금 안주할 곳이 어디냐, 내가 살아 남은 동안 있어야 할 곳이 어디냐?`를. 그래서 여기에 남은 거야. 나는 신청은 했지만 오라고 해도 가지 않아요.

□ 이번 북에서 공식적으로 제기한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에서 소환한 것으로 봐야 하지 않나요.

■ 소환한다는 것도 포함돼 있겠지만, 제 1차 때는 소환은 아닌 것 같아.

□ 그 이유는?

■ 저쪽에서 온 사람들이 많고, 고향에 돌아간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또 오랫동안 감옥 속에서 고생했다고 하는 동지들에 대한 배려, 당으로서의 배려로 (볼 수 있지). 또 그렇게 보면 소환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번 제기가 소환으로 볼 수도 있다, 그렇게도 볼 수도 있지만 내가 머무르는 곳에서 한 사람이라도 깨우쳐서는 통일 사업에 전진할 수 있도록 하는 고장이 어디냐, 내가 진정 통일의 일꾼으로서 생각을 가지고 있고, 활동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곳에 있어야 하지.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있어야 되지 않느냐 말야.

물론 제주도도 활발하게 많은 민주단체가 조직됐어. 이번에 보니 12,3개로 생각했는데 28개 단체가 중심이 돼서 이번 대회(제주 민족통일평화체육문화축전)를 조직했다고 하는데. 지금 영향 있는 것은 민주단체로서 반미여성회, 통일 청년회, 주민연대 등 뿐이야.
 
□ 이번에 제주 통일연대도 새롭게 발족을 했던데.

■ 그전부터도 생각을 했지만 이번 대회를 계기로 만들었는데, 그 사람이 그 사람일 것이야. 얼마나 그 사람들이 의식화 돼 있느냐가 문제지.

□ 선생님이 보시기에는 어느 정도의 수준이라고 보시는지.

■ 통일 청년회를 예를 들어보면 (물론 아직까지는) 과정인데 `인생을 마감할 장소다, 일이다` 하는 사람은 아직까지는 없는 것 같아. 전부 다 제주대 출신들인데 운동하다 보면 결혼하고, 또 가정에 들어앉아 버리고, 그러면서 여기 나오는 횟수도 없고 해서 문제가 되고 있어요. 지난 번 어디 가서 여성들 앞에서 얘기한 것이 있는데, `전부 여기서 할려고 생각하지 말고 결혼하는 것도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 사람은 나서라! 부인이 나서든 남편이 나서든 한 사람은 나서라, 남편이 나서야 하면 부인이 일해서 뒷바라지라도 해라, 그렇지 않으면 통일 사업 못한다`라고. 그것이 옳은 일이라면 그렇게라도 일해야 하지 않겠냐 말야. 다 수긍은 하는데 과연 그 중에서 몇 사람이 그 얘기를 듣고 그렇게 할지는 장담하기가 어려워.

□ 젊은 사람들에게 충고 한 말씀 해주신다면?

■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우리나라는 결국 역사적으로도 하나고, 우리는 과거 신라, 백제, 고구려 시대를 상기해보면 그 이후에 통일된 하나의 국가로서 면면히 흘러나온 것이다. 일본은 3백년 이상 간 제도가 없었어. 막부도 3백년 이상 가지도 않았고, 또 과거 역사를 보면 1,2백 밖에 되지 않고... 우리는 전부 통일해서 5백 이상, 1천년이라는 역사를 가지고 있고.

우리민족은 하나라는 뜻에서 면면히 흘러온 역사 속에 살아온 민족, 결국 형제나 다름없는 것 아니예요. 그러면 우리 형제끼리 헤어져서 살수는 없잖아. 한 집안을 이루는데도 가정이 있고, 형제가 필요하고. 그러한 관계가 곧 민족이고, 하나의 국가인데, 불행하게도 해방 후에 우리 민족이 본연의 뜻이 아닌 미국에 의해서 분단이 돼서 이렇게 고생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내 말을 듣기 전에 여러분의 생각이 `우리 민족이 헤어져서 살아야 되냐, 아니면 같이 합쳐서 살아야 되느냐`를 가지고 어느 한쪽이 정당한 쪽으로 의견을 모아야 될 것 아니야.

`민족은 헤어질 수 없다, 또 우리 형제는 헤어질 수 없다, 우리 핏줄은 헤어질 수 없다`로 그렇게 하나로 모아진다면, 그 모아진 생각을 하나로 통일해서 자기가 직접 전념해 나가지 못한다 해도 그 생각만이라도 가져야 한다는 것이여. 어디 가서 저쪽말 하고, 이쪽에 와서 이쪽말 하지말고. 그게 옳은 생각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하나의 진리가 아니예요? 그 진리를 받들고 살아가야지. 그러지 않으면 오합지졸이나 다름없는 그런 것이 되니까.

그래서 `통일은 우리가 살길이다`는 것이 하나로 모아질 때 우리는 통일이 될 거고, 틀림없이 시기는 다소 되겠지(걸리겠지)만은 우리 역사는 앞으로 더욱 빛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여러분이 통일을 해야되냐, 아니냐는 여러분 자신이 알아야 할 것이고, 같은 민족이고 같은 역사를 가진 민족끼리 헤어져서 살 수는 없는 것 아니여, 그러면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진리만은 가지고 있어야 돼요.

□ 좋은 말씀 많이 들었는데 마지막으로 소원이 있으시다면.

■ 앞서도 얘기했듯, 우리 민족이 헤어져서는 살 수 없고 통일을 제 1의 명제로 삼아서 앞으로의 일선에서 일할 수 있는 분들은 젊은 분들이고, 오늘날 사상적으로나 배운 지식으로라도 판단을 해서 그 전선에 적극 나서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 나의 뜻이고. 또 최고학부를 나온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것은 참 온당치 못한 일이라고 봐. `이것은 절대절명의 명제다, 우리 민족에 있어서는 통일이야말로 우리민족이 살길이고 절대절명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일선에 나서지 못하는 경우라도 배신은 하지 말아야 한다, 절대 배신을 해서는 안 된다`라는 그 일념에서 살면 살았지, 전선에 나서지는 못하더라도 배신은 해선 안 된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어.

주요 약력

1916. 8. 20 제주도 우도에서 출생
1934. 9. 10. 일본낭화상업 5년 중퇴
1935. 3.     우도 사립보통학교 교원
1937. 3.     교원 사업
1938. 1.     함북자동차주식회사 경리사원 입사
1944. 10.    조선마곡창고 주식회사 정사원
1945. 10.    조선공산당 우도 책임자
1947. 3.     미 군정 탄압으로 부산으로 탈출
1947. 4.     남조선노동당 부산시당에서 활동
1948.        영도구당 오르그에서 구당 책임비서
1948. 1.     남로당 부산시 지구당 책임비서
1949. 6.     피검, 2년형 선고받음
1951. 4.     출소
1955. 4.     일본으로 감
1959. 10.    교포 귀환 시작으로 도일 중단
1968. 10.    당으로부터 소환
1973. 3. 16.  피검
1993. 3.     형집행정지로 출소
현재        제주도에서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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