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63년, 제주 우도로 고성화 선생을 찾다

▲ 8월 5일 고성화 선생과의 인터뷰를 위해 제주도 우도를 찾았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광복 63주년, 정부수립 60년을 맞아 정부에서 요란스럽게 ‘건국60년’ 기념행사를 벌이고 있지만 과연 우리의 굴곡진 역사를 ‘건국60년’이라는 장밋빛 축제로 맞이할 수 있을까?

역사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총체라고 한다면, 그 시대를 가장 극적으로 살아온 한 개인의 삶을 통해 지나온 60여년을 되짚어 보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제주도 우도. 소가 누워있는 형상을 따 우도(牛島)라 이름 붙인 아름다운 이 섬을 기자가 찾은 지난 5일은 휴가철이 한창이라 성산포와 우도를 오가는 배편이 수시로 운항되고 있었다.

우도에서 나고 자라 이곳에서 교편을 잡고 45년 해방 후에는 조선공산당 우도 책임비서를 맡았던, 우도와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고성화(93) 선생. 남측에 생존한 최고령 비전향장기수이자 남로당 부산시당 책임비서라는 비중있는 역할을 수행했던 역사적 인물이다.

▲ 유난히 무더운 한 낮, 해변가 인근 정자에서 인터뷰를 이어갔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평소 제주시에 거처를 정하고 시민사회단체들과 대학생들과의 만남을 즐겨온 선생이 “신장이 좋지 않아” 우도 아들 집에 2주간을 약정하고 요양차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종린 선생이 건강이 위험하다는 것 같은데, (행사장에)나오지를 않아.”
다른 이들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시작된 인터뷰는 지난해 연말 <통일뉴스> 방북취재시 좌담을 가졌던 송환 비전향장기수 이야기로 옮겨가자 “최하종이는 자기 숙부가 뭐인고 하니 육군 소장인가 중장인가 됐을 거다 그랬고. 최선묵이는 강화돈데 농사짓는 형을 도와서 뭐를 할려고 했는데 조카가 아무래도 삼촌이 좀 이상하다 생각해서 밀고해버린 것이다. 신인영이는 갈 때 몸이 약했다. 암이 있었고...” 한명 한명의 동지들에 대한 기억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하나도 지워지지 않은 듯 생생했다.

어려서부터 사회운동에 관심을 가졌던 선생은 1932년 일본으로 건너가 ‘반제동맹’ 조직원으로 공식 조직활동을 개시한 때로부터 감옥에서의 20여년을 포함해 무려 77년을 오로지 ‘통일의 한길’을 온전히 걸어왔다.

제주 4.3항쟁은 단정수립 과정에서의 필연

▲ 제주 4.3평화공원 전경.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제주 4.3평화공원에 신축된 제주 4.3평화기념관 전시실에는 제주지역의 48년 5.10단독선거 보이콧에 관한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당시 제주도 출신 사회운동가들이 대체로 그러하듯 선생의 인생에도 중요한 계기가 된 제주 4.3항쟁은 우리 역사에서 남쪽 만의 단독정부 수립과 긴밀하게 얽혀있다.

선생은 제주 4.3사건의 도화선이 된 47년 3.1절 28주년 기념식 직후 발생한 관덕정 앞 총기난사사건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관덕정 바로 그 앞에서 4.3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기마경관이 오다가 어린애를 치어가지고 그냥 관덕정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거든. 그때 여기 28주년 기념행사에 참가해서 있다가 놀던 사람들이 그걸 항의했는데, 그때 여섯 사람이 죽었다. 아무 이유도 없이 총을 쏴서. 지금은 아무도 잘 모른다. 그 당시 사건을..,”

이 ‘관덕정 사건’을 계기로 ‘마치 짜여진 각본처럼’ 미군정 경무국장 조병옥의 지시로 서북청년단이 제주도에 입도했고, 본격적인 진보진영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고성화 선생의 일대기를 기록한 『통일의 한길에서』(창미디어, 2005)에는 제주 4.3항쟁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 △첫째, 리 단위의 육지에서는 이미 사라져 버린 인민위원회가 자주적으로 도민의 손에 의하여 장악하고 있어 미군정의 직무 수행을 방해하고 있었고 △둘째, 입법위원으로 당선된 제주도 대표 두 사람은 애국적 인사로서 상경하여 육지에서 당선된 자들을 친일분자라고 매도 폭로하고 사퇴하였다 △셋째, 제주도의 모든 행정기관에는 반일, 반미 세력이 다수 포함되어 미군정의 시책을 수행하는데 방해가 된다는 점이 제시돼 있다

선생은 “여기는 이승만이 집권하기 위한 선거가 안 됐다”고 잘라 말했다. 당시 제주는 미군정의 통치와 이승만 세력의 단정 수립을 위한 5.10선거 절차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제주 4.3항쟁은 결국 미군정이 이승만 세력을 내세워 남측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이 선생의 주장이다.

선생은 최근 국가에서 4.3항쟁을 재평가하고 4.3평화공원을 건립한데 대해 “평화라고 하는 이름을 붙여서 공원을 만들기는 했는데 거기 통일이라는 것이 빠졌다”며 “4.3은 완전히 통일운동이다”고 지적했다.

부산시당 책임비서로 활동, “지하선거는 무리”

▲ 1934년, 일본 낭화상업학교 졸업을 5개월 남겨두고 도피생활에 들어가야만 했던 선생에게 최근 낭화상업학교 교장이 직접 찾아와 졸업 기념품으로 시계를 전달해줬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선생은 관덕정 사건 직후인 47년 4월 조직적 결정에 따라 제주도를 떠나 부산에서 본격적인 ‘당활동’을 시작했고, 부산시당 4지구당 오르그, 선전책을 거쳐 4지구당 책임비서에 이어 1지구당 책임비서를 역임한 뒤 48년 12월 부산시당 책임비서로 활동하다 49년 6월 25일 피검돼 한국전쟁 중 출소하게 된다.

어떻게 그토록 짧은 기간내에 ‘초고속 승진’을 거듭해 부산시당 책임비서가 될 수 있었을까? “그땐 사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일을 했다. 내 자신도 놀라울 정도로. 이것 아니면 죽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했거든...”

그러나 선생은 “그런데 차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야”라고 의외의 얘기를 꺼냈다. 선생이 지적한 것은 부산시당 책임비서 시절 49년 9월 20일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남쪽에서 지하선거(연판장 선거)를 실시하라는 당의 지시를 받은 것이다.

“지금 남조선 상태로는 지하선거를 한다는 게 무리거든.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건 틀림없이 중앙당의 뭣인가 잘못된 사정에 의해서 된 것이다. 남로당 계열에서... 만일 그때 중앙당이 그러한 잡음이 없이 조직을 잘 활용했으면 이전에 통일됐을 것이다.”

부산시당 책임비서 당시 체포됐지만 고문을 끝까지 이겨내고 당조직을 자백하지 않아 한국전쟁중 석방된 선생은 일본으로 건너가 활동하다 59년 모친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3년상을 치르기 위해 다시 귀국해 4.19와 5.16이라는 역사적 격동기를 목격하게 된다.

가장 치열한 활동기였던 탓일까. 선생에게 오랜 세월 사회운동의 일선에서 일해오며 만난 동료 중 가장 존경할만한 인물을 꼽아달라는 기자의 요청에 선생은 자신에 앞서 부당시당 책임비서를 맡았던 허정식(본명 정칠성) 선생을 주저없이 떠올렸다.

“허정식 동지가 참으로 잘 싸운 동지다. 검속돼서 물고문하고 뚜드려 패도 한 사람도 불지 않았다. 상대편도 나를 믿고 나도 상대편을 믿고. 전선에 섰을 때 처음 만난 신의가 두터운 동지였다.”

고성화 선생에게 아들을 북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던 허정식 선생은 병으로 눈을 감으면서도 고 선생을 찾았다고 한다. 허 선생의 따님이 출소한 고 선생에게 직접 전한 허 선생 임종 당시의 이야기다.

20년 복역,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동지애”

▲ 아들 집 앞에서 포즈를 취한 고성화 선생. 우측 뒷쪽 신식 건물에 아들 내외와 기거하고 있다. 이 마을 집들은 일년 내내 태극기를 내걸고 있다고.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선생은 1968년 진해에 거주하던 중 ‘당에 소환’돼 ‘임무’를 수행하던 중 일명 ‘3.3사건’으로 알려진 ‘우도 간첩사건’의 여파로 73년 3월 16일 피검돼 93년 3월 6일 출소 때까지 장장 20년을 복역하게 된다.

“내 이종동생이 김성환이라고 지금 이북에 가있다. 이북에 가 있다가 여기와서 선사품을 뭘가지고 왔는지 모르겠다. 자기 부인한테 선사하고 돌아가는 길에, 그날 마침 해안통에서 톳을 캐가지고 건조품이 도적맞을까 봐서 동리 청년들이 교대로 감시하고 있었는데, 톳 감시하기 위해서 거기 선 청년을 자기를 잡으려고 하는가 해가지고 총으로 쏴 죽여버리고 그냥 북으로 가버렸다.

그런데 그 사건이 터져가지고는 부인을 데려다가 취조를 하니까 나 때문에 자기 집안이 망했다. 결국은 우리 진영에서 일하도록 만든 게 이 사람이다 이렇게 얘기해버리니깐 진해에 살고 있었는데, 나 또한 다른 임무를 가지고 일하고 있는 땐데, 마침 그렇게 말하니까 제주경찰서에서 진해까지 왔다. 연행해 가지고 와서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고 아무리 취조해 봐도 되지 않으니까 석방시킨 것이다. 석방을 어디로 시켰는고 하니 중앙정보부로 시켰단 말이야. 거긴 가서 보니까 물고문에다 타작에다 아이고, 굉장했다.”

결국 무기형을 선고받은 선생은 20년을 감옥에서 보낸 뒤 1993년 70세 이상 고령자들을 대상으로 한 ‘형 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다시 세상에 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20년의 감옥생활과 혹독한 전향강요는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졌지만 ‘죽음의 문턱’에서 동지들의 투쟁으로 목숨을 건진 선생의 경험은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동지애’를 몸으로 확신케하기에 충분했다.

83년 4월 선생은 대전교도소 6사 독거방에서 사흘간 피오줌을 쌌지만 의무과에도 가지 못하고 있다 정신을 잃고 호흡이 멎어 있었고, 이를 강우규 선생이 발견해 동지들의 힘으로 일반 병원으로 후송될 수 있었다. 6사 동지들은 선생의 소식이 올 때까지 전원 저녁식사와 입방를 거부하며 버텼고 밤 12시가 되어서야 선생의 회생소식이 전해져 입방했다.

엄혹했던 군사독재시절 장기수 사동에서 이같은 일은 동지를 위해 자기를 내놓는 희생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선생의 회복 기간에도 김선명 선생 등이 헌신적인 간호를 아끼지 않은 덕에 선생은 건강하게 감옥문을 나설 수 있었다.

선생은 지금도 감옥에서 옥사한 동지들의 이름 하나하나와 사연 하나하나를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고, 이를 자서전에 기록했다. 최석희, 박융서, 최재필, 조용순, 우인명, 유지인, 이용훈, 황필구...

92살에야 법적인 자유인, “삶이 삶이 아니었다”

▲ 선생이 나고 자란 우도의 해변.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그처럼 아끼던 동지들이 2000년 1차 송환 당시 모두 북으로 떠났지만 선생이 떠나지 않고 이곳에 머문 이유가 자못 궁금했다.

“사실은 1차 송환 때 갈려고 했는데 내가 가야 할 일이 없다. 여기서 있으면 다소 찾아오는 손님도 있을 거고, 친구들도 있고 이러니까 오히려 내가 여기 있는 것이 낫지 않겠나. 여러 가지로 생각했다. 그래서 결국은 남게 된 것이다.

그런데 2차 송환을 신청하라고 해가지고, 그래서 2차 송환 땐 가겠다고 해서 신청은 한 것이다. 선생님 아니면 안 된다고 해서 제일 먼저 내가 (2차 송환 신청서를)썼다.”

실제로 선생은 우도에서 제주도로 나와 시민사회단체들과 대학생들을 만났을 뿐만 아니라 서울에서 열리는 집회에서도 간간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선생은 법적으로는 지난해까지도 보안관찰 대상자로 자유의 몸이 아니었다. 2004년 3월 강금실 법무부 장관 때 사면복권되고도 천정배 법무장관한테 진정서를 낸 뒤 지난해 7월 1일에야 보안관찰이 해제됐다. 선생 나이 무려 92세, 선생은 비로소 합법적 시민권을 획득한 것이다.

“나는 법률적으로 보면 사면복권이 됐으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완전히 활동할 수 있는 그런 조건이 돼 있지 않느냐. 그런데 왜 보안관찰법을 해당시켜가지고 사람 옹색하게 만드냐고 진정서를 냈더니만 중앙에서 검사가 내려왔다. 나보고 보자고. 그래 제주 검사국에서 보자고 하길래 나갔다.

거기서 한동안 싸웠다. 당신들 법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인데 사면이 뭐고 복권이 뭐냐고. 여기 무슨 놈의 다른 사상적 관계가 있느냐고. 대통 싸움한 결과 뭣이 내려 왔느냐면 보안관찰법 해제. 그거 이제 증서를 받았다.”

선생은 “사실은 90이 넘었기 때문에 내준 것이다. 내주고 싶어서 한 게 아니고 이 늙은이가 뭘하겠느냐 내줘라 한 거다”며 “이놈들하고는 싸워야 한다. 싸워야 해. 92살에 받은 것이다”고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70넘으니까 감옥에서 내주고 90넘으니까 보안관찰 해제를 내주고”, “일생동안 삶이 삶이 아니었다”는 선생의 한탄이 현대사의 질곡이 한 개인에게 어떤 멍에를 지웠는지 짐작케 한다.

선생에겐 건국 60년이라는 휘황한 구호보다는 일제와 맞서 목숨 걸고 싸우고 연합국의 도움을 얻어 쟁취한 광복 63년이자 통일을 위해 말 그대로 한 생을 헌신한 분단극복 63년이 '현실'일 뿐이다.

“통일선상에서 민주주의 방향으로”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일생을 오랜 감옥생활과 사회운동에 헌신해온 선생은 93년 석방이후 지금까지도 사회운동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묻자 선생은 “우리나라는 어쨌든 단일국가이기 때문에 어떠한 일이 있어도 통일이 돼야 한다”며 “그 통일선상에서 우리가 활동할 수 있는 건 진정한 민주주의 방향으로 활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선생은 특히 “문화면에서 참으로 민주주의를 이해하고 민주주의적인 문화를 건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평생을 통일의 한길을 걸어온 당신의 삶에 비추어 어쩌면 당연한 말이지만 선생의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 역시 오랜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참말로 희한합니다. 이것 저것 다 종합해보면 무엇이 결함이고 무엇을 몰랐다고 하는 것이 다 느껴지는데. 당중앙은 자리다툼이 한창이었고. 그리고 그 자리다툼을 해서 뭘하겠다는지 모르겠어...”,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의 이익을 위한 정권, 이게 곧 민주주의 정권인데, 지금 민주주의를 말하면서 민주주의를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민주주의를 완전히 실천할 수 있으려면 통일을 해야한다. 단일민족이니까.”

지금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면 또 다시 그 일을 할 수 있겠느냐는 기자의 우문에 “해야죠. 평생동안 그 길 밖에 없으니 도리가 없죠”라는 당연한 답이 돌아왔다.

“아주 신물난 세상이다. 신물난 세상”이라면서도 “자기가 걷고 싶은 길에서 나가는 것은 참으로 희열을 느낀다”는 선생의 삶이 부디 역사속에 부질없이 묻히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선생이 출소해 제주에서 활동하며 “보람있는 사업은 그거 하나했다”고 자평한 일은 제주지역 선각자 강창보 선생의 애국열사비를 세운 일이다. 역사를 바로 보고 그 속에서 헌신한 한 사람 한 사람을 온전히 되살려내는 일이 당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첫째가는 숙제임을 선생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요즘도 아침 7시면 어김없이 “머리에서부터 시작해서 발끝까지” 냉수마찰을 한다는 선생은 이미 귀가 어둡고 거동조차 원활치 않았지만 ‘뭍에서 온 손님’이 배편으로 우도를 떠날 때까지 자리를 뜨지 못하고 뙤약볕을 온몸으로 맞으며 묵묵히 전송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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