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규 (동작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시민모임 독립’과 ‘지역사’(지도에 역사를 새기는 사람들)가 선정한 2월의 근현대사적지는 1919년 2월 8일 도쿄에서 벌어진 2·8독립선언의 역사현장 <2·8독립선언지(조선기독교청년회관 터)>(3-chōme-3-12 Nishikanda, Chiyoda City, Tokyo)입니다./ 필자주

 올해는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세계 반방에) 선언”한 3·1운동 105주년이 되는 해이며, 2월 8일은 그 3·1운동의 도화선 역할을 했던 2·8독립선언 105주년 기념일이다. 

1919년 2월 8일, 조선인 도쿄 유학생들의 의지를 모아 일제의 심장부인 도쿄에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한 쾌거로 기록되고 있는 2·8독립선언을 발표한 곳은 도쿄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당시 주소: 東京市 神田區 西小川町 2정목 5번지)이었다. 

2.8독립선언서가 발표된 도쿄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 [사진-필자제공]
2.8독립선언서가 발표된 도쿄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 [사진-필자제공]

2·8독립선언을 추진한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들

2·8독립선언이 발표된 1919년 당시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은 6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당시 최고의 엘리트층이라고 할 수 있는 재일 유학생들은 한국을 강점한 침략국으로 건너가 공부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획득한 신지식과 세계사조에 대한 폭넓은 이해에 기초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들은 조선유학생학우회(학우회), 조선여자유학생친목회,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 조선학회, 동경조선고학생동우회 등을 만들어 상호간의 친목과 권익 신장을 도모함과 아울러 독립운동의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 중 학우회는 이 중 전체 유학생들을 대표하는 중추적인 조직이었다. 1912년 10월 27일 결성된 학우회는 기관지 <학지광>을 발간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2·8독립선언은 재일 유학생의 독립의지를 결집시킨 결과물이었다. 2·8독립선언으로 대한제국기에서 일제강점기 초반기까지의 과정에서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반일감정과 민족의식을 집약해냈던 것이다.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 2·8독립선언의 역사현장

당시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은 단순히 조선인 기독교도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었다. 다양한 조선인 유학생들의 교류공간이자 재일 조선인을 위한 실질적인 영사관 역할마저 수행하는 공간이었다. 2·8독립선언의 장소로 조선기독교청년회관이 선택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도쿄의 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에 나서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1918년 1월 8일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 지침으로 천명한 민족자결주의였다. <학지광>의 편집장으로 있던 최팔용(와세다 대학)이 “윌슨이 민족자결론을 내세운 지금 우리가 조국 광복을 부르짖기에 가장 좋은 기회이니 우리도 이 기회에 일어나자”고 제의하고 나선 것도 1918년 여름이었다. 최팔용은 비밀리에 유학생들의 의사를 타진하면서 동지들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1919년 1월에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조선인 유학생들의 활동력은 배가되었다. 여기에 영자 신문 <재팬 애드버타이저(Japan Advertiser)>가 “미국에 있는 한국인 중 이승만·민찬호·정한경 등 3인이 한민족의 대표로 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파리강화회의에 파견 되었다.”고 보도한 1918년 12월 1일자 기사, <동경조일신문(東京朝日新聞)>가 “미국 샌프란시스코 거류하는 한국동포들이 독립운동자금으로 30만원의 거금을 모금하였다.”고 보도한 12월 15일자 기사 등은 독립을 열망하는 조선인 유학생들을 고무시키기에 충분했다.

2.8독립선언을 주도한 인물들. [사진-독립기념관]
2.8독립선언을 주도한 인물들. [사진-독립기념관]

조선인 유학생들 사이에서 2·8독립선언의 구체적인 실행을 준비하는 계기가 된 모임은 12월 30일에 열린 학우회 주최의 웅변대회였다.

동경 조선기독교청년회회관 강당에서 열린 이날의 웅변대회에서도 서춘·이종근·김상덕·윤창석 등이 민족자결주의 원칙 아래 자주독립을 획득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는데, 이날의 행사는 웅변대회로 끝나지 않았다. 웅변대회 직후 독립운동의 방향에 대한 의견 교환이 활발히 이루어졌고, 최팔용·전영택·서춘·백관수·송계백·최근우·김도연·이종근·김상덕·윤창석 등 10명을 대표위원으로 선발하여 이들에게 독립운동 세부 계획 마련을 일임하기로 한 것이다. 

10명의 대표위원은 이광수와 김철수를 충원하여 논의를 이어갔고, 이를 눈치 챈 일제 경찰에 의해 대표위원을 포함한 주동 학생 12명이 체포되었다가 석방되는 우여곡절도 겪으면서 준비는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은 이광수가 맡았고, 최팔용을 비롯한 11명의 대표들이 자필로 서명한 독립선언서를 영어와 일어로 번역하여 일본정부 요로와 외국 공관 등에도 보내기로 하였다.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학우회 총회를 한다는 명목으로 4백여 명의 학생들이 조선기독교청년회관 강당에 모여 들었다. 이날의 행사는 학우회 회장인 백남규의 개회선언이 있은 직후 최팔용의 긴급동의로 조선독립청년단대회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백관수의 독립선언서 낭독과 김도연의 결의문 낭독으로 매끄럽게 이어지면서 성공리에 진행되었다. 하지만 서춘이 연설하려고 할 즈음 일본 경찰이 무력으로 개입하여 행사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학생대표들은 모조리 검거되고 말았다.

도쿄 유학생의 독립운동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2·8독립선언의 주동 학생들이 구속되자 구속을 면한 유학생들은 다시 2월 12일에 일본 제국의회에 독립 청원을 한 후, 후계 투쟁 위원을 선출하기 위하여 100여 명이 도쿄 히비야(日比谷)공원에 모여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이달을 회장으로 추대한 후 다시 궐기고자 하였다. 이 집회로 이달을 비롯한 13명의 학생이 히비야경찰서에 검거되었다. 2월 24일에는 최재우가 히비야공원에 모여든 학생 150여 명에게 ‘조선청년독립단 민족대회 소집 취지서’를 배부한 후, 이를 낭독하여 항일의 기세를 다시 올렸다. 이날의 궐기는 오후 3시 반경 강제 해산을 당하면서 16명이 연행되었는데, 그 중 김동인과 최재우가 앞서 연행된 변희용·최승만·강종섭·장인환 등과 함께 히비야경찰서에 구속되었다. 

최팔용 등 2·8독립선언 주동자의 공판일에 맞춰 시위를 벌이려는 계획도 추진되었다. 변치덕·한진희·정근모·이재훈 등은 3월 10일과 11일 이틀에 걸쳐 태극기 130매를 만들었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압수당하고 말았다. 3월 16일에는 정태성이 고향으로 독립운동에 관한 선동문을 만들어 우송하려다가 압수당한 일도 있었다.

3·1운동의 도화선 역할을 한 2·8독립선언

2·8독립선언을 준비한 유학생들은 처음부터 자신들의 행동을 계기로 거족적인 민족운동으로 확산될 수 있기를 기대했다. 2·8독립선언을 한창 준비하고 있던 1919년 1월 하순에 송계백과 이광수를 서울과 상하이에 각각 파견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송계백은 보성중학 출신으로 전 보성중학 교장인 최린과는 사제지간이었고, 현상윤과는 보성중학 선후배 사이였다. 거사자금 마련과 국문 인쇄활자 확보 등을 겸하여 송계백을 국내에 몰래 파견한 이유이기도 했다. 송계백은 이들을 통해 송진우·최남선 등과도 만나 유학생들의 계획을 알렸다. 이 과정에서 국내에서도 독립선언 계획이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정노식으로부터는 국문 인쇄활자도 입수했다. 이광수를 상하이로 파견한 이유는 그가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을 세계만방에 잘 선전할 수 있는 인물로 지목되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3·1운동을 준비하던 인사들도 도쿄 유학생들의 독립선언 준비 소식에 고무되었고, 2·8독립선언이 이루어지고 난 이후에는 더욱 더 심혈을 기울여 독립선언을 준비하게 되었다. 

2·8독립선언에 참여한 도쿄 유학생들 중에는 김마리아·황애시덕과 같이 먼저 귀국하여 도쿄의 소식을 전하면서 3·1운동에 참여한 경우도 있었고,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한 이후에 귀국하여 3·1운동에 참여한 유학생들도 있었다. 3‧1운동 직후인 3월 9일, 재일 유학생들은 ‘재동경 조선청년독립단 동맹휴학 촉진부’ 명의로 동맹휴학 참여와 함께 귀국하여 조국의 독립운동에 합류하자는 제안을 담은 격문을 뿌렸다. 그 결과 5월 15일까지 3·1운동에 참가하기 위하여 귀국한 유학생은 무려 350여 명에 달했다.

1923년 간토대진재로 불타버린 조선기독교청년회관터에서 찍은 사진. [사진-재일한국YMCA회관]
1923년 간토대진재로 불타버린 조선기독교청년회관터에서 찍은 사진. [사진-재일한국YMCA회관]

동아시아 민족해방운동의 촉발제가 된 2·8독립선언

2·8독립선언은 국내의 3·1운동에만 영향을 준 사건이 아니었다. 2·8독립선언은 3·1운동 직후에 벌어진 중국의 5·4운동에도 영향을 미쳤고, 타이완의회설치 청원운동 등 타이완인의 자치 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민족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동아시아 민족해방운동의 흐름 속에서 이해하는 일도 중요하다.

실제로 1916년 도쿄에서는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조선·중국·타이완의 해방과 조선·중국·타이완 동지들의 상호협력을 목적으로 하는 신아동맹당이 조직되었다. 신아동맹당의 결성은 1년 전인 1915년 2월 11일, 중국인 유학생 황개민(黃介民)과 조선인 유학생 하상연이 도쿄의 중화유일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가진 모임이 발단이었다. 조직의 구성원들은 모두 조선·중국·타이완의 유학생들이었는데, 조선인 중에는 김철수를 비롯하여 윤현진·정노식·장덕수·김효석·전익지 등이 참가하였다. 단장을 맡은 중국인 유학생 황개민(메이지대)은 1912년 중국에서 중국인과 조선인이 함께 결성한 신아동제사의 회원으로도 활동한 인물이었다. 

신아동제사는 한국과 중국의 혁명지사를 서로 연결하고 두 국민 사이의 우의와 친선을 도모하면서 동시에 한국의 독립을 촉진시키기 위해 만든 조직이었다. 신아동제사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우리 측 독립운동가는 신규식이었다. 신규식은 이미 조선인의 조직이었던 동제사를 결성하여 이사장을 맡고 있었는데, 동제사 회원들은 한중연대 조직인 신아동제사를 기반으로 삼아 중국 안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용이하게 전개할 수 있었다.

신아동맹당은 비록 1917년에 관헌의 탄압을 우려하여 스스로 해산하였음에도 한국·중국·타이완의 민족해방을 고민하는 젊은 유학생들이 함께 비밀결사를 만들고 교류를 했다는 점에서 이들 상호 간의 공감대 형성과 연대의식 확산에도 크게 기여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김철수를 비롯하여 신아동맹당에 참여한 조선인들은 훗날 2·8독립선언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고, 장덕수는 1918년에 상하이로 건너가서 여운형, 조동호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만들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신한청년당은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특사로 파견한 조직이었는데, 파리강화회의에는 혁명파 중국인들도 참여하는 등 이들 사이의 연대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2·8독립선언을 이끈 청년들, 독립운동의 주역이 되다

2·8독립선언에 참여한 유학생들은 이후 중국과 국내로 들어가 독립운동을 계속 벌여나간 경우가 많았는데, 일부는 일본에 남아 독립운동을 계속한 경우도 있었다. 
 
2·8독립선언에 참여한 후 중국의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한 대표적인 인사는 이광수, 김석황, 나용균 등이다. 김마리아는 국내로 들어가 독립운동에 종사하다가 뒤늦게 중국으로 탈출하여 임시정부에 참여한 경우이다. 반면, 김철수와 오의선은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다 국내로 귀국하여 조선공산당 결성에 참여한 경우이다. 

2·8독립선언에 참여한 후 국내로 들어와 독립운동에 참여한 대표적인 인사는 김마리아와 황애스더를 들 수 있다. 이들 둘은 여성계를 조직하여 최초의 전국적인 여성단체인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결성하였다.      

일본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한 인물도 있었다. 2·8독립선언 후계 투쟁을 주도했던 이달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달은 1920년 3월 1일에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과 히비야공원에서 벌어진 3·1운동 1주년 기념투쟁도 주도하였다. 이달은 자신을 비롯하여 2·8독립선언으로 옥살이를 한 유학생들을 적극 변호한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변호사와 깊은 유대관계도 이어갔다. 그는 1926년 3월 후세 변호사가 전남 나주군 궁삼면의 토지문제를 조사하기 위해 조선으로 왔을 때도 함께했고, 1926년 조선공산당 사건 재판으로 후세 다쓰지를 포함한 일본자유법조단이 국내에 들어왔을 때에도 재일노동총동맹 방청대표로 함께했다. 1928년 11월, 간도공산당사건 공판이 진행될 당시에도 일본자유법조단 소속 변호사와 함께 국내에 들어와 변론을 도운 이도 이달이었다.

2.8독립선언기념비 [사진-지역사 제공]
2.8독립선언기념비 [사진-지역사 제공]

2·8독립선언지의 위치는 어디일까? 

현재 2·8독립선언을 기리는 2·8독립선언기념비는 재일한국인YMCA회관(아시아청소년센터) 입구에 세워져 있다. 이 기념비는 2·8독립선언이 있은 지 63년이 지난 1982년에 민단계 청년단체에 의해 건립되었다. 재일한국인YMCA회관 2층에는 견학이 가능한 2·8독립선언기념자료실도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유의할 점이 있다. 2·8독립선언기념비가 있는 재일한국인YMCA회관 자리는 105년 전 2·8독립선언을 발표했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이 있던 자리와는 무관하다는 사실이다. 2·8독립선언의 역사현장인 조선기독교청년회관은 1923년 9월 1일의 간토(關東)대진재로 불타 없어졌고, 1929년에 다시 건립할 때는 원래의 장소와는 다른 지금의 장소에 세워졌다.

그렇다면 2·8독립선언기념비를 2·8독립선언의 역사현장인 조선기독교청년회관 터에 세우지 않고 재일한국인YMCA회관 앞에 세운 이유는 무엇일까? 간토대진재 이후 추진된 일본의 동경대개조 과정에서 지번 분할과 신주소 배정 등이 이루어지면서 그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 힘들었던 탓이다. 

2·8독립선언지(옛 조선기독교청년회관 터)의 정확한 위치를 찾으려는 노력은 이후 여러 차례 시도되었다. 2015년, 독립기념관은 과거의 지도를 통해 그 위치를 ‘존슨앤존슨(Johnson & Johnson Inc)’ 빌딩 자리(도쿄도 치요다구 니시간다초 3정목 5-2)로 추정했다. 그런데 지난 2019년, 《제도부흥구획정리지(帝都復興區劃整理誌)》(1932)와 《동경지도(東京地圖)》 등 새로운 자료 발굴과 조사를 통해 ‘니시간다(西神田) YS빌딩’ 자리(3-chōme-3-12 Nishikanda, Chiyoda City, Tokyo)로 비정한 윤소영의 논문(「일본 도쿄지역 2·8독립운동 사적지 재검토」)이 새롭게 발표되었다. 그럼에도 독립기념관은 “현재 명확한 위치를 확정할 수 있는 근거자료를 발굴·조사 중”이라면서 지금까지도 정확한 위치를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역사적인 2」8독립선언임에도 그 역사 현장인 조선기독교청년회관 터가 어디인지 여전히 확정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개탄하면서 이 글을 맺는다. 

현재 재일한국인YMCA회관 모습 [사진-필자]
현재 재일한국인YMCA회관 모습 [사진-필자]

2월 8일을 전후하여 <2·8독립선언지(조선기독교청년회관 터>를 둘러보시거나, 구글(https://maps.app.goo.gl/SsxQqnihB1Redezw5)에 들어가 관련 자료와 각자의 생각을 남겨주십시오. 전자지도에 근현대사를 새기는 작업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완성될 것입니다.  

김학규 동작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서울 동작구에서 동작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을 맡아 지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서울현충원 역사탐방을 비롯하여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중심으로 한 근현대 역사탐방을 이끌고 있다.

저서로 『현충원 역사산책』(2022), 『동작구 근현대 역사산책』(202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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