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모임 독립’과 ‘지역사’(지도에 역사를 새기는 사람들)가 선정한 2024년 1월의 근현대사적지는 ‘대한조국주권수호일념비(1·20비)’(서울 종로구 혜화동 56)입니다. / 필자주

 

동성중학교 입구에 새워져 있는 대한조국주권수호일념비. [사진 제공 - 김학규]
동성중학교 입구에 새워져 있는 대한조국주권수호일념비. [사진 제공 - 김학규]

대한조국주권수호일념비((大韓祖國主權守護一念碑)는 서울 혜화동 동성중고 앞에 세워져 있다. 이른바 ‘학도특별지원병’(학병)이라는 이름으로 일본군에 동원된 우리 젊은이들이 일왕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강요당했던 일제강점기의 참담한 역사를 기억하고자 세운 비이다. 이 대한조국주권수호일념비를 ‘1·20비(碑)’로도 부르는 이유는 이들 학병이 일본군 부대에 입소한 날이 1944년 1월 20일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옆에 있는 ‘일념비(=1·20碑) 안내문’의 다음과 같은 문구는 보는 이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이 자리에 세워진 일념비는 비에 새겨진 내용과 같이 일제가 2차대전 말기(1943-1945) 우리 대한의 정예 4,300여 명의 전문 대학생들에게 소위 학도특별지원병이라는 터무니없는 허울을 씌워서 일군(日軍)에 강제로 입대시켜 무참하게 각 전선에 내몰려고 함에 한 목숨 내걸고, 이를 거부하고 자신과 민족을 위하여 항쟁, 탈주, 체포, 징역, 사형, 부상, 실종, 전사 등 온갖 희생을 몸으로 겪으면서 싸웠던 피의 투쟁 흔적들을 2,700명(생사 불문)의 이름과 함께 새겨서 이 겨레 후손들에게 다시는 이러한 치욕의 과거사가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준엄한 경고의 상징으로 바로 여기 입대 전 한 때 합숙훈련장이었던 추억의 자리 동성고교 구내 양지바른 언덕에 민족의 역사와 함께 영원히 자리하게 하는 것이다.”

낯선 이름 학병, 그들은 누구인가

사실 일제는 식민지 조선인에게 총을 주지 않는 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일본육군사관학교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일본육사에는 1909년 대한제국의 육군무관학교가 폐교되면서 국비장학생으로 일본에 유학했던 소수를 제외하고는 조선인의 입학이 허용되지 않았다. 총구를 돌려 자신을 겨눌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컸기 때문이다. 실제로 3·1운동을 전후하여 일본육사 출신의 김경천과 지청천이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 독립군의 주요 간부로 활약하기도 했다.

일제가 제한적이나마 정책을 바꾼 것은 만주침략 직후인 1933년부터였다. ‘검증된 조선인’에 한하여 제한적이나마 일본육사 입학을 허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어 중일전쟁까지 일으킨 일제는 1938년 2월 2일 「육군특별지원병령」(칙령 제95호)을 공포하면서 소학교 이상 졸업자를 대상으로 일반 사병 모집도 실시하였다. 형식은 지원이었지만, 실제로는 도별로 할당하는 강제성을 띤 모집이었고, 1943년까지 6년간 총 17,664명이 동원되었다.

동성상업학교와 경성제대벅문학부에서 학병 예비훈련을 실시한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는 경성일보 기사(1943.12). [사진 제공 - 김학규
동성상업학교와 경성제대벅문학부에서 학병 예비훈련을 실시한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는 경성일보 기사(1943.12). [사진 제공 - 김학규

1941년 아시아-태평양전쟁으로 전선을 확대해나가던 일제는 훨씬 더 많은 병력이 필요하게 되자 징병제를 검토하기 시작했고, 결국 1944년부터 징병제를 적용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학도특별지원병은 징병제 실시를 결정했으면서도 여전히 다급한 일제가 1943년 10월 20일 「육군특별지원병 임시 채용규칙」(육군성령 제48호)을 공포하여 징병 유예 대상이던 대학생과 전문학교 학생 등 식민지 조선의 엘리트 청년을 강제 동원하기 위해 내놓은 허울 좋은 정책이었다. 이 과정에서 무려 4,385명의 학병이 동원된 것도 온갖 강압에 의해 이루어진 결과였다.

이는 지원자 256명 중 “자발적으로 지원하였다고 볼 수 있는 자는 도내 겨우 10명 내외에 불과하고, 다른 대부분은 모두 농후한 지도적 격려를 더하면서 결의 지원한 자”라고 한 함경북도 청진 검사국의 보고(高等法院檢事局, 「臨時陸軍特別支援兵の動向一斑」, 『朝鮮檢察要報』 1, 1944. 3, 2쪽)에서도 확인된다. 학병에 응하지 않으면 힘든 공장과 광산 등지로 징용을 보낸다는 협박을 넘어 가족의 생계 등 신변까지 위협하는 마당에 이를 계속 거부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일제에 맞선 학병거부운동

서정주가 매일신보(1943.11.16)에 학병을 응원하며 쓴 헌시 - 반도 학도특별지원병 제군에게. [사진 제공 - 김학규]
서정주가 매일신보(1943.11.16)에 학병을 응원하며 쓴 헌시 - 반도 학도특별지원병 제군에게. [사진 제공 - 김학규]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일제의 강압적인 학병 동원에 맞서는 학병거부운동이 벌어지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학병으로 끌려가기 싫은 당사자들은 여러 형태로 저항을 했다. 예비소집을 앞둔 1943년 11월 이후 관공서를 습격하여 파괴한 후 차라리 형사처벌을 받아 학병을 면하려는 시도조차 있었다. 함남 북청 출신 이광림 등 학병 60명은 술을 마시고 떼를 지어 경찰관서를 때려 부수는 일을 벌였고, 서울에서도 서재균, 최이권, 권중혁 등이 재동 파출소를 습격하여 기물을 파괴하는 일을 벌였다. 하지만 일제는 학도지원자라는 이유로 이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서울에서는 경성제대의 이혁기, 보성전문의 이철승과 유정담 등이 주동이 된 학병거부운동이 벌어졌다. 이들은 서울 시내 각 학교의 대표들과 한 달 동안에 걸쳐 장소를 옮겨가며 투쟁 방안을 은밀히 협의했고, 결국 학생 대표 20여 명이 서명 날인한 학병 거부 이유서를 작성하여 조선총독에게 우송하는 방법을 채택하여 이를 실행에 옮겼다.

이 사실을 파악한 일경은 그 주동자들을 모두 체포하려고 했으나, 조선총독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는 이들에게 면담 제안을 했다. 학생대표 12-13명은 총독의 면담 요청을 받아들여 총독 관저로 갔고, 약 3시간에 걸쳐 학도병 지원제와 일제의 조선에 대한 식민 정책의 부당성을 설파했다. 이에 맞서 고이소 총독도 1시간여에 걸쳐 “미·영을 격멸하여 그들의 침략으로부터 아시아 민족을 해방시켜야 한다”느니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실천을 책임질테니 학병 출정을 요망한다”느니 하는 논리로 학생들을 설득하려고 했다. 이때 이철승이 큰 소리로 “나는 각하의 얘기를 못 알아듣겠습니다”라고 외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고 한다. 이로써 담판은 결렬되었다.

직접 행동으로 학병거부를 실천한 사람도 많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경남 함양 출신의 하준수이다. 하준수는 진주중 3학년 때 일본인 교사를 두들겨 패고 퇴학당한 이력도 있었다.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日本)대학 전문학부를 졸업하고 일본 주오(中央)대학 법학부에 입학했지만, 1943년 학병 동원을 피해 고향 함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리산 칠선계곡에서 다른 학병 거부자 73명과 함께 항일무장단체이자 생활공동체인 보광당(普光黨)을 결성하여 활동하였고, 8·15 해방 이후에야 산에서 내려왔다. 하산 직전 보광당의 규모는 15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메이지대 출신 김종백을 중심으로 1943년 6월 도쿄에서 결성된 조선민족해방협동당은 학병 입대를 거부하는 청년학생들의 가세로 조직을 확충한 독립운동단체였다. 1944년 국내로 거점을 옮겨 경기도 포천의 국망봉과 서울 계동에 근거지를 만들었고, 학병을 거부한 이조원(경성제대) 등 청년들을 받아들였다. 협동당은 1944년 8월에 이르면 포천 국망봉에 약 120명, 금강산에 약 100명의 청년을 수용하여 군사훈련을 시킬 정도로 성장하였다.

학병을 거부한 후 국경을 넘다 체포된 후 징용대상으로 분류되어 평양 인근 송호리에 있는 오노다(小野田)시멘트공장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렸던 계훈제(경성제대)도 이 조직의 연락책 중 한 명이었다.

훈련소에서 터져나온 학병 의거

학병 불응자와 피신자에게는 계훈제의 경우와 같이 징용영장이 나왔다. 이들 중 피신하지 않은 최기일(경응의숙 고등부)을 비롯한 273명이 제1육군훈련소에서 2주간 훈련을 받은 후 원산과 평양, 해주 등지의 공장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자의든 타의든 학병 동원에 응한 전국의 학생들은 1943년 12월 22일부터 1주일 간 서울로 소집되어 신체검사와 정신교육 등 사전 훈련을 받았다. 이때 소집된 훈련 장소가 대한조국주권수호일념비가 세워져 있는 혜화동의 동성상업학교와 경성제대였다.

이듬해인 1944년 1월 20일 마침내 학병 적격자 7,200여 명 중 한국 내 학생 959명, 돌아온 일본 유학생 1,431명, 일본 체류 유학생 719명, 9월 단축 졸업생 941명, 취직중인 졸업생 335명 등 총 4,385명이 용산의 육군 제23부대, 대구의 육군 제24부대, 평양사단(39여단)의 제42보병부대, 제43보병부대(함흥 주둔), 제44보병부대, 제47포병부대, 제50치중병부대, 그리고 만주 봉천의 보병학교, 일본의 보병학교 등에 나뉘어 입영하였다.

이렇게 동원된 훈련소에서 가장 먼저 학병 의거가 일어난 곳은 함흥에 있던 43보병부대였다. 이곳에는 주로 함경남북도 출신 학병들이 있었는데, 입대 직후부터 부대 탈출을 위한 모의가 이루어졌다. 주동 역할은 학병 임영선이었다. 임영선은 1941년 메이지대학 예과에 진학한 직후에도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마술(馬術)이 능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승마에 열중한 인물이었다. 그는 43부대에 입대하기 전에도 이미 두 차례나 탈출을 시도한 바 있었지만, 실패하면서 어쩔 수 없이 입대한 터였다.

1944년 6월 2일, 임영선은 동지로 포섭한 이윤철(주오대학 전문부), 태성옥(와세다대학 전문부)과 함께 탈출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이윤철이 중간에 자수하면서 체포되어 탈출은 또다시 실패하고 말았다. 이들은 1944년 7월 17일 평양 육군 군법회의에서 4년 6개월(임영선, 이윤철)과 5년 6개월(태성옥)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해방될 때까지 옥살이를 해야 했다.

평양사단에서는 42부대에 배치된 김완룡, 박성화 등이 주축이 되어 탈출 논의가 이루어졌다. 평양사단에 입대한 학병의 대부분이 이미 중국으로 파견되고 남은 학병마저 곧 중국으로 파견될 예정인 상황에서 평양사단 내 학도병들 사이에서 부대를 집단으로 탈출하자는 논의가 일어났다.

이들은 1944년 7월 42부대 내 한국인 학병을 규합하여 삼천당(三千黨)을 결성하였다. 학병들은 힘을 모아 평양사단을 폭파한 후 한·만국경지대와 부전고원 일대에서 항일무장투쟁을 벌일 것을 결의하였다. 이 결사는 곧 타 부대의 한국인 학병에게도 알려져 44부대, 47부대, 48부대, 50부대 내 학병들과도 연계된 조직으로 발전하였다.

이들은 김완룡을 최고지휘자로 하고 박성화를 참모장으로 하여 지대와 분대로 구성된 조직체계를 정비한 후, 1944년 11월 1일로 탈출일을 잡고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도움을 기대했던 보조헌병 임영호의 배신으로 평양사단 학도병들이 대대적으로 헌병대에 연행됨에 따라 실패하고 말았다.

이들은 5개월에 걸친 모진 고문과 조사 끝에 1945년 6월 10일 조선군관구 임시군법회의에서 징역 13년에서 징역 2년에 걸친 징역형을 언도 받았다. 이 사건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학병은 25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평양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 8·15 해방을 맞이하여 풀려날 수 있었다.

대구 24부대의 학병 의거는 문한우(연희전문), 권혁조(주오대학), 김이현(메이지학원) 등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이들 3인은 이미 학생시절부터 반일운동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대다수 학병들이 중국이나 남방으로 떠난 이후 대구 24부대에 27명만 남게 되자 이들은 일본군을 살해한 후 집단 탈출을 감행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탈출 후에는 지리산에서 전열을 정비한 후 국외로 나가 독립운동단체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자는 결의도 하였다. 집단 탈출에 앞선 1944년 6월에는 징용 청년들의 탈출을 돕는 일도 벌였다.

1944년 8월 8일 마침내 문한우를 비롯한 3인은 권태용·권중혁·김복현 등 3명의 학병과 함께 부대를 탈출하였다. 탈출하고 보니 막상 지리산이 너무 멀고 식량을 조달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다고 판단한 이들은 가까운 팔공산에 들어갔고, 이어 일본군이 경찰·경방단 등과 함께 구축한 포위망을 뚫는 데도 성공했다. 하지만 김이현과 김복현 만이 서울을 거쳐 중국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을 뿐, 권혁조·문한우·권태용·권중혁 4인은 안동 등지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징역 4~5년의 형을 선고받은 이들은 일본 오무라(大倉) 육군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 1945년 8·15 광복 이후에 풀려나 귀국할 수 있었다.

중국 등 해외에서 탈출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한 학병들

용산의 육군 23부대, 대구의 육군 24부대, 평양과 함흥의 평양사단 등에 입대한 학병 중에는 해당 부대에서 계속 머무르면서 훈련을 받기도 했지만, 상당수는 약 3주일 전후의 기초 훈련 과정을 마친 후 곧바로 중국 전선이나 남방 전선으로 이동하여 현지 부대에 재배치되었다.

학병출신이 남긴 회고록(장준하의 돌베개, 김준엽의 장정, 강영훈의 나라를사랑한벽창우, 정철수의 한 학도병이 걸어온길. [사진 제공 - 김학규]
학병출신이 남긴 회고록(장준하의 돌베개, 김준엽의 장정, 강영훈의 나라를사랑한벽창우, 정철수의 한 학도병이 걸어온길). [사진 제공 - 김학규]

김준엽(게이오대학)과 장준하(일본신학교), 한성수(전수학교)를 포함한 수백 명의 학병들이 평양사단을 출발하여 중국으로 이동한 것은 1944년 2월 13일이었다. 이들은 입대 이전부터 이미 탈출하여 임시정부를 찾아가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2월 16일 중국 쉬저우(徐州) 지역의 일본군 스가다(柄田)부대에 배치된 김준엽은 3월 29일 일본군을 탈출하여 우선 중국 중앙군 소속 유격대에 합류하였다. 김준엽은 한국광복군 참여자 중 제일 먼저 탈출에 성공한 학병이었다. 장준하도 윤경빈(메이지대) 등과 함께 1944년 7월 7일 쉬저우에서 일본군을 탈출한 후 중국 유격대에서 활동 중이던 김준엽을 만났고, 함께 중국 유격대를 떠나 1944년 9월 10일 안후이성(安徽省) 린취안(臨川)에 도착하여 한국광복군훈련반(한광반)에 입교하였다. 이들은 한광반 졸업생 중 35명의 동지들과 함께 충칭(重慶)에 있는 임시정부를 찾아가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나섰다.

쉬저우에서 김준엽과 비슷한 시기에 탈출한 학병 중에는 한성수·오건·이종무도 있었다. 이 중 한성수는 한광반에 입교하여 훈련을 마친 후 김학규 장군의 한국광복군 3지대에 남아 상하이를 중심으로 하는 공작활동에 참여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45년 3월 13일 새벽에 상하이 거주 조선인 부호 손창식의 밀고로 홍순명·김영진 등과 함께 체포되었고, 상하이 주둔 일본 군법회의에 기소되어 사형을 선고받은 직후 참수형을 당했다.

황갑수(주오대)·김상학(전수대학)·강익진(입정대학) 등은 용산 23부대에 입대한 후 열흘 만에 중국 중지파견 64사단에 배속되었다가 1944년 5월 18일에 탈출한 학병이었다. 탈출 후 한동안 여성지구(汝城地區) 중국군 유격대에 편입되어 활동하던 이들은 쉐웨(薛岳) 중국 국민당 정부 제9전구 사령관(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의 도움을 받아 1945년 2월 광복군 제1지대 제3구대에 편입되어 활동하였다.

일본군에서 탈출한 후 독립운동단체인 조선의용군에서 활동하던 시절의 정철수(오른쪽, 1944). [사진 제공 - 김학규]
일본군에서 탈출한 후 독립운동단체인 조선의용군에서 활동하던 시절의 정철수(오른쪽, 1944). [사진 제공 - 김학규]

정철수(보성전문)는 대구 24부대로 징집되었다가 한 달여 만에 중국 산동성 제남(濟南)에 있는 일본군에 배치되었는데, 김준엽보다 4일 앞선 3월 25일에 허섭·평장우와 함께 탈출에 성공한 학병이었다. 정철수는 이후 항일투쟁 근거지인 태항산(太行山)으로 가서 조선의용군에 참여하였다. 정철수는 1944년 9월 화북에 있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를 수료하였고, 1945년 1월에는 조선의용군 화북조선인민위문단 대표가 되어 지역을 순회하면서 중국에 있던 조선인을 위로하는 활동도 벌였다. 중국 팔로군 지구로 탈출하여 조선의용군의 일원으로 항일전쟁에 참가했던 학병 중에는 신상초(동경제대)도 있었다.

이철승과 함께 서울에서 학병거부운동을 주도했던 이혁기는 학병으로 징집되어 남양 전선으로 출항하는 히로시마 우지나항(宇品港)의 수송선에서 바다에 뛰어들어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혁기는 서울로 잠입하여 보성전문의 유진오 교수 등을 만난 후, 1945년 8월 15일 해방될 때까지 강원도 속초와 설악산 일대에서 ‘산악대(山岳隊)’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이혁기의 활동은 해방 이후로도 이어졌다. 1945년 8월 17일에는 <귀환장병대>를 결성하였고, 8월 말에는 별도로 <귀환군인동맹>도 창립하였다. 9월 7일에는 두 조직을 통합한 <조선국군준비대>의 총사령을 맡기도 했다.

억압의 굴레에서 온전히 탈출하지 못한 학병세대를 위로함

한국광복군 국내정진대원으로 8월 18일 여의도에 착륙했다. 중국으로 돌아간 직후의 노능서, 김준엽, 장준하.(왼쪽부터, 1945.8.20.  산동성 유현에서)  [사진 제공 - 김학규]
한국광복군 국내정진대원으로 8월 18일 여의도에 착륙했다. 중국으로 돌아간 직후의 노능서, 김준엽, 장준하.(왼쪽부터, 1945.8.20. 산동성 유현에서) [사진 제공 - 김학규]

일제 강점기 학병으로 동원되었던 청년 중 살아남은 이들은 광복이후 귀국하여 한국 사회 곳곳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김종오·임선하·강영훈·최영희·한신·김웅수·김형일 등은 국군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고대 총장을 지낸 김준엽, 배재대 학장을 지낸 김대준, 서울대 교수로 있던 임원택 등은 학계의 주요 인사였다. 언론인 중에는 부산일보 사장과 문화방송 사장을 역임한 황용주도 있었다.

정치인 중에는 <사상계>를 이끌며 반유신 투쟁의 선봉에 섰던 장준하와 정치학자이자 언론인 출신으로 네 차례 국회의원을 지낸 신상초, 군인 출신으로 자유당 시절부터 국회의원을 지낸 안동준, 야당인 신민당 총재를 지낸 이철승도 있었다. 사업가로는 코오롱그룹 창업주 이동찬, 삼영화학 설립자 이종환도 있다. 종교인 중에는 김수환 추기경도 학병 출신이었다.

하여 이들을 학병 세대로 부르기도 한다. 그럼에도 학병 세대는 일반인에게 여전히 낯선 이름이다. 물론 일제강점기 말에 벌어진 학도특별지원병이라는 이름의 학병 강제동원의 역사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해방 이후 줄곧 한국사회를 억누른 분단체제와 1961년 이후 한국 사회를 주도한 군사독재정권의 중심에 학병세대와 대척점에 서 있던 만주국군과 일본육사 출신의 군인이 자리하고 있으면서 학병세대의 정체성 정립을 용납하지 않았던 데 있다.

결국 일제의 강압으로부터 탈출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등 시대적 과제 해결에 앞장섰던 이들 학병세대는 해방된 조국에서 분단과 전쟁, 그리고 독재에 맞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민주주의 실현이라는 시대적·민족적 과제 해결에 앞장 설 것을 또다시 요구받았던 셈이지만, 학병세대는 그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학병세대가 후대의 기억 속에 여전히 흐릿하게 자리 잡고 있는 이유도 개별적 성취는 있었으되, 뚜렷한 집단적 족적을 남기지 못한 데 따른 불가피한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저려온다.

대한조국주권수호일념비 앞에서 그 험악한 시대, 그들이 겪었을 참혹한 고통에 공감하면서 학병세대의 모든 구성원에게 심심한 위로의 마음을 전하며 글을 맺는다.

 

일제의 억압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했던 학병세대의 의지를 담은 대한조국주권수호일념비는 우리의 아픈 과거사를 되돌아보면서 앞으로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고민케 하는 소중한 역사현장입니다. 1월 20일을 전후하여 대한조국주권수호일념비를 둘러보신 후, 구글, 카카오, 네이버에 들어가 각자의 생각을 남겨주십시오. 전자지도에 근현대사를 새기는 작업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완성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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