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1. 혜원 신윤복에 관한 나의 연구

필자는 삼원(三園)이라 불리는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1816경)와 혜원(惠園) 신윤복(申潤福, 1758~1817),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 1843~1897)에 관한 여러 편의 논고를 발표한 바 있다. 혜원 신윤복에 관한 필자의 글은 모두 세 편으로 아래와 같다.

(1) 「혜원 신윤복을 찾아서 – 그의 부친 일재 신한평과 더불어」. 1993년 월간 『미술세계』 11월호와 12월호에 기고. 나는 이 글에서 혜원 신윤복이 고령신씨(高靈申氏)로 시조 신성용(申成用)으로부터 귀래정공파(歸來亭公派)의 혜원 신윤복에 이르기까지 19세의 계대를 확정하며, 그의 신분이 중인(中人)임을 규명해 내면서, 필자가 확정한 계대를 『고령신씨보외중인보(高靈申氏譜外中人譜)』라 하여 공개하였다.

당시 나의 이 규명은 혜원 신윤복 연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평가되었다. 이 논고는 원래 한편의 글이었으나, 잡지사 편집부에서 둘로 나누어 게재하였다. 이후 2015~6년에 만든 고령신씨 집안의 인터넷 족보에는 혜원 신윤복이 처음으로 기입(記入)되었다.

『중앙일보 1993년 10월 13일 자 기사』, 필자가 월간 『미술세계』 11월호에 기고한 글을 중앙일보에서 미리 소개하고 있다. 이는 우리 미술사학계가 이 글에 대하여 주목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중앙일보 1993년 10월 13일 자 기사』, 필자가 월간 『미술세계』 11월호에 기고한 글을 중앙일보에서 미리 소개하고 있다. 이는 우리 미술사학계가 이 글에 대하여 주목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사진 제공 – 이양재]

(2) 「‘혜원 신윤복을 찾아서’에 부쳐」, 『애서가 소식 10호』, 1993년 12월 17일 자. 1993년 월간 『미술세계』 11월호와 12월호 기고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써서 1993년 12월 17일 자 한국애서가클럽 월례 모임에서 발표하였다. 말하자면 이 글은 앞서 발표한 논고의 연속선상에 있는 글이다.

(3) 「여성미의 탐색자, 혜원 신윤복의 인생과 예술」(1)과 (2), 격월간 『한국고미술』 통권 제9호·제10호, 1997년·1998년. 이 논고에서는 혜원 신윤복의 삶과 예술 세계를 논하였다. 이 글도 하나의 논고였으나 편집진에 의하여 둘로 나누어 게재하였다.

2. 『취화첩(醉畵帖)』의 출현과 나의 연구 시도

나는 위의 세 번째 글 「여성미의 탐색자, 혜원 신윤복의 인생과 예술」(1)에서 혜원의 『취화첩(醉畵帖)』을 언급한 바 있다. 그 그림은 1994년 6월에 인사동에서 열린 한 고미술 전시회에 처음으로 실물이 공개되었다. 1997년 가을에 필자는 『취화첩』을 가지고 있는 상인에게 혜원의 원고를 써서 『한국고미술』 제9호에 게재하는데 이 작품을 소개하겠다며 사진을 사용하겠다고 하였으나, 당시의 소유자는 그림 도판 전체의 사용은 거절하였고 그림과 글씨 각 한 점만을 도판으로 사용하라고 허용한 바 있다.

그때(1997년)로부터 오랜 시일이 흐르는 동안 이후 『취화첩』의 행방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2020년 10월 25일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타계하면서, 2021년에 그의 많은 수집품이 국립중앙박물관(국박)과 국립현대미술관(국현)에 기증되었는데, 국박으로 기증된 이건희 수집품에 『취화첩』이 포함되어 있었다.

필자는 2002년에 『오원 장승업의 삶과 예술』이란 저서를 내면서 당시 ‘리움’에 소장 중이던 장승업(張承業, 1843~1897) 작품을 소개하고 싶다고 소장가에게 도판 사용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한 경험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이건희 회장의 소장품으로 국박이나 국현 등에 기증 소장된 것은 국가의 공공 소유물이 된 것이니만치 자유롭게 도판을 사용할 수 있게 됨으로써 처음 이 화첩을 보고 30년이 지난 이제서야 본 논고를 쓰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번 글은 1997년도에 발표한 「여성미의 탐색자, 혜원 신윤복의 인생과 예술」의 후속편으로 보아야 한다. 이 논고를 쓰는데 길게도 걸렸다.

3. 『취화첩』, 즉 『혜원화첩(惠園畫帖)』

이건희 컬렉션에 포함된 『취화첩』의 본 명칭은 『혜원화첩』으로 되어있다. 『취화첩』이란 명칭은 술에 취한 모습이 그려져 있어 상인이 임시로 부친 명칭이다. 이 화첩은 첩1인 수(首)와 첩8인 미(尾)에는 혜원 신윤복의 자필서(自筆書)가 들어가 있고, 첩2부터 첩7까지는 지본수묵담채(紙本水墨淡彩)의 그림 6점이 들어 있는 화첩이다. 각 그림의 크기는 세로 27.1cm에 가로 37.9cm이다. 국박 소장품 번호는 ‘건희 3650’이다.

화첩은 모두 8면으로 되어있는데 화첩의 수(首)와 미(尾)에는 혜원 신윤복의 자필서(自筆書)가 있다. 화첩의 첫 그림은 화제(畫題) 없이 둥근 달과 난과 죽을 그리고 있고, 두 번째 그림은 술에 취하여 달이 떨어져 가는 야밤에 술독 옆에서 잠든 취객을 그리고 있다. 이 그림의 무대는 술독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야외의 노상(路上)이 아니고 아회(雅會)가 있던 조선후기의 어느 사인(士人)의 정원(庭園)으로 판단된다.

도(6)과 미장(尾張)에 있는 서에는 ‘무진맹추(戊辰孟秋)’라고 기년(記年)이 있다. 즉 이 화첩을 그린 면도는 1808년(戊辰) 음력 7월(庚申)이니, 이 작품은 혜원의 기년이 확인되는 가장 확실한 작품이다. 1808년이면 순조(純祖, 1790~1834) 8년이고, 1858년생 신윤복이 51세 되던 해로서, 이 시기는 1800년 정조(正祖, 1752~1800)가 사망하고 11살이던 순조가 즉위하자 김조순(金祖淳, 1765~1832)이 자기 딸을 왕비(純元王后, 1789~1857)로 삼아 외척으로 정권을 장악하게 되어 많은 안동 김씨 일파가 요직에 앉아 세도정치를 하던 초기였다.

이 시기는 조선후기 영조와 정조 때 개화하였던 문화예술이 쇠락해 나가던 초기이다. 이 쇠락의 시기에 단원 김홍도는 화원에서 물러나고 혜원 신윤복은 도화서 화원에서 쫓겨나는데, 이 화첩은 그 쇠락의 시기에 쓰이고 그려진 작품으로 시사하여 주는 점이 많다.

4. 『혜원화첩』에 보이는 혜원의 글씨체

우선 화첩의 수(首)와 미(尾)에 있는 혜원 신윤복의 자필서(自筆書)를 살펴보면, 여기에는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완성한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 서체의 영향이 담겨 있다. “어떻게 혜원은 원교를 배웠는가?”를 유추해 보자.

1777년 원교가 사망했을 때 1758년생이던 혜원은 20세였는데, 원교와 혜원의 접점(接點)에는 혜원의 부친으로 화원(畫員)이던 일재(逸齋) 신한평(申漢枰, 1726~?)이 있다. 일재는 초상화에 능하여 정조(正祖, 1752~1800)의 어진(御眞)을 김홍도, 한종유와 함께 각각 그린 사실이 『정조실록』 12권, 정조 5년(1781년) 8월 26일 병신 첫 번째 기사에 기록되어 있다. 즉 “화사(畵師) 한종유(韓宗裕)·신한평(申漢枰)·김홍도(金弘道)에게 각기 1본씩 모사(摸寫)하라고 명하였다”라는 사실(史實)이다.

그러한 어진화사(御眞畫師) 일재 신한평의 현전하는 초상화 작품으로는 어진을 그리기 7년 전인 1774년에 원교가 귀양 가 있던 신지도(薪智島, 현재의 전라남도 완도군 신지면 금곡리)로 찾아가 그린 『이광사 초상』 한점이 있다.

왜? 1726년생이던 일재 신한평은 한창 도화서 화원으로 활동 중이던 48세의 나이(1774년)에 한양에서 멀리 전라도 완도군 신지도까지 찾아가 원교 이광사의 70세 시 초상화를 그렸을까? 일재 신한평도 원교 이광사의 동국진체를 높이 평가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즉 혜원의 글씨체(書體)에 원교의 영향이 보이는 것은 혜원이 원교를 사사(師事)했기 때문이며, 그 중간점에 『이광사 초상』이 있는 것이다.

혜원은 원교로부터 직접 글씨를 배웠거나 원교의 체본(体本)을 받아 글씨를 배운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1774년 일재 신한평의 신지도 방문할 때 혜원 신윤복이 동행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즉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원교의 초상화는 원교 이광사와 일재 신한평, 그리고 혜원 신윤복의 연관성을 입증하는 작품이다. 이 초상화는 2006년 12월 29일 자에 보물 제1486호로 지정되었다.

『이광사 초상』, 신한평, 1774년, 견본채색, 53.6cm × 67.6cm, 보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사진 제공. [사진 제공 – 이양재]
『이광사 초상』, 신한평, 1774년, 견본채색, 53.6cm × 67.6cm, 보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사진 제공. [사진 제공 – 이양재]
『이광사 필 행서』, 이광사, 66.0 × 105cm. 지본묵서. 서울대박물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이광사 필 행서』, 이광사, 66.0 × 105cm. 지본묵서. 서울대박물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이광사 필첩』에 채록한 제문, 행서(行書) 4면 중 제1면. 이광사, 지본묵서, 1771년 8월 2일, 필자 소장본. 이 원교의 필첩은 파본 상태로 나온 11장 22면을 재 표구한 것이다. 원교의 행서와 해서(楷書) 등의 여러 필체가 들어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이광사 필첩』에 채록한 제문, 행서(行書) 4면 중 제1면. 이광사, 지본묵서, 1771년 8월 2일, 필자 소장본. 이 원교의 필첩은 파본 상태로 나온 11장 22면을 재 표구한 것이다. 원교의 행서와 해서(楷書) 등의 여러 필체가 들어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혜원화첩』 첫 장 초서(草書), 신윤복, 1808년, 27.1cm × 37.9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사진 제공. [사진 제공 – 이양재]
『혜원화첩』 첫 장 초서(草書), 신윤복, 1808년, 27.1cm × 37.9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사진 제공. [사진 제공 – 이양재]
『혜원화첩』 끝장 초서, 신윤복, 1808년, 27.1cm × 37.9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사진 제공, 이러한 혜원의 초서는 이 화첩에 든 작품에 필적하는 것이 달리 공개된 바 없다. [사진 제공 – 이양재]
『혜원화첩』 끝장 초서, 신윤복, 1808년, 27.1cm × 37.9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사진 제공, 이러한 혜원의 초서는 이 화첩에 든 작품에 필적하는 것이 달리 공개된 바 없다. [사진 제공 – 이양재]


5. 『혜원화첩』에 보이는 혜원의 화풍(畫風)

『혜원화첩』은 여섯 장의 그림이 들어 있다. 첩2부터 첩7까지는 지본수묵담채(紙本水墨淡彩)의 그림 6점이 들어 있다. 각 그림의 크기는 세로 27.1cm에 가로 37.9cm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혜원이 “이 화첩을 그린 연도는 1808년(戊辰) 음력 7월(庚申)이니, 이 작품은 혜원의 기년이 확인되는 가장 확실한 작품이다”.

이 작품을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도(1) 도(2) 도(5)에서 보름달을 보이고 있고, 맹추(孟秋)는 음력 7월을 의미하므로 이 작품은 음력 7월 보름, 즉 백중(百中) 날에 그렸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백중날은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보름 명절의 하나로서 세벌 김매기가 끝난 후 농민들이 여름철 휴한기에 휴식을 취하는 날이다. 이때쯤이면 과일과 채소가 많이 나와서 농민들은 음식과 술을 나누어 먹으며 백중놀이를 즐기면서 하루를 보냈는데, 그것은 양반가에서도 같았다.

화첩의 도(1)에 그려진 여성적인 난초와 남성적인 대나무에 둥근 가을 달이 걸린 모습은 남녀 간의 깊은 연정(戀情)의 정취(情趣)를 느끼게 한다. 도(2)와 도(3) 도(6)에서 보이는 수지법(樹枝法)은 단원 김홍도의 수지법과 거의 같다. 암석을 그린 도(5)와 도(6)의 준법(皴法)에서는 단원 김홍도보다는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1707~1769)의 영향도 보인다.

이 1808년도의 이 작품을 그의 50세 때의 기준작품으로 본다면 기존에 알려진 간송미술관 소장의 『신윤복필풍속도화첩(申潤福筆風俗圖畵帖)』(국보 제135호)은 40대 초반의 작품으로 비정(比定)하게 한다. 즉 화첩에 담긴 그림의 전체적 수준으로 보았을 때, 기존에 알려진 혜원의 전형적인 필치를 넘어선 자유분방(自由奔放)한 필치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조선후기의 다른 작가들과는 전혀 다른 필치이다. 그러면서도 작품은 조화로운 면에서, 이 『혜원화첩』은 혜원의 득의작(得意作)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이 작품은 화책을 분책(分冊)한 화첩의 일부일 가능성이 있다. 불과 작품 여섯 점에 서(書) 두 점으로 화첩의 규모가 매우 작고, 또한 작품에 흐르는 일관성(一貫性)이 약하기 때문이다. 왜 이러한 현상이 나왔을까? 이것은 화첩의 분책이 아니면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언젠가 필자의 가설(假說)이 입증되도록 이 『혜원화첩』의 잔여 작품이 나왔으면 한다. 물론 필자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분책한 것이 사실일지라도, 이 화첩은 문화재로서 변함없는 가치를 갖고 있다.

도(1) 「난죽도(蘭竹圖)」. 신윤복, 여성적인 난초와 남성적인 대나무에 둥근 가을 달의 모습은남녀 간의 깊은 밤의 연정(戀情)을 느끼게 한다. 혜원의 작품다운 난죽도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도(1) 「난죽도(蘭竹圖)」. 신윤복, 여성적인 난초와 남성적인 대나무에 둥근 가을 달의 모습은남녀 간의 깊은 밤의 연정(戀情)을 느끼게 한다. 혜원의 작품다운 난죽도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도(2) 「대취도(大醉圖)」, 신윤복, 매우 파격적인 필치이다. 술독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야외의 노상(路上)이 아니고 아회(雅會)가 있던 조선후기 어느 양반가(兩班家)의 정원(庭園)으로 판단된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도(2) 「대취도(大醉圖)」, 신윤복, 매우 파격적인 필치이다. 술독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야외의 노상(路上)이 아니고 아회(雅會)가 있던 조선후기 어느 양반가(兩班家)의 정원(庭園)으로 판단된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도(3) 「관폭도(觀瀑圖)」, 신윤복, 조선후기의 다른 화가들의 「관폭도(觀瀑圖)」에 비하여 폭포의 동적(動的)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도(3) 「관폭도(觀瀑圖)」, 신윤복, 조선후기의 다른 화가들의 「관폭도(觀瀑圖)」에 비하여 폭포의 동적(動的)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도(4) 「해상선인도(海上仙人圖)」, 신윤복, 게를 탄 해상 선인(仙人)이 생황(笙簧)을 불고 있다. 혜원이 남긴 선인도는 이 작품 외에는 본 적이 없다. 단편적인 소품(小品)이지만 현재 심사정이나 단원 김홍도의 「해상군선도」를 뛰어넘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도(4) 「해상선인도(海上仙人圖)」, 신윤복, 게를 탄 해상 선인(仙人)이 생황(笙簧)을 불고 있다. 혜원이 남긴 선인도는 이 작품 외에는 본 적이 없다. 단편적인 소품(小品)이지만 현재 심사정이나 단원 김홍도의 「해상군선도」를 뛰어넘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도(5) 「송하탄금도(松下彈琴圖)」, 신윤복, 거문고는 조선후기의 아회에 자주 등장하는 악기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도(5) 「송하탄금도(松下彈琴圖)」, 신윤복, 거문고는 조선후기의 아회에 자주 등장하는 악기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도(6) 「秋山圖」, 신윤복, 백중날의 가을 산 계곡을 그린 「추산도」로서는 매우 쓸쓸한 노년의 황망(慌忙)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도(6) 「秋山圖」, 신윤복, 백중날의 가을 산 계곡을 그린 「추산도」로서는 매우 쓸쓸한 노년의 황망(慌忙)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사진 제공 – 이양재]
『기생출행도(妓生出行圖)』, 신윤복, 지본채색, 45.2cm × 65.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건희 3657). [사진 제공 – 이양재]
『기생출행도(妓生出行圖)』, 신윤복, 지본채색, 45.2cm × 65.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건희 3657). [사진 제공 – 이양재]
『신윤복 필 풍속도 화첩 (申潤福 筆 風俗圖 畵帖)』*(30면) 제8번째 장, 신윤복, 28 × 35cm. 국보, 간송미술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신윤복 필 풍속도 화첩 (申潤福 筆 風俗圖 畵帖)』*(30면) 제8번째 장, 신윤복, 28 × 35cm. 국보, 간송미술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신윤복 필 풍속도 화첩 (申潤福 筆 風俗圖 畵帖)』 : 「단오풍정」 「월하정인」 등 혜원의 연작 풍속화 30여 점이 들어 있는 혜원의 대표적인 화첩이다. 혜원의 참신한 색채가 돋보이는 풍속화로서 혜원만의 독특한 경지를 나타내고 있다.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가 주로 노동하는 모습이나 세시풍속(歲時風俗) 등을 그린 것이라면 혜원의 풍속화는 주로 한량과 기녀를 중심으로 한 남녀 간의 애정과 낭만, 양반사회의 풍류를 다루었다. 가늘고 섬세한 부드러운 필선과 아름다운 색채가 세련되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잘 나타내고 있다. 등장인물들을 갸름한 얼굴에 눈꼬리가 올라가게 표현함으로써 다소 선정적인 느낌이 들고, 인물들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주위의 배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점이 돋보인다. 혜원의 40대 초반의 작품으로 유추된다.

『춘화(春畫)』, 신윤복, 견본채색, 필자 소장품. 혜원이 그린 속화(俗畫)는 성애(性愛)를 그린 춘화를 말한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춘화(春畫)』, 신윤복, 견본채색, 필자 소장품. 혜원이 그린 속화(俗畫)는 성애(性愛)를 그린 춘화를 말한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춘화(春畫)』 부분도, 간송미술관 소장의 혜원 『미인도』에서 보이는 여성의 얼굴과 매우 유사한 얼굴 묘사를 보인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의 가채(加髢) 머리를 보면 소품이지만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춘화(春畫)』 부분도, 간송미술관 소장의 혜원 『미인도』에서 보이는 여성의 얼굴과 매우 유사한 얼굴 묘사를 보인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의 가채(加髢) 머리를 보면 소품이지만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미인도(美人圖)』 부분도, 신윤복, 113.9 × 45.6cm, 보물, 간송미술관 소장.이 『미인도』의 여인은 머리에 가채를 얹고 회장저고리에 풍성한 치마를 입고 있다. 부드럽고 섬세한 필치로 아름다운 여인의 자태를 묘사하였고 은은하고 격조 있는 색감으로 처리하였다. 자주색 회장 머리띠, 주홍색 허리끈, 분홍색 노리개 등 부분적으로 가해진 채색은 정적인 여인의 자세와 대비되어 화면에 생동감을 부여하고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미인도(美人圖)』 부분도, 신윤복, 113.9 × 45.6cm, 보물, 간송미술관 소장.이 『미인도』의 여인은 머리에 가채를 얹고 회장저고리에 풍성한 치마를 입고 있다. 부드럽고 섬세한 필치로 아름다운 여인의 자태를 묘사하였고 은은하고 격조 있는 색감으로 처리하였다. 자주색 회장 머리띠, 주홍색 허리끈, 분홍색 노리개 등 부분적으로 가해진 채색은 정적인 여인의 자세와 대비되어 화면에 생동감을 부여하고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미인도(美人圖)』, 신윤복, 113.9 × 45.6cm, 보물, 간송미술관 소장.마치 초상화처럼 여인의 전신상을 그린 이 미인도는 신윤복 이전 작품에는 남아 있는 예가 거의 없다. 따라서 이 작품은 19세기 초의 미인도에 있어 한 전형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필자는 이 작품에서 혜원이 사랑했던 여인을 그린 초상화라는 감성을 느낀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미인도(美人圖)』, 신윤복, 113.9 × 45.6cm, 보물, 간송미술관 소장.마치 초상화처럼 여인의 전신상을 그린 이 미인도는 신윤복 이전 작품에는 남아 있는 예가 거의 없다. 따라서 이 작품은 19세기 초의 미인도에 있어 한 전형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필자는 이 작품에서 혜원이 사랑했던 여인을 그린 초상화라는 감성을 느낀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대쾌도(大快圖)』, 신윤복(관), 1785년, 견본채색, 215.7cm × 60.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혜원 신윤복의 관지가 되어있으나 후대에 그려진 혜산(惠山) 유숙(劉淑, 1827~1873)의 『대쾌도(大快圖)』와 비견되는 작품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대쾌도(大快圖)』, 신윤복(관), 1785년, 견본채색, 215.7cm × 60.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혜원 신윤복의 관지가 되어있으나 후대에 그려진 혜산(惠山) 유숙(劉淑, 1827~1873)의 『대쾌도(大快圖)』와 비견되는 작품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6. 혜원 신윤복을 도화서와 가문에서 파문하다

필자가 1993년 월간 『미술세계』 11월호와 12월호에 기고한 「혜원 신윤복을 찾아서 – 그의 부친 일재 신한평과 더불어」에서 밝힌 귀래정(歸來亭) 신말주(申末舟, 1429~1503)로부터 혜원 신윤복까지의 계대와 그들의 생몰년(生沒年)은 아래와 같다. (일부 인물의 생몰년은 최근에 확인)

고령신씨 귀래정은 수양대군(세조)이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켜 벼슬에서 물러나 지금의 전라북도 순창(淳昌)으로 낙향하여 귀래정을 짓고 은거하였다. 귀래정 신말주는 고령신씨 시조 신성용(申成用)의 8세손이고, 혜원 신윤복은 시조의 19세손이니, 혜원은 귀래정의 11세손이다.

[혜원 신윤복 가계보}
 

(8세) 신말주(申末舟, 1429~1503) →
(9세) 신홍(申洪, 1450경~1483) →
(10세) 신공섭(申公涉, 1481~1521) →
(11세) 신수진(申狩眞·申滇, 1520~1594) →
(12세) 신경지(申景池, 1545~1592) →
(13세) 계(系) 신대원(申大源, 1571~1635, 1609년 역과) →
(14세) 신극해(申克海, 1601~1685) →
(15세) 신청(申淸, 1635~1696) →
(16세) 신세만(申世漫, 1670~1726, 1693년 역과) →
(17세) 신덕광(申德洸, 1695~1751) →
(18세) 신한평(申漢枰, 1726~1809, 화원) →
(19세) 신윤복(申潤福, 1758~1817. 화원).

귀래정의 손자 안협공(安峽公) 신공섭(10세, 1481~1521)의 배위(拜位)는 두 분이다. 그의 전실(前室)은 좌의정을 지낸 거창신씨 신수근(愼守勤, 1450~1506)의 큰 딸(1481~1518)이고, 측실(側室)은 홍주목사를 지낸 광주이씨 이효천(李孝薦)의 딸(1484~1554)이다. 신공섭과 그의 첫 부인은 동갑이고 측실과는 세 살 차이이다.

신수진(申狩眞, 11세)은 고령신씨 족보에는 신진(申滇)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광주이씨 부인이 1520년에 낳은 서자(庶子)이다. 조선초기에는 적서(嫡庶)의 차별이 거의 없었지만 광해군(光海君) 이후 인조(仁祖, 1623~1649) 조부터는 서얼(庶孼)은 잡과(雜科)가 아니고서는 관직에 나가기가 대체로 어려웠다. 신대원(13세)과 신극해(14세)의 세대부터이다. 여기까지가 필자의 혜원 신윤복 계대의 기존 연구이다.

그런데 9년 전 서울의 어느 경매에 출품된 1804년(한성보) 목활자본 『고령신씨세보(高靈申氏世譜)』 9책을 고령신씨 문중의 보학자 신경식(申慶植) 선생이 발견하여 입수하였고, 그 책의 스캔본을 최근 필자에게 제공하였다. 그러나 그 족보는 1993년 필자가 확인한 『고령신씨보외중인보』와 일치하였으나, 몇 곳에서 오류가 발견된다.

즉, 혜원 선대의 계대는 필자가 고증한 것과 일치하지만, 혜원의 부친 신한평의 생년이 영묘(英廟, 영조) 기사(己巳生, 1749년)이라 한 것이 기존의 정설 1726년생(英祖 2년 丙午)이라는 것과 다르고, 혜원 신윤복은 여기에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1804년 『고령신씨세보』(이하 한성보)에는 일재 신한평의 4남2녀가 기재되어 있다. 신인권(申仁權) 신의권(申義權) 신응권(申應權) 신양권(申亮權)과 사위 김인욱(金仁旭煜)과 한수묵(韓守黙)이다. 혜원 신윤복과 필자가 달리 확인한 혜원의 동생 신윤수(申潤壽)의 이름은 없다.

그런데 1990년대 중후반에 국립중앙박물관의 이원복 박사는 혜원의 본명이 신가권(申可權)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 근거는 국박 소장의 작품 「아기를 업은 여인」의 오른쪽에 붙은 제첨 “혜원(惠園) 신가권(申可權) 자덕여(字德如)“에 있다. 「아기를 업은 여인」의 작가를 혜원이라며 그 이름을 ‘가권’으로 자를 ‘덕여’라 밝히고 있다. 즉 신윤복의 항렬(行列)에 따라 지은 보명(譜名)은 ‘가권(可權)’인 것이다.

1804년 『고령신씨세보』 한성보(漢城譜)에 신한평의 네 아들의 항렬은 ‘권(權)’자인데, 신가권의 기록이 빠진 것이다. 이 한성보에 신한평의 ‘영묘 기사생’은 ‘영묘 을사생(乙巳生)’의 오자(誤字)로 보인다. 그렇다면 일재 신한평은 1726년생이 아니라 한 해 전인 1725년생일 것이나, 한편 2015~6년경에 만든 『고령신씨 인터넷 족보』에는 1726년 병오생으로 1804년 한성보의 오기를 바로 잡고 있다.

『고령신씨세보』 (한성보) 신한평 부분 면, 1804년, 목활자본. 사진 제공 신경식.이 세보는 ”서울에 사는 중인들을 대거 수록하고 있어 조선후기의 고령신씨의 대종중에서는 인정하지 않고 훼폐(毁廢)하였다“라고 한다. (참조 : 1850년 간행한 『고령신씨세보』 ‘묵정보(墨井譜)’ 서문) [사진 제공 – 이양재]
『고령신씨세보』 (한성보) 신한평 부분 면, 1804년, 목활자본. 사진 제공 신경식.이 세보는 ”서울에 사는 중인들을 대거 수록하고 있어 조선후기의 고령신씨의 대종중에서는 인정하지 않고 훼폐(毁廢)하였다“라고 한다. (참조 : 1850년 간행한 『고령신씨세보』 ‘묵정보(墨井譜)’ 서문) [사진 제공 – 이양재]
『고령신씨세보』 (한성보) 신한평 부분, 1804년, 목활자본. 사진 제공 신경식. [사진 제공 – 이양재]
『고령신씨세보』 (한성보) 신한평 부분, 1804년, 목활자본. 사진 제공 신경식. [사진 제공 – 이양재]

2015~6년에 만든 『고령신씨 인터넷 족보』에는 혜원을 일재의 다섯째 아들로 기록하여 일명(一名) 가권(可權)이라 하고 있다. 신윤복의 본명이 신가권이라는 사실은 이원복 박사에 의하여 후대에 밝혀진 것을 고령신씨 문중에서 그대로 받아들여, 2015~6년에 인터넷 족보를 만들면서 1804년 한성보에서 밝히고 있는 서손(庶孫)들을 모두 그대로 기록하며 혜원을 일재의 아들로 추가 기록하였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혜원은 일재의 장남(長男)이다. 일재가 1809년에 사망하였으므로, 1804년 한성보가 출판되었을 때 그는 생존해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가권(可權)을 족보에 올리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일재가 장남 혜원 신윤복을 족보에 올리지 않은데는 한 이유가 있다. 당시는 혜원이 춘화(春畫)를 그린 이유로 도화서 화원에서 쫓겨난 이후로 보인다.

사학자 호암 문일평(文一平, 1888~1936)은 『호암전집』 제2권(1939년, 조선일보 간)에서 그 사실을 밝힌 바 있다. 그것은 조선후기의 화단에서 전해져 온 보편적 사실인 것 같다. 이 한성보가 편찬된 1804년 직전에 혜원은 도화서 화원에서 이미 쫒겨나 있었고 그 이유로 신한평도 그를 집안에서 파문(破門)한 것 같다. 혜원이 집안에서 파문된 190년 후가 되는 1993년에 필자는 혜원의 가계를 밝혀냈다.

오늘날 우리는 혜원의 회화를 통하여 우리 회화사에서 여성미의 여유와 풍류를 볼 수가 있다. 혜원의 풍속화가 없었다면 우리 회화사는 삭막했을 수 있다.

그런데 이후 필자는 격월간 『한국고미술』 통권 제9호(1997년 11·12월호)에 기고한 「여성미의 탐색자, 혜원 신윤복의 인생과 예술」(1)에서 「혜원 신윤복의 팔고조도(八高祖圖)」를 제시한 바 있다. 여기에서 필자는 혜원의 모계로 홍주피씨(洪州皮氏) 피재록(皮在祿)의 딸임을 밝힌 바 있다. 그런데 한성보에 의하면 신한평의 장인은 전주이씨 이만해(李萬楷)로 기록하고 있다.

필자가 유추하기에는 일재 신한평에게는 부인이 두 분이 있었는데 홍주피씨가 본부인인지 전주이씨가 본부인인지는 명확한 기록이 없다. 하지만 1804년 한성보에 오른 전주이씨 이만해는 진사(進士)가 아니라, 1714년생으로 1736년 23세에 주학(籌學)에 입격한 잡과 출신자이다. 그 주학에 입격한 사실을 진사시 입격으로 과장하여 기록한 것이다.

어떻든 일재 신한평은 혜원 신윤복과 그의 동복제(同腹弟) 신윤수를 한성보에 올리지 않았다. 한성보에 사위로 올라있는 한수묵의 처도 홍수피씨의 소생인데 말이다. 한수묵은 청주한씨인데, 족보에 올리지 않을 수 없었던 사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화원 일재 신한평에게 실망스러운 부분이다.

「아기를 업은 여인」**, 신윤복, 지본수묵, 23.3cm × 24.8cm, 국립 중앙박물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아기를 업은 여인」**, 신윤복, 지본수묵, 23.3cm × 24.8cm, 국립 중앙박물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아기를 업은 여인」 : 혜원은 이 작품에서 훤칠한 키에 가녀린 몸매, 항아리같이 넓은 치마에 풍성한 가채를 얹은 젊은 여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짧고 꼭 끼는 저고리 밑으로 젖가슴이 드러나 있는데, 젖먹이 어린아이를 등에 업은 모습에서 모성애가 느껴진다. 그려진 여인을 기녀로 말하는 경우가 있지만, 조선후기에는 아들을 출산한 여성들은 아기를 돌볼 때 그 사실을 과시하여 가슴을 드러내는 풍습이 있었고, 여인의 가채를 한 머리는 조선시대의 여성이 사치(奢侈)를 한 보편적인 모습이다.


7. 혜원 신윤복의 묘소를 찾아서

안협공 신공섭(10세)은 신홍(9세)의 3남이다. 형으로는 신공제(申公濟, 1469~1536)와 신공도(申公渡)가 있다. 안협공 신공섭과 전실 거창신씨 부인, 그리고 그 적자(嫡子)들의 묘소는 주로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상리 삼상리 산113-1번지(일영역 인근)에 소재해 있다.

필자는 혜원의 묘소를 찾아다니던 초기에 신공섭의 측실 광주이씨 부인의 아들 신수진(11세)의 자손들 가운데 32명이 역관(譯官)으로 10명이 의관(醫官)으로 출사(出仕)하였다는 사실을 주목하였다. 그런 것으로 보아 그들은 모화관이 있던 현재의 독립문역으로부터 연신내역에 이르는 사행(使行) 길 인근에 흩어져 살았을 것으로 유추한 바 있다. 그 지역에 은거(隱居)하였다면 그들의 선산(先山)은 그 지역에 있었을 것이다.

2022년에 확인한 사실은 ”광주이씨 부인의 묘소는 조선후기의 경기도 양주군 연서 구산리(지금의 서울시 은평구 구산동)에 소재해 있었으나, 도시 개발로 실전하였다“라는 것이다. 현재의 고령신씨 안협공파 문중(회장 신왕수)에서는 혜원의 묘소가 여기 구산리(구산동)의 고령신씨 선영에 있었을 것으로 본다. 필자도 그의 견해에 공감한다. 구산리는 지금의 은평구 구산동이다. 은평구나 서대문구청 또는 양주군에 1970년대 이전의 구산리나 구산동의 토지대장을 확인한다면 그 선영의 지번을 확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1994년경에 혜원 신윤복의 묘소를 찾아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일대를 헤맨 적이 있다.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2002년 10월 20일, 혜원이 속한 고령신씨 안협공파(安峽公派)에서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상리 산113-1번지에 혜원의 단묘(壇墓)를 조성하였다. 즉 혜원 신윤복을 추모하기 위한 비를 세우고 가묘(假墓)를 조성한 것이다. 혜원이 집안에서 파문(1804년 이전)된 지 거의 200여 년 만에 문중에서는 그를 공식적으로 복권한 것이다.

필자가 2022년 9월 16일자로 <통일뉴스>에 연재 중이던 ‘이양재의 ‘문화 제주, 문화 Korea’를 위하여‘의 제20회 연재분 「표현의 자유를 주창한 ‘혜원 신윤복 기념관’을 세우자」에서는 이 설단을 주목한 바 있다. 이후 안협공파 문중의 신왕수(申王秀) 회장으로부터 정확한 지번을 받았고, 2022년 11월 9일 오전에 조각가 전영일 화백과 함께 혜원의 단묘를 찾아서 2시간여를 둘러본 바 있다.

일영역에서부터 고령신씨 안협공파 문중의 묘역에 이르는 지역을 조선시대 단원과 혜원 등 여러 화가의 풍속화를 재현하는 조선시대의 민속 마을이 들어섰으면 싶다. 물론 성풍속에 대한 것은 제한하고 말이다.

이 글을 끝맺음하면서 필자의 이번 혜원 연구에 자료를 제공하고 격려해 주신 안협공파 신왕수 회장과 고령신씨의 보학자 신경식 선생에게 이 자리를 빌려 심심한 감사를 표한다.

『고령신씨 안협공 신공섭 부부묘』,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상리 산113-1번지. 사진 제공 신경식.1521년에 처음 장사지낸 자리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 묘역은 잘 정비된 묘역으로, 1521년 이후부터 21세기 현재까지 이어지는 우리 민족의 숭조(崇祖) 정신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묘역이자 유적이다. 경기도 지방문화재나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하고 보존하여야 한다. [사진 제공 – 이양재]
『고령신씨 안협공 신공섭 부부묘』,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상리 산113-1번지. 사진 제공 신경식.1521년에 처음 장사지낸 자리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 묘역은 잘 정비된 묘역으로, 1521년 이후부터 21세기 현재까지 이어지는 우리 민족의 숭조(崇祖) 정신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묘역이자 유적이다. 경기도 지방문화재나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하고 보존하여야 한다. [사진 제공 – 이양재]
『고령신씨 안협공파 묘역과 혜원 신윤복 설단 빛 추모비』, 2023년 11월 9일, Ⓒ이양재.고령신씨 안협공 묘역의 최상단부에 안협공 신공섭과 거창신씨의 묘소가 있고, 그 옆에 서울 은평구 구산동에 있다가 실전한 안협공의 후배(後配) 광주이씨의 설단묘와 묘비가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고령신씨 안협공파 묘역과 혜원 신윤복 설단 빛 추모비』, 2023년 11월 9일, Ⓒ이양재.고령신씨 안협공 묘역의 최상단부에 안협공 신공섭과 거창신씨의 묘소가 있고, 그 옆에 서울 은평구 구산동에 있다가 실전한 안협공의 후배(後配) 광주이씨의 설단묘와 묘비가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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