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1. 혜원 신윤복 연구

우리 민족의 조선시대 회화사에서 혜원(惠園) 신윤복(申潤福, 1758~?)의 풍속화에 나타나는 에로스(eros)가 없었다면 매우 삭막하였을 것이다. 젊은 나이에 이를 주목한 나는 혜원 신윤복의 삶과 예술을 탐색하여 월간 『미술세계』 1993년 11월호와 12월호에 「혜원 신윤복을 찾아서–그의 부친 일재 신한평(申漢枰, 1726~?)과 더불어」를 기고하면서 그의 고령신씨(高靈申氏) 세계(世系, 系譜)를 규명하였다.

또한 『애서가 소식』 제10호(1993년 12월 17일 자)에는 「‘혜원 신윤복을 찾아서’에 부쳐」를 추가 발표하였다. 이후 1997년과 1998년의 격월간 『한국고미술』 통권 제9호와 10호에는 「여성미의 탐색자, 혜원 신윤복의 인생과 예술」(1)과 (2)를 기고하였다.

이러한 혜원의 세계에 대한 규명은 당시 회화사학계에 신선한 자극을 주었으니, 이 일은 벌써 29년 전이고 25년 전의 일이다.

2. 혜원의 묘소를 찾아서

흔히 삼원(三園)이라 불리는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은 모두 중인 출신인데, 그들 단원과 오원의 묘소는 확인할 가능성이 없으나 혜원의 묘소는 확인이 가능할 수도 있으므로 나는 혜원의 묘소를 찾아 나섰다.

혜원 신윤복의 선대와 친척들 가운데 많은 역관이 있는 것에 주목하였다. 나는 조선후기에 형성된 역관들은 대대로 당시의 모화관(慕華館) 주변과 모화관에서 북행길로 가는 무악재 인근에 많이 거주하였던 것으로 보았고, 분명히 그들의 선산은 무악재에서 의주로 가는 초입부 어디엔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신윤복의 정확한 가계를 확인해 내자 당시의 고령신씨종친회에서 나를 찾아왔다. 여러 문헌을 참조하여 족보에 빠진 혜원의 세계를 규명해 낸 것에 그들도 놀란 모양이다. 나는 이후에, 1995년쯤이다. 종친회의 협조를 받아 당시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일대의 고령신씨 선산(先山)을 조사하였다. 혜원 신윤복의 묘소를 찾기 위해서였으나 당시의 장흥면에 혜원의 묘소는 없었다.

3. 고령신씨 안협공 문중에서 혜원의 가묘를 세우다

그런데 훨씬 후에 고령신씨 가문 안협공(安峽公) 자손들은 “혜원 신윤복의 8대조 신수진(申狩眞, 1520~1594)의 묘소가 은평구 구산동(옛 경기도 양주군 연서면 구산리)에 있었으나 도시개발로 없어졌다”고 주장하며 혜원도 거기에 묻혔을 것이라 주장하였다. 혜원의 묘소가 구산동에 있었다는 말은 믿기 어려운 주장이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구산동 어느 지점에 고령신씨들의 선산이 있었는가 하는 것은 종친회의 도움을 받거나, 또는 1960년대의 토지대장 및 임야대장이나 등기부등본을 탐색하면 대체적으로 확인이 가능하다. 그러나 현재 은평구청에서 이러한 자료의 열람을 허용해 줄지는 알 수가 없다. 1960년대 구산동 일대의 토지대장과 임야대장의 열람이 가능하다면 찾아보고도 싶다.

신윤복의 가묘, 2002년 10월 20일, 혜원이 속한 고령신씨 안협공파(安峽公派) 후손들은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상리 산113-1번지’에 혜원의 단묘(壇墓)를 조성하였다. 조만간에 상경하면 찾아가 볼 예정이다. [사진 출처 - 양주시 홈피]
신윤복의 가묘, 2002년 10월 20일, 혜원이 속한 고령신씨 안협공파(安峽公派) 후손들은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상리 산113-1번지’에 혜원의 단묘(壇墓)를 조성하였다. 조만간에 상경하면 찾아가 볼 예정이다. [사진 출처 - 양주시 홈피]

이후 2002년 10월 20일, 혜원이 속한 고령신씨 안협공파(安峽公派)에서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상리 산113-1번지에 혜원의 단묘(壇墓)를 조성하였다. 즉 혜원 신윤복을 추모하기 위한 가묘(假墓)를 조성한 것이다. 나의 혜원 세계 규명으로 인하여 가문에서 세계 불확실로 잊혀진 혜원 신윤복이 이제는 추모 제례(祭禮)를 받게 된 것이다. 기쁜 것은 1810년대 봉건시대에 사라진 혜원의 명예가 200여년 후, 21세기초 문명사회에서 회복된 것이다.

4. 어디에든 혜원 신윤복 기념관을 세우자

그런데 혜원 신윤복의 고향은, 그의 부친이 도화서 화원으로 입신하였고, 그의 증조부와 5대조는 역관(譯官)이었음을 미루어 볼 때, 그리고 그의 선대 묘소가 조선시대의 양주군 연서면 구산리 지역에 있었음을 미루어 볼 때, 그는 당시의 한성부나 한성부의 서북쪽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즉 지금의 서울 서대문구 영천 인근이나 은평구 지역이다.

혜원 신윤복이 남긴 작품의 수량은 단원 김홍도나 오원 장승업에 비하여 많지 않다. 그러나 혜원을 기념하는 미술관이나 기념관은 서울시 은평구(恩平區)이든, 아니면 지금 그의 가묘가 있는 경기도 양주시(楊州市)에든 세울만한 가치가 크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우리 민족의 회화사는 혜원 신윤복이 없었다면 매우 삭막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춘화(春畫)], 신윤복(申潤福, 1758~?), 견본채색, 필자 소장품. 혜원이 그린 속화(俗畫)는 성애(性愛)를 그린 춘화를 말한다. 그런데 혜원의 여러 작품을 보면 당시의 양반사회에 대한 비판성이 높다. 언제인가 필자가 이해하는 『혜원 신윤복의 예술』 론을 저술하고 싶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춘화(春畫)], 신윤복(申潤福, 1758~?), 견본채색, 필자 소장품. 혜원이 그린 속화(俗畫)는 성애(性愛)를 그린 춘화를 말한다. 그런데 혜원의 여러 작품을 보면 당시의 양반사회에 대한 비판성이 높다. 언제인가 필자가 이해하는 『혜원 신윤복의 예술』 론을 저술하고 싶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역사학자 호암 문일평(文一平, 1888~1936)의 글에 의하면 혜원은 속화(俗畫)를 그렸다는 이유로 도화서 화원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혜원의 여러 작품을 보면 당시 사회에 대한 비판성이 높은데, 이는 예술 표현의 자유를 주창하는 현대 미술가들의 선구자적 선배로 혜원을 칭송할 당위성을 갖게 한다. 물론 혜원은 풍속화 이외에도 산수화와 인물화도 그렸다.

‘일영역’은 1960년대 시골역사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양주시에 이 주변을 혜원 신윤복의 묘단과 연결하는 공원으로 지정하고 관광열차를 운행시켜 조선시대의 거리를 재현하는 ‘풍속화 마을’과 1960~70년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문화성있는 ‘근대 마을’로 특화하기를 제안한다. 여기에는 현대식 건물은 짓지 않는 것이 좋겠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일영역’은 1960년대 시골역사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양주시에 이 주변을 혜원 신윤복의 묘단과 연결하는 공원으로 지정하고 관광열차를 운행시켜 조선시대의 거리를 재현하는 ‘풍속화 마을’과 1960~70년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문화성있는 ‘근대 마을’로 특화하기를 제안한다. 여기에는 현대식 건물은 짓지 않는 것이 좋겠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나는 은평구이든 양주시에든 ‘혜원 신윤복 기념관’을 세운다면 흔쾌히 도울 용의가 있다. 특히 혜원 신윤복의 단묘는 2004년 4월 1일자로 운영이 중단된 ‘일영역’ 뒷길에서 700미터 정도의 거리이니 도보로 10분이 안 되는 거리이다. 이 ‘일영역’은 방탄소년단(BTS)의 뮤직비디오 ‘봄날’의 촬영지라 한다. ‘일영역’은 1960년대 시골역사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나는 양주시에다가 이 주변에서 혜원 신윤복의 묘단과 연결되는 지역을 공원으로 지정하기를 촉구한다. 이 공원에는 조선시대의 거리를 재현하는 ‘풍속화 마을’과 1960~70년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문화성있는 ‘근대 마을’로 특화하기를 제안한다. 여기에는 현대식 건물은 짓지 않는 것이 좋겠다. 또한 (관광) 열차 운행을 부활시켰으면 한다. 내가 이번 10월에 ‘한라산’ 소주 한병을 들고 상경하여 혜원의 가묘를 찾아 볼 예정이다.

“혜원이여~! 그대의 풍속화에서처럼 ‘풍악과 안주가 없다’고 노여워하지는 마시라.”

5. 풍속화를 위한 여적(餘滴)

조선시대 화가로서 삼원(三園) 삼재(三齋)가 있다. 삼원으로 불리는 단원 김홍도(金弘道, 1745~?),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張承業, 1843~1897), 이들은 모두 서얼(庶孼)의 후손이므로 중인(中人) 출신이다. 조선시대 양반과 상인의 중간 계급이다. 따라서 그들은 족보가 남아 있지 못하다. 그렇지만 나는 혜원 신윤복의 세계를 정확히 밝혀냈다.

반면에 삼재로 불리는 겸재 정선(鄭歚, 1676~1759), 현재 심사정(沈師正, 1707~1769), 관아재 조영석(趙榮祏, 1686~1761)은 모두 양반 출신이다. 모두 족보에 올라가 있다. 삼원 삼재 가운데 풍속화를 그린 화가는 단원과 혜원, 그리고 관아재이다. 또한 이외에도 긍재 김득신(金得臣, 1754~1822)도 풍속화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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