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필자는 1993년부터 수년간 월간 『미술세계』에 「한국회화의 재발견」을 연재하였다. 그 7회 연재로 「경립 이신흠 연구」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1994년 3월호(통권 제112호 pp.110~114)에 게재되었으니, 아마도 늦어도 1994년 2월 초에는 탈고하여 원고를 넘겼을 것이다. 꼭 30년 전의 일이다. 그리고 2024년 연초에 다시 그에 관한 글을 쓰게 되었다.

1. 다섯 원종공신에 책록된 경립 이신흠

『디지털도봉문화대전』에서는 언제 나온 『태안이씨세보(泰安李氏世譜)』인지는 밝히지 않고, 경립(敬立) 이신흠(李信欽, 1570~1631)이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다섯 공신의 원종공신으로 녹훈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참고자료 보기]

이른바 ①종계변무(宗系辨誣)에 성공(1589년)한 이듬해인 1590년(선조23) ‘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이 되었고, 또한 ②정여립(鄭汝立)의 난이 평정(1989년)되고 나서 1590년에 ‘평난원종공신(平亂原從功臣)’ 삼등(三等)이 되었으며, ③임진왜란이 끝난 후인 1604년(선조37)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이등(二等)이 되었다. 이후 ④1625년(인조3) 인조반정(仁祖反正)의 공으로 ‘정사원종공신(靖社原從功臣)’이 되었고, ⑤1624년(인조2) 일어났던 이괄(李适)의 난을 진압한 후에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이 되었다. 이렇게 이신흠은 원종공신에 다섯 번이나 녹훈된 상당히 희귀한 기록을 갖고 있다는 것인데, 이제 그 사실의 확인에 들어가 보자.

2. 경립 이신흠의 원종공신 녹훈 사실에 관한 고증

지난 수십 년간 필자는 여러 고서점과 경매에서 원종공신록권이 눈에 띄는 대로 수집했기에 위에서 언급한 다섯 원종공신록권 가운데 4점을 소장하게 되었다.

①『광국원종공신록권(光國原從功臣錄券)』 장16의 후면 9행에 ‘선교랑 이신흠(宣敎郎李信欽)’, 경진자본(庚辰字本), 1590년, 필자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①『광국원종공신록권(光國原從功臣錄券)』 장16의 후면 9행에 ‘선교랑 이신흠(宣敎郎李信欽)’, 경진자본(庚辰字本), 1590년, 필자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①『광국원종공신록권(光國原從功臣錄券)』 ; 경진자본(庚辰字本), 이 녹권은 현전본이 매우 희소하다. 필자 소장본은 이경회(李慶會)에서 내린 녹권이다. 표지를 제외하고 모두 20장으로 1등 137명, 2등 136명, 3등 599명, 합계 872명의 녹훈이 확인되고 있다. 이 녹권 장16의 후면 9행에 ‘선교랑 이신흠(宣敎郎李信欽)’이 나온다. 이신흠을 삼등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같은 면 2~3행에 경립의 부친 ‘부사과 이희량(副司果李希良)’도 기록하고 있으며, 화원 이상좌(李上佐)의 손자이자 화원 이자실(李自實)의 아들인 화원 이흥효(李興孝)도 장16의 앞면 9행에 ‘부호군 이흥효(副護軍李興孝)’로 삼등으로 기록하고 있다.

②『평난원종공신록권(平難原從功臣錄券)』 장13의 앞면 3~4행에 ‘선화 이신흠(善畫 李信欽), 경진자본(庚辰字本), 1590년,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②『평난원종공신록권(平難原從功臣錄券)』 장13의 앞면 3~4행에 ‘선화 이신흠(善畫 李信欽), 경진자본(庚辰字本), 1590년,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②『평난원종공신록권(平難原從功臣錄券)』 ; 경진자본(庚辰字本), 이 녹권은 현전본이 매우 희소하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첨정 유봉서(劉鳳瑞)에 내린 녹권이 1부 소장되어 있다. 표지를 제외하고 모두 15장으로 1등 129명, 2등 144명, 3등 412명, 합계 685명이 녹훈되었다. 이 녹권의 장13의 앞면 3~4행에 ‘선화 이신흠(善畫 李信欽)을 삼등으로 기록하고 있다. 필자에게는 평난공신을 책록한 후 정공신(正功臣)의 공신회맹제(功臣會盟祭)를 기록한 『평난공신회맹록(平難功臣會盟錄)』 한 부가 소장되어 있다. 이 회맹록은 필자 소장본 만이 조사되고 있다.

③『선무원종공신록권(宣武原從功臣錄券)』  장67의 후면 7행 아랫부분에 ‘사과 이신흠(司果李信欽)’, 목활자본, 1604년, 필자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③『선무원종공신록권(宣武原從功臣錄券)』 장67의 후면 7행 아랫부분에 ‘사과 이신흠(司果李信欽)’, 목활자본, 1604년, 필자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③『선무원종공신록권(宣武原從功臣錄券)』 ; 목활자본, 현전본이 상당수 남아있는데. 필자도 2점 소장하고 았다. 선무원종공신은 최소한 1등 559명, 2등 3,510명, 3등 4,939명 등 9,008명의 명단이 확인되는데,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된 자는 총 9,060명이다. 이신흠은 이 녹권 장67의 후면 7행 아랫부분에 ‘사과 이신흠(司果李信欽)’을 이등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신흠 이외에도 같은 면에 화원 임언옥(林彦玉)과 화원 이언충(李彦忠), 화원 이정(李楨), 화원 이증(李澄) 등도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이신흠이 “임진왜란 때 조선으로 온 명나라 장수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라고 하는 사실(史實)이 진실임을 입증하여 준다.

이 원종공신록권에 관해서는 ‘신 잡동산이’ 제42회 연재 「공신 녹훈과 『선무원종공신록권』」를 참조하기를 바란다. [연재글 보기]

④『정사원종공신록권(靖社原從功臣錄券)』 장14의 후면 6행 아랫부분에 ‘사과 이신흠(司果李信欽)’. 목활자본, 필자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④『정사원종공신록권(靖社原從功臣錄券)』 장14의 후면 6행 아랫부분에 ‘사과 이신흠(司果李信欽)’. 목활자본, 필자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④『정사원종공신록권(靖社原從功臣錄券)』 ; 목활자본, 필자 소장본은 정홍임(鄭弘任, 1587~1642)에게 내린 녹권이다. 서울대 규장각에도 소장되어 있다. 이 녹권은 표지를 제외하고 모두 43장으로 약 3,000명이 녹훈되었다. 이신흠은 이 녹권 장14의 후면 6행 아랫부분에 ‘사과 이신흠(司果李信欽)’을 일등으로 기록하고 있다.

⑤『진무원종공신록권(振武原從功臣錄券)』 장9의 후면 9행 아랫부분에 ‘사과 이신흠(司果李信欽)’, 목활자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⑤『진무원종공신록권(振武原從功臣錄券)』 장9의 후면 9행 아랫부분에 ‘사과 이신흠(司果李信欽)’, 목활자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⑤『진무원종공신록권(振武原從功臣錄券)』 ; 목활자본, 현전본이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중앙도서관(2점 소장), 서울대 규장각과 수원화성박물관, 필자 등에게 소장되어 있다. 국립민속박물관본은 후대에 목활자본으로 다시 인출한 것이다. 표지를 제외하고는 모두 77장으로, 녹훈된 자는 1등 642명, 2등 1,088명, 3등 4,475명, 합계 6,205명이다. 이신흠은 이 녹권 장9의 후면 9행 아랫부분에 ‘사과 이신흠(司果李信欽)’을 일등으로 기록하고 있다.

3. 경립 이신흠의 약력과 작품

경립 이신흠이 위의 다섯 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는 『태안이씨세보(泰安李氏世譜)』의 기록은 모두 사실로 확인된다. 이에 따라 그 사실을 넣어 그의 약력을 아래와 같이 정리한다.

경립(敬立) 이신흠(李信欽, 1570~1631) ; 조선중기의 화가이다. 그는 태안이씨(泰安李氏)이다. 자는 경립(敬立)이고, 아버지는 부사과(副司果)를 지낸 이희량(李希良)이다. 그는 탁월한 그림 실력으로 도화서 화원(畵員)이 되었다. 그리고 종계무변의 공으로 1590년에 선교랑(宣敎郎, 종6품)으로 광국원종공신에 녹훈되었고, 같은해 선화(善畫, 종6품)로 평난원정공신 3등에 녹훈되었다. 이신흠은 인물 묘사에 뛰어나 이덕형(李德馨) 등 당대 유명한 신하들과 임진왜란 때 조선으로 온 명나라 장수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고, 이로 인하여 1604년에는 사과(司果, 정6품)로 선무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었다. 그리고 1604년(선조37) 세자책봉주청사(世子冊封奏請使)로 파견된 이정구(李廷龜, 1564~1635) 일행을 따라 명나라에 다녀왔다. 1608년에는 「사천압필경도」를 그렸으며, 1609년(광해군1)에는 명나라에서 사신이 왔을 때 관반사(館伴使) 이정구(李廷龜) 일행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1625년 사과(司果)로 정사원종공신에 녹훈되었고, 같은해에 진무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1628년(인조6) 경주 소재의 집경전(集慶殿)에 있던 태조 이성계의 영정(影幀)을 수리한 공로로 동반(東班) 6품 실직(實職)을 제수 받았다. 그의 관직은 부사직(副司直, 종5품)에 이르렀다.

경립 이신흠은 「동계팔경도(東溪八景圖)」와 「섬강도(蟾江圖)」 같은 실경 산수(實景山水)를 그렸다는 기록도 있지만, 작품은 「사천장 팔경도(斜川庄八景圖)」와 「초충도(草蟲圖)」 가 현전한다. 경립이 다섯 원종공신에 녹훈된 것은 공신들의 초상화를 그려 그들을 위무(慰撫)한 데 있다.

4. 창동 태안이씨 묘역

현재의 서울시 도봉구 창동과 노원구 월계동 일대의 초안산에는 조선시대의 분묘군(墳墓群)이 있다. 이른바 ‘초안산분묘군(楚安山墳墓群)’이다. 서울 ‘초안산분묘군’은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 산202-1번지와 노원구 월계동 산8-3번지 등지에 위치한다. 조선전기 15세기 이후부터 조선 말기까지 조성된 분묘이다.

2000년 한국미술사연구소의 지표조사에 의하면 도봉구와 노원구 모두 합쳐 총 1,154기의 묘와 상석 511개, 향로석 210개, 석인상 169개, 묘비 182개, 비석 대좌 123개, 석망주 58개, 초석 2개, 장명등 1개 등 약 1,256개의 지표상의 석물이 확인되었다. 도굴 및 이장 등 많은 우여곡절이 있으나, 현재는 돌보는 후손이 없어서 이름 없는 묘와 파손 매몰된 석물이 산재하고 있다.

이 초안산 분묘군의 가장 북쪽에, 지번으로 창동 산189-1 일대의 태안이씨묘역(泰安李氏墓域)에는 증한성부판(贈漢城府判) 이신흠(李信欽, 1570~1631)과 그의 아들 증공조참의(贈工曹參議) 이홍달(李弘達), 이홍달의 아들인 증형조참판(贈刑曹參判) 이상훈(李尙薰, 1623~1674), 이상훈의 아들인 증공조판서(贈工曹判書) 이봉령(李鳳齡, 1653~1724)과 증공조참판(贈工曹參判) 이령학(李齡鶴), 이봉령의 아들인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이이해(李以楷, 1707~1771)의 묘가 있다.

이 가운데 경립 이신흠은 조선중기의 화가이다. 그의 셋째 아들 이홍달은 큰형 이세달(李世達)에 이어 1623년(인조 1) 산원(算員)을 양성하는 주학에 입학하였다. 이후 종6품의 주학 별제에 올랐는데, 조선 말기까지 이홍달의 자손 100명이 주학(籌學)에 들어가 산원이 되었다. 요즘의 말로하자면 대단한 수학자(數學者) 가문이었던 셈이다. 이들의 후손 가운데서 세계적인 수학자가 나왔으면 싶다.

이 태안이씨 묘역은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어 정비가 잘되어 있는, 조선시대 중인 신분의 묘 형태를 추정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장소이다. 신분으로 인하여 석인을 조성하지 않았고 묘표 석상 향로석 석망주 등을 배치하였는데, 이 석물들은 18~19세기 마정질을 한 석물로서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5. 맺음말

경립 이신흠은 고관대작은 아니었다. 미관말직을 면한 정도였으나, 그는 초상화에 능하였고, 맡은 화원(畫員) 직에 충실하여 다섯 번이나 원종공신의 녹훈을 받았다. 매우 드믄 예이다.

이 글을 쓰면서 30년전 필자가 월간 『미술세계』에 기고한 「경립 이신흠 연구」를 다시 찾아서 보았다. 월간지 지면에 교정한 부분이 남아있다. 지금 보면 당시의 기고문 내용을 바로 잡고 증보할 부분이 있다. 이신흠에 대한 종합적인 글은 다음 기회로 미룬다.

그러나 여기에서 분명히 하고자 하는 것은 “그의 그림 5점이 들어있는 『사천시첩(斜川詩帖)』 4책4첩은 조선중기 문인 34인의 자필 시문 70여 폭이 들어있어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높아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이 필요하다”라는 사실이다.

『이덕형 초상 초본(李德馨肖像初本)』, 한음 이덕형 초상 초본은 이신흠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한음은 “체구가 컸고 미남자(美男子)”라고 한다. 2019년 4월 10일자에 작자 미상인 상태로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이덕형 초상 초본(李德馨肖像初本)』, 한음 이덕형 초상 초본은 이신흠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한음은 “체구가 컸고 미남자(美男子)”라고 한다. 2019년 4월 10일자에 작자 미상인 상태로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경립 이신흠과 필자는 324년의 시차를 넘어서는 인연이 있는 것 같다. 나는 그에 대한 첫 글을 쓴 이후 30년이 되면서 이번에 그러한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인물 묘사에 뛰어나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의 초상을 그렸다”라고 한다. 한음은 나의 방조(傍祖)이며, 소년 시절의 내게 많은 자극을 준 인물이다.

경립 이신흠은 내가 글을 쓰기 이전까지는 주목받지 못하던 거의 잊혀진 화가였으니, 결국 필자가 그를 우리 회화사의 수면위로 끌어 올렸다. 이것은 그가 한음의 초상화를 그린 것에 대한 보답을 한음의 방손(傍孫)으로서 내가 하게 된 것이 아닐까 한다.

현재 한음 이덕형의 초상화는 여러 점 현전하고 있다. 1980년경에 종손가에서 소장품(반신상)을 실견한 적이 있는데, 가장 오래된 초상화는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덕형 초상 초본(李德馨肖像初本)』이다. 이덕형 초상 초본은 조선 중기의 명신 이덕형의 얼굴을 묘사한 초상화이다. 이 초상화는 이덕형이 1613년(광해군 5)에 익사공신 및 형난공신의 공신 녹훈를 받았을 때 국가로부터 수여받은 공신상의 초본으로 추정되느니 만치 이신흠의 작품으로 판단된다. 이 초본은 2019년 4월 10일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외에도 조선후기에 이한철(李漢喆, 1808~?)이 이모(移模)한 전신상을 비롯한 몇 점이 있다. 한음의 모든 초상화를 조사하여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일괄 지정할 필요가 있다.

경립 이신흠의 후손으로 현대 화가가 한 분이 있다고 한다. 수십 년 전에 통화한 적이 있는데, 지금은 그의 이름을 잊었다. 기회가 되면 조만간에 만나 그 후손의 미술 작품을 보고 싶다. 그리고 이 겨울이 지나 날이 풀리면 그 후손과 함께 이신흠의 묘소를 찾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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