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공신(功臣)에는 국가나 왕실의 안정에, 그리고 국난극복에 큰 공훈이 있는 정공신(正功臣)과 작은 공훈이 있는 원종공신(原從功臣)이 있다.

조선왕조에서는 28종의 공신이 녹훈(錄勳)되었는데, 그중 광해군이 책록한 4종의 공신을 포함한 6종의 공신은 후일 삭훈(削勳)된다. 이러한 조선왕조의 공신은 선무공신(宣武功臣)과 호성공신(扈聖功臣) 이외에 대부분은 국왕의 옹립이나 왕실의 안정을 목적으로 파생한 것이고, 외적의 침입에 직접 싸운 무사나 의병들에게 준 공신은 선무원종공신의 녹훈이 유일하다.

1. 선무공신과 선무원종공신의 녹훈

선무공신(宣武功臣)은 임진왜란 때 무공을 세웠거나 명나라에 병량주청사신(兵糧奏請使臣)으로 가서 공을 세운 사람에게 준 칭호이다. 선무공신의 경우 정공신은 1등 3인, 2등 5인, 3등 10인으로 모두 18인이고, 원종공신은 9,060인에 이른다.

선무공신에는 모두 18인이 봉해졌는데, 1등에는 이순신(李舜臣)⸱권율(權慄)⸱원균(元均) 등 3인의 장수가 선정되었다. 이들은 관작과 품계가 3단계 올랐으며, 상으로 병졸 10명, 노비 13명, 마부 7명, 전지 1백 50결, 은자 10냥, 말 1필을 받았다.

2등에는 신점(申點)⸱권응수(權應銖)⸱김시민(金時敏)⸱이정암(李廷馣)⸱이억기(李億祺) 등 5인이 선정되었다. 이들은 관작과 품계가 2단계 올랐으며, 상으로 병졸 6명, 노비 9명, 마부 4명, 전지 80결, 은자 7냥, 말 1필을 받았다.

3등에는 정기원(鄭期遠)⸱권협(權悏)⸱유사원(柳思瑗)⸱고언백(高彦伯)⸱이광악(李光岳)⸱조경(趙儆)⸱권준(權俊)⸱이순신(李純信)⸱기효근(奇孝謹)⸱이운룡(李雲龍) 등 10인이 선정되었다. 이들은 관작과 품계가 1단계 올랐으며, 상으로 병졸 4명, 노비 7명, 마부 2명, 전지 60결, 은자 5냥, 말 1필을 받았다.

그런데 당시 공신의 선정을 둘러싸고 조정 안에서 당파 간의 대립이 벌어지면서 선무공신의 선정이 지나치게 축소되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의 전공과도 무관하게 이루어졌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초기에는 곽재우(郭再祐)⸱우치적(禹致績)⸱배흥립(裵興立)⸱박진(朴晉)⸱김응서(金應瑞)⸱정기룡(鄭起龍)⸱한명련(韓明璉)⸱안위(安衛)⸱이수일(李守一)⸱김태허(金太虛)⸱김응함(金應緘)⸱이시언(李時言) 등도 왜군 정벌에 큰 공을 세운 것으로 인정되었으나, 논의과정에서 이들은 녹훈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들 이외에도 의병을 이끌었던 정인홍(鄭仁弘)⸱김면(金沔)⸱김천일(金千鎰)⸱고경명(高敬命)⸱조헌(趙憲) 등이 모두 제외되었고, 일부 인물은 공이 없는데도 유력인사의 추천으로 공신에 포함되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당시 일화가 있다. 한음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은 임란 공신의 녹훈에 들지 못하였다. 이 사실을 후에 안 오성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이 한음에게 말하길 “자네는 논공행상 시에 어디에 가 있었는가?”라고 물었다고 한다. 한음은 자신의 공을 전혀 내세우지 않고 침묵하여 정공신의 논공행상에서 제외되었다는 일화이다.

선무공신의 선정을 둘러싸고 논란이 계속되자 조정은 1605년 음력 4월 16일에 선무공신 책봉에서 빠진 9,060명을 선무공신과 마찬가지로 1등, 2등, 3등으로 구분해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봉했다. 선무원종공신에는 의병장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2. 한음 이덕형의 임란 시 행적과 공신책록 사양

한음 이덕형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북상 중인 왜장 고니시(小西行長)가 충주에서 만날 것을 요청하자, 이를 받아들여 단기(單騎)로 적진으로 향했으나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왕이 평양에 당도했을 때 왜적이 벌써 대동강에 이르러 화의를 요청하자, 홀로 배를 타고 나가 왜군의 사신 겐소(玄蘇)와 화의를 교섭하여 대의로써 그들의 침략을 공박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 뒤 정주(定州)까지 왕을 호종했고, 청원사(請援使)로 명나라로 가서 원병을 요청하여 성공하였다. 귀국 후 대사헌이 되어 명군을 맞이했으며, 이어 한성판윤으로 명나라의 장군 이여송(李如松)의 접반관(接伴官)이 되어 전란 중에 같이 행동하였다. 1593년 병조판서, 이듬해 이조판서로 훈련도감당상을 겸하였다. 1593년 선조는 이덕형의 공을 인정하여 병조판서에 임명하였고 이듬해에는 이조판서가 되고 조선의 군사 편제를 새롭게 만든 훈련도감(訓鍊都監) 당상에 임명하였다.

1595년 경기⸱황해⸱평안⸱함경 4도체찰부사가 되었으며,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어사 양호(楊鎬)를 설복해 서울의 방어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명군과 울산까지 동행, 그들을 위무하였다. 1598년 우의정에 승진하였고 이어 좌의정에 올라 훈련도감도제조를 겸하였다. 이어 명나라 제독 유정(劉綎)과 함께 순천에 이르러 통제사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적장 고니시의 군사를 대파하였다.

1601년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로 경상⸱전라⸱충청⸱강원 4도체찰사를 겸해, 전란 뒤의 민심 수습과 군대 정비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대마도 정벌을 건의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602년 영의정에 올랐다. 1604년 이항복(李恒福)이 이덕형의 공을 들어,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녹훈할 것을 건의했으나 본인의 사양과 시기하는 자들의 반대로 책록되지 못하였다.

이후 잠시 한직에 있다가 1608년 광해군의 즉위와 동시에 영의정으로 복직하였다. 명나라에서 광해군(光海君)을 적통을 이어받은 왕으로 인정하지 않자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고, 1613년(광해군 5)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과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북인(대북파)와 대립하였으나, 결국 모든 관직이 삭직되고 낙향하여 경기도 양근(楊根)으로 물러났다가 병을 얻어 1613년 사망했다.

이렇듯 임란 극복을 위하여 동분서주했던 이덕형은 영의정을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선무공신과 호성공신의 정공신이 되지 못하였고, 다만 1605년에 ‘영중추부사 이덕형(領中樞府事李德馨)’으로 선무원종공신 1등으로 녹훈되었다(참조: 『선무원종공신록권』 장6의 뒷면 9행).

이덕형이 호성공신의 녹훈을 사양한 것은 그는 논공행상의 공치사 당쟁과 시기(猜忌)에 말려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임란 시에 국난극복에 헌신하여 생명을 바친 정기룡(鄭起龍) 곽재우(郭再祐) 김천일(金千鎰) 고경명(高敬命) 등등도 선무공신이 아니라 선무원종공신 1등으로 녹훈되었다. 반면에 이순신을 음해 모략하고 조선의 수군을 괴멸(壞滅) 상태로 몰아넣은 원균(元均)은 선무공신 1등으로 녹훈되었다. 정치 당쟁이 빚은 놀라운 역사 농락이다.

3. 현전본 『선무원종공신록권』에 대하여

선무원종공신에 9,060명이 책록되었으므로 『선무원종공신록권』 목활자본은 상당한 수량이 출판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확인된 현전본은 불과 수십 부 정도가 되는 것 같다. 9,060명 모두에게 주어진 것 같지는 않다.

7년간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직후 1604~5년 당시의 국가 경제와 산업은 거의 붕괴 직전이었고, 종이가 부족하여 1부 남아 있던 왕조실록의 사고본 복본 제작마저도 어려움이 많았다. 한 책이 103장이나 되는 록권을 9,060부 발행한다는 것은 933,180장 이상의 종이가 필요했을 것인데, 동시에 『호성원종공신록권』도 발행한다면 그것은 엄청난 일이 된다.

따라서 선무와 호성 양(兩) 공신(功臣) 전부에게 록권을 주지는 못한 것 같다. 현전하는 『선무원종공신록권』의 소장처는 아래와 같다.

국가지정문화재

①보물 (지정일, 1989.5.23.) - 양산이씨종가고문서(梁山李氏宗家古文書) 6종에 포함. 양산유물전시관 관리 (이몽란 녹훈본).

②보물 (지정일, 1996.1.19.) - 밀성박씨삼우정파종중고문서(密城朴氏三友亭派宗中古文書) 17점에 포함 (박경신 녹훈본).

③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지정일, 1988.3.16.) - 영산사소장문서일괄(英山祠所藏文書一括)에 포함.

④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지정일, 1988.12.21.) - 반계사유물일괄(盤谿祠遺物一括) 5종에 포함. 반계사 소장본 (丁景達 녹훈본).

⑤광주광역시 (지정일, 1998.5.7.) - 이신의종가소장고문서(李愼儀宗家所藏古文書) 7종에 포함, 국립광주박물관 소장 (이신의 녹훈본).

⑥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지정일, 1998.11.13.) - 밀양박씨종중유품 및 고문서(密陽朴氏宗中遺品 및 古文書)에 포함 (박몽룡 녹훈본).

⑦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지정일, 2000.1.25.) - 박세항공신록권 및 상서문(朴世項功臣錄券 및 上書文) 4점에 포함 (박세항 녹훈본).

⑧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지정일, 2009.8.31.) - 포항 합천이씨전서공파소장유물(浦項 陜川李氏典書公派所藏遺物)에 포함 (이응표 녹훈본).

⑨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지정일, 2017.7.20.) - 선무원종공신녹권(이희급)(宣武原從功臣錄券(李希伋)) 1책 (이희급 녹훈본), 남해군 소장.

⑨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지정일, 2018.6.21.) - 박홍정 선무원종공신녹권(朴弘貞 宣武原從功臣錄券) 1책 (박홍정 녹훈본), 창원대학교 박물관 소장.

⑩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지정일, 2018.8.23.) - 고흥 김붕만 선무원종공신녹권과 신위단비(高興 金鵬萬 宣武原從功臣錄券과 神位壇碑) 2종에 포함 (김붕만 녹훈본), 김해김씨예회문중 소장.

⑪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지정일, 2022.3.25.) - 조웅 선무원종공신녹권(趙熊 宣武原從功臣錄券) 1점 (조웅 녹훈본), 충주시청 소장본.

이외에도 비지정 문화재로는 국립중앙박물관(2점), 국립진주박물관, 국립광주박물관, 울산박물관, 진주역사박물관, 경기도박물관, 국립대구박물관, 국립중앙도서관, 서울대 규장각 등등 10여 군데 소장되어 있다. 비지정 소장본으로도 몇몇 문중과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 선무원종공신 녹훈자가 9,060명인데 비하여 현전하는 인본은 의외로 50여 본이 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녹권은 책 첫 장의 두 번째 줄에 책을 받은 분의 직책과 성명을 인쇄하고 있어 서지학적으로 볼 때 같은 녹원의 각 책마다 유일본으로 규정할 수 있다.

『선무원종공신록권』은 실록목활자본으로 첫장과 마지막 장에 「시명지보(施命之寶)」가 찍혀 있다.

4. 필자 소장의 『선무원종공신록권』

『선무원종공신록권』 첫 부분, 첨정(僉正) 염언상(廉彦祥) 녹훈본, 1605년, 실록목활자. [사진 제공 – 이양재]
『선무원종공신록권』 첫 부분, 첨정(僉正) 염언상(廉彦祥) 녹훈본, 1605년, 실록목활자. [사진 제공 – 이양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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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무원종공신록권』 끝 부분, 첨정(僉正) 염언상(廉彦祥) 녹훈본, 1605년, 실록목활자. [사진 제공 – 이양재]

필자도 『선무원종공신록권』 2점을 소장하고 있는데, 두 점 모두 경매에서 낙찰받았다. ⑴한 점은 부장(部將) 김언벽(金彦璧) 녹훈본이고, ⑵다른 한 점은 첨정(僉正) 염언상(廉彦祥) 녹훈본이다.

⑵염연상 녹훈본은 ①장1 후면 제2행의 상단 4자와 ②장101 전면 끝부분과 ③후면 첫 부분에서 6행 부분이 절취(截取)되어 있으나 다른 부분의 보존 상태는 ⑴김언벽 녹훈본보다도 양호하다. ⑵염연상 녹훈본의 절취된 부분을 ⑴김언벽 녹훈본에서 찿아보니, ①장1 후면 제2행의 상단 4자는 ‘임해군 진(臨海君珒)’이다.

임해군은 선조의 맏아들로서 성품이 사나워 세자로 책봉되지 못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순화군(順化君)과 동북지방(함경도)으로 피난 가서 가토(加藤淸正)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석방되었고, 1609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북파(大北派)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이 모해하여 이복동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김제남(金悌男)과 함께 역모죄(逆謀罪)로 몰려 살해되었다. 그러므로 1605년 선무원종공신으로 녹훈되었으나, 1609년에는 역적이 되었으므로 절취 삭제한 것이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녹훈자 미상의 『선무원종공신록권』의 그 부분도 절취 삭제되어 있으며, 서울대 규장각 소장의 녹훈자 박대걸의 록권에서는 ‘임해군 진(臨海君珒)’의 이름의 상하좌우에 먹선을 그어 네모 안에 가두어 놓았다. 반면에 ⑴김언벽 녹훈본에서는 원 상태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부장 김언벽은 해풍김씨에서 분적한 정주김씨의 최고(最高) 인물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다른 기록은 없어, ⑴김언벽 녹훈본은 매우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반면에 염언상은 1552년 전라도 금성(金城)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릴 때부터 병서 읽기를 좋아했으며 무예를 연마하여 명종(明宗) 때 무과에 급제하여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를 지낸 후에 사임하고 낙향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이순신 휘하에서 순천, 옥포, 한산 등 해전에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워 훈련원 첨정(訓練院 僉正)에 오르고, 그 뒤 이순신 장군이 모함을 받아 투옥되자, 낙향하여 차남 염탁(廉倬)을 비롯하여 의병들을 이끌고 남원에서 활약하였다.

정유재란 때에는 의병장 권율(權慄) 장군 막하로 출전하여 하동, 악양곡의 전투에서 공을 세워 유격장(遊擊將)이 되어 곽재우와 더불어 의령, 함안(宜寧 咸安)을 지키고, 추풍령을 방어하고 청안(淸安)으로 진격하다 적군의 총탄에 맞아 1597년 9월에 향년 46세로 순국하였다. 현재 경상남도 통영시에 있는 그의 묘는 시도지방기념물로 지정된 것을 보면 그는 크게 기념되고 있다.

5. 공신 녹훈의 의미를 현대에 생각해 본다

조선왕조 28개 공신 가운데 26종은 왕위 쟁탈이나 내란의 제압, 왕실 수호에 공을 세워 녹훈한 것이다. 반면에 선무공신은 임진왜란의 외침 항쟁의 공을 기리려 녹훈한 것이며, 호성공신은 임진왜란시 왕을 호종(扈從)한 공을 기리려 녹훈 한 것이니, 이 두 공신은 의미가 깊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외침 항쟁에서 피를 흘려 공을 세운 많은 사람이 원종공신에 포함되어 있지 못하다. 특히 승려 사명당이라든가 귀화하여 공을 세운 김충선(金忠善, 1571~?) 등등은 없다. 선무원종공신에 이름을 올린 9,060명보다도 여러 배에 달하는 백성들이 임진왜란 시의 항쟁에 나서서 이름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독립운동가들도 이름과 역사 흔적이 남아 훈장을 추서를 받은 분들은 빙산의 일각이 채 되지 않을 것이다.

원종공신에 녹훈된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권문세가의 배경으로 포함되었을 것이고, 현재 정부의 대한민국장 수여는 조선시대의 정공신 녹훈과 같은 것이지만, 정치적 목적에서 외국인에게도 남발하였다. 그리고 대한민국장 이외의 다른 훈장들은 원종공신에 녹훈된 것과 같은 것이지만, 이 역시 현대의 권문세가에 의하여 친일파 일부가 부정 수급받기도 하였다. 반면에 의당 독립운동가로 추서를 받아야 할 분들이 못받은 경우도 많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조선시대 명종 때의 위사공신은 선조에 의하여, 광해군 때 녹훈된 4개의 공신, 위성공신⸱익사공신⸱정운공신⸱형난공신은 인조에 의하여 삭훈(削勳)되었고, 경종 때의 부사공신은 영조에 의하여 삭훈되었다. 이 여섯 공신은 사화(士禍)나 모해로 인하여 발생한 사건을 처리하는 데 공을 세웠다고 녹훈한 것이므로 당연히 삭훈되어야 했다.

이는 거짓에 의거하여 독립유공자나 국가유공자로 포상을 받은 현대의 일부 보훈 모리배들을 척결하는 데 참고하여야 할 사항이다. 상벌의 운용은 엄격하고 정당하여야 한다. 한비자(韓非子)에 의하면 그래야 법치(法治)가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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