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빨치산 변숙현 선생을 기리는 추도식이 22일 오후 6시 성남중앙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렸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여성 빨치산 변숙현 선생을 기리는 추도식이 22일 오후 6시 성남중앙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렸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변숙현 선생님은 제겐 빨치산 여전사가 아니라 따뜻한 할머니셨다.”

백수를 누리고 소천한 여성 빨치산 변숙현 선생을 기리는 추도식이 22일 오후 6시 성남중앙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렸다.

서향수 성남여성회 회장은 추도사에서 변숙현 선생을 처음 만났을 때의 심정을 이같이 밝히고는, 생전에 고인에게 들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했다. 한마디로 고인의 운명을 결정지은 슬프고도 기구한 에피소드였다.

서 회장은 “선생님이 오래전 활동하실 때 남편을 통 못 봐서 보고 싶기도 하고 해서, 조직생활 하는 사람이 그러면 안 되는데 하루 종일 강가 바위 위에 앉아있다가 돌아왔는데, 사람들이 어디 갔다 왔냐며 남편이 다녀갔다고, 진주로 내려가는 길에 일행들과 함께 왔었다고 말을 했다”면서 “운명의 장난이란 말이 있는데 그 말이 사실이라고 하셨다”고 기억했다.

계속해서 서 회장은 “그 길로 선생님이 100리가 넘는 길을 걸어서 진주로 찾아갔는데 진주에서 ‘남진’이란 글자만 써 있는 걸 보고 돌아왔다”고는 “선생님은 그 후로 남편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고 하셨다”며 안타까움을 소개했다.

고인은 장기수이기에 통일광장에서, 여성이기에 전국여성연대에서 그리고 거주지가 성남지역이기에 성남여성회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날 추모식에는 여성들, 특히 성남지역 여성들이 많이 참석했다.

자연히 ‘말잔치’를 이룬 추도식에서도 여성 인사들의 추도사가 주를 이뤘다.

추도사를 하고 있는 임방규 통일광장 전 대표.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추도사를 하고 있는 임방규 통일광장 전 대표.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이날 추도사는 임방규 통일광장 전 대표를 시작으로 윤희숙 진보당 대표, 한미경 전국여성연대 상임대표, 김미희 전 의원, 서향수 성남여성회 회장, 손미희 전 전국여성연대 상임대표, 최은아 6.15남측위원회 사무처장, 김지영 해솔내과 원장, 조순덕 민가협 회장 순으로 이어졌다.

구순을 넘긴 임방규 전 대표는 백수를 누린 고인이 들으라는 듯 “저희들이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기에 이제 만나면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더러 한다”면서, 한 동지가 “우리 잘 살았어?”하고 물으면 다른 동지가 “참 잘 살았고 말고”라고 답한다면서 “외부 사람들은 우리 대화를 이해 못할 거야”라고 빨치산과 장기수로서의 삶의 편린을 내보였다.

윤희숙 진보당 대표는 “선생님은 늘 후배에게 더 좋은 나라, 자주국가를 물려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해왔다”면서 “그럴수록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는다”고 결의를 밝혔다.

한미경 전국여성연대 상임대표는 “선생님께 배울 게 더 많은데 이제 뵐 수 없게 된 것이 너무 가슴 아프다”고는 “백 살의 연세임에도 선생님을 보내는 것이 너무 아쉽다”고 진한 아쉬움을 표했다.

김미희 전 의원은 “선생님은 통일운동만이 아니라 여성운동에도 관심이 많았다”고는 “성남에서 활동한 선생님 덕분에 성남에는 여성운동이 많이 활성화돼 있다”고 고인의 활동을 기렸다.

손미희 전 전국여성연대 상임대표는 “선생님과 지리산과 회문산에 간 적이 있다”면서 “선생님은 나이가 드셔서 평지도 잘 못 걷는 편인데 희한하게 산에 갈 때 선생님의 모습이 가장 편안하고 잘 걸으셨다”며 놀라워했다.

최은아 6.15남측위원회 사무처장은 “2000년에 사회활동을 처음 할 때 선생님을 뵈었다. 그때 변숙현 선생님과 함께 지금은 작고하신 박정숙, 김선분 선생님과도 함께 만났다”면서 “세 분 모두 자그마한 체구에서 그렇게 열심히 투쟁할 수 있는 근원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늘 궁금해 했다”며 오랜 긍금증을 전했다.

김지영 해솔내과 원장은 “그전에 가락시장 근처에 살 때 전철에서 선생님을 자주 만났다”면서 “나는 퇴근을 하고 귀가하는 길이었는데 선생님은 늘 시내에서 시위를 하고 성남 댁으로 들어가시는 길이었다”고 회고하고는 “선생님은 자그마한 체구이지만 담백하고 단단하고 그리고 순수하셨다”고 기렸다.

조순덕 민가협 회장은 “선생님은 민가협 어머니들에게 많은 추억을 남겨 주셨다”고는 “전철표를 종이딱지로 사용하던 때 선생님이 전철표를 어디서 구해왔는지 잔뜩 들고서 목요집회에 오셔서는 집회 참가자들에게 종이 전철표를 일일이 나눠주셨다”고 따뜻한 일화를 전했다.

계속해서 전남병 ‘고난함께’ 목사, 조원호 통일의길 대표, 이태형 범민련남측본부 의장, 한충목 한국진보연대 상임대표의 추도사가 이어졌다.

고인의 삶과 활동을 엮은 동영상.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고인의 삶과 활동을 엮은 동영상.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긴 추도사 행렬 중간중간에 가수 이수진 씨의 ‘심장에 남는 사람’ 등의 노래와 양은미 씨의 오카리노 연주가 이어졌으며 그리고 고인의 삶과 활동을 엮은 동영상과 사진이 상영되었다.

끝으로 고인의 손자가 나서 가족인사를 대신했다. 손자는 “할머니는 우리를 사랑과 인자함으로 키우셨다. 그리고 할머니는 통일을 위해 사셨다”고는 “우리도 통일이 이뤄지길 바란다. 그 길에 우리 가족들도 함께 하겠다”며 고인의 뜻을 따르겠다고 짧고 굵게 밝혔다.

권낙기 통일광장 대표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추도식은 추도사를 한 인사들 외에도 조영건 통일원로, 장남수 유가협 회장 등을 비롯해 80여명의 추모객들이 참여했다.

권낙기 통일광장 대표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추도식은 추도사를 한 인사들 외에도 조영건 통일원로, 장남수 유가협 회장 등을 비롯해 80여명의 추모객들이 참여했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권낙기 통일광장 대표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추도식은 추도사를 한 인사들 외에도 조영건 통일원로, 장남수 유가협 회장 등을 비롯해 80여명의 추모객들이 참여했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한편, 1924년 전남 장성군에서 출생한 고인은 1945년 남로당 전북 장수군당위원장을 역임한 박태원과 결혼했고, 해방공간에서 여맹 활동을 벌이다 1950년 빨치산으로 입산, 1952년 군경토벌대에 생포됐다.

남원 포로수용소와 광주 포로수용소를 거쳐 징역 20년형 선고받고 옥중 생활 중, 1960년 재심 판결을 받아 출소했다.

1990년부터 통일광장과 전국여성연대, 성남여성회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했으며, 지난 20일 소천했다.

다음은 병석에 있는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이 고인의 추도식 후 고인을 기리며 보내온 추도사 전문이다.

 

반봉건에서 반미자주화까지 백수를 누리시고 가신 여성빨치산 변숙현 선생님
[추도사]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 

 

부끄럽게도 몸이 마음 같지 못해 선생님 가시는 영결추도의 자리에도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비록 찾아뵙지는 못했어도 새해를 맞거나 명절 때마다 전화인사를 드리면 선생님께서 “우리 다 같이 자주통일세상을 위해 힘을 모읍시다”고 하시던 결의의 말씀이 아직도 귀에 남아 있습니다.

코로나 전염병이 돌기 전까지만 해도 양심수후원회 새해인사 모임에 함께 하시며, 양심수도 국가보안법 없는 자주통일세상을 이루자며 통일일꾼들을 격려해 주셨는데, 그러나 끝내 평생 염원 보시지 못하시고 모진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선생님은 1924년 전남 장성군 북일면에서 가난한 농가의 1남1녀 맏따님으로 태어나셨습니다. 봉건적 인습이 남아 있는 변씨성의 집성촌이었고, 그래서 양반, 상놈, 남·녀사이 차별이 심한 집안과 마을에서 자라셨습니다. 여자이기에 학교에 가는 것은 엄두를 못내고 있었지만 당시 사돈 사이 오고 간 편지를 ‘사돈서’라는 국문편지가 있었는데 그것을 교본으로 이웃과 함께 3년간 국문을 익히셨다고 하셨습니다.

1943년 선생님 집안에 일대 큰 전환을 맞게 되었습니다.

1931년 일제 식민지 지배 속에 점점 살기가 힘들어 객지로 나가셨던 아버님이 뜻밖의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어머님 앞으로 보낸 편지에는 약간의 돈을 부치면서 아버님께서 계신 북만주로 오든지 고향에서 살던지 좋을 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어머님은 당시 일제 말기 징용이네 정신대네 흉흉하던 고향땅을 등지고 두 남매와 함께 아버님 계신 곳으로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낯선 이국땅에서 고국을 떠나온 동포들을 만나 나라를 빼앗긴 슬픔을 함께하며 항일의식을 익히게 되고 아버님으로부터 남만주의 백두산을 근거로 항일 독립투쟁을 벌이고 있는 김일성부대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고향에서 봉건인습에 대한 저항심을 키워 오셨고 세상이 어지러운 것이 일제 침략과 식민지 지배라는 것을 어렴풋이 듣고 있었지만 이곳 만주로 오시어 실감하게 되셨습니다. 한때 젊은 패기로 남만주 항일투쟁 현장으로 달려가려고도 했지만 어머님의 권고로 아주 착실하다는 고향 총각과 1945년 5월 결혼을 하시게 되셨습니다.

1945년 8.15 조국광복을 맞아 선생님 가족은 동포들과 함께 고국 - 고향땅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선생님은 남편(박태원, 뒤에 전북 장수군당위원장)과 함께 전북 순창으로 귀국하셨습니다. 해방된 조국땅엔 자주독립국가를 세우기 위한 모든 지역에서 자치기구로서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습니다. 순창지역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남편은 새로운 외세 미군정을 반대하고 인민위원회와 당건설 등을 위한 일로 줄창 밖에 나가 있었고, 옷 갈아입을 때만 잠깐씩 들르곤 했다고 하셨습니다.

1947년, 아드님을 출산하시고 선생님 또한 여성동맹과 남로당에 가입 본격적인 사회활동을 하셨습니다. 1948년 4월 남편을 볼 수 없었는데 뒤에 알았지만 남편은 1948년 4월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북행(평양) 했었고, 곧이어 수배령이 떨어지고 경찰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곤 했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들에게 초대한 일 없다며 대거리로 싸워 쫓아 보내곤 했다고 하셨습니다.

1948년 봄 남편에 이어 선생님까지 수배령이 떨어져 한 돌된 어린것을 업고 다른 면으로 피해 있다가 3일 만에 집에 돌아와 보니 기둥을 톱으로 썰어 집이 기우뚱하니 내려앉고 살림살이 들은 모두 박살내어 사람이 살 수 없게 폐가가 된 상태였답니다. 그러나 그 움막 같은 데서 살아가며 당 세포 활동도 했고 때로는 체포령에 남원과 임실, 동생이 국방경비대로 근무하고 있는 대전 유성까지 피해 다니셨고 어린것 들쳐 업고, 보따리 장사도 했으며 경찰 추적을 피해 이름도 '김현숙'이라고 고쳐 부르기도 했다고 하셨습니다.

1950년 6월 선생님 말씀대로 ‘조국전쟁’(조국해방전쟁)이 일어나요. 전라북도지역도 해방이 되자 선생님은 수배령에서 해방되어 남원 여맹으로 가서 병원일을 하셨습니다. 다시 순창으로 돌아와 돌계면 여성동맹 일을 맡아 하셨습니다. 1948년 이후 만나볼 수 없었던 남편이 돌아와 옛집을 다녀갔고 전라북도 도당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100리 길을 걸어 가보았으나, 이미 그곳을 떠났고, '야영훈련소'로 가보라는 말에 또다시 달려갔으나 ‘태백산 빨치산부대’였던 남편은 남해안 쪽으로 남진하고 있어 만나질 못했다고 하셨습니다.

1950년 초가을 선생님은 '일시적 후퇴시기' 4살짜리 아드님을 시부모님께 맡기고 순창지역에서 입산하셨습니다. 그것은 1951년 초까지 '해방구'였고 서울에서 학교 다니던 시동생도 의용군으로 입대하여 순창지역에서 입산했으며 남편과 연락이 되어 참으로 4년 만에 모두 빨치산 신분으로 산에서 마주할 수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남편이 선생님께 "생포란 있을 수 없다. 각오가 되어 있는가?"라며 "몸조심하고 건투를 빈다"고 전투원으로 냉철한 대화가 있었음을 회상하셨습니다. 오랜만에 짧게 만나고 헤어지면서 뒤를 돌아보니 "그분도 돌아보고 손들어 주었다"고 남편과의 마지막 모습을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생애 가장 보람있게 살았던 때가 바로 “저기 저 산에서 큰 포부를 갖고 차별 없는 세장 - 인민해방세상을 실감하며 외세와 맞서 싸웠던 시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보람된 삶도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952년 2월 2차 공세 때 선생은 남원(혹은 순창 용골산)에서 이른바 군경토벌대에 체포되었습니다. 남원 포로수용소를 거쳐 광주 포로수용소에 반년 동안 수용되었다가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사형 구형에 20년 징역형 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빨치산(유격대)은 제네바협정에 따라 정규군과 다름없이 전쟁포로로 인정되어 전쟁이 끝나면 본국 또는 소속 부대로 송환하게 되었지만 당시 군당국은 협정에 반하는 군사재판에 회부하여 중형을 선고했던 것입니다.

형이 확정된 뒤 선생님은 광주형무소에서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고, 그곳에 갇혀 있던 박선애·박순애 자매 빨치산을 만나시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청주형무소로 이감되어 모두 9번 옥고를 치르시고, 당시 군생활을 하던 남동생 도움으로 재심을 받아 1960년 봄 4.19혁명 직전에 출소하셨습니다.

감옥에서 나와보니 10년 전 입산할 때 시부모님께 맡겼던 아드님은 시부모님과 시동생이 키워서 14살이 되어 곡성에 살고 있었습니다. 시대상황이 가족들을, 특히 모자 사이를 이렇게 처절하게 만들었습니다. 또 하나 시련은 입산투쟁 과정에서 걸린 동상을 감옥에서 제대로 치료를 못해 따뜻한 환경으로 나오니 동상이 악화되어 왼쪽 손목을 잘라내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몸을 도려내는 죄를 짓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출소 뒤 갈 곳이 마땅치 않아 부안에서 농사를 짓고 계신 친정 부모님 댁으로 아드님과 함께 가서 사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경찰이 와서 계속 괴롭히고 동네에서는 빨갱이라고 손가락질하여 1973년 부모님 도움으로 서울로 올라왔다가 다시 친정 동생 주선으로 오늘까지 살고 계신 성남에 정착하셨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지울 수 없는 회한이 하나 있었습니다. 혁명가의 아들로 태어났기에 아버지 얼굴도 제대로 못 보고 어머님과는 4살 때 헤어져 10년을 외롭게 살아야 했고 열악한 환경에서 배우지도 못한 채 빨갱이 자식이란 놀림과 공격을 받아왔던 아드님에 대한 미안함이었습니다. 그 아드님이 끝내 불치의 질환을 앓다가 어머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그때의 곤혹스러운 선생님 모습이 기억납니다. 지금 살고 계신 성남집을 찾아뵈웠을 때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러한 회한과 아픔을 반미자주화 투쟁으로 승화시키셨습니다.

선생님께서 양심수후원회에 처음 나오실 때는 1994년 낙성대 '만남의 집'에 출소하신 비전향장기수들이 공동체로 살고 계실 때로 기억됩니다. 옥중동지들에 대한 연대감일 수도 있고 양심수후원회가 비전향장기수들의 석방운동과 후원사업을 하고 있는 데 대해 공명하셨을 터였습니다.

선생님의 양심수후원회 활동에 가장 많이 참여하신 부문은 '양심수후원회산행'이었습니다. 한쪽 팔이 '의수'였지만 높은 산까지 오르는 노익장을 보이셨습니다. 서울 근교의 북한산,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 아차산, 관악산을 비롯하여 멀리 남한산성, 연천의 고대산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1996년께부터 2007년 무렵까지 거의 빠짐 없이 함께하셨습니다. 맨 나중 산행으로는 2013년 1월 20일 하얗게 눈 덮인 북한산을 등반하셨습니다. 이때가 선생님 90살이셨습니다.

그밖에도 회원 역사기행으로 철원 등 북녘땅이 보이는 접경지대(2002.10.26.), 순창 회문산, 정읍 갑오농민전쟁 유적탐사(2003.11. 9), 지리산 일대 투쟁현장답사(2005. 11. 6), 예산·서산 ·홍성 등 역사유적답사(2007. 11. 3) 등 해마다 있는 양심수후원회의 역사기행을 함께하셨습니다. 또한‘만남의 집’에서 하는 회원 월례강좌에도 빠짐없이 참여하셨습니다. (2004.6.13., 2008.8.23, 2010.3.17, 2013.4.27, 2014.5.24 외) 특히 양심수 석방과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민가협 목요집회’에 함께 하셨고 민가협이나 양심수후원회 주요행사에 함께 하셨습니다. (정기총회 송년모임 등)

선생님께서는 양심수후원회뿐 아니라 자주통일과 평등세상을 위한 여러 민족민주운동 단체와 함께하며, 입산하시어 부르짖으신 차별없는 세상, 조국해방과 인민해방을 위한 투쟁의 연장선에서 헌신을 다하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활동이 평택 미군기지 확장반대 투쟁이었습니다.(2005. 7. 10외) 그리고 선생님께서는 가장 감격해하셨을 ‘광복60년기념 평양문화유적 참관’(2005. 10. 27)을 하셨습니다.

이 같은 선생님의 100년 생애는 반봉건에서 반미자주화 투쟁으로 일관되셨습니다. 그리하여 젊은 통일일꾼들이 누구를 상대로 어떻게 싸워나가야 하는지를 몸소 실천하신 거울이셨습니다. 이제 무거운 짐 내려놓으시고 영면하시기 빌겠습니다.

2023.9.29
(사)정의·평화·인권을 위한 양심수후원회 권오헌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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