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빨치산 변숙현 선생이 20일 낮 12시 45분 경기도 성남시 한 요양원에서 백수를 누리고 소천했다.

빈소는 경기도 성남중앙병원장례식장 201호에 마련됐으며, 22일 오후 6시 장례식장에서 추도식을 가진 뒤 23일 발인할 예정이다.

백수를 누리고 20일 소천한 여성 빨치산 변숙현 선생. [사진 제공 - 통일광장]
백수를 누리고 20일 소천한 여성 빨치산 변숙현 선생. [사진 제공 - 통일광장]

1924년 전남 장성군에서 출생한 고인은 1945년 남로당 전북 장수군당위원장을 역임한 고 박태원과 결혼했고, 해방공간에서 여맹 활동을 벌이다 1950년 빨치산으로 입산, 1952년 군경토벌대에 생포됐다.

고인은 회문산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던 시기를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회상하며 “긍께 거그서는 서로를 존중허지. 배운 사람이나 못배운 사람이나 여자나 남자나 평등헝께로. 하고 싶었던 공부를 원없이 많이 했제. 참 좋았던 시절이었어. 행복하고”라고 말한 바 있다.

남원 포로수용소와 광주 포로수용소를 거쳐 징역 20년형 선고받고 대전교도소, 청주교도소에서 옥중 생활 중, 1960년 동생의 도움으로 재심 판결을 받아 출소했지만 1961년 동상으로 악화된 왼쪽 팔을 절단해 평생 불구의 몸으로 지냈다.

1990년부터 통일광장과 전국여성연대,성남여성회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했으며, 2022년 7월 성남요양원 입소했다가 오늘 소천했다.

한 여성회 활동가는 “선생님은 자기 관리가 굉장히 철저하신 분”이라며 “‘내가 몸이 늙고 팔은 하나 없어도 할 수 있는 것은 다 한다!’ 이것이 신념이신데 약속을 단 한 번도 어기신 적이 없다”고 기억했다.

고인은 생전에 “빨치산은 이름낼라고 한 사람은 없었어. 목숨은 내걸었지만. 목숨을 내걸면 한 개도 두려운 것이 없어. 한평생 그저 바쁘게만 살았어. 내가 평생 바라던 것이 조국의 통일과 여성해방인디, 내가 이거라도 해야쓰지 않겄소?”라고 여성 빨치산으로서 일관된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

2002년 금강산 남북여성통일대회에 참석한 변숙현 선생. [자료 사진 - 통일뉴스]
2002년 금강산 남북여성통일대회에 참석한 변숙현 선생. [자료 사진 - 통일뉴스]
생전 고인의 동지들과 함께 한 모습(맨 왼쪽). [사진 제공 - 통일광장]
생전 동지들과 함께 한 모습(맨 왼쪽). [사진 제공 - 통일광장]

권낙기 통일광장 대표는 “변숙현 선생님은 조직에 복무할 줄 아는 사람, 병상에서도 회비를 내는 사람”이라며 “고령에도 총명하셔서 나의 아이들 이름과 근황까지도 기억하셨다”고 회고했다.

임방규 통일광장 전 대표는 “변숙현 선생님은 어머니의 품성을 지니신 분”이라며 “남편의 영향을 받아 여성전사로 살았지만 전형적인 우리의 어머니 상이다. 심지가 굳으신 분”이라고 기렸다.

고 변숙현 선생 약력

1924년 전남 장성군 북일면 1남 1녀 장녀로 출생
1943년 북만주로 이주
1945년 박태원과 결혼, 남편(남로당 전북 장수군당위원장)의 입산
1946년 민가에서 여맹활동 시작
1947년 아들 출산. 조선노동당 입당
1948년 남편 박태원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참여로 북행
1949년 수배령으로 피신 생활
1950년 빨치산 입산
1952년 전라남도 순창군 용골산에서 군경토벌대에 의해 생포
1952~1960 남원 포로수용소, 광주 포로수용소 6개월 복역
                    최종 징역 20년형 선고받고 대전교도소, 청주교도소 수감
1960년 (동생 도움으로 재심) 출소. 가족과 재회
1961년 동상으로 악화된 왼쪽 팔 절단 수술. 부안에서 친정 부모, 아들과 농사
1965년 친정집에서 아들과 독립
1973년 거주지 제한을 어기고 서울로, 1974년 성남으로 이사
1990년 통일광장과 전국여성연대, 성남여성회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
2022년 7월 5일 성남요양원 입소
2023년 9월 20일 12시 45분 소천

(자료 제공 - 통일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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