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오는 8월 8일 개막하는 서울 강북구 수유동 소재의 ‘근현대사기념관’ 기획전과 이준 열사 추모 사업의 정상화를 위하여 이 글을 쓴다. /필자 주

 

[이준 열사 유해봉환 60주기 추모특별전 – 돌아오지 못한 헤이그특사], 8월 8일부터 11월 30일까지 강북구 수유동 근현대사기념관에서 열린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이준 열사 유해봉환 60주기 추모특별전 – 돌아오지 못한 헤이그특사], 8월 8일부터 11월 30일까지 강북구 수유동 근현대사기념관에서 열린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유독 이준 열사는 가짜 자손이 많이 출현한다. 직계 자손 모두가 함경남도 북청에 있어 그런 것 같다. 이준 열사의 자녀로는 외아들 이용(李鏞, 李勇) 장군과 장녀 이송선과 차녀 이종숙이 있다.

장녀 이송선는 조건학과 결혼하였고, 차녀 이종숙은 역사학자 유자후와 결혼하였다. 외아들 이용 장군은 부인 청해이씨(李周年의 딸)와의 사이에서 장손자 이렬(李洌)과 차손자 이활(李活)을 두었고, 이준 열사의 아들과 손자는 해방후에 모두 함남 북청에 거주하였다.

반면에 남쪽에는 이준 열사의 장녀 이송선(사위 조건학)의 자손과 차녀 이종숙(사위 유자후)의 자손(외동딸 유성천)이 있다.

그런데 이준 열사의 직계가 아닌 자들이 이준 열사의 증손자임을 대를 물려 자처하고 있다. 이러한 일로 인하여 엄숙하여야 할 추모제가 한바탕 소란이 벌어지기도 한다. 분명한 사실은 현재 남한에는 이준 열사의 외증손과 외고손 만이 생존하고 있고, 이준 열사의 직계 증손과 고손은 함경남도 북청에 거주하고 있다.

1. 이준 열사의 계보(系譜)를 찾아 나서다

필자는 한때 이준(李儁, 1859~1907) 열사가 전주이씨 완풍대군파 후손이라는 사실에 회의적이었다. 1982년에 발행한 『전주이씨완풍대군파세보』에서는 엉뚱한 사람 1인(李正模, 一名 李浩)을 이준 열사의 손자로 기록하는 위계(僞系)의 오류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필자는 이준 열사가 실제로는 완풍대군파 후손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설하에 지난 2020년부터 때때로 이준 열사가 수록된 고족보를 조사해왔다. 이준 열사가 완풍대군파 자손이 아니라는 증거를 찾는다면, 그 가짜 자손들의 기도가 일시에 허물어지므로 그 부정적인 증거를 찾다가, 오히려 완풍대군파 자손이라는 증거를 찾은 것이다.

『璿源續譜-桓祖大王子孫錄 (完豊君派)』, 40권 40책 중 권지25 장92 후면, 1902년 종정원(宗正院)에서 간행.
『璿源續譜-桓祖大王子孫錄 (完豊君派)』, 40권 40책 중 권지25 장92 후면, 1902년 종정원(宗正院)에서 간행.

필자는 1902년 이철재(李轍在)가 편찬하여 1902년 종정원(宗正院)에서 간행한 『璿源續譜-桓祖大王子孫錄 (完豊君派)』 40권 40책 중 권지25 장92 뒷면에서 이준 열사를 찾아냈다. 그런데 1902년 [선원속보]에는 이준 열사의 본명인 이선재(李璿在)라는 인물이 아래와 같이 모두 8명이 등재되어 있다. 그 가운데 7명은 같은 시대 같은 집안의 동명이인이다.

- 선재(璿在, 1886.06.19.~당시 생존) ; 용빈(容彬) 자.
- 선재(璿在, 1810.10.20.~1866.05.05) ; 용백(容白) 자.
- 선재(璿在, 1858.04.10.~당시 생존) ; 학성(學成) 자.
- 선재(璿在, 1873.08..24.~당시 생존) ; 용면(容勉) 자.
  종혁(鍾爀, 1898.12.09.~당시 생존) 부.
- 선재(璿在, 1884.03.03.~당시 생존) ; 용겸(容謙) 자.
- 선재(璿在, 1871.08.03.~당시 생존) ; 용빈(容斌) 자.
- 선재(璿在, 1859.11.18.~당시 생존) ; 병관(秉瓘) 자.
  종직(鍾直, 1888.04.07.~당시 생존) 부.
- 선재(璿在, 1862.02.27.~당시 생존) ; 하원(夏元)의 자.
  종규(鐘奎) 종우(鐘楀) 종효(鐘堯) 부.

(한편 선재(璿在)는 완풍대군파 이외에 선성군파(宣城君派)에도 3인이 있다.)

이상의 완풍대군파 여러 이선재(李璿在) 가운데 이준(李儁, 1859~1907) 열사는 병관(秉瓘)의 아들 선재이다. 나는 이러한 탐색을 하는 가운데 이준 열사에 대하여 기존론과 다른 부분을 이 족보기록에서 발견하였다.

1902년 『선원속보』에는 이준 열사가 기존에 알려진 기미년(己未年) 12월 19일생이라는 것과는 달리 한달 빠른 11월 18일생으로 나와 있고, 또한 그의 아들 종승은 종직(鍾直)으로 기록하고 있다. 종직은 종승의 보명(譜名)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준 열사의 부인 신안주씨(주만복의 딸)는 갑인(甲寅, 1854년) 12월 17일생이다. 이준 열사보다 5세 연상이었다.

이 책이 간행된 1902년은 이준 열사의 생존 시기였으므로, 이 세계(世系)는 이준 열사가 종정원(宗正院)에 직접 수단(收單)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준 열사의 외아들 이종승(李鐘乘)은 독립운동가로서 북청 거주의 가족들에게 미칠 화를 피하려고 이용(李鏞, 1888년 4월 7일 ~ 1954년 8월 18일)으로 개명하였다. 그의 호는 추산(秋山)이라 하였고, 가명은 이객우(李客雨) 등을 사용하였다.

2. 1902년 『선원속보』의 계보

1902년 판 『선원속보 - 환조대왕자손록 (완풍군파)』 권지25의 이준 열사 세계를 참조하여 정리하면, 이준 열사는 완풍대군 이원계의 17대손(18세손)으로 그 계보는 아래와 같다.

1) 완풍군 이원계 (完豐君 李元桂) ; 桓祖大王第一男至順庚午十月十日李氏生麗朝錄輔理功臣階三重大匡封郡夫人 洪武戊辰十月二十三日卒追封完豐君諡襄平當宁壬申特命追封君贈領宗正卿○墓咸興歸州洞義陵靑龍或云杻田洞或云北靑泉水洞娶郡夫人南平文氏右文館提學完豐君贈領議政郡夫人諡忠宣益漸女, 忌四月五日壬申封完豐君生二子一女○墓咸興同原再娶郡夫人慶州金氏贊成事鏞女, 忌五月十三日壬申封完豐君生二子三女○墓咸興同原.
2) 완원부원군 이양우 (完原府院君 李良祐) ; 至正丙戌二月二十九日生初封完原府院君定宗朝錄定社功臣階大匡輔國封完原府院君永樂戊子六月十日卒諡安昭不祧○墓楊根西始面大灘里癸坐禮葬有碣娶禮曹典書善山朴廷元女至正己丑九月十一日生永樂丙申七月十八日卒○墓祔.
3) 선성군 이흥제 (善城君 李興濟) ; 贈大匡輔國左議政○墓洪原希贒社駕龍洞娶領相淸州韓尙敬女.
4) 청안군 이효신 (淸安君 李孝信) ; 崇政○墓洪原好賢社駕龍洞北麓娶軍威朴女○墓祔祀壇有碣.
5) 이복번 (李福蕃) ; 進士 祭酒司成○墓北靑中山廣川里梨淸.
6) 이중보 (李重寶) ; 娶○墓廣川里梨洞.
7) 이시홍 (李蓍弘) ; 初名論崇生員娶○墓廣川里梨洞.
8) 이강문 (李綱文) ; 乙亥生禦侮將軍乙未十月十五日卒娶密陽朴泰根女辛未生辛巳九月十日卒○墓廣川里亥坐祔有碣.
9) 이언조 (李彦祚) ; 乙未生通政己未六月二十日卒娶密陽朴世賢女甲午生甲辰六月十一日卒○墓上同庚坐祔.
10) 이광로 (李光露) ; 甲戌生武科丙申十月十四日卒娶淸州裵仁傑女丙戌生壬辰九月十六日卒○墓都隴山艮坐祔有碣.
11) 이호성 (李好成) ; 萬曆庚申生壬戌二月一日卒娶全州朱永吉女辛酉生乙丑五月九日卒○墓上同艮坐有碣.
12) 이흥인 (李興仁) ; 顯宗壬寅生己亥卒娶慶州劉得春女甲辰生癸卯卒○墓上同有碣.
13) 이경익 (李景榏) ; 肅宗辛巳生己亥卒娶驪州李時元女己丑生己未卒○墓後垈祔再娶全州朱次敏女己亥生丁巳卒○墓長興洞艮坐有碣.
14) 이창운 (李昌運) ; 英祖丁卯生庚戌卒娶金海金恒郁女戊辰生己酉卒○墓上同卯坐祔.
15) 이후백 (李厚白) ; 正祖己亥生己丑卒娶丹陽李春益女戊戌生丙午卒○墓長興洞甲坐有碣.
16) 이명집 (李命集) ; 正祖己未正月三日生壬辰十月十九日卒○墓上同艮坐有碣娶忠州池東基女癸丑五月十三日生辛酉十一月二十八日卒○墓上同有碣.
17) 이병관 (李秉瓘) ; 生父 命燮 憲宗己亥四月十一日生癸亥七月八日卒娶淸州李錫五女丁酉三月四日生癸亥七月十三日卒○墓上仝祔有碣.
18) 이선재 (李璿在) ; 哲宗己未十一月十八日生檢事娶綾城朱萬福女甲寅(1854)十二月十七日生.
19) 이종직 (李鍾直) ; 當宁戊子四月七日生娶靑海李周年女甲申生(1884).

3. 유자후의 『리준선생전』과 이선준의 『일성 이준 열사』에 수록된 연보 기록

해방 2년 후 1947년에 역사학자 유자후(柳子厚, 1895~?, 이준 열사의 사위)는 『이준선생전(李儁先生傳)』을 발행하였다. 이후 함경도가 고향인 이선준(李善俊)은 『일성 이준 열사』(1973)와 『일성 이준 열사』(1994)를 내놓았고, 또한 1997년에는 탄신 138주년⸱순국90주년에는 특별기획도록 『이준과 만국평화회의』를 편찬하였다.

이준 열사의 혈손(血孫)들은 이준의 사위 유자후가 지은 『이준선생전』(1947)과 이선준이 지은 두 종의 『일성 이준 열사』(1973)와 『일성 이준 열사』(1994), 또한 이선준이 편찬한 『이준과 만국평화회의』(1997) 등등에 명확히 규명되어 있다. 그 네 종의 책에 수록된 이준 열사의 후손 부분만 아래에 정리하여 밝힌다.

1885년(27세), 장녀 송선(松鮮) 출생.
1888년(30세) 4월 7일, 장남 종승(鐘乘, ~1954) 출생(후에 개명 鏞).
1899년(41세) 10월 21일, 차녀 종숙(鍾肅, ~1983) 출생.
1900년(42세), 장녀 송선, 조시범(趙時範)의 장손 건학(鍵學)과 결혼.
1905년(47세), 손자 렬(洌) 출생(鏞의 장남).
1906년(48세), 외손 조서해(趙瑞海) 출생(松鮮의 자).
1910년(사후3년), 손자 활(活) 출생(鏞의 차남).
1921년(사후14년), 차녀 종숙 유자후(柳子厚)와 결혼.
1927년(사후20년), 외손녀 성천(星天) 출생.

[사진 제공 - 이양재]
[사진 제공 - 이양재]

현재 이준의 본손(本孫)은 모두 이북에 거주하고 있으며, 큰딸과 둘째 딸이 낳은 외손(外孫)들은 모두 이남에 거주하고 있다. 1946년 아들 이용은 북청에서 월남하여 활동하다가 1948년 다시 북으로 귀환한다. 당시 이용과 가까이 지냈던 조카 조서해에 의하면 이용의 장남은 이렬(李洌, 1905~?)이고 차남은 이활(李活, 1910~?)이며, 이종승의 장손자는 이한(李翰, 1935~?)이고 차손자는 이건(李建, 1933~?)이다. 그 외의 직계 혈족은 없다.

4. 탁보(濁譜) 기록은 백골양자도 아니다

『전주이씨완풍대군파세보』(발행인 이주경), 1982년, 전주이씨완풍대군파세보편찬위원회 편. [사진 제공 - 이양재]
『전주이씨완풍대군파세보』(발행인 이주경), 1982년, 전주이씨완풍대군파세보편찬위원회 편. [사진 제공 - 이양재]

해방후 1982년에 만들어진 『전주이씨완풍대군파세보』(발행인 이주경)에는 엉뚱한 인물 ‘이호(李浩, 1921.03.15.~?)’가 수단되어 있다. 이호는 보명(譜名)으로 족보에는 “일명(一名) 정모(正模)”라 밝히고 있는데, 실제로 ‘이정모(李正模, 1921.03.15.~?)’라는 인물이 1960년대에 이준 열사의 외손들에게 접근하며 이준 열사의 손자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당시에 이준 열사의 아들 이용 장군의 일생 행적과 북청 거주 손자들을 명확히 알고 있는 이준 열사의 외손들은 그가 이준 열사의 손자가 아님을 알고 그를 당시의 기념사업회에 얼씬도 못 하도록 경고하였다고 한다.

이후 그는 1981년에 ‘전주이씨완풍대군파세보편찬위원회’에 접근하여 수단해 줄 것을 요구하였고, 당시 편찬위에서는 상당한 돈(족보 발행 경비 상당액)을 받고 아래와 같은 단서를 달아 수단해 주었다. “宗親會合議에 依據追加登載”. 이런 단서가 붙인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보학에서는 이러한 단서 조항을 붙인 것은 거짓 자손임을 명시한 것으로 본다. 이 족보에서 이준 열사 후손 부분만은 분명히 잘못된 오보이다.

‘사단법인 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 일성사상연구소 이선준 소장 역시 완풍대군파 자손인데, 그는 1982년 족보 편찬 때 엉뚱한 사람을 이준 열사의 손자로 편입시키는 매보(賣譜) 행위를 반대하며 반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종친회합의에 의거추가등재”라는 표식을 넣은 것이다.

『이준과 만국평화회의』의 표지와 족보 사진, 이선준 편찬, 1997년, 탄신 138주년⸱순국90주년에는 특별기획도록. [사진 제공 - 이양재]
『이준과 만국평화회의』의 표지와 족보 사진, 이선준 편찬, 1997년, 탄신 138주년⸱순국90주년에는 특별기획도록. [사진 제공 - 이양재]
『이준과 만국평화회의』의 ‘가계보’, 이선준 편찬, 1997년, 탄신 138주년⸱순국90주년에는 특별기획도록. [사진 제공 - 이양재]
『이준과 만국평화회의』의 ‘가계보’, 이선준 편찬, 1997년, 탄신 138주년⸱순국90주년에는 특별기획도록. [사진 제공 - 이양재]

결국에 이선준 소장은 1997년 이준 열사의 순국 90주년을 맞아 자신이 편찬하여 ‘사단법인 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에서 발행한 – 탄신 138주년⸱순국90주년 특별기획도록 『이준과 만국평화회의』에서는 11면에 ‘가계보’를 밝히면서 이호(李浩), 즉 이정모(李正模)‘를 배제하였다. 원래 이정모는 전주이씨 완풍대군파 자손이 아니라 다른 파 자손이라고 한다.

그런데 대체로 백골양자는 자손이 없을 때 인정이 되지만, 자손들이 버젓이 살아있을 때는 백골양자는 인정되지 않는다. 결국 1982년 판 『전주이씨완풍대군파세보』(발행인 이주경) 8책은 이 기록으로 인하여 보학의 측면에서 보면 탁보(濁譜)로 확인되는 것이다. 이는 종친회에서 바로잡아야 할 일이다.

이외에도 이준 열사의 증손자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여러 명이 더 있다. 그러나 종친회와 결탁하여 계보까지 위조한 것은 이정모, 일명 이호가 유일하다. 최근 이정모의 아들 이00가 이정모의 대를 이어 자신이 이준 열사의 직계 혈손이라 주장하며 다니고 있다. 그런 주장은 사실이 아니므로 나는 보학(譜學) 전문가로서 여기에 밝히는 것이다.

5. 맺음말

[사진 제공 - 이양재]
[사진 제공 - 이양재]

이준 열사는 아직 국내에 기념관이 세워지지 못하였다. 그것은 이준 열사라면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거부감을 말하는 ‘사단법인 보재이상설선생기념사업회’(이하 보재측) 임원들의 방해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은 2007년도에 ‘이준열사순국백주년추모기념사업회’가 국회에서 확보한 3억원의 쪽지 예산마저 국가보훈처(당시 처장 박유철)가 제대로 쓰지 못하도록 당시 보재측 회장이던 이 모 장관을 통하여 훼방하였다. 당시 보훈처는 ‘사단법인 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이하 일성측)에 지출한 사업비 6,000만원 보다 더 많은 7,000만원을 보재측에 지원하였다.

『이준 열사 환국』, 1963년 9월 30일 김포공항. 네델란드에서 동경을 거쳐 환국하였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이준 열사 환국』, 1963년 9월 30일 김포공항. 네델란드에서 동경을 거쳐 환국하였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이준 열사 묘 안장』, 10월 4일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을 치루고 15:30에 수유동 안장. [사진 제공 - 이양재]
『이준 열사 묘 안장』, 10월 4일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을 치루고 15:30에 수유동 안장. [사진 제공 - 이양재]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순국 백주년을 추모하는 기획전은 당시 문화재청(당시 청장 유홍준)이 예산을 투입하여 중명전(重明殿)에서 개최(2007년 6월)한 것으로 해서 가까스로 빛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극우 수구들이 2007년 8월 일성측을 완전히 장악한 이래 이준 열사를 위한 기념사업은 유야무야되어 왔다.

이러한 미진함을 한탄한 나는 2009년에 사재를 털어 ‘재단법인 리준만국평화재단’을 설립하였고, 1980년대 중반부터 수집하여 오던 독립운동가 자료를 바탕으로 ‘리준만국평화기념관’ 설치를 준비하여 왔다. 현재 약 500여 점을 상회하는 자료를 수집하였지만, 그럼에도 부족함을 느낀다.

우리 재단은 자료 수집과 병행하여 2016년과 2017년, 2018년, 2022년에 이준 열사와 그 동지들을 기리고 민족사를 조명하는 5번의 기획전을 직접 주최하였고, 이번 8월 8일부터 11월 30일까지 ‘강북구’와 ‘민족문제연구소’가 주최하고 ‘근현대사기념관’이 주관하는 [돌아오지 못한 헤이그 특사 – 이준 열사 유해 봉환 60주기 추모 특별전]까지 모두 6번의 기획전을 후원하여 대여한 바 있다.

필자는 아이(소장품)를 낳기(갖추기) 전에 옷(기념관)부터 지은 것이 아니라, 서지학과 회화사 전문가로서 아이(소장품)를 먼저 키워 성인으로 만들고 그에 맞는 옷(기념관)을 지으려 시도하는 것이다. 그 모든 자료를 기념관을 설립하면서 재단 소유로 등록할 것이다.

다른 분들을 기리는 여러 기념관이 자료 부족으로 박물관 등록을 못 하고 있으나, 우리 재단은 기념관을 두 개 이상을 설립할 충분한 자료가 있다. 이제 서울시든 자택(안국동)이 있던 종로구든 묘소(수유동)가 있는 강북구든, 아니면 이준 열사가 조직한 국채보상운동기성회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제주도이든 지자체가 나서서 자그마한 추모기념관이라도 설치하겠다면, 혹시 지자체가 아닌 다른 단체가 나선다고 할지라도 필자가 수집한 자료 일체를 향후 20년간 무상 기탁하겠다. 말이 무상 기탁이지 영구 기탁과 같은 것이다.

6. 부기(付記) ; 윤석열 정부에 보내는 호소문

나는 대한민국의 대통령님과 법무부장관님, 보훈부장관님, 검찰총장님에게 정중하게 호소합니다.

“이준 열사의 가짜 자손의 행위를 엄하게 다스려 주십시오. 이준 열사의 가짜 자손들이 출몰하는 것은 역사와 사회를 기만하는 행위입니다. 이에 진짜 유족의 대표는 우울증 걸려 병마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가짜 유족은 심지어 ‘사단법인 헤이그특사기념사업회’ 발기에 참여하여 진짜 후손들의 숨통을 조이고 있습니다. 이준 열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검사인데, 검사 출신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사익을 채우려 하는 무리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속지 마십시오. 지금 국가로부터 아무런 보조 혜택도 없는 유족 대표(외증손자)는 심한 우울증과 생활고를 겪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보훈 정의를 세워주십시오.”

아울러 ‘사단법인 헤이그특사기념사업회’ 발기회에 말합니다. 이00은 이준 열사의 직계 혈손이 아닙니다. 그는 이준 열사와 전혀 무관한 인물입니다. 그 점은 분명히 하십시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