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과거와 현재는 무엇이고 미래에는 무엇인가? 이는 단순히 명쾌하게 답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이는 정치적 문제이기에 쉽게 답하기도 주저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 민감한 뜨거운 감자를 ‘신 잡동산이’에서 차갑게 다루고자 한다.

조선시대 말기에 미국에 대한 관점을 돌이켜 보자. 1871년 4월 어전회의(御前會議)에서 고종(高宗, 재위 1864~1907)은 영의정 김병학(金炳學, 1821~1879)에게 “미리견(彌利堅: 미국)이라는 나라는 어떠한 나라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김병학은 “미리견이란 나라에는 작은 부락만 있으며, 화성돈(華盛頓: 워싱턴)이란 촌장이 나와서 영길리(英吉利: 영국)와 교섭하면서 성지(城池)를 개척하고 기지를 만든 촌락 정도의 나라로 [해국도지(海國圖志)]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바다를 왕래할 때 약탈하는 습성이 있고, 해적과 다를 바 없는 이들이 교역을 운운하는 것은 해괴한 일입니다. 만약 이들과 교역한다면 나라를 보전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답변하였다.

이에 고종은 “그렇다면 우리가 이들과 교역하면 사학(邪學: 요사스런 학문이나 학설)이 반드시 들어와 공자의 예법이 무너질 것이니 오랑캐와 통교할 수 없는 일입니다”라고 응답하였다.

이 일화에서 우리는 조선 위정자들의 미국에 대한 왜곡된 선입관을 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1866년에 발생한 제너럴셔먼호 격침은 이러한 왜곡된 선입관에 의하여 발생한 사건이다.

1. 미국과 조선의 첫 만남

제너럴 셔먼호 사건(General Sherman incident)은 미국의 무장상선 ‘제너럴 셔먼(SS General Sherman)’호가 1866년 7월 25일 평안도 용강현 주영포 앞바다에 도착한 뒤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부까지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며 대포를 쏘고 민간인을 살해하자, 9월 5일 당시 평안 감사 박규수 휘하의 조선군 부대와 평양 주민들이 배를 급습하여 불태우고 선원들을 살해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미국이 한반도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게된 일대 전기가 되었다.

셔먼호는 원래 미국선적으로서 중국 천진에 기항했다가 영국 메도우즈(Meadows) 상사와 용선계약을 체결함으로써 셔먼호는 영국 상사(商社)에 위탁되었다. 이리하여 메도우즈 상사는 조선과 통상교역할 서양 상품을 잔뜩 적재하고 1866년 8월 초 지부(芝罘)를 출항 조선으로 항했다.

셔먼호의 구성원을 보면 선주 프레스턴(W. B. Preston), 선장 페이지(Page), 항해사 윌슨(Wilson)등 미국인 3명, 통역 및 개신교 목사 토머스(R. J. Thomas), 화물 관리인 호가스(Hogarth) 등 영국인 2명, 중국인·말레이 선원 19명, 총 24명이었다.

이들은 평양에 도착하기 전(음력 7월 8일)에 황해도 황주목 삼전방 밖에 있는 송산리 앞바다에 정박하여 황주목의 형리(刑吏)인 이기로(李耆魯)와 영리(營吏)인 신몽신(辛夢辰) 등과 면담하여 통상을 요구한 바 았다.

이후 셔먼호는 장맛비로 불어난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에서 통상을 강요하면서 중군 이현익(李玄益)을 납치하는 등 도발적 약탈행위를 자행함에 평양감사 박규수(朴珪壽) 등의 화공작전에 의해 선체는 소파(燒破)되고 승무원 24명 전원이 몰살되었다.(북에서는 당시의 화공 작전에 김일성의 조부인 김응우가 선두에 섰다고 한다)

셔먼호는 선주가 미국인이지만 메도우즈 상사와 용선계약으로 계약기간에는 법률적으로 영국 상사의 소유라는 것, 시종일관 셔먼호의 실질적인 주역은 토머스 목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사건발생 후 영국은 소극적인 반응을 보인 반면, 미국은 선주가 미국인이라는 이유로 적극적인 강경반응을 보였다. 셔먼호사건을 계기로 미국은 조선의 개항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게 된다.

2. 미군과의 첫 전투; 신미양요

미국은 셔먼호 사건 발생의 진상을 탐문하는 정찰원정을 즉각 단행했다. 1867년 1월 슈펠트(R. W. Shufeldt, 薛斐爾)는 와추세트(Wachusett)호로 서해안 옹진만 일대를 탐사하고 조선을 응징하는 데는 무력 행사에 근거한 해결책(a solution based on force)만이 최선책이라 강조하면서 포함외교(Gunboat Diplomacy) 실시를 강력히 촉구했다.

포함외교란 분쟁 당사국의 한쪽이 자기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하여 약세인 다른 나라에 함대를 파견하여 압력을 가함으로써 상대방으로부터 유리한 조건을 끌어내려는 갑악적 외교 수단이다.

1867년에 이어서 1868년 4월에는 폐 비고(John C. Febiger, 費米日)가 셰넌도어(Shenandoah) 호로 제2차 탐사를 강행했다. 이때 조선 수비군은 내강항행(內江航行)을 영토 침략으로 규정하여 포격하였다. 이에 페비거는 성조기를 게양한 함정에 대한 포격은 국기 모독죄로 단죄하면서 포함 책략에 의한 응징 보복 원정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 해군부는 이렇게 두 차례 탐문항행을 벌이는 가운데, 슈어드(William H. Seward) 국무장관은 포함외교 책략에 의한 조선 원정계획을 수립했다. 슈어드 국무장관은 1868년 4월에는 슈어드(George F. Seward) 상해 총영사에게 조난선원 구휼협정 체결과 대조선 통상교섭의 전권을 부여하면서 보복응징 원정계획을 수립했지만, 해군부의 함대동원 반대로 실행하지 못했다.

1869년 미국 그랜트(U. Grant) 행정부가 발족되면서 피쉬(H. Fish) 국무장관의 당면문제는 슈어드 전 국무장관이 입안한 조선원정을 결행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그랜트 행정부는 셔먼호사건에 대한 응징보복원정을 단행하기로 하고, 피쉬는 상해총영사 슈어드를 국무부로 초청하여 조선 원정계획 실행 문제를 협의했다.

이 자리에서 슈어드는 첫째, 셔먼호와 같은 비참한 사건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하여 조선과 조난선원 구휼협정을 체결하되, 가능한 한 통상조약을 체결할 것. 둘째, 조선과 교섭하기 전에 먼저 청의 협조와 중재역을 구할 것. 셋째, 조선 원정 임무의 전권을 아시아함대 사령관에게 부여할 것 등 세 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피쉬는 이상 1안과 2안은 채택했지만, 원정 임무의 전권을 아시아함대 사령관에게 부여하자는 3안은 거부하면서, 그 대신 조선과의 교섭을 성취하려면 무엇보다도 청의 중재와 협조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판단, 주청미국공사 로우(F. F. Low)를 조선파견 전권공사에 임명하면서 조선원정의 임무를 부여하는 한편 로저스(John Rodgers) 아시아함대사령관에게 해군함대를 총동원 로우공사를 수행호위할 것을 명했다.

그랜트 대통령은 1870년 교서를 통해 “조선과 조난선원 구휼협정을 체결하기 위하여 로우를 조선에 파견하는 바이다. 로우 공사의 경호를 위해 로저스제독에게 아시아함대의 충분한 병력을 인솔하고 로우를 호위할 것을 명한다”라고 조선 원정 결행을 발표했다.

로우 공사는 1871년 3월 7일 조선 원정의 목적을 천명한 조선 국왕에게 보내는 친서에서 “조선과 화로를 맺고, 조난선원 구휼협정문제를 상의하고자 조선에 간다. 미국은 화목을 간망하고 있으며 우리의 친선우호관계 수립에 대한 교섭을 거절한다면 전쟁이 발생하더라도, 어느 누구를 원망할 수 없다. 3,4개월 안으로 조선에 갈 것인즉 조선은 전권위원을 파견, 본인과 협상에 응해주기 바란다”라는 친서를 총리아문을 통하여 조선정부에 전달했다.

여기서 미국은 만약 조선이 조난선원 구휼협정을 위한 협상을 거부할 경우 ‘물리적 힘’ 즉 포함외교 책략에 따라 강제로 조약체결을 강행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친서를 접수한 조선 정부는 1871년 4월 14일자 회신문에서 로우의 친서는 곧 조선에 대한 선전포고로 간주하면서, 제너럴 셔먼호사건은 미국상선의 도발행위로 파멸을 자초했다는 것, 조선은 유원지의(柔遠之義)에 의해 국적 여하를 불문하고 조난선원을 인도적으로 구제하고 있기 때문에 새삼스레 조난선원 구휼협정을 체결할 필요가 없다는 것, 조선은 전통적으로 중국 이외의 다른 나라와는 외교관계를 수립할 수 없다는 것, 조선은 생산업이 빈약해서 미국과 교역할만한 상품이 없다는 것, 따라서 교역을 허락한다면 경제적 파탄이 발생할 것이기에 미국과 통상관계를 수립할 수 없다고 밝혔다.

로우 공사는 5월 초까지 전함대를 일본 나가사키(長崎)에 집결하라고 로저스 제독에게 지시했다. 로저스는 기함 콜로라도(Colorado)호를 비롯하여 군함 5척, 수해병 1,230명, 함재대포 85문을 적재하고, 만약 조선에서의 전쟁 발생에 대비, 나가사키에서 약 보름 동안 해상기동훈련을 실시한 후 1871년 5월 16일 조선원정에 올랐다.

로저스는 조선원정의 실상을 사진으로 남기기 위하여 나가사키 주재 이탈리아인 사진기사 비토(Felix Beato)를 대동하고 출정했다. 로저스는 일찍이 페리 제독의 포함책략에 의한 일본개항방식을 본받아 그 자신도 조선이 평화적 협상을 거부할 경우 무력시위 및 군사작전에 의해 강제적으로 입약(立約)을 성취시켜보겠다는 포함책략을 수립했다.

아시아함대가 제물포 앞바다에 도착하여, 무치섬(작약도, 芍藥島)을 기함 정박기지로 정하고, 로우 공사는 5월 30일 조선 관리에게 6월 1일 강화해협을 탐측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고하면서 그 자신의 조선사행임무를 밝힌 공한을 전달했다. 로우는 이 공한에서 조선과 협상을 위해 왔다는 것, 조선은 직위상 자신과 대등한 특사를 파견하여 교섭에 응할 것, 대형함정이 수도 서울 가까이 이동 항진하기 위한 예비작업으로 아시아함대 소속 소한정을 강화해협으로 파견 탐측 활동을 전개한다는 것, 조선 측이 탐측 활동을 방해하거나 적대적 행동이 없는 한 조선 백성을 위해할 생각은 없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미국은 서울 정복을 위한 군사적 확대 작전 수행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로우의 공한을 접수한 조선은 미국이 조선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선언한 것으로 간주했다. “필요하다면 미국의 대형함정이 수도 서울까지 항진하기 위해 예비탐측을 실시한다”는 로우의 선언은 곧 아시아함대가 서울까지 침공 정복 작전을 감행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방적 통고를 한 후 6월 1일 미군함대는 강화해협 탐측 활동을 전개했다. 포함 2척이 손돌목(孫乭項)에 이르렀을 때, 강화도 포대는 조선당국으로부터의 통항 허가없이 해협 진입은 곧 영토 침략으로 간주, 자위권을 발동, 일제히 기습포격을 가해 한미 간 무력충돌이 발생했다(손돌목 포격). 강화포대에 설치된 약 200문의 대포는 일제히 약 15분간 집중포격을 가했지만, 전근대적 낡은 병기라 미군 함정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지 못했으며, 손돌목 포격사건이 발생한 후 조미간 교섭이 단절되었다.

조미 양측은 율도 백사장에 긴 장대 꼭대기에 편지를 매달아 꽂아놓고 서로 편지를 주고받는 이른바 원시적 통신수단인 ‘장대 외교문서교환’이 전개되었다. 로우는 평화적으로 탐측 활동을 벌이고 있는 미군함대에 대한 기습포격은 비인도적 야만 행동이라고 비난하면서 즉각 조선은 대표를 파견해서 협상에 응할 것, 기습포격에 대한 사죄 및 손해배상을 할 것, 만약 10일 이내로 이러한 요구 조건을 거부하면 보복 응징하기 위해 상륙작전을 단행하겠다는 편지를 장대에 매달아 전달했다.

이에 대해 조선측은 강화해협은 조선의 국방 안보상 가장 중요한 수로이기 때문에 미군함대가 조선의 최고당국의 정식 허락없이 항행하는 것은 주권 침해요 영토침략행위라고 규정하면서 미국의 요구 조건을 단호히 거부했다.

평화적 협상 교섭이 결렬되자 로저스는 즉각 각 군 지휘관 회의를 주재, 마침내 6월 10일을 강화도 상륙작전의 ‘디데이(D-day)’로 정하고 상륙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로저스는 상륙군 부대를 10개 중대로 편성하고, 포병대·공병대·의무대 그리고 사진 촬영반 등으로 진용을 갖추고, 원정군 지휘관에 브레이크(H. C. Blake) 해군중령·상륙군 부대장에 킴벌리(L. A. Kimberly) 해군중령을 임명하면서 6월 10일 초지진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상륙작전에 644명, 해상지원작전에 190명이 동원되어 1시 45분에 상륙작전이 개시되었다. 당시 강화도 초지진⸱덕진진⸱광성보에는 조선 수비병 약 3천여 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미군은 함재대포로 초지진 성채를 약 2시간 함포사격을 한 후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미군은 22척의 보트를 타고 상륙작전을 전개, 초지진을 조선군의 저항을 받지 않고 점령했다. 초지진에서 하룻밤을 야영한 후 6월 11일 새벽에 덕진진을 점령하고 진사⸱무기고 등 군사시설을 모두 불태운 뒤 마지막으로 광성보 점령 작전에 돌입했다.

신미양요 당시의 조선군 전사자들의 모습, 1871년 6월 11일, 당시의 이 사진은 조선에서 찍힌 첫 전쟁 직후의 사진이다. 신미양요 시에 나라를 지키기 위한 이들의 전사(戰死)도 분명 순국(殉國)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신미양요 당시의 조선군 전사자들의 모습, 1871년 6월 11일, 당시의 이 사진은 조선에서 찍힌 첫 전쟁 직후의 사진이다. 신미양요 시에 나라를 지키기 위한 이들의 전사(戰死)도 분명 순국(殉國)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광성보에는 어재연(魚在淵, 1823~1871) 중군의 휘하 조선수비병 6백 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미군은 해상에서 함포사격을 약 1시간 포격을 계속하여 초토화한 후 돌격작전을 전개했다. 어재연 중군은 손돌목돈대 촬주소(札駐所, 지휘본부)에 대형 ‘수자기(帥字旗)’를 게양하고 폭우처럼 쏟아지는 탄우(彈雨) 속에 옥쇄(玉碎) 작전으로 용감하게 결사항전을 벌이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전세가 위급해지자 어재연은 “내가 나라의 후은을 입었으니 죽음으로써 내 직책을 지킬 뿐이다”하며 몸을 일으켜 화포를 이끄는 힘을 다해 공격하다가 탄환이 다 떨어지자, 계속 군도(軍刀)를 휘둘러 미군을 격살(擊殺)하였다. 한 시각이 지나서 순사(殉死)하니 음력 4월 24일(양력 6. 11)이다.

당시 미군측은 “조선군은 전근대적 노후한 병기를 가지고 미군의 현대적 총포에 대항해서 용감하게 싸웠다. 조선군은 결사적으로 용감하게 싸우면서 아무런 두려움 없이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다가 죽었다.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이보다 더 장렬하게 싸운 국민을 다시 찾아볼 수 없다”라고 조선수비군의 용맹성을 찬탄하였다.

약탈한 ‘수자기’를 배경으로 함상에서 사진을 찍은 미군 병사들, 조선의 입장에서는 치욕스러운 사진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약탈한 ‘수자기’를 배경으로 함상에서 사진을 찍은 미군 병사들, 조선의 입장에서는 치욕스러운 사진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미국 상륙군 부대는 돌격작전으로 광성보 손돌목 돈대를 함락, ‘수자기’를 내리고 성조기를 게양함으로써 육·해상의 장병들은 전승의 함성으로 환호했다. 광성보 전투에서 미군의 피해는 전사자 3명, 부상자 10명에 불과했다. 이에 반해 조선측 공식기록에는 조선수비병 전사자는 53∼55명, 부상자 24명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미군측 통계에 의하면 전투가 끝났을 때 광성보 일대에 널려있는 시체 수는 243구, 해협에 뛰어내려 익사한 장병이 100여 명, 총 350명이라고 집계했다.

전투는 수백 명에 달하는 조선군의 전사자를 낸 가운데 모두 종식되고 1시 정각에 킴벌리 부대장이 연락장교를 기함으로 파견, 로저스에게 전승 소식을 보고했다. 미군은 광성보를 점령하고 6월 12일 작약도 기함 정박지로 철수하면서 수자기를 비롯하여 각종 군기 50개, 각종 대포 및 화승총 481문을 전리품으로 약탈해 갔다. 당시 약탈한 전리품이 미해군사관학교에 보관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로저스는 무려 20일간 작약도 기함에서 조선 대표가 파견되기를 고대했지만, 대원군의 강력한 쇄국 양이 정책에 부딪혀 조선과의 입약 교섭을 단념하고 7월 3일 함대를 철수하였다. 대원군은 이러한 엄청난 인명피해가 발생하고 5개 요새지가 함락되는 참패에도 불구하고 미군함대의 철수는 곧 미군의 패퇴로 간주하여 조선군이 미군을 격퇴했다고 주장했다.

영의정 김병학은 “미리견(彌利堅)이‥‥‥, 해도(海島)를 왕래할 때 약탈의 습성이 있으므로 해랑적(海浪賊)과 다를 바 없다. 이들이 교역을 운운하는 것은 더욱 해괴한 말이다”라고 했다. 이처럼 미군을 약탈을 일삼고 있는 해적시함으로써 미군에 대한 적개심은 절정에 다다랐다. 이것이 신미양요(辛未洋擾)이다. (참조 : [신편 한국사] 37,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국사편찬위원회)

3. 미군의 철수

미군의 강화도 내침, 즉 신미양요는 분명히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이다. 그러나 그것은 미국이 처음부터 군사적으로 조선을 정복 지배하여 영토 분할이나 한반도를 식민지화하기 위한 침략전쟁이라기보다는, 오로지 포함책략에 의해 조선을 무력적으로 굴복, 조선개항을 실현해보려는 일시적 침략전쟁이었다는 점에서 서구 열강의 식민주의적 침략전쟁과는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러므로 미국은 한시적·국지적 전쟁을 통해 조선을 개항, 한반도에까지 통상무역의 범위를 확장시켜 보고자 포함외교책략에 의해 조선원정을 단행했지만, 실패로 끝난 것이다.

미국이 남북전쟁 이래 최대 규모의 해군 병력을 동원하여 조선원정을 단행하게 된 궁극적 지상목표는 조선 개항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압도적 전승을 거두었음에도 입약 시도는 무위로 끝났다. 미국의 조선 개항 실패 원인을 분석해보면, 첫째, 미국은 조선당국과의 입약 교섭에서 화해적 교섭 방법을 지양하고 시종일관 호전적 포함 책략으로 대응했다. 물리적 함포의 힘으로 무력적으로 조선을 굴복, 조선개항을 강요했다. 둘째,

문화적 배경에 대한 상호 이해가 부족했다. 양이에 대한 불신감이 강한 조선은 미군을 ‘인간동물, 해랑적’으로 비하 경멸한 반면, 미군은 백인 우월감을 가지고 조선군을 적개심이 강한 야만족으로 천대했다. 여기에서 상호 불신감이 증폭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화해적 교섭은 불가능하여 전쟁만이 유일한 해결 방편이 되었다.

셋째, 조선은 철두철미 대미 불교섭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 셔먼호사건(1866)⸱병인양요(1866)⸱남연군묘도굴사건(南延君墓盜掘事件, 1868) 등 일련의 양요를 치르면서 양이에 대한 배외감정이 격화된 조선 지도층은 양이와는 일체 교섭을 않겠다고 불교섭정책을 확립했다.

넷째, 미국은 조선원정을 단행할 때, 처음부터 조선과 전쟁을 각오하고 강화도에 내침했다. 강화해협은 역사적으로 외국 선박의 출입항이 금지된 ‘군사적 제한지역’이다. 그러기에 병인양요 직후 대원군은<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라는 ‘항행 금지 비석’을 세워 놓았다. 이처럼 국가안보상 중요한 수로에 정식 허가 없이 미군함대가 항행한 것은 엄연한 주권 침해요 영토침략행위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므로 조선측은 이를 영토침범으로 규정하고 있다.

다섯째, 1871년 조선은 아직도 개항 여건이 조성되지 못한 가운데 미군함대를 맞이했다. 로저스는 1854년 페리(M. C. Perry)의 일본개항 성공을 역사적 교훈으로 삼고 조선에도 동일한 역사적 결과를 기대하면서 조선원정을 단행했지만, 그 결과는 정반대였다. 일본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개항을 성취했지만, 조선은 엄청난 피의 대가를 지불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했다.

그럴 뿐만 아니라 일본은 이미 개항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일본은 1641년 나가사키(長崎)에 화란상관(和蘭商館)을 개설하여 유럽 각국과 교역을 통해 민족 자본을 축적해 왔고, 이를 통해 서구 선진문물을 수용함으로써 일본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는 이미 개항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은 나가사키 같은 교역항구도 없었고, 양반 지도층 인사는 태서(泰西) 문물에 어두워 화의론적 대미인식을 바탕으로 대응했기 때문에 개항은 곧 망국인 양 쇄국(鎖國)을 고수하였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조선 개항의 관건을 쥐고 있는 청나라가 조선개항을 반대했다는 사실이다. 만약 조선이 개항해서 구미 각국과 통상교역을 하게 되면 조⸱청 간의 전통적 유대관계(조공관계)가 단절되고, 이로 인해 조선에 대한 종주권(宗主權)이 상실될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청국은 조선이 계속 쇄국정책을 고수함으로써 전통적 종속관계를 유지하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위정척사(衛正斥邪)의 고루한 인습에 안주하고 있는 대원군은 7월 3일 미군함대가 철수하자마자 “서양 오랑캐와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팔아먹는 행위이다”라는 척화비(斥和碑)를 경향 각지에 세우면서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했다. (참조 : [신편 한국사] 37,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국사편찬위원회)

4. 중간 비망록

미국의 상선 제너럴셔먼호 격침 사건이 일어난 1866년과 조선 침략 원정을 계획하던 1869년 사이의 미국 대통령(제17대) 앤드류 존슨(Andrew Johnson, 재임 1865~1869) 역시 미국 프리메이슨 출신의 대통령이다. 앤드류 존슨의 뒤를 이은 제18대 대통령 율 리시스 그랜트(Ulysses Simpson Grant, 재임 1869〜1877)는 미국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북군총사령관(1864~1865)이었는데, 그는 프리메이슨 출신은 아니지만, 프리메이슨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인물로서, 1867년부터 앤그류 존슨 행정부에서 ‘임시전쟁부 장관’을 지낸 전쟁통 인물이다.

조선과의 통상교역을 위한 조선침략이 실패로 들아가자 미국의 대(對) 조선반도 정책은 변화가 일어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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