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동북아의 역사에서 왕대(王代)를 잇거나 국가를 창업하는 데에는 반드시 국새(國璽)가 필요하였다. 국새가 없으면 나라도 왕도 아니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단군 사화(사화)에 나오는 천부인(天符印) 세 개는 하늘이 준 단군 조선의 국새(國璽)로 보아야 한다. 국새는 그렇게 중요하다.

그런데 관찰사나 목사와 현감도 관인(官印)이 주어졌다. 가문이나 개인도 재산권을 행사하거나 권리를 주장할 때 사인(私印)을 사용하였다. 그것이 인감도장(印鑑圖章)이다.

공문서나 사문서라든가 유명인의 그림이나 글씨 등등을 위조할 때 가장 큰 문제점은 도장을 찍는 것이다. 특히 국왕의 도장을 위조하거나 제멋대로 찍는다면 이는 반역에 해당한다.

대한제국과 일본의 합병 문서에는 순종(純宗, 재위 1907~1910)의 서명도 없고 대한제국의 국새(國璽)도 찍혀 있지 않다. 이를 보면 일본은 친일 매국노 무리와 작당하여 대한제국의 주권과 영토, 국민 등등을 강탈한 것이지 신사적으로 합병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는 왕실과 친일파 무리, 그리고 상층부 일부를 회유하여 허울 좋은 은전을 뿌렸다.

이번에는 대한제국 국새의 위조 문건을 다루고자 한다. 즉 1907년 헤이그 특사 신임장이다.

1. 헤이그 특사증에 관한 첫 의문 제기

『역사속의 참 그리스도인 이준열사』, 필자, 2007년 5월 20일, CBS 교회 평신도 특강 자료. [사진 제공 – 이양재]
『역사속의 참 그리스도인 이준열사』, 필자, 2007년 5월 20일, CBS 교회 평신도 특강 자료. [사진 제공 – 이양재]

나는 2007년 5월 20일, CBS 교회 평신도 특강에서 [역사속의 참 그리스도인 이준 열사]에 대하여 강의를 한 적이 있다. 당시 강의에서 ‘헤이그 특사 신임장’의 위조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한 적이 있다. 아래에 당시의 강의안 유인물을 인용한다.

“(중략) 이른바 고종황제가 이준 열사에게 내렸다는 ‘헤이그 특사 <신임장>., 사실 그것은 몇 가지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다. 헤이그 특사 <신임장>과 아래의 고종황제가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친서> 초본과 비교하여 보면, 우선 어새(御璽)가 다르다. 어새 부분에서 위의 <신임장>과 <친서> 초본을 비교하여 보면, <신임장>의 ‘황제어보’는 그린 것임이 확연히 드러난다. 또한 위의 <신임장>은 한 줄에 35〜38자로서 글씨가 상당히 작고 조화를 이루고 있지 못한 데 비하여, 아래의 <친서> 초본은 1행 17자를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서체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를 보면, 헤이그 특사 <신임장>은 고종황제가 내려 준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민간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도 있고, 고종황제는 이준 열사가 한양을 떠나가는 시점까지 신임장을 내려 주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중략)”

[사진 제공 - 이양재]
[사진 제공 - 이양재]

필자는 CBS 교회 평신도 특강에 이어서 신임장은 민간에서 위조한 가짜라는 이러한 사실을 조선일보사 문화부의 유석재 기자에게 제보하였다. 유 기자가 나의 제보를 기사화할 때 사학계가 입게 될 타격을 염려하여 취재를 망설이자 나는 “독자가 가장 많은 조선일보에서 기사화하지 않으면, 다른 신문에 제보하겠다”라고 공언하였다. 이에 유석재 기자는 적극적으로 취재하여 6월 23일 자 [조선일보]에 헤이그 특사 신임장의 위조 문제를 처음으로 기사화하였다. 유석재 기자의 특종이 된 것이다.

1907년 이래 백 년간 누구도 의심치 않았던 헤이그 신임장이 고종이 보내준 것이 아니라 민간에서 위조되었다는 가능성이 밝혀지자 우선 경주이씨 문중 측에서는 당혹하여 필자를 공격해 왔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사진 제공 - 이양재]

나는 이러한 상황을 예상, 대비하여 CBS 교회 평신도 특강 유인물에서 이미 “(중략) 고종황제는 이준 열사에게 백지 신임장을 보내주었고, 이에 이준 열사는 고종황제의 의도를 담은 신임장을 민간에서 완성한 것이다. 이는 고종황제가 머무르던 경운궁에 대한 감시와 통제가 그만큼 심하였기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그렇다면, 이준 열사 일행은 <신임장>의 이러한 문제점을 인지한 상태에서 헤이그로 출발했을까? 나는 이준 열사 만이 <신임장>의 이러한 문제점을 안 상태에서 헤이그로 출발한 것으로 본다.”라고 밝힌 바 있디.

2. 신임장과 그 반출의 문제

당시 [조선일보] 유 기자의 취재 시에 나는 “어새(국새)는 찍은 것이 아니라 그려진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어압(御押)은 고종의 어압과 유사하다. 따라서 나는 “고종이 어새는 찍지 않고 직명 대황제 임을 밝히고 어압만 하여 백지 상태로 보냈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헤이그 특사의 파견에 고종의 윤허(允許)가 담겨있음을 당연하게 인정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즉 일단은 신임장이 백지 신임장일지라도 궁중에서 민간으로 나왔다는 것을 입증하여야 했다. CBS 교회 평신도 특강에서 나는 아래와 같이 주장하였다.

헤이그 특사 , 1907년.그려진 도장의 크기로 보아 이 신임장의 크기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신임장의 크기에 비하여 글자의 크기가 상당히 작다. 즉 신임장으로서의 짜임새가 엉성한 것이다. 도장은 확실히 그려 넣은 것이다. 그러나 대황제라 쓴 것과 어압은 고종황제의 육필로 판단된다. [사진 제공 - 이양재]
헤이그 특사 , 1907년.그려진 도장의 크기로 보아 이 신임장의 크기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신임장의 크기에 비하여 글자의 크기가 상당히 작다. 즉 신임장으로서의 짜임새가 엉성한 것이다. 도장은 확실히 그려 넣은 것이다. 그러나 대황제라 쓴 것과 어압은 고종황제의 육필로 판단된다. [사진 제공 - 이양재]
『황제어새(皇帝御璽)』, 가로 5.3cm 세로 5.3cm 높이 4.8cm. 위 사진은 어새와 원형(原形)과 찍은 모습이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황제어새(皇帝御璽)』, 가로 5.3cm 세로 5.3cm 높이 4.8cm. 위 사진은 어새와 원형(原形)과 찍은 모습이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1907년 4월 20일 자로 된 고종황제의 신임장(위임장)을 누가 궁궐에서 가지고 나왔느냐 하는 것이 풀리지 않은 의문으로 남아 있다. 당시에 일본 헌병들은 고종황제를 덕수궁에 있게 한 후 궁궐을 출입하는 사람들을 일일이 몸수색까지 했는데 어떻게 신임장이 밖으로 흘러나왔을까. 이에는 네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고종황제의 궁녀였던 박상궁이 가지고 나왔다는 설이 있고, (유자후 주장)
둘째는 고종의 신임을 받던 헐버트 박사가 가지고 나왔다는 설이 있으며, (헐버트 주장)
셋째로는 전덕기 목사의 친척인 김상궁이 가지고 나왔다는 설이 있고, (전덕기 측 주장)
넷째로는 이회영의 부인인 이은숙 여사가 가지고 나왔다는 설이 있다. (이은숙 주장)

준 사람(고종)이 하나이고 받은 사람(이준)이 하나인데, 위임장이 나온 경로로 주장되는 것이 넷이라는 기괴한 현상이 생긴 것이다. 이러한 각기 주장에서 공통적인 점은 네 사람 모두가 궁궐을 둘러싼 일본 헌병이 몸수색하기 어려운 여성이거나 외국인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 네 가지 설은 모두 틀릴 수도 있고, 두 사람의 설이 맞을 수도 있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신임장이 민간에서 위조된 이상, 위의 네 가지 설은 모두 틀렸을 수 있다. 논공행상에서 저마다 없는 공을 내세운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어압 만이 있는 백지 신임장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헐버트나 김상궁 또는 이은숙을 통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렇게 추정하면서도 왜 나는 “이 네 가지 설은 모두 틀릴 수도 있고, 두 사람의 설이 맞을 수도 있다”라고 언급한 것일까? 박상궁 이외에도 헐버트를 염두에 둔 것이다.

3. 헐버트 기념 사업회 주장

[연합뉴스]의 보도를 전재한 2015년 8월 12일 자 [서울신문]에 「“고종-헐버트-이회영-이상설 순 특사증 전달”…. 헐버트 기념사업회 추모식서 자료공개」라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기사에서는 “(사)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는 12일 서울 마포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내 백주년선교기념관에서 열린 ‘헐버트 박사 66주기 추모식’에서 헐버트 박사가 한국을 떠난 지 42년 만인 1949년 7월 29일 귀환해 같은 해 8월 5일 별세하기까지의 언론보도를 발굴했다며 이같이 밝혔다. 헤이그 특사 파견은 1907년 고종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해 국제사회에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알리려고 한 외교활동이다. 그동안 고종이 헤이그 특사인 이상설, 이준, 이위종 선생에게 어떻게 파견증(신임장)을 전달했는지를 두고 여러 가지 설이 있었다. 이날 사업회는 헐버트 박사가 양화진에 묻힌 1949년 8월 11일 동아일보에 실린 이시영 당시 부통령의 담화를 토대로 고종-헐버트-이회영-이상설 순으로 특사증이 전달됐음을 밝혔다. 보호조약이 늑결되자 대한민족이 뉘 아니 분통하랴마는 그때 의정부 참찬이던 이상설씨는 더욱 통분하여 늑약을 회소하고 국권을 부활키 위하여 태황제의 전권 친임장을 봉대하고 제2호 만국평화회의에 참가코자 하나 회의는 닥쳐오는데 궁중에 풍달할 도리가 없더니 마침내 나의 가형(이회영)이 비밀 풍달하여 황제께서도 친임장을 서하코자 하시나 좌우 정탐이 심하여 기회를 보시다가 헐버트 박사에게 친임장을 비밀 서하하시니 헐버트 박사는 이를 비밀히 가형을 거쳐서 이상설씨에게 전달하였던 것이다.”(기사 중)

위의 기사 중에 “1949년 8월 11일 동아일보에 실린 이시영 당시 부통령의 담화를 토대로 고종-헐버트-이회영-이상설 순으로 특사증이 전달됐음”을 주장한 이시영 부통령의 주장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1906년부터 이상설은 용정에 있었으므로 1907년에 이회영과 만날 기회조차 없었다.

역사적 사실이 그런데도 (사)헐버트기념사업회 측에서는 특사증(신임장)이 헐버트를 통하여 궁에서 나왔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1949년 8월 11일 자 [동아일보] 기사를 소환하여 주장한 것이다.

4. 신임장 위조 당사자는 우당 이회영

2007년 6월 23일 자 [조선일보]의 보도가 있던 시기에, 나는 (사)보재이상설기념사업회 임원들에게 신임장 위조의 당사자로 탁월한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李會榮, 1867~1932)을 지목하였다. 당시에 이성설기념사업회와 경주이씨 문중에서는 필자를 심하게 공격하였다. 내가 “무슨 의도로 그렇게 주장한 것이냐?”는 반발이다.

그러더니 금년(2023년) 3월 1일 자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이종찬 씨는 “헤이그 밀사 신임장의 옥새, 할아버지 우당이 위조해서 찍었다”라고 주장하였다.

기사의 내용인즉슨, “1907년 6월 25일 고종의 ‘밀명’을 받은 이준(李儁·당시 48)과 이상설(李相卨·37), 이위종(李瑋鍾·20) 세 명의 특사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한다. 제2회 만국평화회의(1907·6·5~10·18)는 이미 열흘 전에 개막했다. 을사늑약의 강압적 체결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파견된 이들은 고종 황제의 옥새가 찍힌 신임장을 내보이며 회의 참석을 요구했다. (중략) 이 신임장에 찍힌 황제의 인장이 위조됐을 것이라는 주장이 십수 년 전 학계에서 제기됐다. ‘제(帝)’자 윗부분의 획 길이나 간격이 고르지 않고, ‘새(璽)’자 역시 가운데 뚫린 부분이 없어 다른 문서의 황제의 인장과 다르기 때문이다. 신임장 사진은 언론이나 교과서 등 많은 책에 실렸지만 진본은 찾지 못했다. 헤이그 밀사 신임장에 찍힌 황제의 옥새(왼쪽)와 1909년 고종 황제가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에게 보낸 서신에 찍힌 정본 옥새. 신임장에 찍힌 옥새는 ‘제(帝)’자 윗부분의 획 길이나 간격이 고르지 않고, ‘새(璽)’자 역시 가운데 뚫린 부분이 없어 다른 문서의 황제의 인장과 다르다. (중략) 3·1절을 맞아 지난 22일 만난 이종찬 우당이회영선생교육문화재단 이사장(87·전 국정원장)은 “헤이그 특사 신임장에 찍힌 인장은 우당이 옥새를 위조해 찍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독립운동가 이회영 선생(1867~1932)의 손자인 그는 이 같은 주장의 근거로 우당이 ‘보소당인존(寶蘇堂印存)’을 보고 전각(篆刻)을 연습했다는 사실과 “옥새 위조범 조남승을 기소했다”라는 황성신문 1910년 6월 5일 자 기사, 그리고 조남승의 여동생인 어머니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 등을 제시했다.”(중략)라는 것이다.

2007년에는 노발대발하던 경주이씨 문중의 분들이 이제는 신임장 위조의 공로(?) 마저 이회영을 내세워 가져가고자 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종찬 이사장은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하고 넘어가야 한다.

우당 이회영이 헐버트로부터 신임장을 받은 사실이 없기에 민간에서 위조를 주도했다는 말이 되므로, 이시영이 주장한 기 작성된 신임장이 고종-헐버트를 통하여 이회영에게 전달되었다는 (사)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의 한때 주장을 이회영 유족들은 명확히 해결하고 넘어가야 한다.

5. 신임장 위조 당사자는 우당 이회영과 일성 이준이다

헤이그 특사 신임장의 또 다른 문제와 그 신임장의 위조를 둘러싸고 당시에 벌어진 상황이 있다. 간략히 언급하고자 한다.

헤이그 특사 신임장은 국내가 아닌 러시아에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20세 어린 나이의 이위종(李瑋鍾, 1887~1921)이 특사의 명단에 들어간 것이다. 이위종이 특사 명단에 들어간 것은 이범진을 대신한 것이다. 만약에 20세의 청년 이위종이 특사단에 넣은 것이 페테르부르크 현지에서 결정한 것이라면, 신임장은 러시아의 페테르부르크에서 만든 것이 된다. 그러나 이위종이 특사에 포함된 것이 국내에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참가를 기도할 때부터 의도한 것이었다면 신임장의 위조는 당연히 국내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신임장에 보이는 국새는 찍힌 것이 아니라 그려진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2007년에는 신임장의 국새는 이회영이 위조하여 그려 넣었다고 공언하였다. 이제 헤이그 특사 신임장은 민간에서 위조한 사실은 (사)보재이상설기념사업회와 경주이씨 문중의 탁월한 독립운동가 이회영의 자손들도 공인하는 사실이 되었다. 필자를 향한 2007년도의 노발대발은 이제 사라진 것이다.

헤이그 특사 신임장에는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모두 특사로 기록하고 있다. 정사(正使) 부사(副使)라는 구분이 없다. 이시영은 신임장을 민간에서 위조할 때, 이준 열사가 정사와 부사의 구분 없이 모두 특사로 기록하자며 이준이 그렇게 써넣었다고 후일 불만스러운 말을 하였다.

그렇다면 이 신임장이 위조된 것이라는 사실은 문장을 지은 이준 열사와 국새를 그린 이회영, 이를 본 이시영 등등, 적어도 세 사람은 헤이그 특사 출발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6. 맺음말 : 위조된 특사증과 제대로 된 특사증의 행방은?

나는 신임장에 보이는 고종황제의 어압(御押)은 진짜로 판단한다. 즉 우유부단했던 고종은 백지에 어압만 해서 백지 신임장을 만들어 궁에서 내보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백지 신임장을 가지고 나온 자는 분명 헐버트는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헐버트는 대한제국의 신임장의 형식과 규격을 잘 알기 때문에 규격 외의 백지 신임장을 가지고 나올 위인이 아니다.

헐버트는 제대로 된 세 특사의 신임장을 가지고 나왔을 수 있다. 제대로 된 신임장을 헐버트가 궁에서 가지고 나왔다면, 그 제대로 된 신임장은 어디로 갔는가? 헐버트가 이회영에게 특사증을 전달한 것이 사실이라면 전달 시점은 이준이 헤이그로 출발한 이후에 뒤늦게 전달하였을 가능성은 있을까?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다. 이회영이 늦게라도 전달받았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블라디보스톡으로 보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 특사는 헤이그에서 신임장을 한 번도 꺼내어 보여준 사실이 없었다. 그러나 일본은 세 특사가 가지고 있는 신임장이 위조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을까? 혹시 일본이 제대로 된 신임장을 입수하거나 탈취라도 한 것일까?

심각한 것은 헐버트는 1907년 7월 10일 헤이그에 왔으나 세 특사 가운데 아무도 만나지도 않고 당일로 헤이그를 떠났다. 헐버트는 헤이그에 갔을 때 세 특사의 제대로 된 특사증을 가지고 갔을까? 가지고 갔다면 왜 세 특사에게 전달을 안 하고 그냥 떠났을까?

이상설과 이위종은 이준이 지참해 가지고 온 신임장이 민간에서 위조된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 같다. 이상설이 뉴욕에 갔을 때에야 그 신임장을 신문에 공개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바로 그 위조된 특사증이다. 이 위조된 특사증도 사진 이외에는 실물이 전하지 않는다. 언젠가 위조된 특사증도 제대로 된 특사증도 나타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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