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올해 9월 말은 헤이그에 안장되었던 이준(李儁, 1859~1907) 열사 성체를 환국시켜 서울 강북구 수유동에 안장한 60주년이다.

이준 열사는 이상설 지사와 평생 동지이자 지기(知己)였다. 그러나 해방 전과 후에 이 두 분 사이를 이간질하려 애쓴 사람들이 상당수 있다. 그들은 사료(史料)를 위조하면서까지 이간질하려 애썼다.

가. 해방 전 1910년대 이간질

이상설(李相卨, 1870~1917) 지사와 이준 열사 유족의 이간질은 상식적으로 볼 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상설 지사가 누구인가? 1910년을 전후로 한 시기에 블라디보스토크에 거주하였던 독립운동가들 가운데 가장 고매한 인품과 학식을 지닌 정통 유학자이다.

1. 이상설과 이일정의 추문이 일본 외교부에 보고되다

블라디보스톡 일본 총영사 오오토리후지타로우(大鳥富士太郞)가 1910년 11월 10일자로 보고한 문건, 즉 문서철명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1”, 문서번호 “機密韓 제69호”, 문서제목 “조선인에 관한 정보 송부의 건(별지)”에 의하면 이준 열사의 후처 이일정과 이준 열사의 아들 이종승(李鏞)은 1910년 가을에 경성에서 출발하여 하얼빈을 거쳐 10월 22일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3]”, “朝憲機 제1389호 제318호”, “6월 20일 이후 浦潮斯德지방 鮮人 동정”. 1911년 7월 5일, 블라디보스톡 일본총영사관의 토리이(鳥居) 통역관이 종합하여 보고한 보고서의 첫 장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3]”, “朝憲機 제1389호 제318호”, “6월 20일 이후 浦潮斯德지방 鮮人 동정”. 1911년 7월 5일, 블라디보스톡 일본총영사관의 토리이(鳥居) 통역관이 종합하여 보고한 보고서의 첫 장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1911년 7월 5일 자 보고서의 이상설 부분이다. 이상설 지사와 이준 열사의 부인 이일정의 추문을 보고하고 있다. 일본이 퍼트린 허보(虛報)가 다시 일본에 사실처럼 보고된 것이다. 이는 허보를 사실로 각색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사진 제공 – 이양재]
1911년 7월 5일 자 보고서의 이상설 부분이다. 이상설 지사와 이준 열사의 부인 이일정의 추문을 보고하고 있다. 일본이 퍼트린 허보(虛報)가 다시 일본에 사실처럼 보고된 것이다. 이는 허보를 사실로 각색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사진 제공 – 이양재]

그리고 이듬해 1911년 7월 5일, 블라디보스톡 일본총영사관의 토리이(鳥居) 통역관이 보고한 문서철명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3”, 문서번호 “朝憲機 제1389호 제318호”, 문서제목 “6월 20일 이후 浦潮斯德지방 鮮人 동정”에 이상설에 관한 동정 보고 부분에는 이상설 지사와 이준 열사의 부인 이일정의 추문을 보고하고 있다.

“二. 李相卨
李相卨ハ新開里李某方ニ李儁ノ寡婦ト同居シ居ルモ世間ニ傳フルカ如キ醜事ハ全ク虛妄ナリ同人ハ故李範晉カ露都ヨリ五百留ヲ寄與セシニ依リ之ニ依リテ衣食シ居レリ尙同人ハ人ニ語ルニ他ニ貯金アリ有事ノ時ニアラサレハ之ヲ出サズト云ヒ居ルモ眞僞不明ナリ”

이 보고서에 나타난 추문을 분석해 보자. 이 추문이 사실일까? 이상설 지사가 누구인가? 그는 1910년을 전후로 한 시기에 블라디보스톡에 거주하였던 독립운동가들 가운데 가장 고매한 인품과 학식을 지닌 정통 유학자이다. 그런 그가 가장 절친하였던 동지 이준 열사의 아내 이일정을 탐하였겠는가? 불가능한 일이지만 이러한 보고서가 존재한다는 것은 일제의 밀정 누군가가 그렇게 추문을 조작하여 퍼트리며 몰고 나갔던 것이 아닐까?

즉, 이 “조헌기(朝憲機) 제1389호 제318호” 보고서는 단순한 보고서가 아니다. 일제 밀정은 모략 공작을 성공적으로 진행하였고, 그 공작을 사실로 본 다른 밀정이 일본 영사관에 보고한 것을 블라디보스톡 일본 총영사가 취합한 문건에 넣은 것이다.

결국 이일정은 모략에 참지 못하고 1912년경에 경성으로 귀환하며, 이준 열사의 아들 이종승은 블라디보스톡에 남는다. 1911년 여름의 이 근거없는 추문은 이상설 지사의 가슴에도 심각한 상흔을 남긴 것 같다. 일제 밀정의 이상설과 이준 열사 유족과의 이간책은 성공한 것이다. 결국 이 이간질은 이상설 지사의 죽음으로 끝난다.

2. 이상설 지사 주변의 일본 밀정이 있다

이러한 여러 문건과 당시의 상황을 분석하여 보면, 분명 이상설 지사의 측근으로 누군가 일제의 밀정(密偵)이 있었다. 그 밀정은 독립운동가들의 동향과 정보를 보고하는 단순한 밀정이라기보다는, 독립운동가를 분열시키는 모종의 공작까지 하는 최고 지위의 교활한 밀정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상설 지사와 이준 열사의 부인 이일정 여사의 관계를 불륜으로까지 몰아서 심하게 왜곡하여 퍼트릴 수 없었을 것이다.

필자가 여러 문건과 상황을 통하여 분석하여 보면, 분명 이상설 지사의 최측근으로 이상설 지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는 위치의 누군가가 일제의 밀정이었고, 그 밀정은 이상설 지사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상설 지사와 이준 열사의 부인 이일정 여사의 관계를 불륜으로까지 몰아서 심하게 왜곡하여 퍼트릴 수 없었을 것이다.

필자는 1982~3년에 이강훈(李康勳, 1903~2003)씨와 이규창(李圭昌, 1913년~2005년)씨 등등의 독립운동가와 순국선열 이강년(李康年, 1858~1908) 의병장의 증손자 이인규씨 등등 여러 분을 자주 만난 적이 있다.

당시 어느 분인가가 필자에게 한 말이 있다. “일정때 독립운동가 다섯이 모이면 그 중 한 놈은 밀정이거나 밀정과 연결된 놈이었다”라는 말이다. 그렇게 암약한 놈들도 “해방 후에 독립운동가 행세를 했다.”

반면에 “신분을 위장하고 총독부에 침투한 독립운동가도 있고, 총독부의 직원이면서 독립운동가들에게 협력한 분들도 있다”라고 하였다. “틀림없는 사실은 많은 독립운동가가 신분을 숨기고 지하에서 싸워 자취를 남기지 않았다. 어떠한 보상도 바라지 않은 진정한 투사들”이시다.

반면에 “해방 일주 전에 광복군으로 들어간 분도 있고, 풍속 잡범이 해방 후에 출소하였는데 후일에 가서는 독립운동을 했다고 주장한 예도 있다”고 한다. 필자는 일제 식민지시대의 이런 상황을 잘 알기에 독립운동가로 위장하여 반민족 행위를 한 자와 해방 후 독립운동가 행세를 한 잡범들에 대하여 민감한 감정이 있다.

나. 해방된 나라에서도 이간질이 계속되다

2006년 10월경이다. 이듬해의 이준(李儁, 1859~1907) 열사 순국 백 주년 기념사업을 위하여 동분서주하고 있을 때이다. 필자는 당시 이준 열사의 최대 동지였던 이상설의 전기를 다룬 역사학자 윤 모의 『이상설전』 증보판(1998년 2월 20일 일조각 발행)을 검토한 바 있다.

그 증보판에는 도판 43번으로 1984년 초판본과 1993년 중판본에 없는 이위종(李瑋鍾)이 장(藏)하였다는 소위(所謂) 「이상설 일기초(李相卨日記抄)」가 나와 있다. 이를 위하여 장지연기념사업회를 방문하여 『장지연전서』를 한 질을 증여받았고, 장지연(張志淵, 1864~1921)이 초록하였다는 소위(所謂) 「이상설 일기초」를 검토하였다. 『장지연전서』에 수록된 그 자료를 윤 모는 이위종이 가지고 있던 이상설 일기장을 장지연이 초록하였다고 주장한다. (윤○○, 『증보 이상설전』, 170면, 일조각 발행).

1. 위조된 가짜 문건 「이상설 일기초」

그러나 필자는 이 「이상설 일기초」를 2007년 5월 20일(일) CBS 교회 평신도 특강에서 [역사 속의 참 그리스도인 이준 열사]를 강의하며 위조된 문건임을 설파하였다. 당시의 특강 원고를 소개한다.

“이 「이상설 일기초」라는 문서는 위서(僞書)이다. 그러나 그 위서에서조차 이준의 죽음을 자정(自靖)이라 표현하고 있다. 이는 변절하지 않고 지조를 지킨 사람에게 쓰는 말로서, 결국 이준 열사의 죽음은 순국임을 거꾸로 말하여 준다.

「이상설 일기초」, 위조된 문건이다. 『장지연전서』를 2006년 가을에 장지연선생기념사업회로부터 기증받았으나, 2007년 7월 14일 추모제 이후에 전임 회장 전 모 회장의 독직으로 (사)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에서 손을 떼고 나오면서 이 전서를 포함한 당시 수집한 많은 자료를 사업회의 청파동 사무실에 그대로 두었으나, 현재는 사업회의 일체 자료가 소멸된 상태이다. 이 사진은 『증보 이상설전』에서 수록되어 있는 모습을 찍은 것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이상설 일기초」, 위조된 문건이다. 『장지연전서』를 2006년 가을에 장지연선생기념사업회로부터 기증받았으나, 2007년 7월 14일 추모제 이후에 전임 회장 전 모 회장의 독직으로 (사)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에서 손을 떼고 나오면서 이 전서를 포함한 당시 수집한 많은 자료를 사업회의 청파동 사무실에 그대로 두었으나, 현재는 사업회의 일체 자료가 소멸된 상태이다. 이 사진은 『증보 이상설전』에서 수록되어 있는 모습을 찍은 것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이상설 일기초」]가 가짜인 이유는‥‥‥,

첫째, 「이상설 일기초」를 당사자가 아닌 이위종이 가지고 있다가 장지연에게 보여 주었을 확률은 1% 미만으로 가능성이 매우 적다.

둘째, 이 문서는 이위종 소장본을 장지연이 베낀 것이라고 하나, 필체는 장지연의 것이 전혀 아니며, 서예를 공부한 사람이면 누구나 구사할 수 있는 체본체(體本體)로 쓰여 있다. 즉, 장지연이 구사한 필체(필적)의 자유스러움과 활달함이 전혀 없다.

셋째, 「이상설 일기초」는 일기라 볼 수 없는, 이준 열사 부분을 제외하고는 여정만을 기록한 아주 짤막한 기록이다. 대개의 경우 가짜 문서나 기록은 길게 만들었다가는 들통이 나기 때문에 간략히 만든다. 이는 이 기록은 이준 열사의 사인을 왜곡시키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임을 의미한다.

넷째, 「이상설 일기초」의 모든 기록은 이미 일본 측이 알고 있는 것만 기록되어 있다. 즉, 쉽게 조작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헤이그에서 비공식 활동을 하였던 헐버트 박사에 대하여 「이상설 일기초」는 틀리게 언급하고 있다.

즉, 헐버트 박사가 헤이그에 출현한 시점이 기존 헐버트 박사의 전기와 달리 7월 17일이라고 일기초는 언급하고 있으나, 사실은 헐버트 박사는 7월 10일 연설을 한 후에 헤이그를 떠났다. 즉, 이 짧은 기록에서 조차 틀린 점이 있다. (이것이 「이상설 일기초」가 위조된 문건임을 결정적으로 입증한다.)

다섯째, 「이상설 일기초」의 일기 형식이, 조선시대의 다른 일기와 비교하여 볼 때 잘 못 되어 있다.

여섯째, 가장 중요한 사실로 이상설이 권업회의 회장으로 있었을 때, 스스로 주간한 [권업신문]에서는 이준 열사의 자결에 대하여 두 번씩이나 언급하고 있다. 이는 이상설과 이위종은 이준 열사의 죽엄이 자결임을 말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참조 : 「역사속의 참 그리스도인 이준 열사」, 이양재, 2007년 5월 20일(일), CBS교회 평신도 특강 원고)

2. 누가 「이상설 일기초」를 위조하였는가?

그렇다면, 「이상설 일기초」는 언제 누구에 의하여 조작된 것인가? 누가 조작하여 『장지연전서』를 만들 때 집어넣은 것일까? 이것은 하나의 연구 대상이기는 한데,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이상설의 일족으로서 그 주위에서 암약하던 일제의 밀정이나 그 자손이 『장지연전서』가 편찬되기 직전에 장지연의 유족에게 접근하여 자료를 섞어 넣어 시도한 일로 판단된다.

누구이기에 그런 시도가 가능할까? 윤 모의 『이상설전』(1984)과 『증보 이상설전』(1998)은 해방후 이준 열사와 이상설 지사를 갈라놓은 그 전말의 증거를 남겨 놓고 있다.

필자는 윤 모는 올바른 학자이기를 포기한 자로 본다. 그의 『이상설전』 초판본과 증보판의 차이는 “제15장 이상설의 유문과 이준 열사”라는 글이 초판본에는 없고, 재판본에는 증보했다는 점이다.

윤 모의 『이상설전』 초판본과 증보판에서는 이준 열사의 병사설을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책의 93면에 있는 주(註) 46)의 (3)에서 “일본으로서는 海牙平和會義(해아평화회의)에 唯一(유일)하게 派遣(파견)된 記者(기자)였고, 또한 일본인으로서는 유일하게 韓國密使(한국밀사)를 만날 수 있었던 大阪每日新聞(대판매일신문)의 高石眞五郞(고석진오랑)의 目擊記事(목격기사)(1930년 1월 22일 등). 이 高石眞五郞(고석진오랑)의 目擊記事(목격기사) 자료는 이상설(李相卨)의 長姪(장질) 李觀熙(이관희)가 수집하여 필자에게 주면서 李相卨傳記(이상설전기)를 집필할 때 꼭 전문(傳文)을 소개하여 달라는 희망을 표시하여 좀 장황하지만 여기 전문(全文)을 인용하는 것이다.”라며 2차에 거쳐 [대판매일신문]에 게재된 것을 모아서 수록하고 있다.

이 책의 4면 서언의 주5)에 의하면 이관희는 『이상설전』 저술을 위하여 70건 내외의 자료를 저자 윤 모에게 제공한 바로 그 사람으로 그는 이상설의 족질이다.

이상설의 생부(生父)는 이행우(李行雨)이며 양부(養父)는 이용우(李龍雨)이다. 이상설에게는 이상익(李相益)이라는 친제(親弟)와 이상직(李相稷)이라는 양제(養弟)가 있었다. 그의 양제 이상직은 독립운동가였다.

그런데 친제 이상익은 1899년 11월 14일 한성사범학교 교관(漢城師範學校敎官 敍判任六等)으로 임용되었고, 1902년 5월 28일에 4등으로 승급한다. 이후의 이상익의 행적은 확인이 안 되고 있다(참조: [대한제국관원이력서], 관원이력 29책, 688). 그 이상익이 이관희의 부친인데, 그는 독립운동가가 아니다. 언제인가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상익과 그 자손들의 친일 행위를 탐색하여 규명하고자 한다.

중요한 사실은 이상설의 아들 이정희(李庭熙, 1899~1946)는 1946년 10월 11일 48세로 사망하였고, 그의 세 아들이 전쟁기간 중이던 1950년에 북으로 간 이후에는 이상설 지사의 족질 이관희는 이상설의 유족으로 나섰다.

이관희는 해방 후 이정희가 사망하자 이상설의 족질임을 내세워 환국하여 국내에 거주 중인 독립운동가들에게 접근하며, 이정희의 세 아들이 월북한 이후에는 이병도(李丙燾, 1896~1989)와 신석호(申奭鎬, 1904~1981) 등등의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출신의 친일 식민사학자들에게 접근한다.

이준 열사의 병사설의 진원지는 바로 이 경주이씨 가문의 이관희와 이완희(李完熙) 형제이다. 윤 모의 『이상설전』에는 이관희가 해방후 중앙방송국장을 지낸 것으로 나오는데, 실제로 [자유신문] 1948년 8월 15일 자 4면에는 ‘이관희가 초대 중앙방송국(지금의 KBS) 국장(사장)으로 취임하기로 했다’라는 기사가 나온다. 같은 날 [조선일보]도 같은 기사가 나온다. 그러나 이관희가 실제로 취임했는지, 또한 정확히 몇 개월을 중앙방송국장으로 근무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취임하여 근무하였다면 짧은 기간 근무하였던 것 같다.

윤 모는 『이상설전』을 저술하는데 10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리고 윤 모는 자신이 저술하기 이전에 이관희가 여러 사람에게 이상설 전기의 저술을 부탁하고 자료를 주었다고 한다. 윤 모의 글에 의하면 이관희는 해방 직후 6.25전부터 이상설 전기 저술에 뜻을 두었고, 일찍이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출신의 친일식민사학자 이병도 신석호 등에게 저술을 부탁하였으며, 그들이 이관희를 윤 모에게 소개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1970년 이전은, 적어도 1995년까지는 한국에서나 일본에서나 컴퓨터를 통한 신문기사 검색이 거의 불가능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이관희는 1930년 1월 22일자 [대판매일신문]을 이미 1960년 이전에 가지고 있었다. “감히 조선인 주제에 할복을 해”라며 이준 열사의 할복을 부정하고 싶어하는 일본의 극우 국수주의자(國粹主義者) 누군가가 이관희에게 그 기사를 제공한 것이 아닐까?

분명한 것은 이관희는 1950년대부터 이준 열사의 자결설을 부정하는데 가장 앞장섰던 인물이고, 그는 해외를 자유롭게 나다녔다. 필자는 이관희와 이완희, 그리고 그의 부친 이상익에 대하여 친일파 의혹을 가지고 있다.

(사)보재이상설기념사업회에서는 납북으로 주장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이상설 지사의 세 아들은 납북된 것이 아니라 이상설의 족질로 주장하며 설치는 이관희의 그늘을 피하여 자진 월북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관희는 해방후에 이상설의 족질이라 주장하며 장지연의 유족에게도 쉽게 접근하였을 것이다. 그리고는 조작된 「이상설 일기초」를 섞어 넣었을 수 있다.

장지연선생기념사업회에서 영인본으로 발행한 『장지연전서』의 다른 문건을 보면 장지연의 초고가 그대로 영인되어 있는데, 이 『장지연전서』는 왜정시기에 그의 아들 장재식이 출판을 시도하여 일제가 검열한 검열인(檢閱印) 흔적이 있다. 그 검열된 부분은 장지연이 이준 열사의 자결을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다. 즉 일제가 검열하면서 이준 열사의 할복 부분을 삭제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 맺음말

「이상설 일기초」의 역사적 사실을 돌이켜 보며, 나는 중세시대나 조선시대에, 심지어 해방후에 자신들의 유익을 위하여 위조한 사료를 만들었다는 데서, 그리고 아준 열사의 사인이 병사임을 주장하기 위하여 「이상설 일기초」를 위조한 예를 돌이켜 보면서 중요한 한 사실을 지적하고자 한다.

역사 사료에서는 “당대의 원본이 나타나거나 실물을 검토하기 전에 눈에 보이는 증거가 증거의 전부가 아니다”.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하여, 또는 면피(免避)를 위하여 당대의 사료도 위조하는 판국이고,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고 사실을 왜곡하기 위하여 위조 문건을 만드는 판국이다.

즉 후대인들이 자신의 주장과 유익을 위하여 전대의 사료를 위조하는 일이 흔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문학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서지학이나 문서 분석학을 기본학으로 배워야 한다. 그러고서도 우선하여 중요한 것은 학문하는 학자의 양식(良識)이다.

지금 우리 앞에 드러난 독립운동가는 빙산의 일각도 채 되지를 않는다. 이름도 남김없이 행적도 남김없이 연기처럼 사라진 분들‥‥‥, 그런 분들도 많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자.

이제 필자는 경주이씨가문의 독립운동가 후손 몇 분에게 이준 열사와 이상설 지사를 이간질하는 망동을 이제는 그만 멈추어 줄 것을 호소한다. 그런 짓은 스스로가 친일파임을 숨겨온 기회주의자가 하는 짓이다. 어찌 순국선열과 독립운동가를 기억한다는 분들이 평생 동지이자 지기를 이간질한다는 말인가?

그들이 이준 열사를 병사로 몰고 나가는 것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준 열사 자결을 언급한 이상설 지사라든가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모사꾼이자 사기꾼으로 모는 망동이라는 사실을 왜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가.

노무현 정부때 (사)보재이상설기념사업회(당시 회장 이재정)에서는 월북한 이상설 지사의 직계 자손을 찾으려 하였다. 2007년 초에 필자는 당시 (사)보재이상설기념사업회의 임원 이광민씨와 이동길씨에게 “이상설 지사와 이준 열사의 동지애에 대한 이간책을 이제는 거둬 들이고, 북청에 거주하는 이준 열사의 증손자를 접촉하여 이상설 지사의 후손을 찾자”고 제안한 바 있다.

필자가 아는 바로는 이상설 지사의 아들은 이정희이고, 그의 세 손자는 이재준(李在濬), 이재홍(李在鴻), 이재철(李在哲)이며, 그들은 1950년에 월북하였다. 지금은 불가능하지만 앞으로 남북교류의 시대가 다시 온다면 이상설 지사의 손자 세 분의 자손을 찾아 진천에 있는 기념관을 방문하도록 할 것이며, 이준 열사의 고손(高孫)이 이준 열사의 강북구 수유동 묘소를 참배하는 길이 열리길 소망한다.

부록. 이준 열사의 사인(死因)과 그 근거

1. 이준 열사의 사인에는 여러 설이 있다

이준 열사의 사인(死因)은 여러 설이 있다. 한 사람의 사인이 이토록 제각기 다른 것은 역사상 달리 찾아 볼 수가 없다. 자결설, 분사설, 병사설, 자정설, 독살설이 있다. 이 여러 설을 역순으로 살펴보자.

① 독살설 ; 독살설은 최근에 제기된 의혹에 근거하고 있다. 그것은 1907년 7월 11일 자로 헤이그에 와 있던 러시아의 차이로코프가 이즈볼스키 외무부 장관에게, “곧 일본의 군함 두 척이 네덜란드에 입항할 것이라는 정보”를 알린 데 근거를 두고, 일본 군함에 타고 있던 일본 해군의 특무에 의하여 독살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 것이다. 이는 멀쩡하던 건강한 사람이 급작스레 사망하였기 때문에 주장된 것이다. 이준 열사를 일제가 독살하였다는 주장은 병사설보다는 설득력이 있으나, 현실성이 없다.

② 자정설 ; 자정설은 소위 「이상설 일기초」에 순국자정(殉國自靖)이라 표현한데서 나온다. 그러나 이 「이상설 일기초」는 위조된 문건임을 위에서 밝혔다. 물론 순국자정이란 스스호 순국에 들었음을 말하는 표현이다.

③ 병사설 ; 병사설은 당시 일본 정부가 주장하였다. 그러나 병사설은 각기 단독설(뺨에 난 종기설)과 등창설, 심장마비설로 나뉜다. 일제가 퍼트린 병사설의 사인이 제각각이라는 점은 이준 열사의 순국에 당황한 일본이 시급히 병사설을 유포시키느라 병사 원인을 통일시켜 퍼트리지 못한데 그 원인이 있다. 여러 사람이 제각각 거짓말을 하다 보니, 사인이 하나로 일치될 수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는 이준 열사의 순국은 일제가 예측하지 못한 돌발적인 사태였음을 의미한다. 일제가 퍼트린 여러 병사설은 후일 윤 모가 『이상설전』에서 단독설로 교통 정리한다.

④ 분사설 ; 이준 열사가 헤이그에서 분사(憤死)했다는 주장은 자결설을 부정하기 위해 일제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분사란 말은 병사보다는 자결에 가까운 단어이다. 분해서 병드는 데는 시간이 필요로 하나, 분해서 자결을 결행(決行)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 없다.

⑤ 자결설 ; 자결설은 다시 할복 분사설과 단식 자결설(단식자정설)로 나눌 수 있다. 이준 열사는 병사하지 않았다. 이준 열사의 아들 이용을 언급하고 있는 일본의 외교부의 몇몇 기밀문서에는 “할복분사”, “자살”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할복분사”는 분해서 할복 자결했다는 말이다. 할복은 우리나라 무사의 전통적인 자결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대한제국 말기에 우리식 할복을 한 대표적인 분이 바로 고종황제의 시종무관을 지낸 민영환이다. 이준 열사는 헤이그에서의 외교 노력이 수포가 되는 것을 보며, 7월 10일경부터 단식에 들어갔다고 한다. 기독교적 의미에서는 단식이라기보다는 금식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렇게 금식하는 가운데 분노의 기운이 극도에 달하면 인체에 내재하여 있는 기가 하체로부터 상체로, 다시 머리로 올라간다. 스트레스가 극도로 치밀어 오르는 형상으로, 이 상태에 들어가면 사생결단(死生決斷)만을 생각하게 되는데, 이러한 때에서는 복부에 칼이 약하게 들어가도 폭발적인 현상이 일어나 피를 흘리며 즉사하게 된다.

2. 일제는 병사설을 선전하다

이준 열사의 죽음에 대해, 왜 병사설이 퍼지게 되었을까?

① 일본 측이 병사설을 조작하였다 ;
헤이그 현지의 일각에서는 오히려 자결설이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 측이 헤이그 현지에서 이준 열사가 순국하자 당황하여 그날부터 병사설을 급조하여 퍼트렸다. 또한, 일본은 1907년이 다 가기도 전인 10〜11월에 서둘러 원고를 작성하여 12월 20일 자로 『한국정미정변사』라는 책(일어)을 경성(서울) 일한서방에서 발행한다. 이 책에서 일본은 이준 열사의 사인을 병사로 선전하는데, 내국인들 사이에서 후에 퍼지는 병사설의 원전(原典)은 바로 이 책이다. 그리고 이 책은 고종황제가 퇴위당한 원인을 헤이그 특사 사건에 들씌운다. 후일, 이 책의 내용을 비판 없이 받아들인 몇 사람에 의하여, 한때 헤이그의 이준 열사 묘소는 훼손당하기도 한다.

② 이준 열사의 순국을 시기하는 이관희가 병사설을 퍼트렸다 ;
해방 직후부터 국내의 이상설 지사의 족질 이관희가 “이상설 지사를 이준 열사보다 더 높이기 위하여서는 이준 열사의 명예가 죽어야 이상설이 산다”라며, 이준 열사의 병사설을 위서(僞書)인 「이상설 일기초」까지 만들어 조직적으로 왜곡하고 널리 유포시켜 왔다. 이는 위에서 언급하였다.

③ 일부 기독교인들이 이준 열사의 자결을 자살로 오인하여 병사설 확산에 가세하였다 ;
일부 기독교인들이 자살은 반기독교적이라 하여, 이준 열사의 자결을 자살로 오인하고 이를 부정하려 하였다. 이는 해방 직후부터 이관희가 이상설을 높이기 위하여, 이준 열사의 병사설을 고의로 왜곡하여 유포시키는데 깊은 연관이 있다. 분명한 것은 안중근 의사가 할빈에서 이등박문을 격살한 것은 살인이 아니듯이, 이준 열사가 헤이그에서 자결한 것은 자살이라 할 수가 없다. 이준 열사의 자결은 외침(外侵)에 대응하는 최후의 항거 수단이었다. 이준 열사는 조국의 마지막 운명을 걸머지고,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갔고, 거기서 세계와 한반도의 평화를 외치다가 자신을 희생양으로 바친 것이다. 그의 피는 세계 피압박 민족의 절규로서, 당시 대한제국의 절규를 외면한 40여 개국 대표들의 머리 위에서 머물러 있을 것이다.

3. 이준 열사의 자결설은 어떤 정황 근거가 있는가?

분명한 것은 이준 열사는 병사하지 않았다. 할복 자결이 아니면 단식 자결이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① 이상설과 이위종은 이준 열사의 자결을 말하였다 ;
가장 중요한 것은 이상설은 1911년 6월 블라디보스톡에서 권업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있으면서 [권업신문]의 발행(1912년 4월 창간)에 주간을 맡는다. 그가 발행한 [권업신문]에서는 이준 열사의 자결을 제18호와 제120호에서 두 번이나 논설로 언급한 바 있다. 권업회가 발행하는 <권업신문>의 논설이란 권업회의 공식 입장을 천명하는 것이다.

[권업신문] 제120호, 1914년 7월 19일 자 1면, ‘논설 리쥰공이 피 흘린 날’ 기사 부분. 권업회는 이상설이 회장이었던 독립운동단체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권업신문] 제120호, 1914년 7월 19일 자 1면, ‘논설 리쥰공이 피 흘린 날’ 기사 부분. 권업회는 이상설이 회장이었던 독립운동단체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특히 이 논설 가운데 제120호인 1914년 7월 19일 자로 발행된 [권업신문] 논설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는데, 제120호 논설은 이준 열사의 순국 8주년을 맞아 쓴 것으로서, 이날(7월 14일)을 맞는 이상설과 이위종의 소감이 어떠할까를 독자들에게 심정적으로 되묻고 있다. 당시 이상설과 이위종이 모두 블라디보스톡에 있었는데, 그들의 입에서 자결이란 말이 안 나왔다면, 그런 소감을 언급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자결이 아닌데 이렇게까지 하며 자결한 것으로 주장했다고 우리가 생각한다면 그것은 독립운동가들을 모독하는 망발이다.

그렇다면 이상설과 이위종이 이준 열사의 자결을 부정한 듯한 말을 한 것으로 알려진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일본이 구미의 언론과 일제의 밀정을 통하여 퍼트리고 확대한 이준 열사의 순국을 병사로 왜곡한 공작의 결과이다.

일제가 얼마나 집요하게 이준 열사와 이상설 이위종을 대상으로 하여 공작을 벌였냐 하는 것은 1910년부터 2년여간 이준 열사의 아들 이종승(이용)과 이준 열사의 처 이일정이 블라디보스톡에 가 있었는데, 이일정과 이상설 지사의 불륜이 있었던 것처럼 이상설 지사 주변에서 암약하고 있던 밀정을 통하여 악랄하게 헛소문을 퍼트린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② 이준 열사는 자결할 각오를 다지며 헤이그로 갔다 ;
헤이그 특사로 갈 당시. 이준 열사만이 국내에서 출발하였다. 이상설은 용정에서 출발하였는데, 두 사람은 블라디보스톡에서 만나, 그곳에서 함께 러시아의 페테르부르크로 가서 이위종을 만났다. 그들은 이렇게 세 명의 특사로 각각의 지점에서 합류하여 헤이그로 갔다. 그러나 그들은 헤이그에서의 활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아무도 국내로 돌아오지 못하였다.

이준 열사는 헤이그에서 순국하고, 이상설은 러시아의 우수리 강가에서 순국하였으며, 이위종도 러시아에서 사망하였다. 그들은 헤이그 특사로 가는 길이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길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 갔다. 그들은 모두 자결하는 심정으로 헤이그로 갔으나, 실제로 자결한 사람은 이준 열사이다.

③ 이일정은 이준 열사가 자결하였다는 전보를 이상설로부터 받았다 ;
이준 열사의 부인 이일정은 7월 15일 오후 2시경에 헤이그에서 이상설이 보내온 이준 열사의 자결에 대한 전보를 받았다. 당시 전보는 모두 일제가 장악하고 있었으나, 전보가 헤이그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길은 두 갈래의 선이 있었다. 일본을 경유하는 선과 러시아를 경유하는 선이었는데, 러시아를 경유하는 선이 일본을 경유하는 선보다 소식의 도착이 빨랐다. 당시 이상설이 보내온 전보에 놀란 이일정은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 심장병에 걸려 남은 평생을 고생한다. ([동아일보] 1959년 11월 22일자 3면 참조)

④ 20세기 초의 일본 외교관들 사이에서 이준 열사의 할복분사는 상식이었다 ;
가장 중요한 것은, 이준 열사가 돌아가신 이후 일제의 외무성 산하의 몇몇 영사관에서 본국에 보내는 기밀문서나 일제의 첩자들이 작성한 기밀문서 여러 점에서 이준 열사의 죽엄을 “자살” “할복분사” 등으로 언급하고 있다.

‘재광동일본총영사관’이 「일본 외무대신 앞으로 보고한 내부 기밀문서」 제1면과 제4면. 1926년 4월 30일, 이객우는 이준 열사의 아들 이용이 쓴 가명의 하나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재광동일본총영사관’이 「일본 외무대신 앞으로 보고한 내부 기밀문서」 제1면과 제4면. 1926년 4월 30일, 이객우는 이준 열사의 아들 이용이 쓴 가명의 하나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재광동일본총영사관’이 「일본 외무대신 앞으로 보고한 내부 기밀문서」 제4면 부분. 1926년 4월 30일, 이객우(李客雨, 李鏞)이 20년전에 헤이그에서 ‘할복분사(割腹憤死)’한 이준의 아들이라고 밝히고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재광동일본총영사관’이 「일본 외무대신 앞으로 보고한 내부 기밀문서」 제4면 부분. 1926년 4월 30일, 이객우(李客雨, 李鏞)이 20년전에 헤이그에서 ‘할복분사(割腹憤死)’한 이준의 아들이라고 밝히고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그 중 “할복분사”로 표기한 ‘재광동일본총영사관’이 1926년 4월 30일자로 일본 외무대신 앞으로 보고한 내부 기밀문서를 하나만 선택하여 그 제1면과 제4면을 사진으로 소개한다. 이러한 식의 문서가 하나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보다 앞선 연대의 것도 다수가 남아 있다.

20세기 초 일제의 외교관들 사이에서 이준 열사의 죽엄을 상식적으로 할복분사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일본 외무성에 보고할 때 이종승(개명 이용, 가명 이객우)을 이준의 장남으로, 다시 이준을 설명하며 헤이그에서 자결한 이준이라고 하면, 일본 외무성의 직원들이 즉각 알 수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⑤ 당시 헤이그에 자결설이 널리 유포되고 있었다 ;
당시 헤이그에 있던 일본 측 대표는 일본 외무성에 한국밀사 중 한 사람이 죽었다고 전문을 보내고, 일본 외무차관은 조선통감 이등박문에게 다시 전문을 보낸다. 그 전문의 끝에 헤이그에서 자살 풍설이 돌고 있다고 언급한다.

“한인 이준의 얼굴의 부스럼을 열어본 결과 단독에 걸려 엊그제 사망했다는 것인바 오늘 아침 판매장을 하였다. 장례식에 나온 자는 호텔 소사와 동행한 한인 뿐, 자살이란 풍설을 드는(말하는) 이도 있으나 앞에 쓴 사실은 점차 세상에 판명되리라 믿어진다.”

그 외교관은 왜? 자살 풍설이 돌고 있다고 보고했을까? 실제로 자살했다는 소문이 헤이그에 돌았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 측 대표가 자결 사실을 확인하고도 본국에 자결했다고 사실대로 보고할 수 있었을까?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일본이 헤이그에서 대한제국의 마지막 발버둥을 봉쇄하려고 얼마나 많은 자금을 들여가며 노력을 하였는데, 자결을 방지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현지 외교관들에게 인책 사유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왜곡하거나 축소 보고하게 된다. 현재, 그러한 축소 보고의 전문(電文)이 이렇게 남아 있는 것이다.

⑥ 일본의 철저한 로비와 보도 통제로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다 ;
원래 제2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는 1906년에 열기로 되어 있었는데 일본의 로비에 의하여 1907년으로 연기되어 개최되었다. 아울러 일본은 1906년에 이미 고종황제가 러시아 측으로부터 초청을 받았음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 측은 고종황제를 철저히 감시하였고, 제2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한 나라들에 적극적인 로비를 하여 한 나라도 대한제국의 편을 들어준 나라가 없었고, 아울러 현지 언론을 철저히 매수하였다.

안중근은 이등박문을 죽인 이유 가운데 하나가 세계 언론이 대한제국의 외침에 대해 보도하지 않기에 이등박문을 사살하여 세계 언론에 대한국인의 마음을 널리 알리려 했다는 데 있다. 즉, 이준 열사가 자결을 했어도 그 보도는 축소되고 은폐되며 왜곡될 상황이었다.

⑦ 네덜란드는 국익을 위해 대한제국을 철저히 외면하였다 ;
당시 네덜란드는 일본과 오랜 교역을 하였다. 일본에서는 이미 당시로부터 400여 년 전부터 난학(蘭學)이라는 학문이 있었다. 화란, 즉 네덜란드에 대한 학문이다. 심지어 일본에는 화란인들이 거주하는 특별구역이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있었고, 1907년 이준 열사가 순국할 당시에 일본 군함 두 척이 헤이그 항에 기항하기도 했을 정도로 군사적으로도 교류가 있었다. 즉, 화란은 대한제국의 편을 들어주는 것보다 일본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 더 얻을 것이 많았다.

따라서 네덜란드 측은 이준 열사의 사망진단서에 사인조차 기록하지 않았다. 사인을 밝히지 않은 사망진단서를 발급한다는 점은 이상한 거 아닌가? 심장마비에 의한 자연사나 병사라면 당연히 그 사인을 사망진단서에 적었을 것이다. 당시 상황은 의사가 사망진단서에 사인을 사실대로 적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면, 왜일까? 왜? 사인을 은폐해야 했을까? 일본으로부터 얻는 것이, 대한제국으로부터 얻을 것보다 많았기 때문은 아닐까? 사망진단서에 사인이 없다는 것은 자연사나 병사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여 준다.

⑧ 당시 일본이나 유럽에서는 조선식 자복(刺腹)보다는 일본식 할복(割腹)이 더 널리 알려져 있었다 ;
일본식의 사무라이 할복, 즉 배를 가른 후 목을 내리치는 할복을 아는 일본인이나 서양인들에게, 배에 칼을 깊이 밀어 넣는 조선식 자복은 애들 장난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준 열사가 조선식 자복을 했다면 일본식 할복의 관념을 가진 자들에게는 할복으로 비치지 않는다.

일본의 극우 국수주의자들은 한국인은 정신이 나약하여 할복 자결을 못한다는 관념을 아직도 갖고 있다. 그러니 그들에게 이준 열사의 할복 자결을 말하면 한국에서도 할복 자결이 있느냐고 되 묻는다. 그럴때 필자는 부연하여 설명한다. “대한제국 말기에 고종황제의 시종무관장을 지낸 민영환(閔泳煥, 1861~1905) 선생이 할복 자결하셨다.”

⑨ 이준 열사가 기독교인이었던 것이 자결설의 확산에 부정적으로 작용하였다 ;
이준 열사는 절박한 심정으로 최후의 항거로서 자결하였지만, 타국인들은 다만 좌절에 의한 비관 자살로 치부되었다. 기독교에서는 자살을 죄악시하므로, 현대의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준 열사의 자결을 부정하고 싶어 하듯이, 당시의 헤이그 사람들도 자결을 부정하는 심정이 있었을 것이다.

특히, 당시 헤이그의 기독교인들은 이준 열사가 대한제국의 기독교청년회 회장으로 이해되고 있어 그의 자살 풍문에 더욱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이상의 여러 근거에서 볼 때, 이준 열사가 20세기 초반에 알려진 대로 자결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회의 현장에서 자결한 것은 아닐지라도, 그는 분명 헤이그 현지에서 공식적으로 자결한 것만은 사실로 받아 들여야 한다.

이준 열사의 숭고한 죽엄을 병사로 왜곡하는 일이 광복된 조국에서, 그것도 그의 평생 동지이자 지기였던 이상설 지사의 족질 이관희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출신의 친일사학자 이병도 신석호 등등을 추동하여 윤 모가 『이상설전』을 쓰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여 의도적으로 퍼트렸고, 그것이 지금도 답습되고 있다는 사실은 실로 개탄스러운 일이라 아니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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