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社會)의 들창


벼 열섬과 바꾼 처녀(處女)
『오늘의 심청(沈淸), 옥임 양(玉任 孃)의 사연』

빚에 얽힌 결혼(結婚)에 (행복)幸福있으라
=육순(六旬)넘은 신랑(新郞)은 손녀(孫女) 둘을 거느려=
아버지는 집나간 채 소식 없고

○... 열아홉 살 되는 소녀가 육(六)십오(五)세의 노인과 결혼하여 화제를 일으켰다. 고창군(高敞郡 星松面 溪堂里)에 사는 박(朴魯洙)씨의 장녀 옥임(玉任)양은 이웃에 사는 김(金在銀=65)이라는 노인과 지난 이(二)십이(二)일 김씨의 집에서 혼례식을 올리고 백년을 기약한 것이다. 사모관대(紗帽冠帶)를 하고 꽃다운 신부를 맞아들인 이 늙은이는 슬하에 독자를 두어 이미 두 손녀를 얻은 할아버지였었다.

그러나 외아들은 시름시름 앓다가 그만 죽어 버렸다. 그 후 오(五)년동안 며느리는 홀시아버지를 섬겨오다가 두 딸 자식을 남겨 놓고 어디론가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김」노인은 어버이 없는 손녀를 데리고 눈물로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동네 노인들은 딱한 「김」씨에게 깊은 동정을 보내며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재혼하라고 권하게 되었다.

절망에 싸였던 이 노인도 차차 그럴듯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저무는 환혼기의 생애에 빛깔이 깃들여 그를 재생시켰으며 노인은 백방으로 자기의 배우자를 찾아 헤매었다.

○... 그러자 그 앞에 나타난 여인 - 그는 젊음이 넘치는 열아홉 살 처녀 「옥임」양이었던 것이다. 찢어질 듯 발랄한 육체와 아직 아무도 개척하지 않은 여인이 마흔여섯 살 위인 노인의 신부가 된 것이다.
근 반세기나 되는 연령의 차이가 나는 한 늙은이 앞에 시집을 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처녀에게는 미어질 듯 슬픈 사연이 있었던 것이다.

○... 옥임 양의 부친 「박」씨는 가난에 쫓겨 이(二)십팔(八)만환이나 되는 빚을 지게 되었다. 그에게는 일생을 다해도 못 갚을 거액이었다. 심한 독촉의 화살이 날았다. 매일과 같이 빚쟁이가 몰려들어 난리가 벌어지곤 했다.

쌀 없는 절량가에는 단 한 푼의 돈이 나올 구멍이 없었다. 그날 그날 입에 풀칠할 끼니도 없고 심한 빚달련에 못 이겨 마침내 「박」씨는 행방을 감추고야 말았다. 이 불운한 집의 딸 「옥임」양에게는 그때부터 남모르는 결심이 섰던 것이다. 

불쌍한 내 아버지를 자기가 구하려고 한 것이다. 내 몸을 바쳐 빚을 갚으리라고 나선 순정의 처녀 - 「옥임」양은 「김」노인의 주름살 깊은 품안에 매끈한 그의 육체를 파묻고 아버지의 빚을 갚아달라고 하소연하였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새 각시를 얻은 「김」영감은 저 세상에서 새로 태어난 기쁨을 안고 그에게 정조(正租) 열섬을 선뜻 내주었다. 신부는 그것을 십육(六)만환의 돈으로 바꾸었다.
급한 빚 십사(四)만환을 여기저기의 채무자에게 갚았다. 나머지 이(二)만환은 그 어머니와 동생들을 굶주림에서 건져 주었다.

○... 빚 때문에 처자를 버리고 꼬리를 감춘 처녀의 아버지는 그의 혼례식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딸이 이웃 영감에게 시집을 갔는지도 모르고 그는 지금 타향에서 헤매고 있다. 자기 때문에 꽃다운 청춘을 바친 지도 통 모르는 아버지....
그러나 동네 사람들은 이 처녀를 가리켜 심청(沈淸)이라고 불렀다. 영원히 행복하라고 빌었다.

[고창지국 발(高敞支局 發)]

사진=옥임(玉任)양과 김(金)노인의 결혼식 광경(上)과 쓰러져가는 옥임(玉任)양의 친정집(下)

사회(社會)의 들창

사회(社會)의 들창 [민족일보 이미지]

[민족일보] 1961년 5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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