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한국사회에서 잊힌 존재였던 항일노동운동가 이재유 선생을 기리는 ‘이재유 기념사업회 준비위원회’(기념사업회)가 오는 25일 출범한다. 이 준비위 출범에 주도적 역할을 한 최승회 세계노동운동사연구회 이사장을 만나 이재유 및 기념사업회 출범과 관련한 이야기를 나눴다.

최 이사장은 이재유가 비교적 뒤늦게 발굴되고 연구된 이유에 대해 “분단과 반공이데올로기가 오랫동안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결과”와 “연구자의 입장에서도 1930년대 사회주의 계열의 운동을 연구하는 것이 많은 제약이 있었”음을 들었다.

특히, 이재유가 당대 노동운동가들과의 차이점에 대해 “당시 사회주의운동이 민족적 과제보다는 계급적 관점을 우위에 두고 있던 반면에 이재유 선생은 민족문제와 계급문제를 함께 해결하려고 노력” 한 점, 그리고 “조직방식에 있어서도 오르그 방식의 하향식 조직이 아니라 아래에서부터 활동가들의 의지와 투쟁과정을 통한 민주적 방식으로 전국적 혁명조직을 만들려고” 한 점을 들었다.

아울러 이재유가 계급문제만이 아니라 민족문제에도 신경을 쓴 이유에 대해 “이재유 선생은 조선의 완전한 독립 없이는 당시 사회주의자들이 그리는 사회를 이룰 수 없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고 단언했다.

나아가, 이재유가 국제주의 노선보다 자주적인 노선을 중시한 이유에 대해서는 “무엇보다도 국제선의 운동가들이 조선의 구체적 현실에 기반하지 못하였다는 점이 국제선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하게 된 이유”로 꼽았다.

경성트로이카 결성을 주도한 이재유의 트로이카 이론에 대해서는 “일방적인 지도-피지도 관계를 부정하고 지도함과 동시에 자신도 지도되는 민주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짚었다.

최 이사장은 오늘날 노동운동가들이 이재유로부터 배워야 할 점에 대해 △노동자 대중에 대한 깊은 애정과 신뢰를 가지고 열성을 다해 활동하고 있는지, △민족문제와 계급문제의 관계 설정을 정확히 하고 이를 통일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 등을 들었다.

아울러 이번 기념사업회 출범과 관련, 최 이사장은 김금수 세계노동운동사연구회 상임고문의 역할 그리고 이재유 연구가인 김경일 교수와 손옥희 이관술선생 유족, 박진수 이효정선생 유족 등의 참여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이 인터뷰는 지난 10월 19일 오전, 경기도 고양시 3호선 전철 원당역 근처 카페에서 진행되었다. 이후 좀 더 보완을 위해 이메일을 통해 서면으로 진행했다. / 편집자 주

 

'이재유 기념사업회 준비위' 출범을 주도한 최승회 세계노동운동사연구회 이사장. 최 이사장은 "이재유가 일제시대 때 민족문제와 계급문제를 함께 해결하려고 노력"했음을 강조했다. [사진제공-세계노동운동사연구원]
'이재유 기념사업회 준비위' 출범을 주도한 최승회 세계노동운동사연구회 이사장. 최 이사장은 "이재유가 일제시대 때 민족문제와 계급문제를 함께 해결하려고 노력"했음을 강조했다. [사진제공-세계노동운동사연구원]

“‘잊힌 이재유’, 일제시대 노동운동 역사 제대로 살려내는 것이 필요”

□ 이계환 : 세계노동운동사연구회 이사장으로 계시다. 세계노동운동사연구회는 무엇을 하는 곳인가?

■ 최승회 : 세계노동운동사연구회는 2013년 창립되었으며 2014년 법인등록을 하였다. 창립 이전에도 김금수 선생님의 지도로 2007년부터 활동가들의 학습모임이 이어져왔다. 노동운동의 역사를 공부하며 우리 운동의 미래를 고민하는 학습모임, 공개강연, 노동조합 교육 등을 진행하였으며, 세계노동운동의 역사현장을 찾아가는 탐방여행도 진행하였다.

□ 세계노동운동사연구회가 이재유 기념사업회 출범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나?

■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1930년대 이재유 선생의 활동을 통해 엄혹한 일제치하에서도 노동자의 투쟁이 이어져왔고 이 투쟁은 우리 노동운동 역사의 중요한 부분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분단 이후, 치열했던 사회주의 계열의 노동운동은 역사에서 지워졌다. 현재의 노동운동이 있기까지는 엄혹한 시기 몸 바쳐 싸웠던 선배노동자의 투쟁이 있었고 이 역사를 제대로 살려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2013년, 하나밖에 없는 이재유 선생의 흉상을 모셔오면서 매년 회원 중심의 추모식을 진행해왔지만 이제는 많은 분들이 해방세상을 위해 몸 바친 선생의 삶을 함께 기리길 기대하며 기념사업회 출범을 제안하게 되었다.

□ 세계노동운동사연구회에서 이재유에 대해 공부하거나 연구한 적이 있나?

■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역사를 공부하다보면 1930년대 이재유 선생의 활동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이재유를 연구한 김경일 명예교수를 모셔서 공개 강연을 연 적도 있다. 지난 8월에는 ‘소통과 혁신 연구소’와 함께 경성트로이카 활동 무대였던 영등포역 주변을 답사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였다.

□ 이재유 기념사업회 출범 웹포스터를 보면, 위에서 말씀한 이재유 흉상 조각품이 사진으로 나와 있다. 누구의 작품이고, 어떻게 만들어졌나? 또 소유하게 된 경위가 있나?

'이재유 흉상'. 최 이사장은 김금수 선생과 함께 2013년 8월, 군산의 한 유치원에서 조월희 조각가가 만든 이재유 선생의 흉상을 승용차 뒷좌석에 모시고 올라왔다. [사진제공-세계노동운동사연구원]
'이재유 흉상'. 최 이사장은 김금수 선생과 함께 2013년 8월, 군산의 한 유치원에서 조월희 조각가가 만든 이재유 선생의 흉상을 승용차 뒷좌석에 모시고 올라왔다. [사진제공-세계노동운동사연구원]

■ 소유라기보다는 보관이 아닐까?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2005년 10월, 이재유 선생 60주기 추모식이 남원의 민주노동당 중앙연수원에서 개최되었고, 조각가 조월희 선생이 이재유 선생의 흉상을 제작하여 기증했다고 한다. 그 연수원이 없어지면서 선생의 흉상이 군산 지인의 유치원에 잠시 머물고 있던 것을 김금수 선생님과 제가 세계노동운동사연구회 사무실로 모셔왔다.

조각가 조월희 선생은 인천이 고향으로 서울예고 재학 시절 전국미술대회에서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실력파 작가였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뒤늦게 서울대 미대 서양학과를 졸업하고, 전국 곳곳을 방랑하며 작업에 전념하다 광화문 촛불집회 현장에 나선 민중의 모습을 주제로 작품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2015년 작고하셨다.

□ 일제하 항일운동가, 노동운동가로서 이재유는 오랫동안 잊힌 존재였다. 비교적 뒤늦게 발굴되고 연구되었는데 그 이유가 있나?

■ 무엇보다 분단과 반공이데올로기가 오랫동안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결과라고 생각한다. 연구자의 입장에서도 1930년대 사회주의 계열의 운동을 연구하는 것이 많은 제약이 있었을 것이다. 이재유 선생의 고향이 함경남도였고 후손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도 조금은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민족문제와 계급문제를 함께 해결하려고 노력한 이재유”

□ 독자들을 위해 이재유의 주요 활동을 간략히 정리해 달라.

■ 이재유 선생은 1905년 함남 삼수군 별동면에서 출생하여 1922년 18세의 나이로 상경하여 사립 보성고보 2학년으로 편입하였다가 자퇴하였고, 다음해 개성 송도고보로 편입하여 사회과학연구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퇴학 처분을 받고 1926년 12월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제의 주요 감시대상 인물카드의 이재유. 32세 때인 1936년 12월 26일 형사과에서 작성했다. [사진-국사편찬위원회]
일제의 주요 감시대상 인물카드의 이재유. 32세 때인 1936년 12월 26일 형사과에서 작성했다. [사진-국사편찬위원회]

일본대학 전문부에 입학하면서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조공 일본총국 위원, 고려공청 일본총국 선전부 책임을 맡아 활동하다가 1928년 4월 제4차 조공사건으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고 1932년 만기 출옥한다.

이후 조공재건 경성트로이카를 결성하여 활동하다 서대문경찰서에 체포되었으나 신출귀몰하게 탈출하였고 이후 경성을 중심으로 치열한 노동운동 조직과 함께 조공재건 경성준비그룹을 결성하고 활동을 이어가다 1936년 12월 양주군에서 체포되어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선생의 나이 40세, 해방을 몇 달 앞두고 청주보호교도소에서 옥사하였다.

□ 이재유의 운동 노선을 간략히 설명해 달라.

■ 이재유 그룹이 만든 발행물을 보면 조선의 경제적 관계들을 반봉건적, 반자본주의적이라고 평가하고 조선혁명의 성격을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민족혁명은 민족부르주아지가 모두 반동화되었기 때문에 혁명적 투쟁력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노동대중이 자신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그 전단계인 민족혁명을 앞서서 수행해야한다는 것이다. 중심 강령은 조선의 절대독립과 노동자, 농민의 소비에트 정부 수립, 대토지 소유 몰수, 1일 7시간 노동제 등이다.

□ 그렇게 보면 이재유는 노동운동을 통해 항일운동을 한 것 같다. 이재유가 당대 노동운동가들과의 차이점은?

■ 당시 사회주의운동이 민족적 과제보다는 계급적 관점을 우위에 두고 있던 반면에 이재유 선생은 민족문제와 계급문제를 함께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 조직방식에 있어서도 오르그 방식의 하향식 조직이 아니라 아래에서부터 활동가들의 의지와 투쟁과정을 통한 민주적 방식으로 전국적 혁명조직을 만들려고 하였다.

□ 방금 말씀하신대로 일제시대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운동가들은 대부분이 계급문제를 우선시하고 민족문제를 경시하거나 무시했다. 그런데 이재유는 계급문제만이 아니라 민족문제에도 신경을 써 민족해방투쟁을 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 이재유 선생은 조선의 완전한 독립 없이는 당시 사회주의자들이 그리는 사회를 이룰 수 없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선생은 1920년대 중반 서울에 올라와 민족적 차별대우를 받으며 민족의식이 싹텄으며 이후 공산주의자로 성장하는 사상적 토양이 되었다.

검사의 취조과정에서 선생은 ‘내가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함은 일본에서 독립하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조선은 공산주의 국가로 될 수 없고 또 설령 공선주의 국가로 된다고 하여도 일본적 공산주의 국가가 되기 때문이다’라고 진술하였다.

□ 이재유는 당시 국제주의 노선과 달리 국내 상황에 근거한 자주적인 노선을 중시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른바 ‘국제선의 권위’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와 근거가 있나?

■ 선생의 운동노선도 ‘국제공산당의 정당한 지도와 계통적 연락을 정립하는 것’을 주요한 조직적 임무로 생각하였지만, 국제선의 권위를 빌어 군림하려는 영웅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태도, 소수의 운동가들로 조직을 결성하여 일거에 혁명을 달성하려는 관념적이고 급진적 태도, 무엇보다도 국제선의 운동가들이 조선의 구체적 현실에 기반하지 못하였다는 점이 국제선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하게 된 이유라고 본다.

“트로이카 이론은 지도함과 동시에 자신도 지도되는 민주적 성격”

□ 이재유 주도로 경성트로이카가 결성됐다. 경성트로이카란? 그리고 주요 인물과 활동은?

■ 트로이카운동은 선생이 고안해낸 독자적인 운동방식으로 당 조직 이전에 상호 접촉을 통해 이론적 통일을 도모함으로써 이를 기반으로 각자가 자신의 의사에 따라 자유롭게 운동하는 것을 말한다.

유력한 지도부가 먼저 당을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세 마리의 말이 자유롭게 마차를 끄는 것과 같이 회원 전부가 각자 자유로이 선전하고 투쟁을 하고 이를 통해 상부조직을 건설하려한 것이다.

1930년대 이재유와 그의 동지들. 큰 사진부터 시계 방향으로 이재유, 박진홍, 이순금, 이효정, 이관술, 김삼룡, 이현상. 
1930년대 이재유와 그의 동지들. 큰 사진부터 시계 방향으로 이재유, 박진홍, 이순금, 이효정, 이관술, 김삼룡, 이현상. 

경성트로이카가 조직된 것은 대략 1933년 9월경이었고 당시 이재유, 안병춘, 변홍대, 이현상, 최소복 등이 활동하였으며 용산, 영등포, 동대문 지역에 하위 트로이카가 결성되어 노동자투쟁을 전개하였다.

□ 경성트로이카는 사업방식에서 기존 조직들과 차이가 있다고 하는데 대중사업이나 조직사업을 어떻게 했나?

■ 경성트로이카는 ‘대중이 없는 당은 죽은 당이므로 각각의 운동가는 공장에 들어가 자유롭게 획득해야한다’는 일관된 방침을 가지고 있었고, 대중을 획득하여 상당한 그룹이 형성될 때 비로소 조직을 한다는 이론은 당시 오르그에 의한 중앙집중적 하향식 조직방식과 다르며, 트로이카 이론은 일방적인 지도-피지도 관계를 부정하고 지도함과 동시에 자신도 지도되는 민주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선생은 노동대중의 지도력을 인정하였으며 민중적 자율성과 역동성에 무한한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

□ 이재유가 이끈 그룹은 ‘경성트로이카’(1934.9) -> ‘경성재건그룹’(1934.11) -> ‘조선공산당재건경성준비그룹’(1936.10) 등으로 명칭을 바꾸며 노동현장에 바탕을 둔 당재건 활동을 전개했다. 이 변화 과정을 어떻게 봐야 하나?

■ 일반적으로 트로이카 운동을 3기로 나누어 보는데 명칭과 상관없이 조직과 활동방식은 트로이카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명칭을 바꾼 것은 비합법 상황에서 보안의 문제, 아래로부터의 운동조직 통일을 위해 전술적인 선택을 한 것이라고 본다.

□ 당시 이재유는 국내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력인 박헌영과 만난 적이 있었나? 두 운동가 사이에서 사업작풍의 차이는?

■ 박헌영은 상해에서 체포되어 6년의 선고를 받고 1939년에 출옥하였으므로 이재유와 한 공간에서 만나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이재유 선생이 투옥되어있던 1939년 12월, 선생과 함께 활동하던 이관술이 박헌영을 만나 이후 활동에 대해 논의하였다고 한다.

최승회 이사장(왼쪽)과의 인터뷰는 지난 10월 19일 오전, 원당역 근처 카페에서 진행되었다. [사진제공-세계노동운동사연구원]
최승회 이사장(왼쪽)과의 인터뷰는 지난 10월 19일 오전, 원당역 근처 카페에서 진행되었다. [사진제공-세계노동운동사연구원]

□ 이재유는 여러 차례 검거돼 투옥되고 또 피신생활도 오래 했다. 투옥과 피신 중 특이한 게 있는가.

■ 선생은 20대부터 40세 옥사할 때까지 20년도 안 되는 기간 중 10년이 넘게 투옥 되었고, 나머지 기간도 피신생활의 연속이었다.

1934년 4월, 서대문경찰서를 탈출한 것은 이재유 선생의 담대함과 기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일제의 경찰이 체포에 혈안이 되어 있었지만 활동지역을 떠나지 않고 치열한 비합법 투쟁을 이어갔다. 옥중에서도 조선어 사용금지 반대, 수감자 대우개선, 간수들에 대한 사상 고취 등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 이재유는 1936년 체포되어 징역 6년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르고 1942년 형기가 만료되었으나 출옥하지 못하고 1944년 옥중 순국한 것으로 나와 있다. 1942년 형기 만료임에도 출옥하지 못한 이유는?

■ 당시 일제는 사상탄압을 위하여 1941년 치안유지법을 개정하여 예방구금제도를 만들었고 선생의 형기가 만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향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제도를 적용하여 청주보호교도소에 수감하였다. 결국 1944년 10월 26일, 해방을 몇 달 앞두고 안타깝게 옥사하였다.

□ 이재유는 국가보훈처로부터 2006년 독립운동 포상자로 추서됐다. 어떤 포상을 어떤 사유로 받았나?

■ 선생은 국내항일 운동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6년 정부로부터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사회주의 계열의 운동을 하였다는 이유로 제외되었다가 뒤늦게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것이다.

“오늘날 노동운동가들은 노동대중에 대한 깊은 애정 갖고 활동해야”

□ 오늘날 노동운동가들이 이재유로부터 배워야 할 점은?

■ 선생의 활동을 통해서 현재 우리 활동가들이 노동자 대중에 대한 깊은 애정과 신뢰를 가지고 열성을 다해 활동하고 있는지, 민족문제와 계급문제의 관계 설정을 정확히 하고 이를 통일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 같다.

또한 운동의 미래에 대한 전략적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전술적 방법을 구체적으로 모색하고 있는지, 이론과 실천을 통일하고 그 차원을 높이기 위해 열성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도 반성해야할 것 같다.

이재유 선생 기념사업회 3차 발기인모임을 마치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회의실에서.  [사진제공-세계노동운동사연구원]
이재유 선생 기념사업회 3차 발기인모임을 마치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회의실에서.  [사진제공-세계노동운동사연구원]

□ ‘이재유 정신’이 오늘날에도 필요하다는 의미 같다. 마침 ‘이재유 기념사업회 준비위원회’가 오는 25일 출범한다. 이재유 기념사업회를 누가 처음 발기했는가? 그리고 기념사업회에 어떤 사람들이 참여하나?

■ 기념사업회를 위한 첫발을 떼게 된 것은 아무래도 세계노동운동사연구회 상임고문을 맡고 계신 김금수 선생님의 의지와 열정이 큰 역할을 한 것 같다. 올해 4월 연구회 9차 총회의 결의가 있었으므로 연구회 이사들이 많이 참여했고, 노동사회연구소 이원보 이사장, 이재유를 오랫동안 연구하신 김경일 교수, 양대 노총 전 위원장, 그리고 황광우 동고송 상임이사, 손옥희 이관술선생 유족, 박진수 이효정선생 유족께서 참여하고 계신다.

□ 향후 이재유 기념사업회 준비위원회의 주요 사업은?

■ 내년 5월 1일, 기념사업회 본 조직을 결성하고 법인등록까지 마칠 계획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재유 선생의 삶을 널리 알리고 회원을 확대해야한다. 자료수집과 연구사업도 진행할 예정이고 대중강연도 계획하고 있다.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홈페이지도 개설할 생각이다.

□ 이재유 기념사업회 출범을 계기로 모처럼 많은 노동계 인사들이 함께 하는 것 같다. 무언가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오늘 이야기를 나눈 ‘이재유’가 갖는 특성으로 보아 잘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 덕담을 해줘서 고맙다. ‘이재유 노선’에 맞게 노동대증과 함께 기념사업회 일을 추진해 가겠다.

 

이재유 기념사업회 준비위 출범을 알리는 웹포스터. 준비위는 10월 25일 출범한다. [사진제공-세계노동운동사연구원]
이재유 기념사업회 준비위 출범을 알리는 웹포스터. 준비위는 10월 25일 출범한다. [사진제공-세계노동운동사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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