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3. 우리 민족의 중요 사료 및 역사서
우리 민족의 상고사(上古史)를 복원하는데 중국의 옛 사서(史書)라든가 몇몇 고문헌들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은 민족주의자로서는 견디기가 어려운 일이다. 이것은 중국 사서와 고문헌들을 신뢰한다는 문화사대주의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우리 민족의 상고사를 복원해 내야 한다는 자조적 괴리감을 갖게 한다.
그런데 일부 자칭 민족사학자들은 도저히 비하해서는 안 되는 『삼국사기』의 가치를 비하하고 중국 이십오사(二十五史)나 『환단고기(桓檀古記)』만을 강조하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이번에는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가 사마천 『사기(史記)』의 기전체를 본떠 편찬하였으나,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는 이문진(李文眞)의 『신집(新集)』을 개편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점을 논하고자 한다.
(4) 『삼국사기』와 『신집(新集)』
가. 기전체(紀傳體)의 사마천 『사기』와 김부식 『삼국사기』
중국 최고(最古)의 역사서는 B.C. 91년경에 완성된 사마천(司馬遷, BC 145~BC 86)의 『사기(史記)』이다. 『사기』는 전설 속의 황제(黃帝, BC 2,600년경)로부터 시작하여 무제(武帝, BC 156~BC 87) 태시(太始) 2년(BC 95년)까지의 역사를 다루었는데, 본기(本紀) 12권, 연표(年表) 10권, 서(書) 8권, 세가(世家) 30권, 열전(列傳) 70권 등 모두 130권으로 52만6천5백자에 이른다.
이 책의 권115, 열전 제55에는 「조선열전(朝鮮列傳)」이 들어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역사를 기술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사기』라든가 『한서(漢書)』 등등의 중국 사료를 이용하여 우리 민족의 상고사를 복원해 내야 하는 것은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이 1145년에 편찬한 『삼국사기(三國史記)』 이전의 우리 민족 역사서는 현재 남아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역사서 『삼국사기』는 사마천의 『사기』 서술에서 비롯한 기전체(紀傳體)의 역사 서술을 따르고 있다. 본기(本紀)‧세가(世家)‧열전(列傳)‧지(志)‧연표(年表) 등으로 구성하는 역사 서술이다. 즉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사마천 『사기』의 역사 서술 방법을 따른 것이고, 이는 사마천의 『사기』 가 늦어도 『삼국사기』가 저술되기 훨씬 이전에 고려에 전래하였다는 것을 입증하여 준다.
그런데 『사기』가 우리나라에서 처음 출판된 시기는 1420년에 주조한 경자자본(庚子字本)이 전존(傳存)하는 것을 보아 경자자(庚子字)가 주조되고 사용된 1420~1434년 사이이다.
나. 『사기』 초기본(初期本)의 형태 서지학적 검토
사마천의 『사기』는 『삼국사기』보다 약 1,236년 전에 편찬한 책이다. 후한(後漢)의 환관 채륜(蔡倫)이 원흥 1년(105)에 수피(樹皮), 마두(麻頭), 폐포(敝布, 낡은 헝겊), 어망(魚網)을 원료로 종이(蔡候紙)를 만들어 황제에게 헌상한 것이 종이의 시작이라 한다. 물론 근래에 채륜 이전의 것으로 보이는 종이가 발견되기도 하였으나 채륜이 종이의 발명자라는 정설은 아직 변함이 없다. 사마천의 『사기』는 채륜이 종이를 발명하기 이전에 저술되었으므로 당연히 죽간(竹簡) 위에 적혀졌을 것이다.
목판본으로 인출된 현존하는 최고본(最古本) 『사기』는 북송(北宋) 순화년간(淳化年間, (990~994년)에 출판된 순화본인데, 이 책의 수보본(修補本)은 북송 인종(仁宗) 경우년간(景祐年间, 1034~1038년)에 출판되어 경우본(景祐本)이라고 불리며, 대만중앙연구원 역사어언연구소(台湾中央研究院历史语言研究所)에 일부 전존하고 있다.
이후 남송(南宋) 경원년간(慶元年間, 1195~1201)에 간행된 것도 전존하고 있다. 이 남송 경원년간본 『사기』가 고려로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사기』의 북송 목판본 이전의 고본은 현재 조사로 알려진 것은 약 20건이며, 그중 한간사본(漢簡寫本) 1건, 돈황사본(敦煌寫本) 5건, 일본고사본(日本古寫本) 10여 건이 있다. 고려에도 목판본이 전래하기 이전에 필사본으로 전래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다. 『사기』의 사실성(史實性)
『이십오사(二十五史)』와 『사기(史記)』
필자는 1975년 3월, 대만의 ‘신문풍출판고빈유한공사’에서 발행한 『이십오사(二十五史)』 한질(一帙, 50책)을 그 이듬해 가을엔가에 ‘대한문화예술공사’에서 매입한 바 있다. 그 제1책이 『사기』인데 건륭(乾隆) 4년 판(1739)을 영인 수록하고 있다.
『사기』 「조선열전(朝鮮列傳)」은 중국식 한장(漢裝)으로는 6장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불과 4장 정도에 불과하고, 「조선열전」 내용은 조선의 역사가 중국으로부터 비롯된 것 인양 위만(衛滿)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중국 『이십오사』는 중국 미화(美化)의 대국주의(大國主義) 춘추필법(春秋筆法)으로 편찬하여, 그 역사 자체가 주변국가들에 대한 멸시로 점철되어 있다.
중국 정사(正史) 『이십오사(二十五史)』는 『이십사사(二十四史)』에 『신원사(新元史)』를 포함한 것이다. 『신원사(新元史)』는 가소민(柯劭忞, 1848-1933)이 저술한 역사서로서 그는 『원사(元史)』를 바탕으로 30년 동안의 시간을 들여서 1920년에 완성했다. 1921년 베이양정부(北洋政府) 총통 서세창(徐世昌, 1855-1939)이 『신원사』를 정사(正史)에 넣도록 명하여 『이십사사』가 『이십오사』로 되었다.
『이십오사』는 사마천(司馬遷)이 저술한 『사기(史記)』에서 시작하여,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진서(晉書)』, 『송서(宋書)』, 『남제서(南齊書)』, 『양서(梁書)』, 『진서(陳書)』, 『위서(魏書)』, 『북제서(北齊書)』, 『주서(周書)』, 『남사(南史)』, 『북사(北史)』, 『수서(隋書)』,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구오대사(舊五代史)』, 『신오대사(新五代史)』, 『송사(宋史)』, 『요사(遼史)』, 『금사(金史)』, 『원사(元史)』, 『신원사(新元史)』, 『명사(明史)』 등이다. 여기에 기록된 우리의 모습은 우리가 아니라 중국의 시각에서 본 것이다. 이를 잊지 말아야 한다.
『사기』에 등장하는 황제는 중국 문명의 시조로서 오제(五帝)와 하‧상‧주 3대 왕실의 공통 시조로 알려져 있으나, 청나라 말기의 대학자 강유위(康有爲, 1858~1927)와 중국 근대의 사학자 고힐강(顧頡剛, 1893~1980) 등의 의고학파(疑古學派)는 황제 신화를 비롯한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신화를 비판적으로 분석하여 그들의 실존성(實存性)을 부인하고 대체로 전국시대(戰國時代, BC 403~BC 221)에 종교적 영향으로 꾸며진 신화로 판정하였다.
그렇지만 1990년대 이후 중국의 학계에서는 한족 중심의 중화민족주의적인 영향으로 황제 신화를 한족의 국조 설화로 중요시하며, 황제나 치우(蚩尤)를 역사적 실존 인물로 구축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한편 조선의 단군을 기록한 일연(一然, 1206~1289)의 『삼국유사(三國遺事)』는 1281년에 편찬되었으니, 『삼국사기』보다 136년 후의 일이다. 1281년이면 단군 기원 3614년이니,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한지 3,614년이 된 시점에 일연이 단군조선을 기록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단군을 일연이 지어낸 허구의 인물은 아니다. 『삼국유사』를 편찬하기 이전의 다른 사료들, 예를 들자면 『고기(古記)』라든가 『위서(魏書)』 등등을 인용하였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사기』에 근거하여 황제와 치우(蚩尤) 등을 역사적 실존 인물로 인정하고, 일본이 『일본서기』에 근거하여 자국의 고대사를 연구하는데, 우리 민족이 단군을 실존 인물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행위는 자학적(自虐的) 망상(妄想)이다.
아울러 중국의 정사(正史) 『이십오사(二十五史)』는 중국 미화(美化)의 대국주의 춘추필법(春秋筆法)으로 편찬되어, 그 자체가 주변국들에 대한 멸시로 점철되어 있다. 또한 중국의 여러 고전 가운데 고조선을 언급한 부분들은 그들의 막연한 전설적 평가가 많으므로 그것을 사실(史實)이나 사실(事實)로 인정하다가는 우리 민족의 본질이 허공에 붕 떠버릴 수도 있다.
사료(史料)의 성격 분별과 취사선택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남이 우리를 도깨비로 본다고 해서 우리가 우리를 도깨비로 자처할 수는 없다.
라. 『삼국사기』 불신론
이른바 강단사학계(講壇史學界)에서는 『삼국사기』의 가치를 부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삼국이 고대국가의 틀을 마련한 시기는 차이가 있다. 고구려는 2세기, 백제는 3세기, 신라는 4세기”로 주장한다. 즉 고구려는 6대 태조대왕(太祖大王, 재위 53~146) 때, 백제는 8대 고이왕(古爾王, 재위 234~286) 때, 신라는 17대 내물왕(奈勿王, 재위 356~402) 때 나라가 되었다는 주장이다.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을 전부 부정하는 것이니, 그들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대한 관점은 어떻겠는가? 그들은 『삼국유사』는 부정하는 정도가 아니라 말살(抹殺)하고 싶을 것이다.
『삼국사기』 앞부분의 기록이 가짜라고 주장한 첫 학자는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가 세운 게이오의숙(慶應義塾) 출신의 일본인 학자 나까 미치요(那珂通世, 1851~1908)이다. 그는 고구려는 6대 태조대왕, 백제는 12대 계왕(契王, 재위 344~346), 신라는 16대 흘해왕(訖解王, 재위 310~356) 이전의 기록은 가짜이므로 믿을 수 없다고 했다.
나까 미치요의 뒤를 이어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은 물론 다수의 일본인 학자들이 『삼국사기』 불신론을 옹호한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일본서기(日本書紀)』와 『삼국사기』가 말하는 같은 사건을 보니, 『삼국사기』 연대가 사실과 부합하는 반면, 『일본서기』는 실제보다 주갑(周甲) 단위로 상승하였다는 사실 때문인데, 『삼국사기』를 부정해야 『일본서기』의 사실성이 인정되기 때문이다.
『일본서기』는 720년에 편찬된 일본 최초의 사서이다. 이 세상의 생성 및 일본의 건국 신화를 담고 있는 신대(神代)에서 시작하여, 697년 지통천황(持統天皇)이 사망한 해까지의 역사를 연대순으로 기록한 통사(通史)이다. 7세기 이전의 일본 역사를 기록한 사서이므로 『고사기(古事記)』와 더불어 일본 고대사 연구의 핵심적인 사료라고 할 수 있으나, 사실이 아닌 것을 기록한 부분이 많다. 즉 사실과 허구를 섞어 놓은 것이다.
그런데 『일본서기』에는 『백제기(百濟記)』 『백제본기(百濟本記)』 『백제신찬(百濟新撰)』 등 지금 남아 있지 않은 우리 역사상의 사서(史書)가 등장한다는 점은 주목하여야 한다.
어쨌든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를 처음으로 왜곡한 것은 일본의 정한론파(征韓論派) 사학자들이었고, 그들의 왜곡이 주축을 이룬 것이 일제가 만든 조선의 식민지사관이다. 일본의 제국주의적 시각에서 정리한 『조선사』의 눈으로 아직도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고 가르치는 강단사학자들이 있다는 것은 매우 참혹스러운 현실이다.
마.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이문진(李文眞, ?~?)의 『신집』
『삼국사기』 권제20 「고구려본기」 제8, 영양왕 11년(600년) 정월(正月)조에 ‘태학박사(太學博士) 이문진(李文眞)에게 명하여 고사(古史) 『유기(留記)』 100권을 줄여 『신집(新集)』 5권을 만들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이 기록은 『유기』가 고구려의 국가적인 역사편찬 계획으로 편찬한 역사서라기보다는 고구려가 한문을 사용하기 시작한 이후에 누군가가 사실(史實)을 기록하여 쌓인 자료가 100권이 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유기』는 일정한 체계로 정리되지 않고 방대한 분량이었기 때문에 태학의 교재로 사용하기 위해 『신집』 5권으로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이문진의 『신집』이 편찬되었을 때는 600년이니, 『일본서기』보다 120년이나 앞선 것이다.
고사(古史) 『유기(留記)』는 종래 구전되어오던 고구려 초기의 여러 가지 종류의 신화‧전설이나 왕족의 계보 등을 모아 편찬한 듯한데, 그 편찬 체재는 중국식 정사(正史) 체계인 기전체와는 달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그 편찬 시기를 우리나라의 사학계에서는 대체로 4세기 후반의 소수림왕(小獸林王, 재위 371~384) 때로 추정한다. 그것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기사가 미천왕(美川王, 재위 300~331) 때까지는 설화적인 것이 많은 데 비하여 그 뒤 고국원왕(故國原王,재위 331?~371)‧소수림왕 때부터는 이러한 성격의 것이 거의 보이지 않는 점으로 미루어 역사 서술에 있어 어떤 단층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즉 고사(古史) 『유기(留記)』는 414년 [광개토태왕릉비] 건립 훨씬 이전에 편찬된 것이다. 이후 고구려 사회의 발전에 부응하여 전반적으로 역사 인식이 높아지자 종래의 『유기』를 개수(改修)할 필요성이 생겨서 『신집』이 편찬된 듯하다. (참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필자는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는 고려초에 편찬된 『구삼국사(舊三國史)』 또는 『해동삼국사(海東三國史)』에 원류(源流)를 두고 있고, 『구삼국사』 또는 『해동삼국사』는 이문진의 『신집』에 그 원류를 두고 있다고 본다. 사서(史書)의 편찬에 있어 당시까지 전래하여 내려오는 사료(史料)에 근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서(私書)이지 사서(史書)일 수가 없다.
바. 서지학에서 본 『삼국사기』의 실체
『삼국사기』는 모화사대성(慕華事大性)이 들어 있기는 하지만, 역사적 사실(事實)을 기록한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최고(最古)의 사서이다. 조선시대의 학자들은 아무도 『삼국사기』의 역사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한 믿음을 처음으로 파괴한 자가 일본의 정한론파(征韓論派) 사학자들이고, 우리나라 강단사학자들이 현재까지도 일본 사학자들이 태동시켜 놓은 식민지사관을 추종하고 있다.
식민지사관을 극복하는 첫걸음은 『삼국사기』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다. 현존하는 『삼국사기』 목판본은 매우 희소하다. 1145년(고려 인종 23년)에 편찬한 직후 한동안은 원고본과 필사본으로 내려오다가 12세기 중후반에 목판으로 출판된 것으로 추정된다.
12세기 중후반 목판본을 고려말에 수보(修補)한 『삼국사기』 고려판본 권44~권50 한 책이 보물로 지정되어 고 조병순(趙炳淳) 씨의 성암문고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고 조병순 씨의 성암문고 소장 완질본은 고려 및 1394년 잔존 목판본에 기초하여 1512년까지 보각한 판으로 찍었다. 『삼국사기』는 1512년 이후인 1573년 경주부에서도 인출하였다.
옥산서원에 소장된 1573년 경주부 인출의 국보 『삼국사기』 완질본을 보면 옥산서원 소장본은 고려시대에 처음 새긴 원판(原板)과 조선 태조 때에 개각(改刻)한 것, 중종 때 다시 개각한 것 등 3종의 판(板)이 종류별로 섞여 있다.
『삼국사기』의 첫 금속활자 인출본은 현종실록자(顯宗實錄字) 인출본이다.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삼국사기』 현종실록자본에는 1711년(강희50, 朝鮮 肅宗 37년)에 연잉군(延礽君, 후에 英祖)에게 내사한 내사기(內賜記)가 있어 『삼국사기』가 1711년경에도 인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현종실록자본은 조선시대의 본격적인 『삼국사기』의 유포(流布)이기도 하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의 속찬위원(續撰委員)으로 활동한 바 있는 창강 김택영(金澤榮, 1850~1927)은 중국에 망명해 있던 1914년에 중국 남통에서 『교정삼국사기(校正三國史記)』를 발행하였음을 볼 때, 단재 신채호가 지적한 대로 고구려 건국연대 등 왜곡된 바가 일부 있어도, 제1기 민족사학자들과 계몽주의자들은 이 책의 가치를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것이 우리 민족사학자들이 보는 『삼국사기』의 근본 시각이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