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2020년 국회에서는 14인의 국회의원에 의하여 ‘교육기본법’에서 ‘홍익인간 교육이념’을 삭제하고 사회통합 민주시민 교육으로 개정하려는 ‘교육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이 발의되기까지 하였다. 이에 충격을 받은 나는 나의 고서 수집품 가운데 역사서를 선정하여 ‘국혼(國魂) - 홍익인간전(弘益人間展)’을 국회 의원회관 2층 로비에서 개최하고자 하였으나, 코로나19로 인하여 실행하지를 못하고 망상(網狀, 인터넷) 전시를 하는 것으로 약속한 바 있다.

나는 일찍이 20세 때부터 고서(古書)와 고문헌(古文獻)을 모아왔다. 사서류(史書類)와 계보류(系譜類), 독립운동가 자료와 종교 자료, 명인(名人)의 묵적(墨跡) 등등, 47년간 모아 온 나의 수집품은 나름대로 명확한 개성이 있다. 나의 이러한 수집과 탐색 행위는 나를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로 만들었고, 몇 권의 저서와 200여 편의 논문과 잡문을 남겼다.

이러한 애서가(愛書家)로서의 길은 차츰 나를 서지학자(書誌學者)와 회화사학자(繪畫史學者)로 대접받도록 하였고, 1994년에는 최연소(만39세)의 나이로 이태영(李兌榮, 1914~1998) 여사와 ‘애서가상(愛書家賞)’을 공동 수상하게까지 하였다. 이렇듯 나는 역사학자가 아니라, 애서가이자 애서운동가이다.

따라서 내가 쓸 수 있는 글이 지향하는 방향은 내용서지학과 형태서지학적 견지에서 사료의 가치를 논하는 것이다. 서지학은 인문학의 기본 학문이기도 하다. 즉 나의 이 연재는 체계적인 저술로 내놓는 것이 아니라, 내가 소장하고 있거나 나를 거쳐 나간 고서와 고문헌을 중심으로 하여 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연재는 제한적인 비망록(備忘錄)이자 초고(初考)에 불과하다. 이에 독자분들은 가볍게 읽어 주기를 바란다.

우리 민족의 정체성

주의 주장이나 학문에 전거(典據)가 없으면 안 된다. 전거도 필요에 따라 현재에 만들어진 전거가 아니라,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사실에 따른 전거가 중요하다. 역사학은 해석의 학문이다. 역사학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전거에 의하여 해석되고 전거에 의하여 만들어져야 한다.

내 할아버지의 초상을 그리면서 백인 피부에 장신의 골격, 매부리코에 수노인(壽老人)의 두상(頭相)으로 그리면, 내 할아버지라 할 수가 없다. 못났던 잘났던 키가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 대로, 과장이나 축소 없이 있는 모습 그대로를 그려야 내 할아버지이다. 내 집안의 가계(家系)를 적거나 족보를 만들 때도, 집 안에 있는 자료를 정리하는 수준에서 적어야지 아무런 연관이 없는 영웅이나 귀족을 조상으로 적어 넣으면, 우리는 그것을 위보(僞譜)라고 부르며, 그런 위보를 만드는 것은 내 진짜 조상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역사도 똑같다.

(1) 민족의 정의

민족(民族)의 정의는 무엇일까? 민족이란 “일반적으로는, 동일한 지역에서 장기간에 걸쳐 공동생활을 함으로써 언어, 풍습, 종교, 정치, 경제, 문화, 역사 등을 갖는 인간 집단이다.”

한민족(韓民族)의 정의는 무엇인가? 우리 말(한국어, 조선어)을 공통으로 사용하며 한반도를 중심으로 공동의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는 아시아계 민족으로서, 북측과 일본에서는 ‘조선민족(朝鮮民族)’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인간 집단이다.

한민족은 중국이나 러시아, 중앙아시아 등지에서는 그곳에 거주하는 한인을 조선족(朝鮮族)・고려인(高麗人)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인종으로는 황인종계 몽골로이드(Mongoloid)에 속하며, 알타이어 계통의 고유어인 한국어(韓國語, 朝鮮語)를 사용하며, ‘한글’이라는 고유한 문자를 지니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서 청동기 시대부터 다양한 국가를 구성하여 살아왔으며, 1948년부터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두 개의 국가에 나뉘어 살고 있다.

(2) 우리 민족의 특성

현대 한민족의 중요한 특성은 무엇인가?

첫째, 우리 민족의 원시조(原始祖)를 단군(檀君)으로 믿고 있으며, 단군의 건국이념을 홍익인간(弘益人間)으로 믿는다. 물론 이 믿음은 보편적으로 신앙적 숭배라기보다는 역사적 사실로의 믿음을 의미한다.

둘째, 씨족 의식이 깊으므로 새로이 한국인으로 귀화하는 외국인들마저 성씨와 본관을 창씨(創氏) 창본(創本)하고 있다.

셋째, 전통적 미풍양속을 중요시하여 예절을 지키고자 하는 질서 의식이 있다.

넷째 언어학상으로는 고유의 말을 쓰며, 문자학상으로는 고유의 문자 ‘한글’을 쓴다.

다섯째, 식품으로서는 쌀과 보리 등의 곡물을 주식으로 하고 김치와 깍두기 된장 고추장 등등의 발효된 절임 반찬을 즐겨 먹는다.

여섯째, 고유한 의상으로 아름다운 한복을 명절시 즐겨 입으며, 고유한 주택으로 온돌을 설치한 한옥을 가지고 있다.

일곱째, 고유한 전통 가무(歌舞)가 있으며 이를 즐긴다.

이외에도 여러 특성이 있으나, 세계화라는 이름(美名)으로 이미 사라진 것도 있고, 현재 남아있는 특성마저도 약화되어 가고 있다.

이 글의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민족이란 “일반적으로는, 동일한 지역에서 장기간에 걸쳐 공동생활을 함으로써 언어, 풍습, 종교, 정치, 경제, 문화, 역사 등을 갖는 인간 집단이다.” 현재의 우리나라는 다종교 국가이다. 불교 유교 기독교 천도교 등등 종교의 자유를 구가하고 있다.

이로써 현대 한민족의 중요한 특성 가운데 하나였던 우리 민족의 원시조(原始祖) 단군과 그 건국이념 홍익인간을 믿는 민족정신은 차츰 저하하고 있다. 심지어 지난해에 국회에서는 14인의 국회의원에 의하여 ‘교육기본법’에서 ‘홍익인간 교육이념’을 삭제하고 사회통합 민주시민 교육으로 개정하려는 ‘교육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이 발의되기까지 하였다.

(3) 민족 개념은 정신적인 것

유태인을 보면 현대에 이르러 민족의 개념은 혈통적인 것에서 신념적인, 정신적인 것으로 변화하고 있다. 유태교(猶太敎)를 믿는 자가 유태인(猶太人)인 것이다.

우리 나라에는 중국에서 동래(東來)하였다고 주장하는 곡부공씨(曲阜孔氏) 등 여러 성씨와 아랍의 귀화인 덕수장씨(德水張氏), 일본의 귀화인 사성(賜姓) 김해김씨(金海金氏), 베트남의 귀화인 화산이씨(花山李氏) 등등은 씨족의 시조는 귀화인이지만, 수백 년 이상을 한반도에 거주하며 한반도인들과 누대(累代)에 걸쳐 혼인을 이어간 그 자손들은 이미 우리 민족화한 우리나라의 씨족이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중국에서 시조가 귀화한 어느 씨족은 그 후손들 일부가 중국을 드나들며 혈통적으로 한족(漢族) 행세를 하고 있는데, 그들은 국적이 한국일 뿐이지, 정신적으로는 이미 우리의 민족임을 포기한 모화사대사상(慕華事大思想)의 노예이다. 반면에 당대(當代)의 귀화인이면서 한국인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몇 분은, 이제는 우리 한민족의 구성원으로 완전히 인정하여야 한다.

우리 민족의 정체성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는 하늘인 환인(桓因)의 손자이자 환웅(桓雄)의 아들인 단군(檀君)의 자손이라는 천손(天孫) 의식(意識)이다. 몇몇 철없는 목사들이 이를 비판하기도 하지만, 초기의 선교사 제임스 게일 목사(James Gayle, 1863-1937)는 이러한 우리 민족의 천손 의식을 이용하여 성경의 유일신 ‘GOD(神)’을 한국적 유일신 명칭인 ‘하느님’, 또는 ‘하나님’으로 불리도록 ‘GOD’의 한국 명칭을 정하는 데 앞장섰다.

반면에 우리 나라의 불교 사찰에는 다른 나라에는 없는 산신각(山神閣)이 있다. 고려의 승려 일연(一然, 1206~1289)이 편저한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단군이 산신이 되었다고 한 것을 보면 산신각의 산신은 단군(檀君)을 형상화한 것이다.

또한 불교를 배척한 유교의 유학자들도 사대주의가 팽배해 있음에도 우리 나라의 역사서를 쓸 때는, 반드시 단군을 조선의 개국조로, 단군조선을 조선 최초의 국가로 기록하였다. 일부 기독교의 개신교파(改新敎派)에서 단군을 우상시하고 배척하는 것은 해방 후에 나온 현상으로 우리 민족을 유태인화 하고자 하는 몽매한 의도에 불과하다.

우리나라에 온 초기의 개신교 선교사 게일이나 헐버트 등등이라든가, 이상재(李商在, 1850~1927) 같은 초기의 개신교 신도들은 단군을 우리 민족의 조상임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였고, 이준(李儁, 1859~1907) 열사는 “국혼의 부활”을 부르짖기도 하였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본 연재를 계속하며 언급하고자 한다

(4) 민족성을 말살하는 법

우리 민족성을 말살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방법은 사대주의를 만연시켜 역사를 개악하고 당파의 파벌주의를 고무시켜 나라와 민족정신의 구심점을 흩는 것이고, 또한 이러한 모화(慕華) 사대주의에 길든 대중에게 그나마 남아있는 민족적 특성, 언어라든가 성씨 등등을 말살하고 외래 사상과 식민지 사관을 주입하는 것이다. 20세기 초에 일본제국주의자들이 그렇게 식민지사관(植民地史觀)을 주입했다.

둘째 방법은 식민지사관으로부터 일탈하려는 작용을 이용하여, 식민지사관을 극복한다는 명분으로 역사를 허구적인 것으로 뻥튀기시킨 ‘황당사관(荒唐史觀 = 虛風史觀)’을 ‘민족사관(民族史觀)’으로 오도하여 보급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를 모르게 된다. 즉 우리의 실체가 누구인지 민족 본연의 정체성을 잊어버리게 된다.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되고, 2022년 올해로 만 77년이 되고 있다. 이 시점까지 조선시대의 사대주의와 식민지 시대의 조선비하(朝鮮卑下) 식민지사관이 널리 만연하고 있으며, 이제는 식민지사관에 질세라, 식민지사관을 극복한답시고 황당사관(荒唐史觀)마저 민족사관으로 둔갑하여 있다.

(5) 민족사관의 본연

우리나라 민족사관의 출현은 대한제국 말기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의 편찬과 관련이 깊다. 대한제국 시기의 『증보문헌비고』 편찬은 1894년의 갑오경장으로 문물제도가 크게 바뀌어 이를 반영시키기 위해 옛 [문헌비고(文獻備考)]를 개찬할 필요성에서 나온 것이다.

1903년 1월 법무국장 김석규(金錫圭, 1864~?)가 이를 건의하여 채택되고, 홍문관 안에 찬집소(纂輯所)를 두었다. 찬집에는 박용대(朴容大)‧조정구(趙鼎九)‧김교헌(金敎獻)‧김택영(金澤榮)‧장지연(張志淵) 등 33인이, 교정은 박제순(朴齊純) 등 17인이, 감인(監印)은 한창수(韓昌洙) 등 9인이, 인쇄는 김영한(金榮漢) 등 3인이 각각 맡아 5년 만에 완성했다.

이 책은 편찬 당시까지의 우리 민족사에 나타난 거의 모든 문물제도를 총망라하여 분류 정리한 유서(類書, 백과사전)인데, 이 책의 내용은 민족주의 사학 연구의 기본 사료가 된 것이다. 더욱이 이 책의 편찬에 참여한 김교헌(金敎獻, 1868~1923)이라든가 김택영(金澤榮, 1850~1927)은 조선 고유의 민족정신에 눈을 뜨게 된다. 아울러 이 책의 편찬 시기와 맞물려 당시 대한제국의 계몽주의자들에게서는 자주적 국혼(國魂)을 중요시하는 역사 지리 국문 등등의 교과서와 위인전 등을 편찬하는 기풍(氣風)이 생겨난다.

김교헌이 1909년 1월 15일(음력)에 나철(羅喆, 1863~1916)이 중광(重光)한 대종교(大倧敎)에 1910년에 입교하여 2대 대종사(大宗師)가 되어 민족주의적 대종교 경전 [신단실기(神檀實記)](1914년)와 [신단민사(神檀民史)](1923년)를 편찬한 것이라든가, 김택영이 1905년(광무9) 을사늑약을 통탄하다가 중국으로 망명하여 양자강(揚子江) 하류 남통(南通)에서 우리 고전을 출판한 것은 [증보문헌비고]를 편찬하면서 체득한 우리의 민족정신과 민족자존을 지키기 위한 시도였다.

민족사학을 개창하였다고 할 수 있는 신채호(申采浩, 1880~1936)는 1905년경부터 국사 연구를 시작했고, 계몽 활동에도 나섰는데, 신채호가 대종교에 입교한 이후에 대종교의 민족주의적 역사관에 따라 1920년대에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사연구초]를 집필한다. 이 연구 초록(抄錄)은 1930년대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각각 연재된다.

또 한 분의 민족사학의 천재적 인물 박은식(朴殷植, 1859~1925)은 만주의 환인현(桓仁縣) 흥도천(興道川)에 있는 대종교 3대 교주인 윤세복(尹世復, 1881~1960)의 집에 1911년 4월부터 1년간 머물면서 6권의 책을 저술하면서 대종교 신자가 된다. 당시 그가 저술한 저술로는 [대동고대사론(大東古代史論)] [동명성왕실기(東明聖王實記)] [명림답부전(明臨答夫傳)] [천개소문전(泉蓋蘇文傳)] [발해태조건국지(渤海太祖建國誌)] [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이다.

이외에도 장도빈(張道斌, 1888~1963)과 문일평(文一平, 1888~1936)의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여러 저술과 권덕규(權悳奎, 1890~1950)의 [조선유기(朝鮮留記)], 이시영(李始榮, 1869~1953)의 [감시만어(感時漫語)], 안재홍(安在鴻, 1891~1965)의 [조선상고사감(朝鮮上古史鑑)], 정인보(鄭寅普, 1892~?)의 [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 등등이 저술된다.

이상의 인물들이 제1기 민족주의 사학자들이다. 여기까지가 우리 민족사학의 본연(本然)이고, 민족사관은 이들의 학문적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서는 안 된다.

(6) 해방 후 민족사관의 발전과 변질

해방 후 한반도의 남과 북에 각기의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우리 민족의 사관은 크게 두 흐름으로 전개된다. 한반도 남측에서의 민족사관과 북측에서의 민족사관의 흐름이 그 주도적 인물들이 다름으로써 발전 양상에서 차이점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한반도(조선반도) 남측에서의 민족사관은 최동(崔棟, 1896~1973) 문정창(文定昌, 1899~1980) 안호상(安浩相, 1902~1999) 최인(崔仁, 1912~?) 등등의 제2기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출현하는데, 이 가운데 남측의 초대 문교부 장관을 역임한 안호상은 우리 민족사를 대종교적(大倧敎的) 측면에서, 최인은 철학 사상적 측면에서 재발견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들의 공통성은 대체로 영토적 측면보다도 사상과 정신의 문화적 측면에서 민족사관을 중요시하였다.

나는 20대 초반의 나이에 이들 제2기 민족사학자들과 아주 가까이 지냈기에 그들의 활동과 주장에 대하여 잘 안다. 그런데 이들 남측의 제2기 민족사학자들의 활동 후반기에 출현하는 일부 자칭 민족사학자들은, 대종교의 민족사관을 탈피하는 경향을 나타낸다.

특히 이유립(李裕岦, 1907~1986)이나 황상기(黃相基) 등등의 자칭 민족사학자들은 순수한 민족사관이라기보다는 그 주장이 대체로 공상적(空想的)이므로 황당사관(荒唐史觀), 사이비사학(似而非史學)이라는 비판을 받게 된다.

반면에 한반도(조선반도) 북측에서의 민족사관은 제1기의 민족사학자로 평가되는 민세 안재홍(安在鴻, 1891~1965)이라든가 민족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은 벽초 홍명희(洪命熹, 1888~1968)와 홍기문(洪起文, 1903~1992) 부자(父子) 등등이 월북하여 북에서 크게 활약하면서, 그리고 북이 고조선과 고구려의 영토였던 사실에 자극을 받은 박시형(朴時亨, 1910~2001)과 리지린(李址麟, 1915~?) 등등 사학자들의 연구 활동이 나오면서 이미 1960년대 초반에 제1기 민족사관은 절정을 이룬다.

이후 1970년대에 ‘주체사상’이 형성되면서 북측의 역사학은 ‘주체사관(主體史觀)’의 틀을 잡는데, 주체사관은 북측의 제2기 민족사관으로 정의하여도 무방하다.

(7) 일부 자칭 민족사관에 대한 우려

나는 본 연재의 서두에서 우리 민족사학은 단재 신채호와 위당 정인보, 민세 안재홍 등등 제1기 민족사학자들이 제시한 범주에서 황당(荒唐)하도록까지 넘어서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우화에 두꺼비의 나이 자랑(爭長說話)과 같은 설화가 있다.

“사슴‧토끼‧두꺼비가 모여서 서로 자기가 나이가 많다고 자랑하게 되었다. 사슴은 천지가 개벽할 때 자신이 그 일을 거들어 주었다 하고, 토끼는 그때 사용한 사닥다리를 만든 나무를 자기 손으로 심었으므로 사슴보다 연장자라고 내세운다.

이 말을 듣고 있던 두꺼비는 훌쩍이면서 말하기를, “내가 자식 셋을 두었는데, 세 아들이 각각 나무를 한 그루씩 심었다. 큰아들은 그 나무로 하늘에 별을 박을 때에 쓴 망치 자루를 만들고, 둘째는 제가 심은 나무로 은하수를 팔 때 쓴 삽자루를 만들고, 셋째는 제 나무로 해와 달을 박을 때에 쓴 망치 자루를 만들어 일하였다. 아들 세 명이 모두 그 큰일 때문에 과로하여 죽어 버렸는데 지금 사슴과 토끼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죽은 자식들 생각이 나서 운다”라고 하였다. 결국 “두꺼비가 제일 어른으로 판정되어 상좌에 오르게 되었다”라는 우화이다.

이 우화는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 권34 「십송률(十誦律)」에서 제일 처음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코끼리, 원숭이, 사막 새가 등장한다. 이 우화가 황당사관(荒唐史觀)에 주는 교훈은, 신중하지 못한 무모한 나이 자랑은 쉽게 깨지는 허구라는 사실이다. 당나라 ‘당(唐)’ 자는 허풍이란 뜻도 있다. 예로부터 중국 한족은 허풍이 심하여서 당나라 ‘당’자가 허풍이란 의미마저 갖게 된 것이기에 황당(荒唐)이란 단어가 생긴 것이다.

가장 우려가 되는 자칭 민족사학, 즉 황당사관에 대해서는 제3회 이후의 연재에서, 우리 민족의 중요 사료 및 역사서를 소개하면서 본격적으로 다룰 예정이다.

(8) 동족(同族)과 이족(異族)

한반도의 남과 북에 사는, 그리고 중국에 있는 조선족과 구소련 내에 있는 고려인은, 세계 각국에 있는 남의 교민과 북의 공민은, 그 족속의 명칭이 무엇이든 모두 하나의 민족, 즉 동족(同族)이다. 모두가 정신적으로 우리의 역사인식을 가지고 있고, 우리 말과 문자를 쓰고 있으며, 대체로 전래의 우리 전통을 가지고 살기 때문이다.

문법이 같으나 말이 다르고 다른 문자를 쓰는, 유사한 역사가 있어도 우리의 역사인식이 없는, 전래의 우리 전통이 상실된 일본인들은 그 조상이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이라고 해도 우리 민족의 구성원이라 할 수가 없다. 그들은 이족(異族)이다.

반면에 임진왜란 시 조선에 귀화한 일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휘하의 선봉장이었던 사야가(沙也加 또는 沙也可)는 조선인 김충선(金忠善, 1571~1642)이 되었다. 그는 우리와 동족이다. 그의 정신에는 조선인으로의 역사인식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조선인으로서의 역사인식이 없는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시에 왜나 청에 부역한 자들이라든가 일제 강점기 친일파들은 스스로 우리 민족의 구성원임을 포기한 반민족주의자들이다. 한국 국적의 한국인이라고 해도 다 우리 민족의 구성원은 아니다. 우리의 민족정신과 역사인식이 있어야 우리 민족의 구성원이라 할 수 있다.

금이나 청, 왜를 우리 민족의 한 갈래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우리 민족과 인종적으로 가까울 뿐이지, 절대로 우리의 동족이 아니다. 그들을 우리 동족으로 주장한다면 그 순간 우리는 병자호란(丙子胡亂)과 정묘호란(丁卯胡亂),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조선강점에 대항한 우리의 선조들의 주검과 희생을 모독하는 신사대주의적(新事大主義的) 망동을 저지르는 것이 된다. 이는 적이 누군지 모르게 하여 민족주의를 파괴하는 행위이다.

과거 남측의 수구 정권은 북측을 “가장 호전적인 집단”이라 선전하였고, 남측은 900번 이상의 외침을 받은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나라”로 선전하였다. 1945년까지 남과 북의 역사가 같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하는 정치성 망언이다.

현대의, 21세기 한반도의 시대정신은 남북의 교류와 협력을 통한 상생과 공존이 되어야 한다. 남과 북은 동일한 역사인식과 민족정신, 그리고 같은 말과 문자를 쓰고 있으며, 대체로 전래의 같은 전통을 가지고 살기에 당연히 우리의 동족이다. 그것이 북을 바라보는 민족주의의 시각이다.

 

단군 관련 사진 자료 설명

 

‘단군 반신상’, [최신초등소학(最新初等小學)] 책3. 정인호 저, 1908년. 필자 소장본. [사진제공 - 이양재]
[최신초등소학(最新初等小學)] 책3. 정인호 저, 1908년. 필자 소장본. [사진제공 - 이양재]
‘단군 반신상’, [최신초등소학(最新初等小學)] 책3. 정인호 저, 1908년. 필자 소장본. [사진제공 - 이양재]
[단군 반신상], 정인호 저 [최신초등소학], 1908년 7월 20일. [사진제공 - 이양재]

독립운동가이자 계몽운동가 정인호(鄭寅琥, 1869~1945)가 저술하여 1908년 7월 20일에 자비(自費) 출판한 [최신초등소학(最新初等小學)] 책3이다.

이 책은 대한제국 말기의 국어 교과서로서 자주독립과 애국심을 강조하고 있다. 국한문혼용체이며, [한국학대백과사전]에는 4권 2책으로 기술되어 있으나, 그것은 책3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파본이기는 하지만 이번에 권5와 권6, 1책을 처음 공개한다. 즉 정인호의 [최신초등소학]은 모두 6권 3책이다.

중요한 것은 이 책3의 권6 쪽4부터 7까지 단군을 다루며, 쪽5의 상단부에는 [단군]의 반신상 어진 판화를 싣고 있고, 61쪽에는 [이순신과 거북선] 판화를 한 쪽에 걸쳐 싣고 있다. 편자인 정인호는 매 단원 끝마다 은연중에 항일·애국사상을 계몽시키고자 하였으므로, 1909년에 학부(學部)의 지시로 사용금지(禁書)처분을 받았다.

이 책은 1908년 7월에 출판되었는데. 그때는 홍암(弘巖) 나철(羅喆, 1863~1916)이 대종교를 중광(重光)한 1909년 음력 1월 15일(양력 2월 5일) 보다 반년 이상 앞선 시점이니, 이 책에 단군상이 수록되어 있음은 이미 조선말에 단군상이 상당히 유포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한편, 정인호는 이 책과 함께 단군에서 조선말까지의 역사 내용을 알기 쉽게 개관한 국사 교과서 [초등대한역사(初等大韓歷史)]도 저술하여 출판하였다.

‘단군 반신상’ [신궁건축지(神宮建築誌)] 1책. 1910년. 서울 화봉문고 소장본. [사진제공 - 이양재]
‘단군 반신상’ [신궁건축지(神宮建築誌)] 1책. 1910년. 서울 화봉문고 소장본. [사진제공 - 이양재]

일제는 조선을 강점하기 직전에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강조하려고 서울 안암동에 조선 신궁을 지어서 고조선의 시조 단군과 일본의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를 함께 봉안하려 시도했다.

그 목적으로 출판된 [신궁건축지]에 [단군천황(檀君天皇)]을 수록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을 강점한 후에는 단군에 천황(天皇)을 붙여 숭배할 이유도 신궁에 합사(合祀)할 이유도 없어진 것이다. 일본이 단군을 이용하려 했음은 경악스럽다.

‘단군 전신상’, [오천년조선역사(五千年朝鮮歷史)] 4권 1책. 고유상 편저, 1930년. 필자 소장본. [사진제공 - 이양재]
‘단군 전신상’, [오천년조선역사(五千年朝鮮歷史)] 4권 1책. 고유상 편저, 1930년. 필자 소장본. [사진제공 - 이양재]
[오천년조선역사(五千年朝鮮歷史)] 4권 1책. 고유상 편저, 1930년. 필자 소장본. [사진제공 - 이양재]
[오천년조선역사(五千年朝鮮歷史)] 4권 1책. 고유상 편저, 1930년. 필자 소장본. [사진제공 - 이양재]

20세기 초반의 교과서를 수집하다 보면 판권란에 발매처로 회동서관(匯東書館) 고유상(高裕相)이 상당히 많이 나온다. 회동서관은 1897년 서울에 설립되었던 출판사이자 서점 겸 문방구점이다. 서울 남대문통(南大門通)에서 고유상(高裕相)이 자본금 15만 원으로 창립하였는데, 이 서점은 1950년대 중반까지 운영되었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랫동안 영업을 했던 서점이다.

그 고유상이 [오천년조선역사]를 저술하여 1930년 10월 15일 자로 발행한다. 이 책의 권1 쪽2 상단부에 배경을 충실하게 묘사한 [단군]의 전신상 어진을 싣고 있다. 정인호의 [최신초등소학] 권6에 실린 것과 기본 초상이 같다.

‘단군 전신상’, [동아일보] 제1556호, 1930년 11월 23일 자 5면. [사진제공 - 이양재]
‘단군 전신상’, [동아일보] 제1556호, 1930년 11월 23일 자 5면. [사진제공 - 이양재]

조선어학자이자 독립운동가 환산(桓山) 이윤재(李允宰, 1888~1943)가 동아일보에 “開天節 단군강탄 四二六三회의 긔념”을 기고하는 글 위에 수록된 [한배 단군상]이다. 이 초상은 고유상의 [오천년조선역사(五千年朝鮮歷史)]에 실린 ‘단군 전신상’과는 달리 배경은 없지만, 본체는 거의 같은 모습이다,

환산 이윤재가 대종교인(大倧敎人)인 것을 미루어 보면 이 초상은 당시 대종교에서 모시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대종교를 중광한 홍암(弘巖) 나철(羅喆, 1863~1916)과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 1835~1922)은 사제지간(師弟之間)이었다. 나철은 21세 때부터 김윤식의 집을 드나들기 시작하였는데, 김윤식이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실각하고 이듬해인 1897년 12월에는 제주도로 유배되었을 때는 스승인 김윤식을 따라 제주도로 건너가서 스승의 주변을 지켰다. 이후 나철은 1901년 부인이 사망하였기 때문에 부득이 제주를 떠났고, 당시에 김윤식도 제주도에서 이재수(李在守)의 난(1905년 5월 28일)이 일어나는 바람에 전라도 지도(智島)로 귀양지가 옮겨졌다. 나철은 김윤식이 유배에서 풀려나 서울로 돌아온 뒤에도 자주 왕래하였다. 즉 나철은 김윤식의 가장 가까웠던 제자였다.

사진(3) ‘단군 전신상’, [단군봉안록] 1책, 1953년. 필자 소장본. [사진제공 - 이양재]
사진(3) ‘단군 전신상’, [단군봉안록] 1책, 1953년. 필자 소장본. [사진제공 - 이양재]
[단군봉안록] 1책, 1953년. 필자 소장본. [사진제공 - 이양재]
[단군봉안록] 1책, 1953년. 필자 소장본. [사진제공 - 이양재]

김정학(金正學) 편. 한국전쟁 기간중인 1952년부터 1953년에 밀양지역에서 편찬 발행하였다. 이 책의 첫 장 앞면에 “단군대황조 천진영정도]가 등사(謄寫)되어 있다. 고유상의 [오천년 조선역사]에 나온 것과 기본형이 같으나, 배경이 다르다.

‘단군 반신상’, [단기고사] 1책, 1959년. 필자 소장본. [사진제공 - 이양재]
‘단군 반신상’, [단기고사] 1책, 1959년. 필자 소장본. [사진제공 - 이양재]
[단기고사] 1책, 1959년. 필자 소장본. [사진제공 - 이양재]
[단기고사] 1책, 1959년. 필자 소장본. [사진제공 - 이양재]

정해박(鄭海珀) 번역. 이 책 앞부분의 천휘호(薦揮毫) 다음장에 [단군] 반신상 존영을 싣고 있다.

[단군상] 1점, 작자미상, 지본채색(紙本彩色), 크기 89×120cm. 필자 소장본. [사진제공 - 이양재]
[단군상] 1점, 작자미상, 지본채색(紙本彩色), 크기 89×120cm. 필자 소장본. [사진제공 - 이양재]

[단군상]의 머리에 금박(金箔)을 입혔다. 이렇게 장식으로 금박을 입히는 것은 조선말기와 왜정 초기에 불화에서 나타나는 흔한 현상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단군상은 1920년대 이후, 늦어도 1940년대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필자가 실견한 단군 초상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1980년대 중반에 답십리 고미술상가 우성빌딩 1층에서 골동상을 하던 전 한국일보 기자 백순기(白舜基)씨가 소장하고 있던 19세기 중반의 것으로 보이는 [단군상] 소품이다. 당시 호가를 물었으나 팔지를 않아서 입수하지를 못하였으나, 작품에 대한 기억이 아직 내 기억에 생생하다.

이 보다 앞서 1970년대 후반에 당시 홍은동에 있던 대종교총본사에 모셔진 지성채 화백의 [단군어진(단군천진)]을 보았으며, 1980년대 후반에는 박생광(朴生光, 1904~1985)이 그린 [단군상] 소품도 보았다.

우리 역사문헌에서 [단군상]에 대한 최고의 언급은 솔거(率居, 후기신라)가 [단군상]을 많이 그렸다는 조선말기의 인물 권종상(權鍾庠)의 [동사유고(東史遺稿, 1937년 목활자본)]의 기록이다.

대종교 남도본사의 신도였던 독립운동가 강우(姜虞, 1862~1932)가 황해도에서 가져와 아들에게 물려주어 소장했던 것이라고 전한다. 1920년대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서 기탁 보관중이다.

‘단군 전신상’, [부여 천진전 단군화상(扶餘天眞殿檀君畵像)],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 369호. 크기: 34×53㎝. [사진제공 - 문화재청]
‘단군 전신상’, [부여 천진전 단군화상(扶餘天眞殿檀君畵像)],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 369호. 크기: 34×53㎝. [사진제공 - 문화재청]
‘단군 전신상’, [곡성 단군전(谷城 檀君殿)], 전남 곡성군. [사진제공 - 문화재청]
‘단군 전신상’, [곡성 단군전(谷城 檀君殿)], 전남 곡성군. [사진제공 - 문화재청]

1931년에 건립된 곡성 [단군전]은 3·1운동 당시 곡성에서 만세를 주도했던 신태윤(申泰允, 1884~1961)이 후학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건립한 건축물이다. 그는 일제 치하에서도 개천절에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나라의 독립을 기원하였다.

이 전신상은 1930년대의 것이 아니고 훨씬 후대에 그린 것이다. 신태윤은 [단군전]을 건립한 이후인 1938년 10월 30일자로 곡성의 삼인동정사에서 대종교의 경전인 삼일신고, 신사기, 신리대전, 도해삼일신고강의, 회삼경, 천부경 등등을 채록한 [도해 삼신제강의]를 발행하였다.

 

애서운동가 이양재(李亮載)

호는 백민(白民), 본관은 광주(廣州),
경기도 가평군의 3.1운동을 주모자 천도교인 이병식(李秉植, 1861~1938)의 증손자로 경기도 포천시에서 1955년에 태어났다. 중동중?고등학교를 거쳐 신학을 공뷰하던 1974년(19세)에 철학사상가 복초(伏草) 최인(崔仁) 선생으로부터 민족사상을 깨우쳤으며, 1976년에는 ‘국사찿기협의회’가 시도한 ‘국정교과서사용금지가처분신청’(변호사 용태용)의 실무에 자원 봉사하였다. (당시의 법정 투쟁은 안호상(安浩相) 김득황(金得榥), 임승국(林承國) 등 3인이 주도하였다)

1975년부터 고서 및 고문헌 수집을 시작하며 1981년부터 애서운동을 하면서 서지학자 남애(南涯) 안춘근(安春根) 선생으로부터 다년간 실사구시의 서지학(書誌學) 가르침 받았고, 1983년부터는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과 동주(東洲) 이용희(李用熙)의 고서화(古書畵) 감식안(鑑識眼)을 사숙(私淑)하였다.

1994년에는 이태영(李兌榮) 여사와 함께 제4회 애서가상(愛書家償)을 공동수상하였고, 1991년에는 제1회 허준의학상을 수상하였다. 2001년부터는 다년간 한국고전문화진흥회 상임이사로, 2007년에는 ‘이준열사순국일백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으로 봉사하였으며, 2009년부터는 다년간 ‘포럼 그림과 책’ 공동대표를 맡았다. 현재는 ‘재단법인 리준만국평화재단’의 이사장으로 활동중이다.

지난 47년동안 애서가로서 고서와 고문헌을 수집하면서 [대동여지도] 초판본, [수능엄경언해] 등, 20여 건에 달하는 고서와 고문헌을 찾아내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하게 하였고, 현재는 사서류(史書類)와 고문서, 독립운동가 관련 자료, 옛 선인(先人)들의 유묵 등등 최소 2,000여 점 이상을 소장(所藏)하고 있다.

저서로는 [조선의 마지막 천재화가 오원 정승업], [고려불화와 돈황사경을 찾아서] 등이 있으며, 공저로는 [안견연구]가 있고, 편저로는 [안견연구를 위하여] [제주미래담논(1)] 등이 있다. 또한 서지학과 회화사 통일미술에 등의 분야에서 150여 편의 논문과 잡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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