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3. 우리 민족의 중요 사료 및 역사서

나는 “고려의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제왕운기』 이후에, 고려까지의 사료를 총정리한 조선초기의 저술로서 조선시대를 관통하면서 각 당대(當代)의 사학자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준 고대사를 다룬 사서(史書)가 없을까?”하는 의문을 20대 초반에 한동안 가진 적이 있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질문인데, 필자는 그 대답은 “있다”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필자는 권람(權擥, 1416~1465)이 1462년에 편찬한 『어제응제시주(御製應製詩註)』가 조선초기부터 말기까지, 그리고 제1기 민족사관자들에게까지 고대사 연구의 전체를 관통하는 영향을 준 일종의 사료집으로 규정한다.

(3) 권람(權擥)의 『어제응제시주(御製應製詩註)』

이 책은 시에 대한 단편적인 주석에 그쳐 체계적인 사서(史書)의 형식을 띠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조선의 민족 시조 단군에서부터 이성계의 건국 설화에 이르기까지의 신화적 사료를 정리하고 있어, 이 책은 전대사(前代史)에 대한 조선초기의 이해를 알려 주고 있다.

가. 『어제응제시주』가 편찬되기까지, 그리고 현존 전래본

『어제응제시주』는 권람이 자신의 조부인 권근이 지은 「응제시」에 주석을 붙인 것이다. 권근은 태조 5년(1396) 표전문사건(表箋文事件)으로 명나라에 갔을 때,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이 내려준 시제(詩題)에 따라 24편의 응제시(應製詩)를 지었다.

1396년 9월 15일에 「왕경작고(王京作古)」 등 8수를, 9월 22일에는 「시고개벽동이주 (始古開闢東夷主)」 등 10수, 10월 27일에 「청고가어내빈(聽高歌於來賓)」 등의 6수를 지었다. 이에 대하여 명 태조는 어제시(御製詩) 3수를 지어 권근에게 내려주었다.

응제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 8수에서는 고려의 멸망, 조선의 건국과 사대, 사행길에 지나온 서경‧압록강‧요동‧바닷길 등을 읊었다. 다음 10수에서는 동이‧삼한‧신라‧탐라 등 역대 국가의 흥망과 금강산‧대동강 등 명승을 노래했다. 마지막 6수에서는 명제가 베풀어 준 잔치에서의 흥취를 읊었다. 곧 조선의 중국에 대한 사대적 입장에서 중국과 명제의 덕을 칭송하고, 우리나라 역사의 유구함과 독자성을 시로 표현한 것이다.

『어제응제시주』의 권말 발문과 간기, 1462년 초판본, 보물 제1090-1호, 삼성출판박물관 소장본. 보존 상태가 상당히 양호하다. [사진출처 - 문화재청]
『어제응제시주』의 권말 발문과 간기, 1462년 초판본, 보물 제1090-1호, 삼성출판박물관 소장본. 보존 상태가 상당히 양호하다. [사진출처 - 문화재청]

이 『응제시』는 권근의 생존 시인 1402년(태종 2)에 명제의 어제시를 받은 영광을 기리는 의미에서 왕명에 의해 간행되었다. 1438년(세종 20)에 중간되었으며, 『양촌집(陽村集)』 권1에도 수록되었다.

『응제시주』는 권근이 명 태조에게 받은 어제시 3편과 명 태조의 명으로 지은 응제시 24편을 모아 1461년에 손자인 권람이 주기(註記)를 붙이고 1462년에 목판본 초판이 간행하였고, 이후 서거정(徐居正)이 1470년에 약간의 보완을 하여 복각(覆刻) 재판본을 발행하였다.

『어제응제시주』 표지, 1462년 초판본, 필자 소장본. [사진제공 - 이양재]
『어제응제시주』 표지, 1462년 초판본, 필자 소장본. [사진제공 - 이양재]
『어제응제시주』, 1462년 초판본, 필자 소장본. 보수(補修)가 필요하다. [사진제공 - 이양재]
『어제응제시주』, 1462년 초판본, 필자 소장본. 보수(補修)가 필요하다. [사진제공 - 이양재]

이 책의 1462년 초판본 두 책은 1991년(삼성출판박물관 소장본)과 2005년(진양하씨가 소장본)에 각기 보물로 지정되었고, 국립중앙박물관에 1책(소장품 번호 증3480), 서울대학교 규장각의 가람문고에 1책, 필자에게 1책 소장되어 있는데, 국립중앙박물관 본은 보존 상태가 매우 열악하고, 서울대 규장각 가람 이병기(李秉岐, 1891~1968)씨가 기증한 본은 책의 앞 7장과 뒤 6장 등 13장이 낙장 되어 있는 반면에, 필자 소장본은 앞에 반면과 뒤에 2장이 낙장 되어 있다. 그런데 위의 초판본 몇 책 이외에 현존하는 대부분의 『어제응제시주』 본은 1470년 재간본이다.

나. 안동권씨 삼대의 역사 인식과 권람

현재까지는 『응제시주』를 권람이 주석을 붙여 책으로 간행한 목적은 “응제시를 권씨 일가의 가보로 삼아 가문을 빛내기 위함”인 것으로 주장되어 왔다. 그러나 권람은 자기 나름의 역사 인식을 전개하여 조부 권근의 역사관을 수정 보완하려는 의도를 이 책에서 보이는 것을 보면, 단순히 가문의 영광을 빛내기 위해서 발행하였다는 기존의 관점에 회의를 갖게 된다. 권람은 단순히 자구의 해석에 그치지 않고, 우리나라 고대사와 관련한 신화‧전설‧설화 그리고 역사 지리에 관한 기록들을 이용하여 상당한 분량의 주석을 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권람의 이 책의 편찬 동기를 이해하려면 권근으로부터 권람에 이르기까지 안동권씨(安東權氏) 권근(權近) – 권제(權踶) – 권람(權擥)에 이르는 삼대(三代)의 역사 인식과 대명(對明) 외교 관련 사실(史實)을 이해하여야 한다.

음성 권근 삼대 묘소 및 신도비(陰城 權近三代墓所 및 神道碑).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이며 학자였던 안동권씨(安東權氏) 양촌(陽村) 권근(權近, 1352∼1409)과 선생의 아들 권제(權踶, 1387~1445), 손자 권람(權擥, 1416~1465)의 3대의 묘소이다. ‘충북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산7’에 있는데, 1980년 1월 9일,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3기의 묘 앞에 모두 각각의 묘비, 장명등(長明燈), 문인석 1쌍이 세워져 있다. [사진출처 - 문화재청]권근은 대제학을 올랐으며, 왕명을 받아 경서의 구결(口訣)을 저정(著定)하고, 문장이 뛰어나 하륜(河崙) 등과 함께 『동국사략(東國史略)』(1402년) 등 조정의 각종 편찬(編纂) 사업에 참여하였다. 그의 둘째 아들 권제(1387∼1445)는 우찬성의 벼슬에 올랐고 『고려사(高麗史)』 편찬에 참여했으며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었다. 손자 권람(1416∼1465)은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여 학문이 뛰어났고, 과거에 장원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좌의정의 벼슬에까지 올랐으며, 『어제응제시주』를 편주(編註)하였고, 『동국통감』 편찬의 감수(監修)를 맡았다.
음성 권근 삼대 묘소 및 신도비(陰城 權近三代墓所 및 神道碑).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이며 학자였던 안동권씨(安東權氏) 양촌(陽村) 권근(權近, 1352∼1409)과 선생의 아들 권제(權踶, 1387~1445), 손자 권람(權擥, 1416~1465)의 3대의 묘소이다. ‘충북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산7’에 있는데, 1980년 1월 9일,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3기의 묘 앞에 모두 각각의 묘비, 장명등(長明燈), 문인석 1쌍이 세워져 있다. [사진출처 - 문화재청]권근은 대제학을 올랐으며, 왕명을 받아 경서의 구결(口訣)을 저정(著定)하고, 문장이 뛰어나 하륜(河崙) 등과 함께 『동국사략(東國史略)』(1402년) 등 조정의 각종 편찬(編纂) 사업에 참여하였다. 그의 둘째 아들 권제(1387∼1445)는 우찬성의 벼슬에 올랐고 『고려사(高麗史)』 편찬에 참여했으며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었다. 손자 권람(1416∼1465)은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여 학문이 뛰어났고, 과거에 장원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좌의정의 벼슬에까지 올랐으며, 『어제응제시주』를 편주(編註)하였고, 『동국통감』 편찬의 감수(監修)를 맡았다.

(1) 권근(權近, 1352~1409)은 1375년(고려 우왕 1)에 박상충(朴尙衷, 1332~1375)‧정도전(鄭道傳, 1342~1398)‧정몽주(鄭夢周, 1337~1392)와 같이 친명정책(親明政策)을 주장하여 원(元) 나라 사절(使節)의 영접을 반대하였고, 1389년(고려 창왕 1)에는 윤승순(尹承順, ?~1392)의 부사(副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조선이 개국한 후 1396년 표전문제(表箋問題)가 일어나자 자청하여 명나라에 들어가 두 나라 간의 외교 관계를 호전시켰다. 이때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을 만나 「응제시」를 지은 것이다.

권근은 1402년 6월에 왕명을 받아 『동국사략(東國史略)』의 편찬을 착수하여 이듬해 8월에 완성하였다. 하륜(河崙, 1347~1416)‧권근‧이첨(李詹, 1345~1405) 등이 편찬에 참여하였고, 권근이 그 주역을 맡았다. 서문과 전문(箋文)을 모두 그가 썼으며, 50여 편의 사론(史論)도 대부분 그가 썼다.

단군조선을 시발점으로 하여 기자조선‧위만조선‧한사군‧이부(二府)‧삼한‧삼국의 순으로 서술하여, 『동국사략』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처음으로 고대사의 체계를 수립한 책이다. 단군‧기자‧위만의 3조선을 설정한 것은 이미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서 보인 바로서, 이것을 그대로 수용하였다.

그러나 삼한에 관한 서술은 『삼국유사』에 따라 마한을 기자의 후예로, 진한을 진(秦)의 유망인으로, 변한을 출자불명(出自不明)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는 삼한 70여 국을 모두 단군의 후예로 본 『제왕운기』의 삼한 서술과도 크게 다르다.

한편 삼한의 위치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서 최치원과 『후한서』의 설을 따르고 있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대신 『당서(唐書)』를 좇아 마한을 백제 지방, 변한을 고구려 지방, 진한을 신라 지방에 비정하는 새로운 설을 내세웠다. 이 설은 그 뒤 『동국통감』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사서에 통설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삼한 다음에 2부를 설정한 것도 『삼국유사』를 좇은 것이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보이는 낙랑‧부여‧대방‧흑수‧옥저‧가야‧발해 등 국가는 『동국사략』에서 독립적인 위치를 잃고 말았다. 이것은 상고사 체계가 그만큼 단순화되고 일원화된 것을 뜻한다.

삼국시대에 관한 서술은 신라를 위주로 하여, 신라의 연기(年紀) 밑에 신라‧고구려‧백제의 순으로 사건을 서술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신라를 삼국의 주인으로 설정한 이유에 대해 권근은 신라가 ‘선기후멸(先起後滅: 가장 먼저 건국하고 가장 늦게 멸망함)’한 까닭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서술 방법은 뒤에 많은 비판을 받아서 『삼국사절요』와 『동국통감』에서는 삼국을 대등하게 서술하는 방법으로 바뀌었다.(참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발행)

이 책의 문제점은 신이한 내용을 담은 신화나 전설은 황탄불경(荒誕不經)한 것으로 여겨서 대부분 삭제하고 싣지 않았다. 결국 이 책은 엄격한 성리학적 명분론을 기저에 깔고 고대문화를 해석하였기 때문에, 『삼국사기』보다도 명분론적인 입장에서 우리의 고대문화를 유교적으로 정리하고자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권람의 『응제시주』는 권근의 『둥국사략』에서 빠진 아쉬운 점을 보완하는 성격의 편저는 아니었겠는가?

(2) 권제(權踶, 1387~1445)는 1419년(세종 1) 사은사 경녕군(敬寧君) 이비(李裶, 1402~1458)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438년 계품사(計稟使) 혜령군(惠寧君) 이지(李祉, 1407~1440)의 부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예문관대제학이 되었다.

권제는 1442년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겸해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인 신개(申槩)와 함께 『고려사』를 찬진(撰進)하였고, 1445년에는 우찬성이 되어 정인지(鄭麟趾)‧안지(安止) 등과 함께 「용비어천가」를 지었다. 또한 그는 세종 18년(1436)에 왕명으로 윤회(尹淮)와 함께 『역대세년가(歷代世年歌)』를 편찬하였다. 이 책은 상권의 『역대세년가』와 하권은 권제가 지은 『동국세년가(東國世年歌)』로 구성되어 있다.

상권은 원나라 초기의 문인인 증선지(曾先之)가 노래한 『역대세년가』에 윤회가 주석을 붙이고, 원대 부분은 장미화(張美和)의 시로 보충하였는데, 이는 천지의 개창에서 원대에 이르는 중국의 역사를 노래한 것이다. 하권은 단군에서 고려말에 이르는 우리나라 전 역사를 체계화하여 노래하고 있다.

이계전(李季甸)의 서문에 의하면 이 책은 초학자들의 역사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편찬한 것이다. 따라서 권제가 지은 『동국세년가』는 중국의 역사를 다룬 『역대세년가』와 함께 동국의 역사를 개괄적으로 정리한 책이라 할 수 있다.

『동국세년가』는 먼저 이승휴의 『제왕운기』에 의거하여 우리나라가 지리적으로 중국에서 독립된 나라임을 설명하였다. 이어 단군조선으로부터 고려말까지의 역사를 개괄하였다.

단군조선에 대해서는 단군의 개국이 요와 동시라는 것과 향국(享國)의 역년(歷年)이 1,048년, 단군묘(檀君墓)가 아사달에 있다는 것을 서술하였다. 기자조선에 대해서는 주나라 무왕에 의해 조선에 봉하여졌다는 것, 그리고 기자의 유풍과 유속이 당시 조선에까지 전해지고 있다고 서술하여 독립성과 정통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위만조선-사군이부(四郡二府)-삼한-삼국의 순으로 고대사의 체계를 서술하였다.

그리고 삼국은 신라-고구려-백제의 순으로 서술하였다. 그리고 삼국에 이어 후고구려와 후백제를 소개하고, 이어 고려 역대 왕들의 승습관계와 치적을 적었다. 이 책은 단군조선에서 고려시대까지의 전 역사를 체계화한 조선시대 최초의 영사시(詠史詩)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는 만리의 옛 대국으로 유구한 역사를 지닌 국가라는 자부심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

비록 시가 형식이나마 이러한 통사가 정리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초기 이래의 단군과 기자에 대한 관심과 『동국사략』과 같은 삼국사에 대한 체계화 작업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같은 영사시인 『제왕운기』가 주로 창업주의 활동을 들어낸 데 비하여, 『동국세년가』는 왕위의 계승에 역점을 두고 있으나, 우리나라의 강역을 중국의 것과 구별되는 일정한 지역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두 영사시에 나타나는 공통점이다.(참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발행)

3) 권람(權擥, 1416~1465)은 명에서 온 사신을 3차에 걸쳐 접대한다. 1457년에 온 진람(陳鑑)과 1459년에 온 진가유(陳嘉猷), 1460년에 온 장녕(張寧)을 상대로 한 시작자(詩作者)로 접대한 것이다. 권람은 1457년에 온 명사(明使) 진람을 접대하면서 지은 시를 모은 1457년 『황화집』의 편자(編者)이기도 했다.

당시 명의 사신들을 접대하는 조선의 원접사(遠接使)들은 사대(事大)의 예에 따라 의주까지 나가서 명 사신을 마중하여 잔치를 베풀고, 선위사(宣慰使)를 도중 다섯 군데에 보내 설연(設宴)하며 위로하였다. 또한 명 사신이 돌아갈 때는 반송사(伴送使)라 개칭하여 다시 의주까지 환송하게 하였다. 이들은 도중에서 시를 읊으며 창화(唱和)하였는데, 이를 모은 시집 『황화집(皇華集)』을 간행하였다.

의식이 있는 접대 시작자들은 매우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권람은 그 일을 무려 세 차례나 한 것이다. 물론 『어제응제시주』]의 편제(編制)에 사대성(事大性)이 있기는 하지만, 사대성의 한계에서도 권람은 당시에 목격한 이러한 일이 자극이 되어 1461년부터 『어제응제시주』 편제를 시작하여 1462년에 내놓았던 것은 아닐까? 이후 권람은 1463년 9월 『동국통감』 편찬의 감수 책임을 맡는다.

권람이 권근의 「응제시」에 주석을 붙인 『응제시주(應製詩註)』는 조선초기의 역사의식을 살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세조(世祖, 1417~1468) 때인 1458년에 편찬을 시작하여 성종(成宗, 1457~1494) 때인 1485년에 개찬한 『동국통감(東國通鑑)』의 편찬 방향을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

우리는 이들 안동권씨 삼대를 통하여 조선초기 명과의 국교관계(國交關係)를 엿볼 수 있고, 그에 대응한 문필(文筆) 내력(來歷)을 알 수가 있다. 이들 안동권씨 삼대의 역사서 저술은 실체가 있다. 이들 심대의 역사 인식과 대명(對明) 외교 관련 사실을 이해하여야 이 『어제응제시주』를 제대로 평가하는 것이다. 『어제응제시주』 한 책만 떼어 놓고 평가한다면 이는 단편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된다.

다. 발췌(拔萃) 인용서(引用書)

『응제시주』의 주석에 인용하거나 참고한 전거(典據) 자료들은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 자료는 『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事)』‧『고기(古記)』‧『도선기(道詵記)』‧『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동명왕편(東明王篇)』‧『제왕운기(帝王韻紀)』‧『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고려사(高麗史)』 등이다.

중국 자료로는 『요동지(遼東誌)』‧『습유기(拾遺記)』‧『속수신기(續搜神記)』‧『신당서(新唐書)』‧『주례(周禮)』‧『문헌통고(文獻通考)』‧『열자(列子)』‧『위서(魏書)』 등이다.

이상의 『응제시주』의 주석에 이용된 자료는 정사(正史)보다 잡록(雜錄)이 많다. 또 실제 주석에서도 잡록을 광범위하게 동원하고 있다. 이 점을 보면 권람의 역사 인식이 신화와 설화를 매우 중요시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단군신화가 실려 있는 현존 자료로는 고려시대 일연(一然, 1206~1289)의 『삼국유사』와 이승휴(李承休, 1224~1300)의 『제왕운기(帝王韻紀)』 및 조선초기의 『세종실록지리지』, 권람의 『응제시주』가 가장 대표적인 책이다.

이 책들 가운데서 고조선에 대한 기술은 『삼국유사』의 기록이 가장 오래되어 원형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보아야 한다. 『삼국유사』의 고조선조에 실려 있는 단군신화는 환웅이 웅녀와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다고 되어 있는데 비하여, 『제왕운기』에는 웅녀가 나오지 않고 손녀(孫女)가 인신(人身)이 되게 하여 단수신(檀樹神)과 결합하여 단군을 낳은 것으로 되어 있다. 후자는 웅녀를 감추고 있는 것으로 고려시대의 두 기록에도 차이가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상이한 내용은 조선초에 편찬된 사서에도 그대로 반영되어서 『세종실록지리지』는 『삼국유사』를, 『응제시주』는 『제왕운기』의 기사를 각기 채록하고 있다.

라. 『어제응제시주』의 평가

권람의 『어제응제시주(御製應製詩註)』 주기(註記)는 단순히 어구(語句) 해석이 아닌 역사 자료로서의 가치를 지닌 만큼 한문학‧역사학‧인문지리학‧서지학 등을 연구하는데 필요한 기본 자료로 의의가 있다.

『어제응제시주』에는 민족시조 단군이나 개국시조에 대한 설화는 거의 모두 수록하고 있다. 이 신화와 전설은 대부분 『삼국유사』 『동명왕편』 『제왕운기』 『고려사』 『용비어천가』에서 뽑은 것이지만, 당시 잘 알려지지 않은 전혀 새로운 자료에서 뽑은 것도 있다. 즉 『응제시주』는 편찬된 1462년 당시까지 전래하여 온 사료를 집대성한 것이고, 이 책은 조선시대의 학자들이 여러 사료를 조사하여야 하는 수고를 덜어 주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응제시주』의 역사 부분에 대한 주석에서는 단군에 대한 인식이 더욱 깊어지고 있으나, 한사군의 위치에 대해서 낙랑이 압록강 북쪽에 있었다는 설을 제기하기도 하고, 현도는 만주 심양 부근에, 진번은 요동 지방으로 비정하여 한사군 중 삼개군을 만주에 비정하여 근대 민족사학자들의 비판을 받기도 한다.

특히 권람은 요동을 기자의 분봉지로 기자조선 이후 우리의 영토가 되었으며, 고구려 시대에 다시 우리의 강역으로 속하게 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조선왕조의 성립과 한양 천도가 이미 참서(讖書) 등에 예시되었음을 들어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강조하였다.

이를 보면 『응제시주』에서의 역사 이해는 비록 전대사를 완벽하게 체계화하여 이해한 것은 아니다. 다만 조선의 건국에 이르기까지 명멸한 많은 나라를 체계적으로 이해하려는 모습을 보였으며, 많은 부분에서 새롭게 이해하여 이후 역사지리 연구의 단초를 열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조선시대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기본서였으면서도 대부분의 조선시대 역사학자들이 이 책이 제시하는 사대적(事大的) 틀에 갇혀 있었다는 비판도 받을 수가 있다. 그 사대적 틀을 비로소 주체적으로 넘어선 것은 박은식, 신채호, 정인보, 안재홍 등등의 제1기 민족사학자들이다.

마. 민족사학과 『어제응제시주』

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응제시주』는 편찬된 1462년 당시까지 전래되어 온 사료를 집대성한 것이고, 이 책은 조선시대의 학자들이 여러 사료를 조사하여야 하는 수고를 덜어 주었다. 특히 순암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은 『동사강목(東史綱目)』을 편술하면서 이 책을 상당히 주목하였다.

[동아일보] 1935년 1월 1일 자 1면. 위당 정인보의 “五千年間 朝鮮의 「얼」” 제1회. ​​​​​​​이 연재는 광복 후에 서울신문사에서 『조선사연구』라는 제호로 상권(1946. 9)과 하권(1947. 7) 두 책으로 엮어 간행하였다. [사진제공 - 이양재]
[동아일보] 1935년 1월 1일 자 1면. 위당 정인보의 “五千年間 朝鮮의 「얼」” 제1회. 이 연재는 광복 후에 서울신문사에서 『조선사연구』라는 제호로 상권(1946. 9)과 하권(1947. 7) 두 책으로 엮어 간행하였다. [사진제공 - 이양재]

또한 근대의 제1기 민족사학자로서 『어제응제시주』를 특별히 주목한 인물은 위당 정인보(鄭寅普, 1892~1950)이다. 위당 정인보는 박은식(朴殷植)과 신채호(申采浩)를 잇는 민족주의 사학자의 한 사람으로 원래 경학(經學)과 강화학파(江華學派)의 양명학(陽明學)을 공부한 당대의 대표적인 학자였다.

경술국치 후에는 한때 중국에 망명해 박은식, 신채호, 여운형, 홍명희 등과 함께 1912년 상해에서 조직된 동제사(同濟社) 운동을 하는 등 독립운동에도 참여하다가 귀국하였다. 1926년 순종황제가 서거하자 6‧10만세 운동을 지원했고, ‘이충무공유적보존회’를 창립하여 현충사를 중건했으며, 고전을 소개하는 ‘조선고전해제’를 <동아일보>에 연재하였다. 이는 정인보는 서지학적 안목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조선사연구』 상권(1946. 9, 사진의 오른쪽)과 하권(1947. 7, 사진의 왼쪽). 서울신문사, 초판본. 필자 소장본. [사진제공 - 이양재]
『조선사연구』 상권(1946. 9, 사진의 오른쪽)과 하권(1947. 7, 사진의 왼쪽). 서울신문사, 초판본. 필자 소장본. [사진제공 - 이양재]

그런데 위당 정인보는 1930년대에 일제의 식민주의사관에 의하여 한국사, 특히 고대사가 왜곡되어 가는 학문적인 풍토를 두고 볼 수 없어서 우리 역사연구에 골몰하게 되면서, 1935년 1월 1일부터 1936년 8월 27일, <동아일보>가 정간될 때까지 「오천년간 조선의 얼」이라는 제목으로 우리 민족사를 다룬 글을 283회 연재하였다. 당시에 연재한 글을 모아서 광복 후에 서울신문사에서 『조선사연구』라는 제호로 상권(1946. 9)과 하권(1947. 7) 두 책으로 엮어 간행하였다.

이외에도 위당은 조선시대의 실학연구를 위한 학문행사도 주도했는데, 1937년에는 『경훈훈민정음서』, 『훈민정음운해해제』 등을 저술하여 일제하에서 국학 보급과 국어 보존에도 기여하였다.

바. 사료의 취사선택에서 서지학의 절대적 중요성

『어제응제시주』를 소개하는 이 글에서 서지학에 대하여 간략히 언급하고자 한다. 서지학은 내용(內容) 서지학과 형태(形態) 서지학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둘이 따로 노는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우리나라의 근대 민족사학자들 가운데 사료의 서지학적 문제점을 인식한 분은 제1기의 위당 정인보와 제2기의 복초 최인(崔仁) 정도이다.

세계의 역사상 목판 인쇄술이 처음 발명된 것은 8세기 초 신라에 의해서이고, 목활자인쇄술은 11세기 중국에서이다. 그리고 13세기에 이르러 고려에서 금속활자가 발명되었다. 초기의 목판 인쇄술로 인쇄된 책은 불서(佛書)인데, 이러한 불서 인출은 13세기까지 지속되었다. 유가서나 역사서가 목판으로 인쇄된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14세기 중반부터이다. 8세기 초에 목판 인쇄술이 발명되었다고 해도 10세기에 이르기까지 유통되는 도서는 대체로 필사본이었다.

19세기 말까지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책종(冊種)은 대부분이 한문(漢文)으로 된 것이었고, 책을 독파하고 학문을 연구할 수 있는 지식인층은 전체 인구의 5% 정도였으며, 서점도 1897년에 와서야 ‘회동서관’이 서울 중구 남대문로 1가에 문을 열었다. 그 이전에는 책을 거간(居間)하는 책쾌(冊快)가 전국을 돌아다니며 책을 수집하여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팔았고, 일부 잡화상(雜貨商)에서 기본적인 책을 팔았다.

우리 민족이 금속활자를 발명하였고, 목활자 인쇄술이 시중에 퍼져있었어도, 금속활자는 관판본(官版本)이나 세도가(勢道家)의 문집 및 족보를 인쇄하는 데 주로 사용하였고, 책은 찍어낼 때부터 수요가 정해진 한정 출판물이었다. 책의 판목으로 목판본을 찍어내는 것도 상당히 번거로운 일이었고, 예를 들어 관(官)에서 소유하고 있었던 『동의보감(東醫寶鑑)』 25권25책 한 질을 사들이는 데는 많은 돈을 내야 했고, 고려재조대장경 전체(全體) 인출(印出)은 고려와 조선시대 500여년간을 통털어 700여 년간 불과 10회도 전체 인출되지 않았다. 즉 고려나 조선시대에 있어서 지식은 대체로 사회지배층의 전유물로 선점(先占)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상의 영광을 드러내는 목적에서 문중판(門中版)으로 나온 문집이라든가 족보 및 『어제응제시주』 같은 특정 저술은 지식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우리나라에 있어서 『삼국사기』와 같은 전대(前代)의 사서라든가 『동문선(東文選)』과 같은 시문류서(詩文類書)의 출판은 관판본(官版本)으로 나와 유통되었다.

그러나 조선의 많은 중요한 저술들은 복수(複數) 필사(筆寫)되어 공급되었고 원본이 없어지면 사라지기 일쑤였다. 그런 예로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목민심서(牧民心書)』나 『경세유표(經世遺表)』도 조선시대에는 어떠한 판본으로도 출판된 적이 없고, 이규경(李圭景, 1788~1856)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는 원고(原稿)만이 남아 있다.

금속활자를 발명한 우리나라에서 지식이 비로소 널리 유통되기 시작한 것은 개화기 서양의 활판(活版) 인쇄기가 들어오고 근대식 학교가 개교하면서부터이다. 그리고 한글 학자들에 의하여 우리 한글 문법의 틀이 규정되고 한글 사전이 만들어지면서 우리나라가 현대로 넘어오는 기반이 형성된다.

중국의 사서가 우리나라에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1420년대 이후부터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라든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이 우리나라에서는 그때 처음 출판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에서 보았을 때, 조선시대 사학자들이 사료의 부족함을 겪으면서 시도한 간고(艱苦)의 노력을 식민사관을 극복한다는 허울 아래 일부 위서(僞書)를 제시하며 폄훼(貶毁)하는 것은 망동(妄動)이다.

사료가 부족한 전대의 미흡한 연구는 지식이 널리 공유되는 오늘날 극복의 대상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내용서지학과 형태서지학적 검토에서 위서로 판명되는 것은 사료(史料)로서 생각해(一考)볼 가치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

시대마다 유행하는 서체가 있고, 시대마다 지질(紙質)과 판각(板刻)의 차이가 있으며, 그 시대를 나타내는 단어와 문체가 있다. 이를 무시하고서 진행하는 연구는 사상누각이다. 학술적 고찰에는 진서(眞書)인가 위서(僞書)인가를 판단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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