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 열사 114주기 추모제를 준비 중인 유족대표 조근송 '일성 이준 열사 기념사업회' 명예회장을 6월 30일 서울 광화문 한 카페에서 인터뷰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이준 열사 114주기 추모제를 준비 중인 유족대표 조근송 '일성 이준 열사 기념사업회' 명예회장을 6월 30일 서울 광화문 한 카페에서 인터뷰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아직 우리는 정신적으로 해방을 맞이하지 못했다. 진실을 왜곡하고 감추고 있는 게 우리나라 최고의 지식집단이다.”

헤이그 밀사사건의 주역 중 한 명인 이준(1859.12.18-1907.7.14) 열사의 후손 조근송 ‘일성 이준 열사 기념사업회’(이하 기념사업회) 명예회장은 다가오는 제114주기 추모제를 앞두고 여전히 한숨이다. 조근송(66) 명예회장은 이준 열사 맏딸 이송선의 손자(외증손자)로 유족대표 역할을 맡고 있다.

쫒겨난 빌딩 수위실에서 발견된 이준 열사 훈장

2년전 <통일뉴스>와 인터뷰 당시에도 기념사업회는 전재혁 전임 회장이 장기 집권하면서 보훈처로부터도 외면당하는 단체로 전락했고, 심지어 이준 열사의 훈장을 비롯한 유품과 관련 자료들이 모두 행방이 묘연한 상태였다. 조 명예회장 등이 ‘일성 이준 열사 기념사업회 재건위원회’(이하 재건위원회)를 꾸린 것도 이 때문이다.

6월 30일 오후 2시 서울 광화문 한 카페에서 다시 만난 조근송 명예회장은 “작년 5월에 청와대와 보훈처에 재건위원회 명의로 민원을 넣었다”며 “청와대 민원은 검찰로 넘어갔지만 지난해 12월 종결 처리됐고, 보훈처는 ‘알고는 있지만 사법적 권한이 없다’는 답만 들었다”고 말했다.

사라졌던 이준 열사 훈장과 증서가 기념사업회가 입주해 있다 쫒겨난 빌딩의 수위실 벽에서 발견됐다. [사진제공 - 재건위원회]
사라졌던 이준 열사 훈장과 증서가 기념사업회가 입주해 있다 쫒겨난 빌딩의 수위실 벽에서 발견됐다. [사진제공 - 재건위원회]
표구된 채 벽에 걸려 있는 이준 열사 훈장(대한민국장)과 증서. [사진제공 - 재건위원회]
표구된 채 벽에 걸려 있는 이준 열사 훈장(대한민국장)과 증서. [사진제공 - 재건위원회]

그 과정에서 그는 뜻밖의 소식을 접했다. 행방이 묘연했던 이준 열사의 훈장과 훈장증서 소재를 알게 됐고, 일부 관련 자료의 흐름도 알게 된 것.

“기념사업회가 사무실 임대료를 못 내서 명도소송을 해서 비워줬고, 그 사무실을 관리하는 빌딩 수위실에 훈장증서와 훈장이 걸려있는 것을 알게 됐다. 훈장은 원래 유족 것인데 기념사업회에서 매년 행사에 이용하니 빌려줬는데...”

유족들이 보유했던 훈장과 훈장증서를 기념사업회에 이용하라고 내줬고, 기념사업회는 사무실 임대료를 못 내서 쫒겨나면서 훈장과 증서가 그 건물 수위실에 볼모로 잡혀있는 셈.

그뿐만이 아니다. “훈장과 증서는 보훈처에 다시 신청하면 재발급 받을 수도 있지만 기념사업회가 보관해오던 서류들의 행방이 묘연하다”며 “건물주 이야기가 박스로 가져갔다고 하더라”고 안타까워했다.

기념사업회에는 이준 열사 관련 중요한 문서들이 캐비넷에 보관돼 왔지만 역시 사무실을 비우면서 상당 분량의 관련 서류들이 사라져 지금 이전한 기념사업회 사무실에는 관련 자료들이 거의 사라졌다는 것. 더구나 “서류 중 일부가 시중에 나왔다”며 누군가 관련 서류를 빼돌려 팔아치우고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7월 14일, 되풀이 되는 ‘따로 추모제’

서울 수유리 묘역에서 재건위원회와 리준만국평화재단이 해마다 기념사업회와는 별도의 추모제를 거행하고 있다. 사진은 2019년 7월 14일 112주기 추모제 전경. [자료사진 - 통일뉴스]
서울 수유리 묘역에서 재건위원회와 리준만국평화재단이 해마다 기념사업회와는 별도의 추모제를 거행하고 있다. 사진은 2019년 7월 14일 112주기 추모제 전경. [자료사진 - 통일뉴스]
2017년 7월 14일 이준 열사 집터 표석 제막식에 앞서 이양재 (재)리준만국평화재단 이사장이 ‘이준 열사와 그의 동지들’ 전시회를 개최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2017년 7월 14일 이준 열사 집터 표석 제막식에 앞서 이양재 (재)리준만국평화재단 이사장이 ‘이준 열사와 그의 동지들’ 전시회를 개최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이같이 어지러운 상황에서도 어김없이 7월 14일은 다가오고 114주기 추모제를 치러야 되는 형편이다. 이미 그는 몇 년 전부터 기념사업회와 별도로 재건위원회와 (재)리준만국평화재단(이사장 이양재) 명의로 서울 수유리 묘역에서 추모제를 개최하고 있다.

조근송 명예회장은 “기념사업회는 보훈처에서도 인정하지 않고 지원도 하지 않고 있다”며 “리준만국평화재단이 이준 열사 유품도 많이 보관하고 있고 전시회도 거의 매년 열고 있어서 이준 열사의 정신을 이 단체로 옮기고 싶다”고 밝혔다.

(재)리준만국평화재단은 문화체육관광부에 등록된 단체로 실제로 이준 열사 추모제와 전시회 등을 꾸준히 개최하고 있다. 기념사업회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리준만국평화재단이 이준 열사 기념사업을 주관하는 단체로 보훈처가 공식 인정해달라는 것이 그의 요구인 셈이다.

이양재 리준만국평화재단 이사장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이준 열사 110주기에 즈음한 지난 2017년 7월 서울 종로구 안국동 152, 153번지 일대, 지금의 덕성학원 해영회관 좌측 앞쪽을 이준 열사 집터로 비정하고 표석 제막식을 갖게 하는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고, 행사장에서 ‘이준 열사와 그의 동지들’ 제목의 전시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준 열사 분사, 자결인가 병사인가

조근송 명예회장은 독립운동 역사와 기념사업에 대한 오늘의 세태에 대해 끝없는 탄식을 쏟아내며 “아직 우리는 정신적으로 해방을 맞이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조근송 명예회장은 독립운동 역사와 기념사업에 대한 오늘의 세태에 대해 끝없는 탄식을 쏟아내며 “아직 우리는 정신적으로 해방을 맞이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조근송 명예회장은 인터뷰 과정에서 여러 차례 “감춘다고 손바닥으로 하늘 가릴 수 없다”며 ‘진실’을 강조했다. 특히 이준 열사의 분사(憤死)를 자결이 아닌 병사(病死)로 받아들이고 있는 주류 사학계에 대해 강한 불신감을 표출했다. 최근 유튜브에 등장하는 유명 국사 강사들에 대해서도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법적 조치를 취하고 싶다는 심경을 토로했다.

또한 이준 열사의 아들 이용 장군의 생애에 대한 재조명의 필요성도 강조했다. 그는 “남북연석회의 당시 북으로 올라간 것으로만 알려진 이용 장군이 사실은 남쪽으로 내려왔다가 암살을 피해 다시 북으로 탈출했다”며 “종친회에서는 이용 선생을 빨갱이로 취급하지만 북한에서의 활동과 죽음에 대해서도 더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친일세력이 버젓이 사학계 주류를 차지하고, ‘일성 이준 열사 기념사업회’ 사례처럼 특정 세력들의 이해관계에 독립운동가 기념사업이 얼룩지는가 하면, 호적을 변조해 독립운동가 후손으로 둔갑하는 현실이 이어지고 있는 견디기 힘든 상황에 대한 그의 토로가 끝없이 이어졌다.

2년전 이준 열사 112주기 추모제에서 유족대표로 나선 조근송 명예회장은 “나는 이 분을 고향에 모시고 싶다. 거기서라도 편안하게 쉬실 수 있도록, 북측 (북청) 남대천변, 아버님이 말씀하신 버드나무 있는 그 남대천변 석호에다 모시고 싶다”고 개인적 바람을 밝히기도 했다. 이꼴 저꼴 보기 싫으니 차라리 북녘 고향으로 모시고 싶다는 것.

그는 “일본 외무성 자료에도 ‘할복 분사한 이준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등 근거는 넘친다”며 구체적으로 주류 사학계와 한국학중앙연구회와 국사편찬위원회, 인기 유튜브 강사 등의 ‘역사 왜곡’을 적시하며 이준 열사의 죽음이 재조명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종황제의 헤이크 특사 위임장. 영문으로 번역돼  1907년 8월호에 게됐다. 고종 대황제의 수결과 어황보제라는 옥새가 찍혀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고종황제의 헤이크 특사 위임장. 영문으로 번역돼 [The Independent] 1907년 8월호에 게됐다. 고종 대황제의 수결과 어황보제라는 옥새가 찍혀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헤이그 특사 3인 왼쪽부터 이 준, 이상설, 이위종. [자료사진 - 통일뉴스]
헤이그 특사 3인 왼쪽부터 이 준, 이상설, 이위종. [자료사진 - 통일뉴스]

이준 열사는 49세였던 1907년 5월 고종황제의 위임장인 밀조(密詔)를 봉대한 특사 자격으로 블라디보스톡에서 이상설(38세), 페테스브르크에서 이위종(21세)과 합류, 1907년 6월 25일에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고 있던 헤이그에 도착, 각국 대표와 언론에 을사조약의 부당성과 불법성 그리고 일제의 침략성을 알리는 활동을 하다 7월 14일 서거했다.

일제는 이준 열사의 사망에 대해 병사라는 소문을 퍼뜨렸고, 일제의 조선통감부는 궐석재판을 통해 작고한 이준 열사에게 종신징역형을 선고했다. 과거 우리 교과서에는 이준 열사의 ‘할복 자결’이 실렸지만 이후 학계는 병사를 주류설로 수용한 상태다.

광복 후 아들 이용 장군과 독립투사 함태영(뒤에 부통령이됨)선생이 중심이 되어 이준열사기념사업회가 결성됐고, 서거 55년째인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1963년 10월 4일 헤이그에서 열사의 유해를 모셔다가 국민장을 거행하고, 서울 강북구 수유리 묘소에 안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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