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 문리대 부교수  현정준 씨]

 

“손님 안 오는 게 좋겠어요”

교단 12년에 서재(書齋)란 엄두도 못내


 

「.... 서재(書齋)요? 원 최저 기본문제도 해결치 못하는 주제에 무슨 서재를 갖는단 말입니까?」

이렇게 반문하는 서울대학 문리대 부교수인 현(鉉)씨는

「집을 살 생각은 아예 단념해 버렸습니다. 전세 집이나 독채 얻었으면 하는데.... 적어도 백만환은 하니 까마득한 얘기죠.」

교수생활 십삼년에 어떻게 하면 서재하나 마련하지 못하겠느냐고 의심하는 이가 있을지 모르나 책만 꽂아 놓았다고 서재가 아닐진대 용이한 일이 아니다.

연구실 속에서 세월을 보내는 학자에게 있어서 별도로 연구비가 지급되는 것도 아니니 쥐꼬리만 한 봉급으로 생활비와 연구비를 아울러 충당해야 하기 때문에 자기소유의 주택을 마련할 여축(餘蓄)은 엄두도 낼 수 없다는 현교수다.

저서의 인세(印稅)같은 것도 없는 처지다. 연구분야가 천문학(天文學)인 「현」교수는 부산(釜山)에서 서울대학교로 전임해 온 이래 3년동안 동숭동(東崇洞) 소재의 문리대 교수 「합동관사」에 우거(寓居)하고 있다.

말이 관사일 뿐 - 8.15이전에는 이공학부(理工學部)의 독신교수들의 「아파트」였으므로 부엌도 없다. 여덟 가구가 들어 있는 이 「아파트」의 2층에서 「다다미」 5장짜리 침실과 두어 평 넓이의 마루방을 점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 작은 세계에도 연년이 인구증가가 끊임없어서 야단이군요. 하하하, 우리집만해도 네식구인데 ... 손님이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어디 모실 자리나 있어야죠?」 

부산 있을 당시 「현」교수는 빚을 내어 80만환짜리 집을 산 적이 있었다고 - 그런데 곧 상경하게 되어 다시 팔게 되니 원금(原金)과 이자를 갚기에도 모자랐다고 쓴 웃음을 짓는다.

재직(在職) 십 년 후에 퇴직하게 되면 집한 채는 살만한 금액이 공제회(共濟會)에서 급여된다고 하지만 7, 8년 후의 화폐가치가 그것을 가능하게 할지는 적이 의문이라고 - 딱한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오히려 「현」교수는 자기 집을 소유한다든가 그걸 대대로 물린다는 것은 낡은 사고방식이라고 지적하고 「이백(李白)의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挑李園序)에 이런 말이 있잖아요? 부천지자 만물지역려 광음자 백대지과객(夫天地者 萬物之逆旅 光陰者 百代之過客) 세상이 주막과 같은 것이라면, 주택에 대한 것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잖겠어요. 사실 땅은 비좁은데 인구만 증가하니까, 도시일수록 「아파트」화되지 않을까.. 우리나라의 형편엔 교수 「아파트」가 대학에 병설되어야겠습니다.」

이렇게 다짐해 말하면서 아이들에게 유산으로 집을 남겨주지 못할 바에는 각기 특기(特技)나 배워 두게 하기 위하여 초등학교 재학 중인 두 자녀에게 「바이올린」을 사주었노라는 「현」교수는 체념한양 오히려 태연자약한 미소를 띠우는 것이었다. (컷은 「현」교수의 서재 「스케취」)

 
(R기자(記者))

▲ 달팽이도 내 집 가졌건만 ① [민족일보 이미지]

<민족일보> 1961년 4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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