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강성주 (KAL858기 사건 연구자)
 
유엔의 국제민간항공기구(ICAO)는 이사회 논의에서 KAL858기 사건을 다뤘는데 당시 소련 대표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대한항공 사장은 사건의 세 가지 가능한 이유가 있다고 했습니다: 나쁜 날씨, 기계적 결함, 또는 파괴행위(bad weather, a mechanical failure, or sabotage). 하지만 우리가 보고 있는 [한국이 제출한] 문서는 이를 부정하면서 오직 한 가지만 있을 수 있다고 합니다. 바로 파괴행위입니다”(2017040103, 227쪽). 
 
실종 다음 날 “불순세력”의 “폭발물” 사건으로 “확정”
 

▲ KAL858기 수색에는 블랙박스 탐지기조차 제때 사용되지 않았다.

조중건 당시 대한항공 사장은 비행기가 사라진 다음 날, 실제로는 이렇게 말했다. “이상기류냐, 기체의 결함이냐, 혹은 테러에 의한 폭발이냐, 세 가지 중에서 대한항공으로서는 테러에 의한, 88[올림픽]을 앞에 놓은 테러에 의한 폭발로 말미암아 사고가 난 것이 아닌가... 외부 불순세력에 의해서 폭발물에 의해서 사고가 난 거 이외에는 다르게 추측을 할 수가 없는 것이라고 우리는 확정을 짓고 싶습니다”(<KBS 9시 뉴스>, 1987년 11월 30일). 

이날은 수색이 시작되던 무렵으로, 잔해가 발견되지 않았을 뿐더러 용의자도 지목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대한항공은 사건이 “불순세력”의 “폭발물에” 의한 것이라고 추정도 아닌, “확정을” 했다. 
 
그래서였을까. 여러 차례 알려졌듯 정부는 수색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이번에 공개된 자료 역시 이를 확인해준다. 예컨대 “black box[블랙박스] 회수문제”라는 제목의 문서다. “black box를 찾기위한 장비(Underwater Acoustic Search Kit)는 투입되지 않았음. 동 장비투입을 위해서는 정확한 추락지점을 찾아낸후 미국용역회사(Abiquipo)에 요청하여야 함”(2016090027, 44쪽). 수색에 블랙박스 탐지기조차 사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유는 위 문구에도 나왔지만, 당시 “정확한 추락지점을 찾아”내기 어려워서였다고 한다. 문서에 따르면 “87.12.13. 안다만 해상에서... 제1차로 잔해물을 발견하였으나 해상조류, 바람 등으로 인하여 정확한 추락지점을 추정할 수 없었”다.
 
블랙박스 탐지기 “투입되지 않았음”
 
어떻게 보면 이해가 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비행기 실종 뒤 보름이 지나도 탐지기가 투입되지 않았다는 것은 문제로 보인다(초기 수색이 버마-태국 국경 산악지대에 집중됐다는 점을 고려해도 그렇다). 이 문건이 정확히 언제 쓰여졌는지 문서상으로는 알 수 없다. 작성 부서도 나와 있지 않고, 문서 위에 비밀을 뜻하는 “秘[비]”라는 표시가 있을 뿐이다. 

참고로 2016년 개인적으로 열람한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자료에 따르면, 당시 탐지기 사용과 관련해 두 가지 가능성이 있었다. 하나는 경기도에 있던 해양연구소, 또 하나는 미국에 있는 용역회사의 장비였다(DA0799672, 12쪽). 그런데 이 미국 회사(INT'L DEEP SEA SURVEY)는 위에 나온 곳과는 이름이 다르다.
 
아무튼 비행기 뒷부분에 블랙박스, 곧 비행자료기록장치(FDR)와 조종실음성기록장치(CVR)가 있었지만 발견되지 않았다. 올해 초 KAL858기 추정 동체가 발견됐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기체 뒷부분도 포함되어 있다. 블랙박스도 있을지 주목되며 KAL기의 것이 맞는지는 기록장치들의 고유번호(S/N 3818, S/N 327)로도 확인할 수 있을 듯싶다(2016090023, 114-115쪽). 조종실기록장치의 경우 보통 마지막 30분 내용이 녹음되는데 KAL기의 것도 마찬가지다(115쪽).
 
미국, 블랙박스 관련 “명확한 설명” 필요
 
항공 사고 조사에서 블랙박스는 사고 원인을 밝히는 데 굉장히 중요하다. 1988년 2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사건을 논의했을 때도 이 문제가 제기됐다. 정부가 3월로 예정됐던 국제민간항공기구 토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이 사안이 거론된다. 

당시 미국 대표는 국제조종사연맹이 KAL기 블랙박스에 관심을 갖고 있다며, 한국의 “명확한 설명이 있는 것이 바람직함을 암시”했다(2016090024, 178쪽).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우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국측 입장의 취약점으로서... BLACK BOX 등 주요부분을 발견하지 못한 것을 들수 있는 바,이를 상대방이 먼저 지적하여 문제를 삼을 경우 아국입장 전체를 악화시키고 신빙성을 삭감시킬 수 있음”(2016090025, 66쪽). 
 
따라서 노재원 당시 캐나다 대사는 항공기구 이사회 논의가 시작되면 블랙박스 등에 대해 정부가 “충분히 수색조사 활동을 하였다는 것을 표명함이 바람직”하다고 외무부(현 외교부)에 건의한다(68쪽). 앞선 글에서도 밝혔지만, 한국은 실제 토론 때 블랙박스 수색과 관련 “철저한 노력”이 있었다고 밝혔다(2017040103, 209쪽).

하지만 정부는 블랙박스 탐지기조차 갖추지 않고 수색에 나섰다. 이를 알고 있는 상태에서 나온 발언인지 모르겠으나, 체코슬로바키아는 한국이 잔해와 블랙박스 수색에 최선을 다했는지 “믿기 어렵다”고 했다(218쪽). 탄자니아 역시 이 문제를 지적하며 블랙박스와 관련해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spare no effort)”고 촉구했다(231쪽).   
 
참고로 미국 대표는 이사회 논의가 시작되기 며칠 전에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심은 300피트[90미터 정도]에 불과한데도 불구하고 블랙박스등 주요 잔해가 수거되지 않은 것은 6000피트[1800미터 정도] 수심인 아일랜드 인근 해역에서 추락된 비행기(85년 에어인디아기 사고 지칭)의 주요 잔해가 수거된 것과 대조를 이룸”(2017040102, 37쪽). 

KAL기 잔해 수색에 왜 진전이 없었는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동시에 미국은 이에 대한 방어 논리도 한국에 알려줬다. “훨씬 깊은 수심인 BENGAL해에 기체가 추락한후 2주후 해류에 쓸려간 잔해가... 발견되었다고 볼수 있고 또 ANDAMAN 인근 지역을 반도들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효과적인 수색을 못한 것으로 설명할 수도 있겠음.”   
 
우방국들도 “조사를 완전하게 신뢰하고 있지 않다”
 

▲ 당시 캐나다 주재 대사에 따르면, 국제민간항공기구 이사국의 거의 모든 대표들은 한국 정부의 KAL858기 조사를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이렇듯 블랙박스 같은 물증이 없었음에도 정부는 사건을 북의 폭파 테러로 확정했다. ‘결과적으로는’ 맞을 수도 있겠지만, 신뢰성 관련해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물증이 아닌 ‘자백’을 바탕으로 한 수사발표.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는 “주요언론사 사회부장단”에게 “보도방향 협조”를 구하고, “조직적인 확대 보도 유도”에 나서기도 했다(2016070060, 141쪽). 

캐나다 주재 대사의 기록이다. “ICAO[국제민간항공기구] 이사회 대표중 공산측 5개국을 제외한 거의 모든 대표를 면담하는 과정에서 본직은 동 대표들의 심중에는 아국조사를 완전하게 신뢰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내포하고 있음을 느꼈는바...”(2016090025, 75쪽). 다시 말해 한국에 비판적인 나라들은 빼더라도, 이른바 우방국이라 할 수 있는 국가들도 수사결과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정부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필요했고, 문서에 따르면 그것은 버마 조사보고서였을 수 있다. 외무부는 당시 항공기구 논의가 끝나고 결과를 정리했는데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북한동조국은 물론 일부 이사국 대표들이 KAL 858기의 공중 폭파사실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어 상기 버마 보고서 ICAO제출은 보고내용의 객관성과 신빙성을 높일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됨”(2017040103, 58쪽). 

하지만 최근 글에서도 밝혔듯, 버마 보고서는 그 작성은 물론 제출 과정에 한국이 아주 깊이 관여했다. 특히 제출 과정에서의 개입은 그 “사실이 누설되지 않도록 보안에 각별 유의”해야 했다(2016090027, 74쪽). 이런 보고서에 대해 과연 “객관성과 신빙성”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한편 당시 국제민간항공기구 의장은 한국에 치우친 견해를 갖고 있었던 듯하다. 정부의 공식 수사발표가 있고 난 뒤인 1988년 1월 19일, 캐나다 대사는 아사드 코타이트 당시 항공기구 의장을 찾아갔다. 이 자리에서 대사는 “과거보다 더 강력하고 효과적인 대북한 국제규탄 및 제재조치가 필요”하다며 항공기구의 협조를 부탁했다(2016090023, 47쪽). 

이에 대해 의장은 “개인적으로 북괴의 여사한 만행에 강한 증오를 느끼며 가능한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대북제재를 하는데 동감이라고” 답한다. 물론 조직 차원에서 특정국가를 규탄하는 결의안은 채택할 수 없다고 덧붙였지만, 다른 곳도 아닌 항공기구 의장이 블랙박스도 없는 결과를 받아들이며 그리 답했다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입장에 고무되어 그랬는지 몰라도, 남쪽은 항공기구가 KAL기 사건 논의 여부를 ‘공식’ 결정하기 전 캐나다가 북 대표단에 비자를 발급하려는 계획에 대해 항의하기도 했다. 입국비자 발급 예정이 남쪽으로서는 “매우 비우호적 조치”이고, 따라서 “강한 유감을 표시한” 것이다(2016090025, 47쪽). 이에 캐나다는 “북한도 ICAO 회원국인 점, 주재국이 국제기구 호스트 국가로서의 의무등을 이행하여야 한다는 점을 고려하여야 한다고” 했다.
 
항의는 (다른 맥락에서) 북쪽에서도 나왔다. 항공기구가 KAL기 사건을 의제로 채택하기로 결정했는데, 이 회의가 끝나고 북 대표단이 남 대표단에게 “다가와서 왜 김현희를 북한첩자로 아국보고서에 기술하였냐고 항의”했다고 한다(2016090026, 14쪽). 남쪽 수사결과를 부인한 것이다. 또한 북쪽은 항공기구 법률국장에게도 남쪽 “사건조사보고서가 정치적 성격의 내용을 담고 있는데 대하여 항의”했다. 
 
새로 확인된 정부 보고서와 의문점
 
올해 공개된 자료로 새롭게 확인된 것이 있는데, 정부의 사건 조사보고서가 안기부 수사발표 외 여러 건 있다는 점이다(검찰 수사기록은 제외). 가장 먼저 보고서를 쓴 곳은 교통부(현 국토교통부)로, 날짜는 1987년 12월 23일에서 31일 사이로 추정된다. 그 다음은 안기부 보고서로 1988년 1월 15일 공개된다. 그리고 1월 30일 전에 교통부는 국제민간항공기구에 제출할 보고서를 정해진 양식에 따라 작성한다(영문). 아울러 2월 2일 전에는 외무부가 항공기구에 보낼 최종 보고서를 쓰게 된다(영문). 다시 말해 최소한 4건의 정부 보고서가 쓰인 것이다(국문 보고서의 경우 영어 번역본도 있다). 
 
이들은 ‘사고 발생국’으로 사건을 조사했던 버마의 보고서보다 빨리 작성됐다. 국제민간항공기구에 제출된 버마의 예비 및 최종 보고서는 각각 2월 9일 이전, 그리고 2월 28일 이전에 완성된 것으로 나온다. 교통부와 외무부의 항공기구 제출 보고서는 항공기구의 요청 및 국제규범에 따라 쓰인 것으로 보인다(2016090023, 81-82쪽). 
 
이 가운데 교통부가 항공기구 양식에 따라 쓴 보고서에는 이상한 점이 적어도 하나 있다. 잔해와 관련되었는데, 구명보트와 좌석 구조물 두 가지만 발견됐다고 나왔다(117쪽). 1988년 1월 초 버마 해군은 몇 가지 물체를 찾았는데, 최근 글에서도 밝혔듯 좌석 구조물 포함 “3점은 사고 KAL기 잔해로 확인”됐다(2016090027, 51쪽). 따라서 보고서에는 구명보트까지 모두 4가지 잔해가 기록되었어야 맞다. 단순한 실수는 아닌 듯한데, 같은 보고서의 또 다른 부분에도 잔해가 두 가지만 발견됐다고 쓰였기 때문이다(2016090023, 121쪽).

참고로 검찰의 수사결과에도 1월에 발견된 잔해 개수가 다르게 나와 있다(2016070060, 173쪽). 생존자나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잔해’가 특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데,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지 궁금하다.
 
이번에 공개된 자료에는 안기부와 검찰의 수사결과도 포함됐다. 그런데 두 자료에는 차이가 나는 점들이 있다. 예를 들어 김현희 일행이 9시간 뒤에 터질 시한폭탄을 언제 작동시켰는가 하는 부분이다. 안기부 자료에 따르면 비행기 “탑승 20분전”으로 이라크 바그다드 시간으로 23시 05분이었다(2017040099, 81쪽, 112쪽). 하지만 검찰 자료에 따르면 탑승이 아닌 비행기 ‘출발’ 약 20분 전이었다(2016070060, 160-161쪽). 

비행기 탑승과 출발은 엄연히 다른 개념으로, 이는 사건과 관련된 또 다른 논란을 불러왔다(서현우, <KAL 858기 폭파사건 종합 분석 보고서> 및 국가정보원,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 III>). 참고로 김현희 수기에는 탑승 20분 전으로 나왔지만 시간은 “22시 40분쯤”으로 되어 있다(김현희,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 제1부>).  
 
“분단이 만들어낸 참극”
 

▲ 검찰은 김현희에 대해 “범죄를 미워하되, 범인을 미워하지 말라”는 말을 인용했다. 수많은 ‘조작 간첩’ 사건에 관여해 죄없는 이들의 삶을 앗아갔던 검찰의 모습과 대비된다.

이상으로 올해 외교부가 공개한 KAL858기 자료를 나름대로 살펴보았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다루지 못한 부분도 있지만, 관심을 가져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고맙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아울러 나의 내용 정리와 해석에 잘못된 점이 있을 수 있고, 혹시라도 이런 부분이 확인되면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려 한다.
 
이번 자료에 포함된 검찰의 기록 가운데 “수사를 마치면서”라는 제목의 마무리 부분이 있다. “이 사건은 민족의 분단이 만들어낸 참극이며, 그 책임은 종국적으로 우리민족에게 귀속되고, 이사건이 가져온 비극의 극복도 우리민족이 감내하여야 할 과제입니다”(2016070060, 180쪽). 

나 역시 전반적인 측면에서 이 사건은 ‘분단’ 문제와 깊이 관련됐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검찰은 이 대목을 김현희 사면을 암시하는 부분과 연결짓고 있다. “검찰은, 피를 함께한 단일민족으로서 짙은 동포애를 가슴에 안고, “범죄를 미워하되, 범인을 미워하지 말라”는 법언을 되새기며 이사건 수사와 처리에 임하여 왔음을 밝히고, 국민여러분의 깊은 이해 있으시기를 당부드립니다”(181쪽).
 
수많은 ‘조작 간첩’ 사건에 관여해 죄없는 이들의 삶을 앗아갔던 검찰의 모습과 대비된다. 그렇게 사면을 받았던 김현희는 사건의 재조사 당시 면담을 수없이 거부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실종자 가족들과 시민들이 지금도 사건의 진실규명을 바란다. “분단이 만들어낸 참극”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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