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연재를 시작하며 

과거사 청산은 근대 국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있었던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으로 세계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과거사 청산은 민주화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일로써 왜곡․은폐된 과거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사회정의를 세우는 일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국가 권력에 의해 왜곡되고 은폐된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바로잡기 위한 과거사 청산 노력이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통해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명박․박근혜 정부 아래서 이러한 역사적 진실을 부정하고 왜곡하여 과거로 되돌리려는 시도가 계속되면서 그 성과가 희미해지고 있다. 

역사는 진실을 밝혔다고 해서 끝나서는 의미가 없다. 역사의 진실이 영원히 기억되지 않으면 역사의 정의는 없다. 진실은 공식 기록으로 표기되고, 교육되고, 기억되어야 한다. 역사를 지키기 위해서는 망각과의 투쟁이 필요하다. 한국 현대사에서 국가 권력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과 테러, 의문사, 고문에 의한 조작 등과 관련된 사건들을 되짚어 봄으로써 역사의 진실을 망각하지 않고 기억하고자 한다. / 필자 주

 

제14연대 군인들 봉기하다

1948년 10월 15~16일경 육군 총사령부는 제14연대장 박승훈 중령에게 제주도 파병을 위해 1개 대대를 편성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제주도의 소요사태 진압을 위해 군대가 파병될 것이란 사실은 위에서 정식 명령이 내려오기 전인 10월 초에 이미 부대 내에 알려져 있었다. 혁명의용군 사건으로 오동기 연대장이 체포된 뒤 부연대장이 육군본부에 올라가 작전명령을 받았으며 이 사실을 연대 내 남로당 세포조직 알게 되었던 것이다. 부대 편성 작업은 비밀리에 이루어졌지만 연대본부 인사담당이었던 지창수 상사는 이런 상황을 연대 내 세포를 통해 파악하고 있었다.(주1)

제주도 파병명령이 내려지자 10월 16일 지창수가 주도하는 남로당 14연대 세포회의가 조직되었다. 이 자리에서는 세 가지 방법이 논의되었다. 첫째는 일단 제주도로 파병된 다음 반란을 도모한다는 것, 둘째는 제주도 출병을 거부하고 이곳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것, 셋째는 제주도로 향하는 함정에서 선상반란을 일으켜 월북하자는 안 등이었다. 세포회의는 이 가운데 선상반란을 일으켜 북으로 향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이를 남로당 전남도당에 전달하기로 했다.(주2)

그런데 10월 18일 아침 10시, 정보과 소속의 세포원으로부터 새로운 소식이 지창수에게 전해졌다. “오늘 저녁에 지창수 이하 좌익 세포원들을 체포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부대 내의 조직원들은 결단을 내려야했다. 좌익혐의로 체포돼 조직이 와해되거나 숙군에 정면으로 맞서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급하게 소집된 회의에서 결국 기존 계획을 포기하고 연대 내에서 무장봉기하기로 결정했다. 이처럼 14연대의 봉기계획은 전남도당의 구체적인 계획과 지시에 따라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급박한 상황에서 연대 내의 당조직이 자의적으로 결정한 것이었다.

▲ <지도 1> 구례지역 여순 사건 주요 집단희생장소와 가해주체. [출처: 진실화해위원회, 『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008, 928쪽]

10월 19일 아침 7시, 육군본부에서 14연대본부로 “LST(전차양륙정)는 10월 19일 20:00시에 출항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14연대는 출동 준비로 하루 종일 분주했다. 개인장비를 제외한 출동부대의 보급품과 탄약 등의 선적 작업이 진행되었다. 제주도로 떠날 대원들은 6시까지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출발을 위해 내무반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봉기계획은 지창수의 지휘 하에 준비되었다. 14연대 당부의 유일한 장교 당원이었던 홍순석 중위는 순천에 파견 나가 있었고, 중앙당이 관리하던 김지회 중위는 봉기 계획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7시 50분 비상나팔 소리가 울리자 연병장에 출동부대와 잔류부대원 2,700여명이 집합했다. 부대원들이 연병장에 모이자 지창수 상사가 연단으로 뛰어 올라가 선동을 시작했다. “지금 경찰이 쳐들어온다. 경찰을 타도하자. 우리는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을 반대한다. 우리는 조국의 염원인 남북통일을 원한다. 지금 조선인민군이 남조선해방을 위해 38선을 넘어 남진 중에 있다. 우리는 북상하는 인민해방군으로서 행동한다”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지창수의 열정적인 연설이 끝나자 계획대로 남로당 세포원들이(주3) 동조하며 지지를 유도했고, 대부분의 병사들도 ‘옳소’라며 찬성을 표시했다.

봉기 주도자는 수십 명에 불과했으나 2천여 명의 병력이 순식간에 봉기에 가담했다. 이처럼 봉기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봉기세력이 반경찰 감정을 적절하게 자극하며 선동함으로써 부대원들의 군중심리를 자극할 수 있었다. 봉기세력은 제주도 출병은 동족상잔이라며 민족 감정에 호소했고, 사실이 아니었지만 남하하는 인민군과 같이 행동할 것이라고 함으로써 사기를 높일 수 있었다. 또한 봉기 직후 다수 장교들이 사실되어 봉기군을 진압할 수 있는 지휘능력을 상실했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으로는 연대 내 대부분의 병사들이 제주도 파병을 거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병사들은 제주도 파병은 곧 제주도민의 대량살상으로 이어질 것을 알고 이를 거부했던 것이다. 계획을 세울 때부터 이 점을 가장 중요하게 고려했고, 병사들도 여기에 호응함으로써 봉기는 성공할 수 있었다.

10월 24일 봉기군이 여수를 점령한 뒤 여수인민위원회가 발행한 <여수인민보>에 ‘제주도토벌출동거부병사위원회’(병사위원회)의 명의의 성명서(「애국인민에게 호소함」)가 게재되었다. 병사위원회는 “분단 정권을 거부하고 독립된 통일조국을 위해 투쟁에 나선 제주도민을 죽이러 가는 출병은 거부한다”는 명분은 내세웠다. 봉기세력의 이러한 주장은 일반 병사들에게 봉기 가담에 대한 정당성을 제공해 주었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군대의 임무는 외국의 침략을 저지하고 외부의 적과 싸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같은 민족에게 총을 겨누는 것이 군대에 들어온 목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봉기군은 성명서에서 쌀 수집 반대나 토지개혁과 같은 사회경제적 요구조건은 내걸지 않았다. 그 대신 강력한 반미․반제국주의 의식과 함께 동족상잔의 전쟁 반대를 분명하게 밝혔다. 이 성명서를 통해서 14연대의 봉기가 전반적인 사회개혁적 요구를 내걸기보다는 당면한 제주도 파병에 반대하는 데 초점이 두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주4)

전남동부지역을 석권한 봉기군

전남도당은 물론이고 여수․순천군당조차도 봉기 사실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14연대 내의 하사관 그룹 세포조직원들에 의해 주도된 봉기는 부대 병사들의 호응에 힘입어 손쉽게 부대 전체를 장악했다. 부대 장악에 성공한 봉기군은 지창수가 연대장에 취임했으며, 각각 대대장, 중대장, 소대장, 분대장을 임명하여 조직을 정비했다. 봉기군 1,200여명은(주5) 여수 시내를 향해 진격을 개시, 20일 새벽 1시경 여수경찰서에 이르렀다.

새벽 3시경 여수경찰서가 봉기군에게 접수되었고, 새벽 5시경에는 시내 중요 기관을 점령했다. 봉기군의 여수 진입과 함께 남로당 여수군당도 이에 호응하여 행동에 나섰고, 오전 10경부터는 보안서와 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경찰과 우익인사, 우익청년단원 등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거사 몇 시간 만에 여수를 장악한 봉기군은 곧바로 순천을 향해 나아갔다.

봉기군 700명은 오전 8시 30분경 열차를 타고 순천으로 향했고, 나머지는 차량 등을 타고 순천으로 나아갔다. 14연대 봉기 소식을 접한 순천경찰은 벌교, 보성, 고흥, 장흥, 광양 등 인접한 군의 지원을 받아 500명의 경찰력과 우익청년단 등으로 방어에 나섰다. 9시 30분경 봉기군이 순천역에 도착하자 그곳에 파견 나가 있던 홍순석이 지휘하는 2개 중대가 봉기군에 합류했다. 순천경찰과 우익청년단 등은 완강히 저항했으나 오후 3시경 순천 시내는 봉기군에 완전히 점령되었다.

순천이 점령되자 좌익청년과 학생, 노동자들에게도 무기가 지급되었고, 이들은 경찰과 우익인사들을 찾아내 처벌하는데 앞장섰다. 여수를 점령한지 몇 시간 만에 또 다시 순천까지 장악한 봉기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순천을 점령한 뒤 봉기군은 3개 부대로 재편성하여 1,000여명으로 구성된 주력부대는 구례․곡성․남원 방면으로, 일부는 벌교․보성․화순․화순․광주 방면으로, 나머지 일부는 광양․하동 방면으로 나아갔다.(주6)

▲ <지도2> 순천지역 여순사건 주요 집단희생장소와 가해주체(시내권)

20일 봉기군이 여수를 점령한 뒤 순천으로 북상하면서 지도부를 개편했다. 김지회가 사령관이 되어 주력을 이끌고 순천으로 북상했고, 지창수는 일부 부대를 이끌고 여수에 남았다. 봉기지역과 규모가 확대되면서 장교의 지휘능력이 필요했다. 또한 봉기군의 원래 목적은 순천 점령이 아니라 구례와 남원을 거쳐 지리산으로 안전하게 들어가는 것이었는데, 경찰과 충돌이 벌어지는 바람에 순천 점령에 나섰다.

주력부대 외에 두 부대가 광양과 보성으로 진출한 것은 지역을 확대 점령하려는 목적보다는 주력부대가 안전하게 지리산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봉기군은 점령지역을 확대하기보다 주력부대가 지리산을 비롯한 산악지역으로 들어가 장기전을 편다는 전략을 세웠다. 14연대만으로 점령지역을 넓히는 것은 무모했고 지역을 확실히 장악하는 것도 무리였다. 대규모 진압에 대비하여 산악을 중심으로 장기전을 펼 준비를 하려 했던 것이다.  

북상하던 봉기군 주력부대는 10월 21일 11시 30분 순천시 북방의 서면 학구리에서 박기병 소령이 지휘하는 진압군 4연대 1개 대대와 처음으로 만났다. 봉기군은 4연대의 봉기 합세를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봉기군은 약 470여명으로 이루어진 진압군 4연대 병력과의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북상을 저지당했다. 이 패배로 봉기군의 기세는 주춤해졌고, 진압군 병력이 증강되면서 봉기군의 북상은 완전히 차단당했다.

그러나 봉기군은 동쪽의 광양 방면이나 서쪽의 보성 방면에서는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진격했다. 10월 21일 봉기군은 별량면, 벌교, 조성, 낙안의 4개 경찰서를 접수했고, 서쪽으로는 10월 21일 광양을 접수했다. 구례에서는 봉기군이 도착하기 전, 이미 지방 좌익에 의해 경찰들이 피살되고 경찰서가 점령당했다. 순천에 지원 나갔던 보성경찰이 타격을 입자 경찰서장이 부하들에게 후퇴를 명령하면서 봉기군은 별다른 저항 없이 보성을 점령했다.

10월 21일 정오 무렵 봉기군은 점령지역을 최대한으로 확장했다. 이때 봉기군과 토착좌익세력은 여수․순천․보성․광양의 전 지역과 하동․남원․구례․곡성의 일부 지역을 확보했지만, 본격적인 진압작전이 진행되면서 봉기군은 급속히 세력을 잃어갔다. 진압군이 여수에 진압하기 전에 전남동부지역은 대부분 진압되었다. 보성에서는 24일 오후 2시, 벌교는 25일 오전 10시, 광양은 26일 오후 7시, 구례는 27일 오후 2시에 경찰이 업무를 재개했다.(주7)

군인봉기에서 인민봉기로, 다시 사회혁명으로

여수에서 시작된 봉기가 전남동부지역으로 확산되는 과정은 주로 군대의 물리력에 의존했다. 그 때문에 봉기군이 물러나자 인민위원회도 동시에 무너졌다. 봉기군의 짧은 점령기간 때문에 인민위원회는 구체적인 정책을 펴 보지도 못했고, 대부분의 시간을 경찰이나 우익인사들을 처단하는 데 보냈다. 이러한 ‘반동세력’의 처단은 곧이어 진압군이 들어오면서 ‘피의 보복’이라는 악순환을 불러왔다. 탈환 뒤 우익의 확대된 보복은 6.25 전쟁에서 인민군과 지방좌익에 의한 우익인사 처단이라는 보복을 낳았고, 또 다시 국군이 들어오면서 확대된 피의 보복을 불러일으켰다.

진압군에 의해 봉기가 평정된 다음, 별다른 저항이 없었던 여수․순천과는 달리 그 이외의 지역에서는 산발적인 봉기군의 활동이 계속되었다. 특히 지리산과 같은 넓은 산악지대를 끼고 있던 구례는 한국전쟁 때까지도 빨치산과 정부군간의 전투가 계속 이어졌다.

▲ <지도3> 순천지역 여순사건 주요 집단희생장소와 가해주체(외곽)

봉기군이 여수와 순천을 점령하고 인민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하면서 남로당의 외곽 조직들은 무장과 함께 우익 인사에 체포에 나섰다. 좌익 세력은 체포한 인사들을 사형에서 무죄까지 4단계로 나누어 처벌했다. 여수와 순천에서 우익 인사들의 처형은 보안서의 관할 아래 기준에 따라 시행되었다. 이런 기준은 진압을 앞둔 상황에서 강경파에 의해 무너졌고, 일부에서는 무차별적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좌익의 학살 행위는 나중에 경찰과 우익 청년단이 보복에 나서는 한 원인이 되었다. 조선노동당 전남도당 군사2부장을 지낸 심명섭은 좌익의 우익 인사 학살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20일부터 22일까지 당성이나 정치성이 부족한 세포요원들이 앞장선 무분별한 살상이 있었다. 살상의 주된 표적은 공무원, 경찰과 그의 가족, 서북청년회 등이었다. 그러나 민간인 살상도 상당수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은 경륜이 짧고 세상이 곧 바뀌리라는 지극히 단순한 사고의 결과로 보인다. 이는 민심을 이반하고 돌아서게 함으로써 정치성의 부재에 따른 명백한 해당 행위를 한 셈이다. 당시 순천경찰서 뒤뜰에는 주검이 쌓여갔고, 곳곳에서 주검이 목격되었다.”(주8)

특히 벌교에서는 군인들이 즉결 처분의 형식을 바꿔 인민재판을 실시했는데, 봉기군이 주둔한 2~3일 사이에 우익 인사 100여 명이 소화다리로 불리는 부용교에서 학살되는 등 인명 피해가 컸다. 이는 벌교가 대지주와 소작인이 많아 소작료 문제로 갈등이 심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벌교가 교통 요지이자 항구이다 보니 고리대금업 등이 발달해 계급적 갈등이 첨예한 것도 한 요인이 되었다. 진압군이 돌아온 뒤에는 가해주체가 바뀐 채 다시 부용교에서 학살이 재현되었다.(주9)

여순사건에서 좌익 세력의 주요 처벌대상은 친일파, 포악한 지주, 더러운 고리대금업, 인민을 못 살게 구는 파렴치한 행위 등이었다. 여수와 순천에서 조직된 인민위원회는 우익 인사와 반동분자들을 가려내는 작업과 함께 해방 후 조직된 인민위원회의 방침과 노선을 부활하고자 했다. 이들은 나아가 북한에서 실시된 민주개혁의 내용을 그대로 시행하고자 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토지개혁 약속이었다. 점령 기간이 너무 짧아서 토지개혁은 시행될 수 없었지만, 인민위원회는 식량 배급을 늘리는 등 당시 가장 심각한 식량문제와 복지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는 여순사건이 군인 봉기에서 시작되어 인민봉기, 그리고 사회혁명으로 나아가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정부군의 강경한 진압작전과 계엄령 선포

여순사건이 일어나자 정부는 사태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기민하게 대응했다. 여수 주변 지역의 병력과 경찰을 동원해 반란을 진압하려했으나 실패하자, 미 군사고문단의 지원 아래 대대적인 진압 작전을 전개했다. 14연대 봉기 다음 날인 10월 20일 국방장관 이범석이 소집한 비상회의가 열렸으며, 미 군사고문단장 로버트(W. Robert) 준장과 경비대 총사령관 송호성 등 미 군사고문단과 국방경비대 수뇌부가 참석한 회의에서 진압 계획이 수립되었다.

10월 21일 광주에 반군토벌을 위한 반란군토벌사령부가 설치되었는데 송호성이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반군에 온정적인 태도를 취하던 송호성은 실제 진압 과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송호성이 반군들을 향해 울면서 마이크로 투항을 권유하자 반군들도 울면서 사령관의 권유를 받아들이지 못해 죄송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반면, 만주군 시절 독립군 토벌을 위해 설치된 간도특설대 출신의 5여단장 김백일과 정보국장 백선엽, 일선 연대장이었던 백인엽․송석하 등이 미 군사고문단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강경 진압 작전을 주도했다. 이들은 만주군 시절 독립군을 토벌하면서 마을을 초토화하고 주민들을 살상하던 그 경험을 그대로 적용해 ‘성과’를 올려 미 군사고문단과 이승만․이범석의 신임을 얻었다. 여순사건 이후 광복군 출신의 송호성은 군부에서 찬밥 신세로 전락했고 만주군과 일본군 출신의 반공주의자들이 군부를 장악하게 되었다.

▲ 펼침막을 이용, 미군들이 경비행기와 교신하고 있다. [사진=칼 마이던스, <LIFE>(1948.11.1.)(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

여순사건 진압 작전에는 전 육군 병력의 3분의 1인 5개 연대와 7척의 해군 함정, 그리고 전 공군력에 해당하는 10대의 비행기까지 동원되었다.(주10) 미 군사고문단의 지원 아래 장갑차와 박격포, 비행기와 해안경비대까지 동원되는 입체작전이었다.

21일부터 진압군은 순천 공격에 나서 일부 지역을 점령했다. 22일 김백일 5여단장은 오후 7시부터 다음 날 아침 7시까지 통행을 금지하고, ‘반도(叛徒)를 은닉하거나 반도와 밀통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계엄포고령’을 발포했다. 하지만 계엄령이 어느 지역에 해당하는지는 언급되지 않았다. 이는 진압군이 활동하는 지역에서 자의적으로 사용될 여지를 남겨둔 것으로 민간인 학살의 주요한 바탕으로 작용했다.(주11) 선무공작과 함께 본격적인 작전 준비를 마친 진압군은 장갑차 부대를 앞세우고 박격포 사격을 해대며 시내 공격에 나섰다.

10월 23일 진압군은 본격적으로 순천 시내 진입 공격을 시작했다. 이날 공격에는 L-4 연락기의 정보가 적절히 활용되었다. 진압군은 시내로 들어가서 한 집 한 집 수색하며 반군을 찾아냈다. 하지만 봉기군은 이미 순천을 떠나 백운산과 지리산으로 근거지를 옮긴 상태였다. 시내에는 일부 14연대 잔류 병사들과 순천중학생들로 구성된 시민 무장대, 순천군 각 면에서 올라온 무장대가 있었다. 이들은 경찰 무기와 죽창으로 무장하고 진압군에 저항했지만 상대가 되지 않았다. 23일까지 순천과 보성, 벌교 등이 어느 정도 평정되었다.

여수 진압 작전은 바다와 육지에서 동시에 진행되었다. 1차 공격은 10월 23일 바다 쪽에서 있었다. 부산에서 천안호(LST)를 타고 온 김종원 부대(5연대 1대대)가 여수 상륙을 시도했으나, 적군에게 아군을 노출하고 탄약만 써버리는 ‘용서할 수 없는 낭비’를 저지른 끝에 실패하고 말았다. 2차 공격은 24일 육지와 해안에서 벌어졌다. 5연대 병력과 해안경비대 함정들이 여수만을 포위한 송석하 부연대장이 지휘하는 3연대 1개 대대와 장갑차 부대가 공격에 나섰다. 여수 신항과 구항 등 해안 쪽에서도 상륙을 시도했으나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3차 진압 작전은 10월 25일 육지와 바다에서 진행되었다. 이날 함정에서 쏘아대는 박격포에 공포를 느낀 여수 시민들은 피난길에 나서기도 했다. 진압군은 반란군과 구별하기 위해 헬멧에 하얀 띠를 두르고 장갑차를 앞세워 여수 진입에 나서 외곽 고지를 점령한 뒤, 시내를 향해 박격포 공격을 퍼부었다. 하지만 밤에는 외곽으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10월 26~27일, 마침내 4차 진압 작전이 전개되었다. 정보기가 하늘에서 시시각각 상황을 알려주는 가운데 육지와 바다에서 동시 공격을 시도했다. 반군은 완강히 저항했으나 진압군의 압도적인 화력과 무력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장갑차를 앞세운 진압군의 무차별적인 박격포 공격으로 여수 시내는 초토화되었다. 시내로 들어온 진압군은 기관총을 난사하며 소탕 작전을 벌였다.(주12)

봉기의 진압 뒤 잔인한 보복이 뒤따르다

봉기가 진압되자 잔인한 보복이 뒤따랐다. 순천과 여수를 점령한 진압군은 제일 먼저 시민들을 넓은 공공장소에 모이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반군에 협력한 부역자를 가려내는 작업을 시작했다. 부역자 색출 작업은 잔인하고 참혹하게 진행되었다. 당시 상황을 직접 목격한 〈조선일보〉 유건호 기자는 그 광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곳은 순천 북국민학교 교정이었다. 23일 토벌대가 순천을 탈환한 뒤 국군은 작전을 계속하고 경찰대가 순천 읍민만 이곳으로 모아놓은 것이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대부분 한군데 모여 있는데……(중략) 심사 중인 그들 앞에는 경찰관에게 끌려나온 사람이 충혈된 눈으로 이 얼굴 저 얼굴 번갈아 훑어보면서 누군가를 찾고, 웅크리고 앉아서 떨고 있는 사람들은 고개를 숙인 채 그 시선을 피하려고 무진 애를 쓴다. 얼굴을 들었다가 그와 시선이 마주쳐서 ‘저놈이다’ 손가락을 가리키기만 하면 끝장나는 것이다. ……(중략) 읍민들이 수용된 북국민학교 교정 남쪽에서 탕, 탕, 탕 카빈총 소리가 들렸다. 언제 파놓았는지 구덩이가 파인 앞에 손을 뒤로 결박당한 청년 5명이 서 있고, 약 10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경찰관 5명이 총격을 가했다. 2탄, 3탄이 계속 발사되었다. 이 총살형은 계엄사령관의 명에 따른 것이며,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주13)  

여수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끌려온 사람들은 곧 ‘심사’라는 것을 받았다. 그제야 여기 끌려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생존 경찰관을 선두로 우익 진영 요인들과 진압군 병사로 구성된 심사 요원 5~6명이 시민들을 줄줄이 앉혀놓고 사람들의 얼굴을 쑥 훑고 다니다가 ‘저 사람’ 하고 손가락질만 하면 그 자리에서 교사 뒤에 파놓은 구덩이 앞으로 끌려가 불문곡직하고 즉결 처분(총살)되었다. 그 자리에는 일체 말이 필요 없었다. 모든 것이 무언(無言)인 가운데 이루어졌다. 사람을 잘못 봤어도 한번 찍히면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임사호천(臨死呼天)이라고 사람은 죽기 전에 하늘을 부른다고 했다. 그때 여수 사람들의 심정이 그랬다. 이런 공포 분위기 속에서 정문에서는 간혹 소탕 작전에서 잡혀오는 것으로 보이는 파리한 몰골의 앳된 젊은이들이 2~3명 혹은 4~5명씩 교사 뒤로 끌려가면 어김없이 탕, 탕 하는 기분 나쁜 총소리가 뒤따라 사람들의 가슴을 얼어붙게 했다.”(주14)

진압군 가운데 특히 잔인한 인물도 있었다. ‘백두산 호랑이’로 악명을 떨친 김종완은 여러 차례 시도한 상륙작전이 실패한 분풀이를 하듯 마구잡이로 죽였다. 그는 독이 올라 군내리에서 3명, 남면 안도에서 20여 명을 죽였다. 그리고 중앙국민학교에서 부역혐의자로 잡혀온 청년들을 보고 “이놈들에게 칼 시험이나 해보겠다”면서 그가 들고 다니던 일본도로 베어서 죽였다. 그는 그 청년이 바로 죽지 않고 피를 흘리며 다른 청년들 뒤로 피하자 계속 칼을 휘둘렀고, 7명의 청년을 모두 그런 식으로 죽였다.(주15)

▲ 진압군은 반군협력자 색출을 위해 주민들을 학교에 집결시켰다. 칼 마이던스(1948. 11. 1.)/<LIFE>(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

이렇게 마구 보복, 처형을 하다 보니 여수 시내 도처에 시체가 즐비했다. 당시 해양대 학생으로 승선 실습을 하고 있던 리영희는 부산에서 여수로 출동한 함정을 타게 되어서 진압 후 처참한 현장을 목격하게 됐는데 그때 광경을 이렇게 썼다.

“운동장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체가 즐비했고, 반란군과 진압군 쌍방의 희생자는 대부분 젊은 민간인이었다. 운동장 울타리를 둘러싸고 많은 사람들이 먼발치에서 통곡하고 있었다. 나는 동료 학생들을 재촉해서 그 자리를 빨리 떠나버렸다. 멸치를 뿌려놓은 것처럼 운동장을 덮고 있는 구부러지고 찢어진 시체들을 목격한 후회와 공포감 때문이기도 했지만, 울타리 밖에서 울부짖는 남녀노소의 시선이 두려워서였다.”(주16)

또 여수 오림동 집단학살에서 살아난 정 아무개는 이렇게 증언했다. “12연대는 … 여수중학교 남학생 1명을 웃는다고 불러내서 바로 그 자리에서 총살시켰습니다. 거기서 신체가 건장하고 좋은 청년 10여 명을 추려내어 한편에 세웠고, 나머지는 다른 한 편에 세웠습니다. 그 다음 나머지는 돌려보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고 있는데 현 테니스장 인근에서 총소리가 났어요.”(주17)

국가보안법 제정과 반공국가의 탄생

1946년 10월 항쟁에서도 경찰의 좌익 탄압에 대응하는 좌익 세력의 공격이 있었고, 진압 과정에서 경찰과 우익의 보복과 살상행위가 있었지만 그것은 여순사건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라이프>는 1948년 12월 6일자 기사에서 “이곳에서는 폭동을 진압했던 정부의 군대가 반란자들의 잔학행위와 같은 짓의 야수성과 정의를 무시한 태도로 오히려 그들보다 더한 보복행위를 자행하고 있다”며 정부군의 잔혹행위를 비판하고 있다.

여수와 순천을 장악한 정부군은 보성, 광양, 구례, 고흥, 곡성, 장흥, 화순 등 반란군이 장악한 전남 동부 지역에 대한 대규모 토벌 작전에 돌입했고, 그 과정에서 초강경 진압책으로 민간인을 대량 학살했다.(주18) 여순 사건은 4․3사건 진압 과정에도 영향을 미쳐서, 대량 학살과 초토작전이 아무 제동장치 없이 전개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여순 사건 이후 군부 숙청 과정에서 군부 내 좌익 세력과 더불어 민족주의 성향의 양심적인 장교들이 대거 숙청되었다. 숙군 작업은 1948년 10월부터 1949년 7월까지 대대적으로 진행됐는데, 이 과정에서 전군(全軍)의 약 5%에 달하는 4,749명이 숙청되었다. 이 중 2,000명 이상이 총살형에 처해졌는데, 초급장교와 하사관의 경우에는 전체의 3분의 1이 체포, 구금, 처형 또는 제대 당했다.(주19)

군부의 숙군 경험과 정보, 조직, 인력자원은 6.25전쟁 발발 직후 보도연맹사건과 형무소재소자사건에서 대량의 민간인 학살을 주도하는 데 바로 이용되었다. 여순사건을 통해 쌓아올린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전쟁에서 군 정보기관과 헌병대 등이 민간인 학살에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관여했던 것이다.

여순사건은 군과 경찰의 역관계를 변화시켰다. 국방경비대는 경찰예비대로 출발했고, 장비와 훈련, 인력, 대우 면에서 경찰에 뒤졌다. 하지만 여순사건에서 경찰은 봉기군에 여지없이 패퇴했지만 만군출신이 주도한 진압과정에서 군은 봉기군에 승리했다. 그렇게 되면서 군과 경찰의 위상이 역전되기 시작했다.

또 여순사건은 그 후 사실상 헌법 위에 군림하며 한국 사회를 좌우하게 될 국가보안법을 제정하는 직접적 계기로 작용했다. 국가보안법은 여순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1949년 12월 1일 임시법으로 제정되어 70여년 동안 사실상 헌법 위에 군림하면서 한국 사회의 성격과 틀을 규정짓는 괴물로 작용해왔다.

국가보안법 제정과 더불어 이승만 정권에 의해 각종 국민통제장치가 만들어지면서 한국은 ‘과대반공국가’로 탈바꿈되어 갔다. 1948년 12월 19일 그동안 김구, 이범석 등 여러 세력과 인물에 의해 나뉘어져 있던 우익청년단을 하나로 통합해 대한청년단을 만들었고, 1949년 4월 22일에는 전국의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학도호국단을 조직하여 학생 통제에 나섰다. 나아가 1949년 6월에는 ‘좌익사상 전향자’를 대상으로 국민보도연맹을 조직하여 사상통제에 나섰다. 결국 보도연맹 가입자들은 6.25전쟁 발발 직후 군과 경찰에 의해 조직적으로 학살되는 비극을 맛보아야 했다.

여순 사건은 한국 현대사에서 반복되는 ‘피의 보복’의 한 출발점이 되었다. 여순 사건에서는 일부 우익 인사가 좌익에 의해 학살되었고, 그에 대한 군경과 우익 세력의 보복 학살이 뒤따랐다. 좌우익의 보복 살육 행위는 한국전쟁까지 이어졌다. 한국전쟁에서 인민군이 이 지역을 점령하자 다시 우익에 대한 학살이 자행되었고, 인민군의 패퇴와 함께 국군의 대규모 학살이 반복되었다. 한국 사회 갈등의 한 원형이 여순 사건에서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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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김득중, 『‘빨갱이’의 탄생 : 여순사건과 반공 국가의 형성』(선인, 2009), 70~71쪽

2) 당시 14연대를 지휘하는 군사 오르그는 ‘조동무’로 알려진 인물이었는데, 그는 선상반란 계획을 전달하고 지령을 받기 위해 광주로 간 뒤 연락이 두절되었다. 그는 이후 14연대 봉기의 오류를 책임지고 처형되었다고 알려진다.(김득중, 위의 책, 73쪽)

3) 미군과 한국 정부는 14연대 봉기의 주체로 ‘핵심 세포원 40명’으로 지목했지만, 그 근거는 나오지 않았다. 미군은 이전부터 14연대 좌익 세포원들의 수를 40명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다.

4) 김득중, 위의 책, 80~81쪽

5) 원래 1개 연대 병력은 3,000여명이지만 당시 대부분의 연대들이 정원을 채우지 못하고 있었다. 14연대의 경우 순천에 2개 중대가 파견 나가 있어서 신월리에 2,200명 정도가 주둔하고 있었다. 그 중 수송 준비를 위해 LST에 승선해 있던 300명, 여수역으로 갈 때 이탈한 200명, 14연대에 계속 남아 있었던 500명을 제외하면 봉기에 가담한 수는 1,200여명 수준이다.

6) 황남준, 「전남지방정치와 여순사건」, 『해방전후사의 인식』3(한길사, 1995, 3쇄), 448쪽

7) 김득중, 위의 책, 128쪽

8) 「내가 겪은 여순사건―심명섭」, 『순천시사』(순천시사편찬위원회, 1997), 814쪽.

9) 김득중, 위의 책, 132쪽

10)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1940년대편 2 : 8․15 해방에서 6․25 전야까지』(인물과사상사, 2004), 173쪽.

11) 계엄령은 민간인 살상의 주요한 근거가 되었다. 당시 계엄령 아래서는 민간인에 대한 즉결 처형 등 무차별적인 살상이 가능하다는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10월 22일 현지사령관에 의해 처음 내려진 계엄령은 어떤 과정을 통해 발포되었으며, 어디에 근거했는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당시는 계엄법이 제정되지 않은 상태여서 엄밀히 말해 계엄령 선포는 법적 근거가 없는 불법이었다.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 24일이었다. 계엄령의 근거뿐만 아니라 유효시기, 지역범위와 효력도 문제가 되었다.(김득중, 위의 논문, 260~270쪽 참고) 계엄령의 불법성 문제는 제주4.3사건에서도 주요한 쟁점이 된다. 법적 근거도 없고 위헌소지가 있는 ‘계엄령 선포’라는 사실자체만으로 민간인 학살의 바탕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12) 임영태, 『산골대통령, 한국을 지배하다』(유리창, 2013), 120~121쪽.

13) 조선일보사출판국,『전환기의 내막』(조선일보사, 1982), 148~149쪽.

14) 김계유, 「1948년 여순봉기」, 『역사비평』(1991년 겨울호), 283쪽; 전남일보광주전남현대사기획위원회,『광주․전남현대사』(실천문학사, 1991), 157쪽.

15) 강준만,『한국 현대사 산책―1940년대편 2 : 8․15 해방에서 6․25 전야까지』(인물과사상사, 2004), 176쪽.

16) 리영희,『역정 : 나의 청년 시대』(창작과비평사, 1988), 122~123쪽.

17) 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6권), 455~456쪽

18) 정부의 공식통계에 의하면, 여순사건으로 토벌군은 141명이 사망, 263명이 실종, 391명이 반란군 측에 합류했으며, 반란군은 821명이 사망하고 2,860명이 체포되었다. 1948년 11월 말 미군 소식통에 따르면, 약 1만 7천명의 사람이 반란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그들 중 866명이 사형언도를 받았다.(강준만, 위의 책, 179쪽) 또 여순사건 진압 직후인 1948년 11월 전남도 보건후생당국이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사망자는 2,633명(여수 1,300명, 순천 1,134명, 보성 80명, 고흥 26명, 광양 57명, 구례 30명, 곡성 6명)이고, 중상 1,28명, 경상 488명, 행방불명 825명 등으로 총 인명피해가 4,974명으로 집계되고 있다.(김득중, 「여순사건 당시의 민간인 학살」,『한국현대사와 사회주의(역사비평사, 2000), 350쪽) 1949년 1월 10일 정부가 여수, 순천, 구례, 곡성, 광양, 고흥, 보성, 화순 등을 현지 조사한 결과 인명피해는 사망 3,392명, 중상 2,056명, 행방불명 82명 등 총 5,530명이었다. 1949년 11월 11일 전라남도 당국이 여순사건 발생지역 전체를 조사한 결과 인명피해는 11,131명이었다.(진실화해위원회, 『종합보고서 3: 민간인집단희생사건』, 2015, 94쪽) 여수지역사회연구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여순사건의 희생자는 10,000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여수 5,000명, 순천 2,200명, 보성 400명, 고흥 200명, 광양 1,300명, 구례 800명, 곡성 100명 등이었다. 가해자는 국군과 경찰이 95%, 봉기군과 지방좌익이 5%로 추정되었다.(여수지역사회연구, 『여순사건 실태조사보고서』1․2․3집(1998, 1999, 2000); 김득중, 『‘빨갱이’의 탄생』, 354쪽)

19) 강준만, 위의 책, 1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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