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연재를 시작하며 

과거사 청산은 근대 국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있었던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으로 세계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과거사 청산은 민주화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일로써 왜곡․은폐된 과거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사회정의를 세우는 일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국가 권력에 의해 왜곡되고 은폐된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바로잡기 위한 과거사 청산 노력이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통해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명박․박근혜 정부 아래서 이러한 역사적 진실을 부정하고 왜곡하여 과거로 되돌리려는 시도가 계속되면서 그 성과가 희미해지고 있다. 

역사는 진실을 밝혔다고 해서 끝나서는 의미가 없다. 역사의 진실이 영원히 기억되지 않으면 역사의 정의는 없다. 진실은 공식 기록으로 표기되고, 교육되고, 기억되어야 한다. 역사를 지키기 위해서는 망각과의 투쟁이 필요하다. 한국 현대사에서 국가 권력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과 테러, 의문사, 고문에 의한 조작 등과 관련된 사건들을 되짚어 봄으로써 역사의 진실을 망각하지 않고 기억하고자 한다. / 필자 주


여순사건과 반공국가‧빨갱이의 탄생

여순사건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는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다. 그동안 여순 사건을 지칭하는 말로는 여순반란사건, 여순병란사건, 여순14연대 반란사건, 여순폭동사건, 여순군민항쟁(여순항쟁), 여순봉기 등 여러 표현들이 사용되어 왔다. ‘반란’이나 ‘폭동’이라고 할 때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불법적이고 파괴적인 행동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서 부정적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봉기’나 ‘항쟁’이라고 표현할 때는 이승만 정권의 탄압에 대응한 민중의 저항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여순사건은 제주에서 발생한 민중항쟁을 진압하기 위한 군대출동에 반대하고 남북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하며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저항의 정당성과 정치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민중봉기, 인민항쟁의 성격’을 갖고 있다. 하지만 정부의 입장에서 본다면 국가권력의 핵심무력인 군대 내에서 상부의 출동명령을 거부하고 ‘소요’를 일으켰다는 점에서 분명 ‘반란의 성격’을 갖고 있다.

그래서 좌익 내에서도 사건의 정당성과 상관없이 실제적 의미를 담은 ‘여순병란’이라는 표현을 한동안 사용했다. 지금은 여순사건에 대한 전면적인 진상규명과 공식적인 의미규정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여 일반적으로 ‘여순사건’으로 부르고 있다. 그런 와중에도 여전히 냉전시대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여순반란’이나 ‘여순폭동’ 등을 고집하는 이들도 있다.

▲ 여순사건에서 진압군에게 체포된 반란군 모습(출처: 나무위키)

어쨌든 봉기의 핵심주체가 국가권력의 일부였다는 점이 대구10월항쟁이나 제주4.3사건과는 차이가 나는 부분이라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봉기의 주체가 국가조직의 일부, 그것도 국가의 핵심무력인 군대라는 사실은 국가권력의 존립자체를 위협하는 근본적인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이승만 정부는 여순사건이 일어나자 이전부터 진행되어 오던 군부 내의 숙청작업을 가속화했고, 그 과정에서 좌익군인(장교와 사병)뿐만 아니라 반이승만세력(친김구세력, 광복군 출신 등 민족주의 성향의 군인들)을 통째로 제거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여순사건의 토벌 과정에서 ‘잔인성’과 ‘용감성’을 보여주며 공을 세운 일본군과 만주군, 특히 만주군 출신들이 두각을 나타내면서 군부의 상층부를 장악하게 되었다. 여순사건 당시 광복군 출신의 송호성 국방경비대 사령관은 봉기세력을 동족으로 인식하고 가급적 피해를 줄이려 노력했으나 미군사고문단과 이승만․이범석 등 최고지휘부의 전격적인 지원 아래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이 강경진압을 주도하면서 대규모 민간인 학살이 벌어지게 되었다.

여순 사건을 통해 토벌 과정에서 ‘혁혁한 전공(戰功)’을 세운 일․만군 출신들이 군 최고지도부와 주요 지휘관 장악, 군부 내의 주도권도 확실히 장악하게 된다. 이 같은 일만군 출신 강경세력의 득세와 군부 장악은 곧바로 다시 제주에서의 무차별적인 살상으로 연결되었고, 6.25전쟁과 함께 대규모 민간인 학살이라는 비극을 낳는 바탕이 되었다.

여순사건은 부대 내의 일부 좌익세력이 주도한 군인들의 봉기(또는 ‘반란’)로 시작하여 지역의 좌익세력, 인민대중과 결합하면서 민중봉기, 인민항쟁으로 발전했고, 삽시간에 여수와 순천뿐만 아니라 광양, 구례, 곡성, 고흥, 남원 등 전남동부지역을 석권했다. 이에 한국 정부는 이 사건이 신생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뒤흔들고 존립기반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판단 아래 미고문단의 지원 아래 초강경 진압책을 폈다. 한국군이 여수 주둔 14연대 군인들과 지역 민중이 합세한 봉기, 항쟁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봉기군과 가담세력뿐만 아니라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주위의 민간인들이 숱하게 살해되었다.

토벌군과 경찰, 우익청년단은 봉기에 참여하거나 군․경찰에 저항하는 인민뿐만 아니라 그 주변지역에 살고 있던 민간인들까지 ‘반란군의 협조자’라는 미명으로 무차별적으로 학살했으며, 나아가 이 사건을 통해 대한민국을 이른바 ‘반공국가’로 만들어내기 위해 진압과정에서 학살된 민간인에 대해서는 ‘빨갱이’라는 굴레를 씌워서 학살에 대한 문제제기 자체를 원천 봉쇄했다. 

해방 후 변혁운동의 연장선에서 발생한 사건

여순사건의 바탕에는 멀리는 해방 이전 일제강점기의 좌익의 적색농조․노조운동과 민족해방운동, 가까이는 해방 후의 건준․인민위원회 등 사회운동이 연결되어 있다. 해방 후 여수․순천을 비롯한 전남동부지역(주1)의 경우 비교적 우익세력이 강세를 보이는 가운데 좌익세력이 활동을 하면서 좌우익의 양자 사이에 일정하게 타협이 이뤄져 심각한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미군정기 이 지역의 인민위원회는 별로 급진적인 성향을 띠지 않아서 미군정부대와도 마찰을 거의 겪지 않았다. 역설적이게도 이 지역 인민위원회 권력이 그다지 크지 않았기 때문에 전남동부지역의 좌익세력은 다른 지방처럼 미군정과 경찰로부터 심한 탄압을 받지 않았던 셈이다. 또한 그랬기 때문에 대구․경북을 비롯하여 충청, 전라, 경남 등 남한 전역을 휩쓴 1946년 10월항쟁 시기에도 전남동부지역에서는 항쟁이 일어나지 않았다.(주2)

이런 점들은 10월항쟁이 일어났던 대구나 4.3사건이 일어나는 제주도와도 유사했다. 이들 지역에서는 온건한 노선을 견지하고 대중적 토대가 강했던 지역운동세력이 일정 기간 동안 미군정과 협조관계를 유지하면서 활동을 지속적으로 폈던 것이다. 장기간 안정적인 활동을 통해 역량을 축적할 수 있었고, 그러한 역량이 바탕이 되어 어떤 계기가 표출되자 폭발적으로 그 힘을 드러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변혁운동은 전국적인 전망을 갖고 지역 상황에 맞는 전략전술을 전개할 정도의 지도력을 갖추지 못하였다. 대구의 10월항쟁이나 여순사건, 4.3사건 모두에 남로당이 관련되어 있기는 하지만 전면적인 지도력을 발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중적 전위정당을 표방하고 출현한 남로당은 3당합당 과정에서 내부의 분열과 대립으로 상당한 역량의 손실을 겪었고, 전략전술의 구사라는 측면에서도 여러 가지로 미숙했다. 그러한 미숙성은 여순사건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나게 된다.  

▲ 진압작전 당시의 모습. 미 임시군사고문단 소속 장교는 현지에서 작전을 지휘했다. [칼 마이던스(1948. 11. 1.)/<LIFE>(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

한편, 1948년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둘러싸고 좌우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여순사건의 주무대가 되는 이 지역에서도 대립과 갈등이 깊어졌고 폭력사태가 빈발하기 시작했다. 단선반대투쟁 등을 통해 과격한 행동을 조직하기 시작한 좌익세력은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제14연대의 봉기를 시발로 억압적인 반공체제에 저항하는 전면적인 인민항쟁을 벌였다. 군인봉기에 지역 좌익세력과 민중이 가세하면서 전면적인 인민항쟁으로 발전하자 국가의 정체성 확보에 위기감을 느낀 이승만 정부는 미군사고문단의 지원 아래 강경 진압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었다. 여순사건 과정에서 희생된 민간인은 적게는 2,000명에서 많게는 10,000여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주3)

그러나 냉전시대를 통해 반공국가 대한민국에서 여순사건에 대한 정당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여순사건 과정에서 살해된 모든 사람들은 그가 공산주의자였던 민족주의자였던 상관없이, 또 군대와 인민의 봉기에 직접 참여했건 아니건 상관없이 모두들 ‘빨갱이’로 취급되었다. 그들의 죽음의 원인을 밝히려는 시도를 하거나 죽음에 대한 위령행위도 할 수 없었다. 여순사건에 대해서는 그 희생규모가 너무 크기 때문에 ‘제주4.3위원회’처럼 별도의 활동이 필요하다는 요구도 있었으나 여건이 마련되지 않아서 결국 국가차원에서는 진실화해위원회의 포괄적 과거사정리 활동에 포함시켜 진행하는 것으로 끝났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신청자를 중심으로 조사하고 그들의 죽음에 대한 사실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주된 작업이었기에 여순사건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와 의미 규정, 전체 피해자 확인 작업은 진행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신청자를 중심으로 한 조사과정에서 많은 민간인 희생자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일정한 성과가 있었다. 그 외의 보다 포괄적인 조사와 연구, 역사적인 의미규정 등은 시민사회운동단체와 연구자의 몫으로 남았다.

경찰예비대로 출발한 국방경비대

여순사건은 군인들의 ‘봉기’로 시작되었다. 따라서 여순사건을 알기 위해서는 미군정 시기 군대의 성격부터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미군정은 각 도에 1개 연대씩을 만든다는 국방경비대 창설계획(‘Bamboo Plan’)에 따라 1946년 1월 15일 처음으로 제1연대를 창설했다. ‘뱀부 계획’은 하지 중장의 명령에 따라 챔페니(A. S. Champeny) 대령이 작성해 국방성의 인가를 받았는데, 25,000규모의 경찰예비대를 창설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국방경비대는 대내외적으로는 독자적인 군대가 아니라 ‘경찰예비조직’을 표방했다. 미국과 소련이 자신의 점령지에서 독자적인 군대를 창설한다는 것은 상호간의 협의를 포기하고 독자적인 정부를 세우려는 의지로 여겨졌기에 미군정은 군대라는 명칭을 가진 조직을 만들 수 없었다.

하지만 미군정도 그렇고 군인들도 국방경비대를 최고의 물리적 조직으로 생각했다. 대외적으로는 경찰을 지원하는 경찰예비조직을 표방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독립적인 군대조직이었다. 국방경비대의 간부들을 양성하기 위해 미군은 처음 군사영어학교를 세웠다. 군사영어학교는 2기로 끝나지만 여기에 초기 한국군의 주요 지휘관들이 대거 가담했다. 그런데 군사영어학교 졸업생 110명 가운데 2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본군․만주군 출신이었고, 일제에 저항하여 독립운동을 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주4)

군사영어학교 폐교 뒤에는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에서 간부들을 배출했는데, 처음에는 후보생의 선발기준에 신체조건만 고려했다. 하지만 점차 사관학교에는 정치성을 띤 인물들이 들어왔으며 3․4기생의 경우에는 80%가 넘은 대부분의 인원이 반이승만 성향을 띤 사병이나 민간인들이었다고 할 정도로 민족적 성향이 강했다. 여순사건 주동자의 한 명이었던 김지회와 홍순석도 3기생이었다. 사병의 경우는 초기에는 장비도 좋지 않았고 대우도 형편없었기 때문에 모병에 제대로 응하지 않고 탈영병도 많았다.

국방경비대는 내용적으로 군대였지만 형식은 경찰을 보조하는 하부 조직으로 창설되었는데, 그 이유는 미․소가 남북을 분할 점령한 상태에서 각각이 군대를 창설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부수립 후에 국군으로 발전하게 되는 국방경비대는 전국적 차원이 아닌 향토연대의 성격을 갖고 출발했다. 미군정은 경비대를 ‘비이념적 불편부당’의 원칙 아래 육성한다고 했다. 하지만 경비대에 치안대와 같은 사설 군사단체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나 사회운동 경험이 있는 인물들이 입대하면서 처음부터 친일 경찰을 중심으로 구성된 경찰과는 달리 민족적 성향이 강하게 형성되었다.

그러나 경찰의 보조조직을 표방한 까닭에 본격적인 무장을 하지 않아서 장비나 인력 면에서 경찰에 뒤졌다. 국방경비대는 초기에 제복조차도 지급되지 않았고, 식사도 형편없었다. 경찰과 비교해 그들의 장비나 의복, 대우 등 모든 면에서 뒤졌다. 그 때문에 경찰은 국방경비대를 우습게보았고, 자신의 똘마니 정도로 취급했다.

또한 국방경비대의 주요 활동 목표는 외부 적의 공격을 방어하는 일보다는 폭동진압이나 치안유지와 같이 남한에서 발생한 정치적 동요를 진정시키는 데 두어졌다. 그러나 미군정은 1947년 말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하고 미소 대립이 격화되면서 남북분단 정권의 수립이 분명해지자 선거에 대비한 치안확보와 정부수립에 대비한 국군 창설 목적으로 갖고 국방경비대를 국군으로 전환하기 위한 조치들을 취했다.

우선 국방경비대 조직을 확대 재편하여 8연대까지의 기본연대 외에 1947년 말부터 1948년 초까지 제1~5여단을 창설했으며, 1945년 5월 1일부터 4일 사이에 제10연대부터 제15연대까지 6개 연대를 모두 창설했다. 1948년 5월 3일에는 경찰 3만 4천명, 군 2만 8천명으로 경찰이 6천명 정도 많았으나 5월 28일에 경찰 34,900명에 비해 군이 41,265명으로 역전되었다.(주5)

여순사건의 주체인 14연대의 형성

여순사건의 발단이 되는 군인봉기를 일으키는 여수14연대의 경우 모태가 된 것은 제4연대였다. 제4연대는 경찰과 군청의 협조를 받아 1946년 8월까지 제1대대를 편성했지만 정원 확보가 힘들었고 입대 뒤에도 사병의 1/3이 도망가는 형편이어서 한동안 정원의 60~70%밖에 채우지 못했다. 제4연대에는 여수봉기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는 경비사관학교 제3기 출신인 김지회, 홍순석이 들어와 있었다. 당시는 경비대 내에서 이념적 성향을 문제 삼지 않는 분위기여서 이들이 좌익성향을 갖고 있다는 게 알려졌어도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 2연대 소속 사병이 주먹밥을 먹고 있다. 철모에 쓴 숫자 2는 2연대를 의미한다. [칼 마이던스(1948. 11. 1.)/<LIFE>(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

제4연대는 1947년 말에 3개 대대의 편성을 완료했고, 1948년 5월 1일 경기도에서 전남 광주로 옮겨 제5여단에 예속되었다. 그리고 며칠 뒤 4연대 제1대대를 기본으로 하여 1948년 5월 4일 여수 신월리에서 제14연대(주6)가 창설되었다. 신월리는 일제 말기에 일본 해군의 항공기지가 있던 곳으로 여수반도 남단에 위치했고, 이곳이 제14연대 주둔지가 됐다. 14연대는 기간병력이 도착한 뒤 가두에서 신병 모집을 했다. 약 2천명의 신병을 모집해 모두 3개 대대를 편성하는 것이 목표였다. 장교들에게 출장비를 주어 전남 일대 도서지방까지 순회시켜 모병을 했고 인원도 책임제로 할당했다.

모병 시기는 5.10선거가 끝난 직후여서 단정단선반대운동에 앞장섰던 청년들이 신상에 불안을 느끼고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군대의 모병에 다수 응했다. 14연대를 구성하기 위해 4연대에서 차출된 1개 대대 성원 가운데는 김지회, 홍순석 등 좌익계 장교들과 지창수 상사 등의 하사관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제14연대 내의 좌익 세포들은 모병의 허점을 이용하여 반이승만 성향이 있거나 사회운동을 하다가 수배를 받은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모집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경찰은 경비대가 좌익의 근거지가 되고 있으며 반공 사상이 투철하지 못한 집단이라고 여겼다. 경비대도 경찰을 친일집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군경 사이에 충돌이 자주 벌어졌다. 국방경비대 제1연대장 배로스(R. D. Barros) 중령은 경비대와 경찰의 충돌이 일주일에 한번 꼴로 발생한다고 말한 바 있다. 경비대와 경찰 사이의 충돌은 거의 모든 지역에서 수시로 발생했는데 경비대원들은 도처에서 경찰서 유치장으로 끌려가거나 경찰에 모욕을 당했다.(주7)

경비대와 경찰 간의 충돌은 좌익세력이 강한 지역에서, 그리고 남북분단이 기정사실화되고 경비대가 팽창하면서 점차 심화됐다. 1947년 4월에는 광주 4연대 병사들이 순천경찰서를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연대 병사의 형이 소요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순천경찰서에 수감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4연대 병사들이 광주에서 3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순천까지 원정을 가서 경찰서를 습격한 것이다.

6월에는 경찰과 경비대가 물리적으로 충돌해 4연대 병사 6명이 사망하고 10여명이 부상당한 영암사건이 발생했다. 여순사건이 일어나기 약 한 달 전인 9월 24일에는 구례에서 군경이 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전남동부지역인 순천, 영암, 구례에서 일어난 세 사건을 통해 14연대 병사들은 경찰과의 무력충돌을 경험했고, 이 과정에서 적대감을 더해갔다. 14연대 병사들이 봉기할 때 지창수는 경찰을 응징하자고 선동했는데 이러한 주장에 공감한 병사들이 자연스럽게 봉기에 가담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당시 군경의 충돌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경비대는 무기지급, 계급장, 복장, 급식문제 등 거의 모든 면에서 경찰에 비해 열악했고, 경찰예비대라는 위상 때문에 열등감까지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경비대 간부들의 경우는 일본군이나 관동군 출신이어서 군이 우위에 있다는 의식을 강하게 갖고 있었고 경찰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장교든 사병이든 경찰을 좋지 않게 생각했다.

반면, 경찰은 경비대를 경찰의 하부조직 정도로 보고 무시했으며, 사상적으로 불순하고 향도경비나 서는 오합지졸로 여겼다. 한편 국방경비대 사병들은 과거 ‘일제의 주구’로 활동했던 경찰이 해방된 나라에서도 높은 대우를 받으며 큰소리치고 자신들을 멸시하기까지 하는 데 대해 강한 분노를 품었다. 하지만 군경의 갈등은 단지 국가 기관 내에서 경찰과 군대라는 조직 사이의 갈등만은 아니었다.(주8)

당시 경찰조직은 친일파세력이 장악한 반공조직이었다. 미군정은 남한을 점령한 뒤 좌익을 제압하고 주민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일제시기의 친일경찰을 그대로 기용했다. 경찰 수뇌부인 조병옥 경무국장과 장택상 수도청장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였으며, 그 아래의 주요 간부들과 하부조직은 일제시기 친일파로 채워졌다. 친일파의 온상이었던 경찰에 월남한 극우반공인사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경찰은 반공․반소의 선봉이 되었다. 이러한 경찰조직은 10월 민중항쟁에서 보았듯이 미군정이 실시한 강제적인 미곡수집정책을 일선에서 집행하는 핵심조직이었고, 그 때문에 민중의 원성의 표적이며 주요 대상이었다.

경찰조직은 수뇌부에서 말단에 이르기까지 거의 대부분 친일경력자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일제시기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었고, 친일잔재 청산에 저항해야 하는 공동의 이해관계를 갖고 있었다. 경찰은 이러한 공동의 기반 아래서 미군정의 정책을 충실히 수행하면서 내적인 동질성과 응집력을 높여갔다. 반면 경비대는 좌익인물들이 쉽게 입대할 수 있었고, 입대 후에도 일사불란한 조직을 만들기 위한 사상교육은 이뤄지지 않았다. 국방경비대 장교들 다수가 친일경력자이면서 반공적인 인물들이었지만 조직 내에 남로당 세포로 활동하는 인물들도 상당히 포진되어 있었다.

경비대 일부 장교들이 군이 경찰에 압도적인 지위에 있어야 한다는 군국주의적 사고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경찰과 갈등을 빚었다면, 좌익․민족적 성향의 장교들과 하층 농촌 출신인 사병들은 경찰의 친일 행각과 미군정 정책의 하수인 노릇, 그리고 반공전선의 선봉으로 활동하는 것에 강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이 여순봉기에서 사병들을 쉽게 움직일 수 있는 주요한 기반이 되었다. 봉기의 주동자였던 지창수는 “경찰이 쳐들어온다. 응징하러 가자”라고 선동했고, 병사들은 이에 쉽게 호응했다.(주9)

군부 내의 숙정작업과 제주도 출동

공산당(남로당)의 군대 공작은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하고 단독정부 수립이 기정사실화 되면서 본격화되었다. 남로당은 1947년 7월 7일 당 중앙에 군사부를 설치하여 군대 공작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군사부는 군대 내의 남로당 조직을 관리했는데 전남도당위원회도 도당에 군사부를 설치하고 군대 내의 프랙션 조직과 초보적인 무장조직인 야산대를 관리했다. 그러나 여순사건 이후 유격투쟁이 본격화되기 전까지는 군사부(특수부)의 역할이 크지 않았다. 단선반대투쟁과 인공수립이라는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비폭력적인 당 활동이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남로당의 군 공작은 장교와 사병을 구분하여 진행했다. 장교는 중앙당에서, 사병은 각 도당에서 맡았다. 장교 선발과 교육배치 등 모든 인사권이 중앙집권적으로 일원화되어 있었고, 장교들은 근무지 이동이 빈발했기 때문에 지방당에서는 장교에 대한 공작을 진행할 수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포섭된 장교를 가급적 노출시키지 않고 집중적으로 관리하려는 중앙당의 방침도 하나의 이유였다. 반면 사병들은 연대의 모병 단위가 도였고 다른 부대로의 전출 또한 거의 없었기에 도 차원에서 관리가 가능했다. 남로당 내의 장교와 사병 세포 간에는 상호 관련이 없었고 양측을 매개하는 조직도 없었다. 또한 두 조직 간에는 성격 차이가 뚜렷했고, 같은 연대 내에 있으면서도 지도선이 달랐기에 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 여순 사건에서 봉기 가담자를 가려내기 위한 심사를 하는 모습.
 [칼 마이던스(1948. 11. 1.)/<LIFE>(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

14연대의 하사관그룹 중에는 지창수, 정낙현, 최철기, 김근배, 김정길 등이 남로당과 연결돼 있었다. 장교그룹에서는 김지회, 홍순석 등이 대표적이고 그 외에도 다수의 장교가 중당당과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들 장교그룹은 하사관․사병그룹과는 전혀 연결되어 있지 않았는데, 홍순석은 지창수에게 포섭되어 장교 중 유일하게 14연대 당부에 소속되어 있었다.

14연대의 조직 책임자는 지창수였다. 14연대 당조직은 도당과 직접 연계를 갖고 있었으므로 군당과 같은 수준의 단위로 취급되었다. 지창수, 홍순석, 정낙현, 김영만, 이영회 등 14연대 세포 책임자들은 계속 모임을 갖고 일반적인 정치정세와 사업방향 등을 토의했다. 홍순석 중위는 순천에 파견된 2개 중대를 지휘하는 선임장교였고, 지창수 상사는 정낙현과 함께 4연대 1기생 출신이었다. 지창수는 연대 인사계 선임하사였고, 정낙현은 정보계 선임하사였다. 그 때문에 이들은 14연대 상황을 손에 꿰고 있었다. 김지회는 중앙당이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원이라는 사실을 몰랐으나 남로당 계열과 호의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14연대의 남로당 조직은 다른 연대에 비해 강한 편이 아니었지만, 병사들 사이에서 경찰에 대한 반감이 거셌다. 병사들의 이런 성향 때문에 지창수 등이 선동했을 때 병사들이 충동적으로 이끌려들어 대거 봉기에 가담하게 된다. 연대에는 남로당계 외에도 ‘혁명의용군 사건’(주10)으로 구속되는 연대장 오동기처럼 김구를 추종하는 민족주의계도 있었다.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 정부는 일본군․만주군 출신을 군부 요직에 기용하는 한편, 군부 내에서 김구 추종세력과 남로당 계열 등에 대한 숙군작업을 본격적으로 준비했다.(주11) 송호성 경비대 사령관과 로버츠 군사고문단장은 이 작업을 하우스만에게 맡겼는데, 하우스만은 정보부에 있던 리드 대위와 논의하여 백선엽을 국방경비대 정보담당자로 임명, 책임을 맡겼다. 백선엽은 은밀히 군부 내의 남로당계 파악 작업에 나섰고 1948년 여름 무렵에는 경비대 내의 남로당 하부조직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했다. 여순사건 발발 직전 제14연대에도 밀고자 고봉규가 제공한 정보에 따라 일부 세포조직이 파악되었고, 이들에 대한 체포가 임박한 상황이었다.(주12)

이런 상황에서 14연대가 제주도로 파병될 날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4.3봉기 후 5월 초 경비대와 무장대 사이에 협상이 진행되었으나 미군과 경찰의 방해로 무산되고 강경진압 정책이 채택되었다. 미군정의 강경진압에 무장대 또한 한라산 깊숙이 들어가 본격적인 유격투쟁을 준비했다. 남과 북에서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면서 남북 간 대결도 본격화되었고, 이승만 정권은 내부의 적으로 간주된 제주의 ‘봉기’세력을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한 준비를 착착 진행했다.

1948년 10월 11일 본격적인 제주도 토벌을 위해 제주도경비사령부가 설치되었다. 사령관에는 광주의 제5여단장 김상겸 대령이 겸직 발령되었다. 제주도경비사령부는 각 부대를 지휘할 뿐만 아니라 산하에 제주도경찰도 배치하여 통합 관리하도록 했다. 10월 초순 다시 시작된 유격대의 공격을 진압하기 위해 제주도에는 이미 파견돼 있는 9연대뿐만 아니라 6연대와 부산 5연대에서 각각 1개 대대씩과 해군함정이 증파될 예정이었다. 여기에 여수에 주둔하고 있는 14연대의 1개 대대까지 증파하여 본격적인 토벌작전을 전개하려 했다.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은 ‘해안선으로부터 5킬로미터 이외의 지점 및 산악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선포했다. 중산간 마을에 대한 초토화 작전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겠다는 공개적인 표명이었다. 이제 14연대는 제주도민을 상대로 한 동족상잔의 전쟁을 수행해야 할 처지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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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여기서 전남동부지역은 대체로 여수, 순천, 구례, 광양, 곡성, 보성, 고흥의 전라남도 7개 지역을 지칭한다.

2) 김득중, 『여순사건과 이승만 반공체제의 구축』,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4~25쪽

3) 김종성․박옥임, 「국가체제형성기의 민간인 학살과 국가폭력 : 여순사건을 중심으로」, 순천대, 『남도문화연구』제9집(2003); 김득중, “이승만 정부의 여순사건 대응과 민중의 피해”, 『여순사건 자료집』2(여수지역사회연구소, 1999) 참고

4) 김득중, 위의 논문, 33~34쪽

5) 김득중, 위의 논문, 36쪽

6) 14연대를 ‘국방경비대’로 부르지만 여순사건 당시 14연대는 ‘국군’ 소속이었다. 미군정은 1946년 1월 14일 ‘남조선국방경비대(국방경비대)를 창설했는데, 1946년 6월 15일 ’조선경비대‘와 ’조선해안경비대‘로 명칭을 변경하고 조직을 두 개로 분리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48년 9월 5일 ’조선경비대는 육군으로 개칭되었고, 조선경비대와 조선해안경비대는 국군으로 편입되었다. 이에 따라 여순사건 발발 당시 14연대는 ‘국군’ 소속이었다. 그러나 국군이 법적으로 정식으로 인정된 것은 1949년 11월 30일 제정된 국군조직법을 통해서였다. 14연대는 조선경비대 시절에 창설되어 이후 육군으로 개칭되었기에 ‘조선경비대’ 또는 ‘육군’으로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 여기서는 이러한 시기적인 복잡성을 고려하여 남조선국방경비대와 조선경비대를 통괄 지칭하는 ‘경비대’로 한다.

7) 제4연대에서는 군인들이 외출만하면 경찰에게 얻어맞고 들어왔다. 이에 제2중대장이었던 최홍희 참위는 대원들에게 신변 보호를 위해 태권도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최홍희는 가라데를 기본으로 하여 현재 통용되고 있는 태권도를 최초로 만든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최홍희는 1972년 유신체제에 반대하여 캐나다로 망명한 뒤 북한을 방문하는 등 친북인사가 되었고, 북한식 태권도를 정립, 보급했다. 최홍희는 2002년 평양에서 사망한 뒤 혁명열사릉에 묻혔다.

8) 김득중, 위의 논문, 41쪽

9) 김득중, 위의 논문, 42~43쪽

10) 미군정 경무부(경찰청) 수사국장 출신의 최능진, 여수 제14연대 연대장 오동기 소령, 서세충, 김진섭 등이 내란음모로 처벌받은 사건. 정부는 “미군정청 경무부 전 수사국장 최능진은 이승만을 낙선시키려고 했지만 실패하자 서세충․김진섭 등과 정부 전복 쿠데타를 음모했으며, 제14연대장 오동기 소령을 통해 국군소속의 젊은 장교를 중심으로 혁명의용군을 조직하여 대한민국 정부 전복을 꾀하였으나 체포되었다”고 발표했다. 1949년 1월 21일 제1회 공판에서 검찰은 최고책임자는 서세충이며, 재정책임자는 최능진, 경비대의 최고책임자는 오동기, 경비대 외곽은 김진섭, 강원도 원주부대 동원책임자는 안종옥 외 3명, 춘천부대 동원책임자는 박규일 외 2명이라고 주장했다. 재판 결과 최고책임자 서세충 무죄, 최능진 5년, 김진섭 6년, 오동기 육군소령 10년, 안종옥 이등병 5년, 박규일 일등병 3년, 김봉수 일등병 3년, 김용간 일등병 2년, 일등병 오필주 1년 등의 징역형이 선고되었다. 이 사건은 이승만에 밉보인 최능진과 국군 내에서 김구 계열의 민족주의자였던 오동기 소령을 제거하기 위해 조작된 사건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판단이다. 최능진과 오동기는 모두 항일민족운동에 가담했던 민족주의자들이었다. 경찰과 우익, 이승만 정부에서는 이 사건을 여순사건과 연계시켜 김구․민족주의세력에 대한 ‘마녀사냥’으로, 민중에 대한 ‘빨갱이사냥’으로 이용했으나 여순사건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11) 숙군 작업은 특히 제주4.3사건에서 박진경 연대장 살해사건 후 본격화되었다. 4.3사건에서 무장대와 협상을 통해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 했던 김익렬 연대장이 해임된 뒤 취임한 새로운 연대장 박진경은 “우리나라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며 강경진압을 밀어붙였다. 그런데 박진경 중령은 강경진압에 불만을 품은 제9연대 제3중대장 문상길 중위의 지시를 받은 손선호 하사에게 암살되었다. 이 사건으로 문상길, 신상우, 손선호, 배경용 등 4명이 군법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9월 23일 총살되었으며, 9연대에 대한 숙군작업이 강경하게 진행되었다. 박진경 암살사건을 계기로 미군정과 국방경비대 지휘부는 좌익과 민족주의(김구)계에 대한 숙군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12) 김득중, 위의 논문, 48~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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