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연재를 시작하며 

과거사 청산은 근대 국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있었던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으로 세계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과거사 청산은 민주화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일로써 왜곡․은폐된 과거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사회정의를 세우는 일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국가 권력에 의해 왜곡되고 은폐된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바로잡기 위한 과거사 청산 노력이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통해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명박․박근혜 정부 아래서 이러한 역사적 진실을 부정하고 왜곡하여 과거로 되돌리려는 시도가 계속되면서 그 성과가 희미해지고 있다. 

역사는 진실을 밝혔다고 해서 끝나서는 의미가 없다. 역사의 진실이 영원히 기억되지 않으면 역사의 정의는 없다. 진실은 공식 기록으로 표기되고, 교육되고, 기억되어야 한다. 역사를 지키기 위해서는 망각과의 투쟁이 필요하다. 한국 현대사에서 국가 권력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과 테러, 의문사, 고문에 의한 조작 등과 관련된 사건들을 되짚어 봄으로써 역사의 진실을 망각하지 않고 기억하고자 한다. / 필자 주

 

총파업투쟁과 군중시위가 인민항쟁으로

▲ 10월 민중항쟁 당시의 대구․경북지역 상황(출처: 정해구, 위의 논문, 79쪽.

10월 인민항쟁은 대구에서 시작된다. 총파업투쟁은 대구에서 10월 1일과 2일 동안 폭발하면서 인민항쟁의 성격으로 확대되었다. 대구항쟁은 해방 이후 대구에서 응축된 모순들이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었다. 식량정책을 비롯한 미군정의 정책적 실패, 전재민의 증가로 인한 불안정한 사회 상황, 친일경찰에 대한 원한과 미군정에 대한 반감이 조직적이고 강력했던 대구의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이 상대적으로 탄압강도가 약했던 미군정과 경찰의 저지력을 뚫으면서 활화산처럼 폭발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던 것이다.

대구에서 9월 총파업의 연장선 위에서 시작된 군중시위는 경찰의 발포로 인해 사망자가 발생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발전했다. 대구에서 군중의 시위가 ‘폭동적 상황’의 대규모 봉기와 항쟁으로 발전해가는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46년 10월 1일

- 아침부터 노동자 수천 명이 대구역과 대구공회당 인근 대구투위 본부 사무실 주위에 집결하여 경찰 100여 명과 대치했다. 이날 오전 부녀자와 어린이 등 시민 1천여 명도 대구부청 앞에서 ‘쌀을 달라’며 시위를 벌이다가 오후에는 도청으로 장소를 옮겨 시위를 계속했다. 시민들의 시위는 9월 총파업의 연장선 위에서 전개됐지만 한편으로는 그동안 쌓인 불만을 표출한 지극히 자연스런 과정이었다.

- 오후 1시경 경찰당국이 30여 명의 경찰을 파견하여 시투 간부들과 군중 해산 문제를 협상하던 중 약 1만 5천 명으로 불어난 군중들이 경찰을 포위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권영석 경찰청장이 무장경찰 60명을 대동하고 현장에 나타나 해산명령을 내렸으나 군중들은 해산을 거부했다.
- 오후 6시경 대구역 앞에서 운수경찰과 운수노동자들의 충돌이 일어나자 대구경찰서 수사주임과 경찰 3명이 출동했다. 이때 군중들이 이들을 구타하여 수사주임과 경찰 3명이 중상을 입는 사태가 발생하자, 오후 7시경 경찰이 발포하여 노동자가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다음날 10월 2일

- 오전 8시부터 대구역 앞에서 수천 명의 군중과 무장경찰이 대치했다. 이때 최무학 등 대구의전 학생을 중심으로 한 학생시위대는 시신 한 구를 들것에 메고 전날 경찰의 총격으로 숨진 사람의 것이라고 외치며 시위를 벌이면서 대구경찰서 앞으로 나아갔다.

- 오전 10시경 대구경찰서 앞에 학생과 교수, 노동자, 시민 1만 여명이 모였다. 이에 권영석 제5관구 경찰청장과 미국인 경찰청장이 연설을 통해 시위군중을 해산하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미군정 경찰부장 프레이저는 이성옥 대구경찰서장에게 무력으로 시위군중을 해산할 것을 명령했으나 이성옥 서장은 이를 듣지 않고 총기를 무기고에 넣고 경찰 병력을 대구경찰서 인근에 있던 본정소학교(지금의 종로초등학교)로 철수시켰다. 시위대는 무장경찰 100여 명을 무장해제 시켰으며, 일부는 대구경찰서로 난입해 유치장 문을 열고 수감자 100여 명을 석방했다. 대구경찰서가 점거되고 난 다음 학생대표단은 미군정을 상대로 “구금자 석방, 경찰의 무장해제, 대중 발포와 폭력진압 중지” 등의 요구사항을 제시했으며, 미군정 측 담당자가 이를 수용하자 학교로 돌아갔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최문식, 이재복 등 좌익 지도자 중 일부는 시민들의 자제를 요청하는 방송을 하기도 했다.

- 오후 미군의 명령을 받은 경찰 150명(또는 특경대 200여 명)이 다수의 군중이 모인 대구역 인근(대구투위 본부)에 출동하여 단상에서 선동하는 여공을 사살하고 그 뒤를 이어 나오는 노동자도 사살했다. 이에 격분한 군중과 경찰이 충돌하여 경찰이 발포하여 민간인 17명(또는 18명)과 경찰 4명이 사망했다. 이 무렵 대구 시내 도처에서 군중들이 봉기하여 지서와 파출소를 점거했다. 일부 군중은 경찰을 살해하고 경찰ㆍ관리ㆍ부호의 집을 공격했으며 한편에서는 관리ㆍ부호의 집에서 몰수한 식량과 재산을 빈민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 오후 3시경 미전술군이 투입되었다. 이때 전차(M-7 mount) 4대와 기관총부대가 출동하여 군중에게 해산하라고 명령했으며 학생대표와 미군이 협상을 통해 군중 해산에 동의했다.

- 오후 5시경 미군정이 계엄령을 선포하여 시위를 진압하면서 대구시내의 질서는 회복되기 시작했으나 그 불똥은 대구 주변의 군으로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걷잡을 수 없게 발전하기 시작했다.(주1)

미군의 출동과 계엄령 선포로 대구시내의 질서는 회복되었으나 폭발하기 시작한 인민들의 항쟁은 대구 주변으로 확산되었다. 풍선 효과라고 할 수 있었다. 대중의 분노는 출구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확산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구에서 밀려난 일부 군중은 화물자동차를 비롯하여 개인소유의 자동차를 탈취하여 대구 주변의 군 지역으로 진출했고, 이를 통해 항쟁은 경북 전체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경찰의 발포에 격분한 민중의 항쟁으로

대구항쟁에서는 학생들의 가세가 10월 2일 경찰과 파업단 사이의 팽팽한 대치관계를 변화시켰다. 해방 직후부터 동맹휴학 등을 통해 조직력을 확대해온 학생들은 부족한 경찰의 힘을 뚫고 경찰서를 접수함으로써 대구의 상황을 예상치도 못한 ‘폭동적’ 상황으로 급진전시켰다. 이에 미군정은 전술군 투입과 계엄령 선포를 통해 대구의 질서를 회복했지만 이는 항쟁을 대구 주변으로 몰아내는 역할을 했다.

▲ 1946.10.2. 대구시위 피살자 사진. [사진 출처: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소(『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조사보고서』, 76쪽)]

대구에서 폭발적인 항쟁이 전개되자 행정관리와 금융기관 직원, 회사원 등 중간계층도 잠시지만 호응하는 모습을 취했다. 특히 대구시의사회와 의대교수들은 동포에 발포하는 경관부상자의 치료를 거부한다는 경고문을 발표하거나 파업기금을 내놓는 등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이처럼 중간계층까지 동조하는 모습을 보인 점에서 대구항쟁은 전민봉기, 전민항쟁의 성격을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은 노동자, 농민, 학생, 일반시민, 다수의 군정관리, 의사, 심지어 일부 경찰까지 참여하거나 긍정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미군정 자체, 친일·친미세력, 일부 자산계급을 제외하고는 전민중이 참여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대구항쟁은 ‘소수의 선동에 의한 폭동’과는 거리가 먼 ‘전체 민중이 참여한 민중봉기, 인민항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대구항쟁에 참여한 민중의 태도와 요구를 통해서도 항쟁의 성격을 확인할 수 있다. 항쟁에 참여한 민중의 요구는 계층에 따라 다양하고 중첩적이었다. 부녀자들은 쌀을 요구하며 대구부(시)청에 난입했고, 노동자는 파업과 조직적인 행동을 통해 임금과 수당의 인상, 쌀배급 증대, 식량문제의 근본적 해결 등 일상적인 생활난을 호소했으며, 학생들은 경찰의 발포 금지와 무장해제, 애국자 석방 등을 요구하며 선동과 조직적인 행동으로 경찰서를 접수했다. 또한 일반시민들은 이러한 모든 주장에 동조하며 시위에 참여했고, 다수의 행정관리들은 미군정에 대한 협조를 거부했으며, 의사들은 경찰 치료를 거부했다. 일부 사람들은 경찰을 직접적으로 공격하기도 했다.

▲ 1946.10.2. 대구시위 피살자 사진. [사진 출처: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소]

이와 같은 각계각층의 다양한 행동양태를 통해서 대구항쟁의 성격이 상당히 복합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거기에는 친일파 처단, 미군정의 반동화정책에 대한 저항, 미군정의 식량정책에 대한 불만, 경제적 불만과 사회적 혼란에 대한 반감, 경찰탄압에 대한 저항 등 복합적인 요인들이 뒤엉켜 있었다. 그럼에도 대구항쟁에서는 경북 군 지역의 항쟁과 달리 인민정권 수립과 인민위원회에 의한 행정·치안 확보, 이를 위한 행정기관과 경찰서 접수 등의 시도는 없었다. 대구경찰서 접수는 경찰의 무력탄압에 대한 항쟁의 성격을 넘어서지 않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대구에서 민중의 주된 공격이 경찰에 향한 것은 이유가 분명했다. 경찰은 탄압과 지배의 표상이었던 것이다. 일제시기의 일제의 앞잡이로, 미군정 아래서는 미군정의 앞잡이로 행동함으로써 민중의 원성의 대상이 되었다. 그것은 일제시기와 해방 후 미군정 아래서 중복된 ‘이중적인 원한’이었다.(주2) 민중이 볼 때 모든 지배와 탄압의 직접적인 수행자는 바로 경찰이었고, 따라서 민중의 공격 표적이 경찰을 향한 것은 너무도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조직적 성격과 자발적 폭동성의 혼재

미전술군의 투입과 함께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대구 시내는 치안을 확보했다. 하지만 대구에서 밀려난 일부 군중은 대구시 주변의 군으로 향했고, 항쟁은 경북의 군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대구와 인접한 몇몇 군에서는 10월2일부터 군중이 들고 일어났다. 미군이 출동하자 대구를 탈출한 군중 일부가 화물차량을 빼앗아 타고 대구 외곽지역으로 달려갔기 때문이다. 군에서는 당이 아니라 인민위원회나 농민조합, 민청이 중심이 되어 시위가 전개됐다. 정치적 중심이 중앙에서는 ‘당’ 중심으로, 대구에서는 ‘인민위원회’나 ‘민전’ 중심으로, 군에서는 ‘인민위원회’ 중심으로 이뤄졌다. 따라서 지방일수록 ‘통합적인’ 조직형태를 지녔다.(주3)

그런데 경북지역에서는 경찰과 마찰이 잦았던 곳, 하곡 수집 문제로 군 당국과 농민조합 간에 대립이 심한 곳, 지주나 친일토호의 뿌리가 깊어 반감이 쌓여 주민의 반발의식이 강한 곳에서 격렬하고 잔혹한 살상이 빚어졌다. 경북 도내에서 민중과 경찰 사이에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곳은 영천군과 칠곡군이었다.

미군의 G-2(정보기관) 주간요약 보고서에 따르면 영천군에서는 3일 아침 2,000여 명의 시위군중이 경찰서를 습격하고 경찰서장과 경찰관 15명을 살해했다. 이밖에도 경찰관 46명이 실종됐는데, 이 중 적어도 40명은 시위군중이 납치했다. 시위군중도 15명이 사살되고 부상자가 다수 발생하는 등 피해가 커져갔다. 그러나 영천의 군중들은 조직적이거나 체계적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과격하고 잔혹한 행동이 많이 벌어졌다.

▲ 1960년, 달성군 가창면 민간인 학살 사건으로 숨진 대구지구 희생자의 공동분묘 앞에서 상복 차림의 유가족들이 묘 표지를 세운 뒤 오열하고 있다(출처: 유나인뉴스).

시위군중은 대구에서 지원경찰 100명이 내려오기까지 만 이틀 동안 영천 일원을 지배했다. 그동안 경찰서와 우편국을 전소시키고 경찰무기고, 신한공사, 법원, 그리고 적어도 100여 채의 건물을 포함한 많은 공공기관과 가옥을 불태웠다. 이 소란 속에 영천군수를 비롯해 면직원과 관리 19명이 살해당했고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특히 영천군수는 시위군중에 의해 생화장에 처해졌다.(주4) 대중의 분노가 얼마나 거셌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군중심리도 작용했을 것이다.

영천군과 함께 잔혹한 보복행위가 벌어진 곳은 칠곡군이었다. G-2 보고서에 따르면 10월 2일 오후 9시 소총과 수류탄, 낫과 창으로 무장한 1,000여 명이 집결하기 시작해 3일 새벽 왜관경찰서를 습격했다. 경찰서를 점령한 군중은 왜관경찰서장과 수사주임을 낫과 도끼로 난자해 참살했다. 또 약목에서는 군중이 약목지서를 습격해 3명의 경찰관을 지서 기둥에 결박해놓고 낫과 도끼로 살해하는 등 잔혹행위가 유독 심했다. 지방 주민들이 주축인 시위대는 3일 오전 2시에서 3시 사이에 칠곡, 안동, 석적, 약목, 북삼 등의 경찰지서를 습격, 파괴하고 그곳의 경찰관, 관공리, 부유층 소유 가옥 50여 채를 파괴했다. 이 와중에 시위대 7명도 사망했다.

선산군은 대구에서 선동자가 내려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조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선산에서 군중을 이끈 것은 민전간부 김정수와 박상희(朴相熙)였다. 박상희는 박정희의 셋째형으로 일제 강점기부터 항일운동을 해온 선산의 애국지사였다. 그는 신간회에도 간여했고, 조선일보 구미지국장, 조선중앙일보 대구지국 기자 등으로 활동했다.

10월3일 오전 9시 당시 선산군민전사무국장 겸 인민위원회 내정부장인 박상희가 이끄는 2,000여 명의 군중은 구미경찰서를 습격하고 “모든 기능을 인민위원회로 이양하라”고 요구했다. 이들은 경찰서장 등 경찰관 16명을 유치장에 감금했으며, 구미 면사무소를 습격해 양곡 135가마를 탈취했다. 이들은 서장과 서원의 가옥은 물론 선산군 내 요인의 집을 모조리 파괴했다. 무기를 탈취한 40여 명의 군중은 선산군청도 습격했다. 6일 오전 지원경찰이 들이닥치자 박상희는 도주하다가 사살당했다.

경북도에서는 오지의 산악지대인 영양군과 청송군, 그리고 안동군과 동해의 고도인 울릉도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군에서 조직적인 봉기나 지역단위의 개별적인 저항이 일어났다. 그런데 경찰과 우익의 선제적 행동으로 안동에서는 용의자만 82명이 검거됐을 뿐 아무런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다. 해방 후 좌익도 강했지만 우익과 경찰도 강했던 안동군에서는 10월 인민항쟁 이전에 좌우갈등과 경찰과의 충돌로 많은 좌익들이 검거된 상태였기 때문에 10월 항쟁 와중에도 조용하게 넘어갔던 것이다.

경북도를 통틀어 볼 때 대구부(시), 달성군, 성주군, 칠곡군, 영천군, 의성군, 선산군, 군위군, 경주군 등 9개 부·군은 시위 군중이 한때 경찰서를 점령할 정도로 시위가 격렬했다. 평소 좌익세가 드셌을 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불안과 미군정의 인사정책, 하곡수집 정책 등 당면한 실정(失政)으로 주민의 불만이 극도에 달해 크고 작은 마찰이 잦았던 곳이다. 또 대구와 교통이 원활하고 왕래가 활발해 대구의 유혈상쟁이 몇 시간 안 돼 곧바로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피해도 컸다.

대구와 경북에서의 항쟁은 조직적인 민중항쟁적 성격과 비조직적이고 자연발생적인 폭동성이 혼합되어 나타났다. 전체적으로 10월 2일 대구경찰서 접수 이전까지의 대구 투쟁과 예천군 이북 지역의 항쟁은 비교적 ‘조직적’이었다. 반면, 10월 2일 대구경찰서 접수 이후의 대구와 경북 남부지역인 대구주변 지역에서는 ‘폭동적 성격’을 나타냈다. 북부에서는 좌익세력의 조직성에 영향을 받았으며 남북에서는 사회경제적인 불안정과 대구로부터의 항쟁의 신속한 파급과 선동에 영향을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대구에서는 양자의 영향이 함께 작용했다.(주5) G-2 보고서에 따르면, 경북도의 총 피해액은 4억원, 경찰측 인명피해는 보안대(경찰보조원 및 마을 자경대원)를 포함해 사망 80명, 행방불명 및 납치가 145명, 부상이 96명으로 집계됐다. G-2 보고서는 시위대의 피해에 대해서는 사망 48명, 부상 63명, 체포 1,503명으로 집계했다. 대부분 습격을 받은 관리이거나 우익인사인 민간인 사상자수는 사망 24명, 부상 41명, 납치 21명으로 집계됐다.

이외에도 또 다른 자료들은 각기 다른 수치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아래 표와 같다. 그러나 이 통계들은 정확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 이유는 당시 사건 관련자들이 보복이 두려워 신고를 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표> 각종 자료에 제시된 대구10월사건 관련 민간인 피해규모

 

사망

부상

체포

비고

Thomas W. Herren papers

(G-2 Summay of Kyongsang)(주6)

88명

55명

33명

1946.12.1.현재

10.1사건대책위원회(주7)

73명

129명

 

1946.10.20.현재

G-2 보고서(주8)

48명

63명

 

 

조병옥의 경위보고서(주9)

17명

25명

635명

1946.10.2.현재

자료 출처: 경찰청과거사위 보고서(2006) 등(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04』, 112쪽)


한편 G-2 보고서에 따르면, 소총 204자루, 권총 11자루, 탄약 2,688발이 탈취 당했으나 회수된 것은 소총 118자루, 권총 3자루, 탄약 1,035발에 지나지 않았다. 이때 회수되지 못한 무기가 뒷날 빨치산의 전신인 야산대의 무기로 탈바꿈하게 된다. 동료들의 참극을 목격한 경찰과 우익청년들의 반격은 가혹한 앙갚음으로 나타났다.

경찰의 보복은 우선 주모자와 그 용의자들에 대한 대량검거선풍을 몰고 왔다. 대구에 계엄령이 내려진 10월2일 밤부터 11월말 사이에 경북도에서만 총 7,400명, 대구와 그 주변지역에서 2,250명의 좌익 정당 및 사회단체 간부, 학생, 노동자, 농민, 도시하층민, 부랑자들이 검거됐다. 이 중 6,580명은 1947년 1월말까지 석방됐으나 석방되기까지 경찰의 극심한 고문으로 초죽음이 됐다. 나머지 피검자 중 280명은 군사재판을 거쳐 형이 확정됐고 그 밖에 640여 명은 조사 중이거나 재판에 계류 중이었다.(주10)

군정재판은 10월12일부터 대구경찰서에서 열렸다. 일반 군정재판의 경우 선고할 수 있는 최고 형량이 징역 5년이었으므로 특별군정재판을 열어 최고 사형을 선고할 수 있도록 했다. 사형 선고는 경찰관 사상자를 많이 낸 화원, 하빈, 영천 사건 주동자들에게 내려졌다. 이들은 이듬해 6월까지 길고 지루한 재판 끝에 대부분 무기형으로 감형됐다. 그러나 계엄포고령에 따라 적법한 절차에 따라 체포, 처벌받은 사람보다도 경찰과 청년단 등에게 사적으로 보복을 당한 경우가 더 많았다.

경찰의 보복은 주모자나 적극 가담자 외에 이름 없는 민초들에게도 가해졌다. 경북 칠곡군 인동면 신동에서는 고문경찰의 손에 농민 한 사람이 맞아죽는 일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빙산의 일각이었을 뿐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변사로 위장 처리된 고문사와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시위대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경찰이나 미군이 쏜 총에 의해 무고한 사람들이 살상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 <한겨레> 1월 22일자. ‘대구10월사건’ 유족들에 대한 법원의 국가배상 판결 결정을 다루고 있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1946년 10월 항쟁 가담혐의로 대구경찰서에 연행되었다가 석방된 바 있는 대구상업중학교 학생 조명해(趙明海)는 1947년 7월 20일 학교에 등교하던 중 사찰계 형사로 추정되는 두 사람에게 강제연행된 뒤 행방불명되었다. 그 뒤 조명해의 시신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는 경찰에 연행된 고문으로 숨졌거나 총살되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때 나이 겨우 14세에 불과했다.(주11)

또 칠곡지역에 살던 김제억은 시위에도 가담하지 않았는데 거리에서 검문경찰에 강제연행되었다가 석방돼 나오던 중 충남 경찰부대원에게 사살되었다. 당시 김제억은 칠곡 왜관읍에서 타면공장과 음식점을 경영했고 상당한 토지를 보유하고 있던 지주로 시위가 벌어지자 시위군중에게 피해를 입을까봐 두려워 피신했다가 봉기가 진압됐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들의 안위가 걱정돼서 돌아오는 길에 이런 일을 당한 것이다. 상업에 종사하던 박치도는 시위군중에 살해당한 칠곡경찰서장의 장례식을 치른 경찰이 마을로 총을 쏘며 들어오자 놀라서 집에서 뛰쳐나가다가 경찰에 의해 사살되었다.(주12) 

또 시위군중의 폭력행동이 과격했던 칠곡군 약목면 동안동에서는 김우도, 김희문, 최정수 등 주민 11명이 토벌을 나온 충남경찰부대에 의해 현장에서 사살되었다. 대대병력으로 추정되는 경찰이 마을을 포위하며 들어오자 여성과 노약자는 집안에 숨고 남성들은 미처 마을을 벗어나지 못해 논으로 달려가 수확을 앞둔 논의 벼 사이에 숨었는데, 이때 경찰은 논을 포위하고 숨어있던 사람들에게 일어서면 살려준다고 명령한 뒤 사살했던 것이다. 경찰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일어서지 않았던 사람들은 살아남았다.(주13) 

영천군의 방달도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있다가 총을 쏘며 마을로 들어와 수색을 하던 경찰부대에 의해 일방적으로 사살되었다. 이처럼 시위와 무관하게 지내던 주민들도 다수 살해되었지만 시위 진압 과정에서 체포된 사람들에 대해서도 경찰이 숲의 공터 같은 곳에서 아무런 절차도 없이 그냥 총살한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항쟁이 경북 도내의 군 지역으로 확산된 뒤 충남북과 강원도 등에서 경찰부대가 증원되었고, 이들은 토벌을 위해 수시로 마을에 들이닥쳐 젊은 남자들을 연행해 갔고, 구타와 고문은 물론이고 경우에 따라서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총살하기도 했다.

“1947년 가을 외지 경찰(전라도경찰) 30~40명이 일개 소대처럼 뭉쳐서 마을에 들어와 집집마다 뒤진 뒤 남자들을 도로 앞에 끌어내어 꿇어앉혀놓고 몽둥이로 팼다. 그리고 삼촌 최진격과 김수암, 박민옥, 이민우 등 5~6명을 지서로 연행했다. 끌려간 사람들은 주로 지역유지들이었는데 경찰이 입수한 ‘원명부’(남로당에서 가입 대상자를 지목하여 적은 명부)에 이름이 올라 있다는 이유로 잡혀가 사살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들이 연행된 뒤 가족들이 지서로 갔으나 낯선 외지 경찰들이 지서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가족들은 근처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했다. 삼촌이 연행된 3일 후에 동도리 사람들에게서 연락이 와 대구뜰 골짜기로 가보니 5~6명을 둘씩 끈으로 연결하여 묶어놓고 총살했더라. 시신은 총 맞고 피를 확 쏟아서 하얗기는 했지만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라 신원을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삼촌의 시신을 찾아와 매장했고 다른 사람들의 시신도 가족들이 수습했다.”(주14)

청통면 신학동에는 1947년 10월 27일 외지 경찰부대가 토벌을 들어와 마을주민들이 봉화산으로 피신했는데, 경찰은 피신하던 사람들을 향해 총을 무차별 난사하여 마을주민 이만수(李萬洙, 1893)가 사살되었고 그의 시신은 가족이 수습했다. 이는 참고인 김석동(1929, 청통면 서기), 이중원(1926, 이만수의 아들), 이재영(1935, 이만수의 아들)이 진술했는데, 특히 이중원은 “아버지의 사살 소식을 듣고 가보니 가슴에 실탄을 맞아서 이미 죽은 상태였으므로 시신의 가슴에 구멍 난 부분을 막아서 업고 와서 장례를 지냈다”고 진술했다. 또한, 경찰 참고인 전○○(1924, 당시 청통지서 경찰)도 “대구10월사건이 났을 때 정부에서 충남부대를 보냈다. 충남부대원들은, 사상자도 아니고 공비도 아닌데 그냥 총이 겁이 나서 도망가는 사람들을 쏘아 죽이기도 했다. 이 마을에도 당시 봉화산에서 그렇게 죽은 사람이 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진술했다.(주15)

“고경면 논실동, 덕정동, 파계동은 산간 부락으로 대구10월사건이 일어난 뒤 군경이 토벌을 위해 마을에 자주 들어왔다. 논실동의 참고인 김호연(1932), 최남주(1930)와 덕정동의 참고인 최채규(1934)의 진술에 의하면, 당시 이 마을들에서는 청년들이 군경의 진압을 피해 입산하거나 도시로 이주하자 토벌부대가 수시로 와서 주민들을 구타하거나 마을 앞 못물에 넣는 등 고문을 했다. 그러던 중 덕정동 주민 박방우(1928)가 대구10월사건 관련자라는 이유로 1947년 불상일에 경찰에게 강제연행된 뒤 마을 인근에서 사살되었다. 또한, 논실동 주민 김정출(1932)과 박위준(1931)은 1948년 5월경 벼락부대 여러 명에게 끌려가 논실리 당산나무 밑에서 주민들이 모인 자리에서 공개 사살되었고 그들의 시신은 가족이 수습했다. 덕정동의 이상두(당시 30대)는 1948년 여름 마을에 들어온 벼락부대(서북청년단)에게 강제연행된 뒤 불상지에서 살해되었으며, 당시 벼락부대는 이상두의 집에 불을 지르고 그의 아내와 마을주민 여러 명도 살해하려 했는데 구장이었던 최용수가 벼락부대에게 소를 잡아 대접하고 설득하여 주민들의 목숨을 구했다.”(주16)

10월 항쟁 이후 계엄령이 선포되고 외부에서 경찰력이 증원되고 우익청년단까지 파견되어 진압에 나서면서 폭력과 고문은 일상사로 자행되었다. 즉결처형과 함께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에 대한 무차별적인 총격 등 보복행위가 심각한 범죄수준으로 자행되었다. 부상경관을 박대했다고 여겨지는 대구시내의 의사들에게도 보복이 가해졌다. 경찰뿐 아니라 독촉국민회, 독촉청년연맹, 서북청년회 등 우익단체도 조직적으로 보복을 자행했다. 지방에 따라 일부 우익청년단체는 좌익관계자를 직접 체포 혹은 구타하는 사형(私刑)을 감행하고 심지어 좌익관계자의 가재(家財)를 파괴하는 테러를 일삼기도 했다.

▲ "폭동이 아니라 항쟁이었다"며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2006년 당시의 이일재(82) 선생. [사진. <평화뉴스> 2006. 10. 1]

 

▲ <대구 10월 항쟁 64주년 희생자 추모제>(2010.10.1 대구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사진. 평화뉴스]

10월 항쟁 관련자 중 다수는 미군정이 발포한 포고령2호위반 등의 혐의로 미군정이 설치한 군정재판과 특별군정재판에 회부되어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법적인 처벌과 관계없이 진압과 토벌과정에서 사건 관련자뿐만 아니라 사건과 전혀 관계없는 다수의 민간인과 비교전, 비무장 상태에서 적법한 재판절차도 없이 불법적으로 살해된 사실이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를 통해서 확인되었다. 10월 항쟁의 전개 과정에서 경찰도 초기에 피해가 컸기에 그에 대한 보복감정이 크게 작용한 것이라 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국가권력의 불법행위라는 사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10월 항쟁의 진압과 수습 과정에서 자행된 이 같은 경찰과 우익의 보복 폭력과 살상 행위는 그 후 여순사건, 4.3제주사건 등에서 그대로 재현, 증폭되면서 한반도를 피의 바다로 만드는 전주곡이자 시발점이 되었다. 또한 해방 후 최초의 동족상잔이자 좌우의 유혈충돌이었던 ‘10월 항쟁 사건’은 4년 후 다시 대규모 학살로 직접 이어졌다. ‘10월 사건’에 연루돼 형무소나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던 사람들은 1950년 6·25 전쟁을 전후해서 달성군 가창골에서, 경산의 코발트광산에서, 수감 중인 형무소에서 집단학살되었던 것이다.(주17) 수감자들은 경우에 따라서는 경찰청 담벽에 세워져 총살되어 가마니에 덮인 시체로 변했다. 이때 죽은 사람이 수천 명에 달했으니 10월 항쟁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의 첫 총성을 울린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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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정해구, 위의 논문, 28∼32쪽; 진실화해위원회, 「대구10월사건 관련 민간인 희생 사건」,『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04』, 2010, 67∼68쪽 참고.

2) 정해구, 위의 논문, 36쪽.

3) 정해구, 위의 논문, 38쪽.

4) 전현수, “좌우익 대결에서 친일경찰 항쟁으로 이어진 대구10.1사건”, <신동아> 558호(2006년 3월), 320~333쪽.

5) 정해구, 위의 논문, 83쪽.

6) 같은 통계에 경찰 및 국방경비대 측 피해자 수는 사망 82명, 부상 129명, 실종 및 포로 151명으로 집계되어 있다.(Thomas W. Herren papers, 앞의 글, 1946)

7) 같은 통계에 관리 측 피해자 수는 사망자 63명, 부상자 133명으로 집계되어 있다.(정해구, 앞의 책, 1988, 156쪽)

8) 같은 통계에 경찰 측 피해자 수는 사망자 80명, 부상자 96명, 행방불명 및 납치 145명. 우익인사 사망자 24명, 부상자 41명, 행방불명 및 납치 21명으로 집계되어 있다. [경찰청과거사위(2006), 42쪽; 대구mbc 보도자료, 2005 등.]

9) 같은 통계에 경찰 측 피해자 수는 사망자 33명, 중경상자 135명, 경찰관 가족 사망자 1명, 부상자 33명으로 집계되어 있다.[경찰청과거사위(2006), 42쪽]

10) 전현수, 위의 글.

11) 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77∼78쪽.

12)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80~81쪽.

13)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83쪽.

14)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91쪽.

15)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92쪽.

16)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93쪽.

17) 이런 집단학살극은 대구․경북만 아니라 대전형무소 등 전국에서 벌어졌다. 형무소재소자학살사건은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사건과 함께 대표적인 국가권력의 범죄행위, 조직적 민간인 집단학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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