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키나와 전투를 형상화한 마루키 부부의 작품. 사키마 미술관에 전시돼있다. [사진-오삼언 통신원]

가혹한 운명.
오키나와 사람들의 역사를 달리 뭐라 부를 수 있을까.

사령관 우지시마 미츠루 중장의 항복 선언 없는 할복 자살 탓에 언제 끝날 지 모를 오키나와 전투(전쟁)도 결국 끝이 났다. 그러나 오키나와에 평화는 오지 않았다.
1952년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되면서 일본 본토는 독립했지만 일본 정부가 오키나와를 미군에 넘기면서 미군 강점이 시작된 것이다. 일본에 귀속되는 1972년까지 20년간이었다.

이에 대해 야마시로 평화운동센터 사무국장은 이렇게 말한다.
“(4월 28일)이날은 일본이 독립했기 때문에 주권 회복을 했다는 의미겠지만, 오키나와의 140만 주민들은 미군에게 넘겨졌습니다. 여러분의 나라에서 국가 일부가 누군가에게 점령당하고, 자신들이 살아남았다고 해서 ‘만세’라고 한다면 그 내각은 붕괴할 것입니다.” -마시로 평화운동센터 사무국장 (2013. 9. 5. KBS 1TV ‘국경의 섬, 오키나와’)

▲ 멀리 후텐마 미군기지가 보인다. [사진-오삼언 통신원]

오키나와 전투가 산천의 모습을 뒤바꾸었듯이 20년간 미군정도 오키나와의 모습을 또다시 바꾸었다. 오키나와 땅을 미 군사기지가 뒤덮은 까닭이다. 오키나와는 군사기지화돼갔다. 오키나와의 미군기지는 현재 일본에 주둔한 전체 미군기지의 75%에 달한다. 오키나와 전체 면적의 20%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미군기지 반대 등을 외치며 또다시 싸우고 있다.

조선인 희생자 기리는 ‘청구의 탑’, 무엇을 추모하나

오키나와에서 이튿날. 금방이라도 비올 듯한 흐린 날씨, 한겨울인 1월 26일에도 얇은 겉옷 하나를 챙기면 충분했다.

기노완시 가가즈공원(가카즈공원) 공원에 마련된 전망대에서 후텐마 기지를 멀리서 볼 수 있었다. 망원경도 설치돼있는데 흐린 날이라서 덕을 보진 못했다. 이 곳에서 후텐마 기지를 볼 수 있었지만 후텐마 기지를 제대로 보려면 사키마 미술관 옥상에서 봐야한다.

▲ 가가즈 공원에서 토치카를 볼 수 있다. [사진-오삼언 통신원]

 

▲ 토치카의 다른 면 모습. 사람이 들어갈 구멍과 폭격 등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사진-오삼언 통신원]

가가즈 공원엔 오키나와 전투 당시의 토치카(철근 콘크리트 따위로 견고하게 구축한 진지)도 그대로 남아있었다. 또 오키나와전투(전쟁)에 참가한 조선인 희생자를 추모하는 청구(靑邱)의 탑이 있다.

1971년 일본민주동지회라는 단체가 세운 이 탑을 어떻게 봐야할까. 쉴틈없이 (사)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평화기행 일행에게 강의를 해주고 있는 서 승 교수는 전날 방문한 평화기념공원의 ‘위령탑’(지난 연재 링크)과 비슷하다고 설명했다. 전쟁에서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면서도 누가 이 비극을 사죄하고 책임져야하는지 모호하게 만들고 오히려 미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청구의 탑’에 새겨진 문구가 그것을 말해줬다.

아아, 여기 오키나와 땅에 태평양전쟁 말기, 옛 일본군이던 한민족 출신의 군인, 군속 316주(柱)가 산하를 피로 물들이고 슬프게도 산화하여 쓸쓸하게 잠들어 있습니다. 이를 생각하고 일본민주동지회는 38도선 판문점의 잔돌 38개를 사경(寫經)과 함께 초석에 묻어 이데올로기와 국경과 민족을 초월하고 인도주의를 준법하며 슬픈 역사를 담은 이들 영혼을 위령 현창(顯彰)하기 위해서 (…) ‘청구의 탑’을 건립하여 영원히 영령을 기립니다.
- 서승 교수의 저서 <서승의 동아시아 평화기행> 70쪽 참조.
▲ 서승 교수가 청구의 탑을 일행들에게 설명하는 모습. [사진-오삼언 통신원]

국경과 민족을 초월한 조선인의 ‘현창(顯彰)’이라는 문구

일본어 번역과 함께 빠르게 해설을 이어간 서 교수는 ‘현창(顯彰)’이라 쓰여진 문구를 가리키며 설명했다. ‘심하게 말하면 잘 죽었다는 의미로 이것만 봐도 어떤 의미로 탑이 세워졌는지 가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돌아와 살펴보니 현창(顯彰)이란 ‘밝게 나타낸다’는 뜻으로 풀이되는데 추도나 애도의 개념이 아니라, 전사자를 미화하고 그 뒤를 이어야할 모범으로 받든다는 의미로 쓰여지는 표현이었다. 야스쿠니 신사를 두고 ‘추도’ 시설이 아니라 ‘현창’ 시설이라고 지적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서 교수는 저서에서 위와 같이 탑에 ‘옛 일본군이었던’이라고 새길 것이 아니라 ‘옛날에 일본군으로 강제동원돼야했던’이라고 새겨야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옛 일본군이었던’이라고 탑에 새긴 것은 ‘천황의 적자(赤子), 즉 일본인과 같은 황군병사로 다뤄주겠다는 황민화정책’이라는 것이다. 또 ‘이데올로기와 국경과 민족을 초월하고(…)영혼을 위령현창하기 위해서’라고 탑에 새길 것이 아니라 ‘전쟁범죄에 대한 국가 책임을 밝히고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청산하며 영혼에게 사죄와 배상을 해야한다’고 질타했다.

조선인이 오키나와 전투에서 처참하게 희생된 것이 이데올로기, 국경과 민족을 초월했기 때문이 아니며 더욱이 ‘현창’할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건축물이 보여주는 ‘평화’, 사키마 미술관

▲ 사키마 미술관은 건물 자체가 미술품이다. [사진-오삼언 통신원]

   

▲ 사키마 미술관 앞 잔디밭에 오키나와 고유 자궁모양의 무덤이 있다. [사진-오삼언 통신원]

서 교수의 연락으로 사키마 미술관을 도착했을 땐 사키마 미치오 관장이 나와 환한 웃음으로 일행을 맞이했다. 작은 키에 다부진 몸매, 동글한 얼굴에 크고 또렷한 눈. 한눈에도 오키나와인 고유의 특징을 가진 인상이었다.

사키마 미술관은 건물 자체가 평화를 말하는 미술작품이었다. 건축가 미키시 코이치가 설계한 미술관은 입구에서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넓어지는 ‘가마’ 즉, 산호섬 오키나와의 자연동굴의 이미지를 착안했다.

미술관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오키나와 전투 종전일 6월 23일의 의미를 담아 23개로 이뤄졌다. 또 옥상 꼭대기에 만든 작은 네모 구멍은 매년 6월 23일 일몰 때 일직선으로 햇빛이 들어오게 설계돼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죽어간 영혼들을 위한 위령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

▲ 일몰 때 빛이 들어오게 설계된 구멍, 위령의 통로다. [사진-오삼언 통신원]

지옥같은 장면을 담은 『오키나와전쟁도』

미술관에는 그야말로 예술의 힘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전시돼있었다. 미술관 입구 쪽 제 3실에는 일장기와 성조기를 함께 형상화한 작품이 돋보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성조기와 일장기 사이 틈새에 미군기지를 둘러싼 철조망을 상징하는 철조망들이 보였다. 오키나와를 표현한 그림이라는 것을 한눈에도 알 수 있다.

▲ 성조기와 일장기로 오키나와를 형상화한 작품. [사진-오삼언 통신원]
▲ 오키나와 전투를 그린 마루키 부부의 작품. [사진-오삼언 통신원]
▲ 오키나와 전투를 증언하는 사람들의 사진. [사진-오삼언 통신원]

3실을 지나 조금 더 넓어진 제 2실로 들어서면 한 벽면이 오키나와 전투를 증언한 분들의 사진들로 채워져있다. 말할 수 없이 끔찍했던 기억을 오키나와 말로 증언하는 모습이다.

오키나와 전투 당시 오키나와 말을 쓴다는 이유로 간첩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본 뒤로는 쓰지 않았던 자신들의 말로, 떠올리기도 싫은 당시의 비극을 증언하는 것이다.

사람의 시체를 밟고 도망쳐야했던 사람들은 시체 썩는 냄새 때문에 쑥을 코에 넣었다. 시체가 부패하면서 내장 등이 터질 수 있었기 때문에 막대기로 확인하고 지나가야했다. 인간의 시체를 밟아온 사람들의 트라우마. 집단자결을 목격한 이들은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 등으로 시달리면서도 후대들에게 증언을 하고 있다고 서 교수가 설명한다. 기억의 대물림을 위해.

가장 넓은 제 1실로 들어서기 전부터 벽면 전체에 걸린 대형 그림이 강렬하게 눈길을 사로잡는다. 크기도 크기지만, 수묵화같은 그림이 강렬한 색채를 내뿜는다. 마루키 부부가 그린 대작, 『오키나와전쟁도-沖縄戦の図』 (1984년, 400×850㎝)이다.

▲ 『오키나와전쟁도』는 가로 4미터, 세로 8.5미터의 작품이다. [사진-오삼언 통신원]
▲ 작품을 그리고 있는 마루키 부부의 모습. [사진-오삼언 통신원]

일본군은 ‘미군은 악귀이기 때문에 포로로 잡히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는다’며 주민들에게 수류탄을 쥐여주는 등 집단 자결을 명령했다.

부모가 아이를, 남편이 아내를 죽이는 일이 벌어졌다. 가족을 죽이기 힘들었기에 단번에 죽이지 못해 고통 속에 피를 쏟는 일이 벌어졌다. 칼과 같은 무기도 없었기에 주민들은 면도칼과 낫을 썼다. ‘가마’ 속은 아비규환, 지옥이었다.

『오키나와전쟁도』는 이같은 지옥을 담았다. 눈을 부릅뜬 사체들, 죽여달라고 애원하는 오누이, 일본군에 의해 강간당하고 살해당한 소녀, 오키나와 말투 때문에 간첩으로 몰려 죽임을 당한 사람, 피난 끝에 갈 곳을 잃고 절벽에서 몸을 던진 사람들 등.

『오키나와전쟁도』를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가던 사키마 관장은 당시 일본군이 주민들에게 부르도록 한 노래, ‘우미우카바’의 가사를 설명했다. 주민들은 ‘어디서 죽든 천황폐하의 옆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노래를 불러야했고 죽음을 당했다.

▲ 『오키나와전쟁도』 작품의 왼쪽 부분. [사진-오삼언 통신원]
▲ 『오키나와전쟁도』 작품의 오른쪽 부분. [사진-오삼언 통신원]

눈동자가 없는 사람들과 눈동자가 있는 해골

사키마 관장의 말에 따르면 『오키나와전쟁도』를 그린 말키 부부는 어느새 일본이 다른 나라를 침략한 전쟁에 대해선 잊고 원폭을 당한 전쟁에 대해서만 기억하는 것을 우려했다. 또 이 모든 전쟁의 비극은 천황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야한다고 생각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때문에 말키 부부는 오키나와 전투를 화폭에 담아야한다고 생각했다. 원폭 공습 피해만을 알고 있는 일본인들에게 지상전이 어떠했는가를 알려야했던 것이다.

“가족끼리 이렇게 죽여야했던 전쟁을 나는 오키나와 외에 잘 모르겠습니다.” 사키마 관장은 『오키나와전쟁도』 그림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붉은 빛을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갔다. “일본군은 당시 미군의 투항 요구를 악마의 목소리로 들었습니다. 자신들의 만행이 있었기에 미군도 그러리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당시 오키나와로 들어온 일본군 부대는 30만명의 중국인을 학살한 남경대학살(난징대학살)의 부대였습니다. 침략과 약탈 등으로 인간성이 붕괴된 부대였습니다. 이 붉은 빛은 일본군이 미군의 포로 수용소로 가려는 사람들을 죽인 핏빛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 사키마 관장이 『오키나와전쟁도』앞에서 설명을 하고 있다. [사진-오삼언 통신원]

처참한 장면을 담았음에도 『오키나와전쟁도』에 그려진 시체는 모두 옷을 입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을 표현하기 위한 작가의 의도다. 또 그림 속 대부분 사람들의 눈에는 눈동자가 없다. ‘기억의 공백’을 의미하는 것이란다. 그림의 오른쪽 아래 귀퉁이 부분, 조선인의 옷을 입은 사람들 옆에 그려진 몇 아이들의 눈과 해골에만 눈동자가 있다.

아이들의 눈과 해골에만 눈동자를 그려넣은 이유가 무엇일까. 사키마 관장은 ‘그 이유가 무엇인지 일행들에게 생각해보시라’는 말로 해설을 마쳤다.

▲ 『오키나와전쟁도』 작품의 오른쪽 아래 귀퉁이 부분. 해골에 눈동자가 그려져있다. [사진-오삼언 통신원]

미술관 옥상에서 바라본 미군기지… 눈앞에 떠오르는 전쟁

미술관을 나와 옥상으로 올라갔다. 후텐마 기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미군기지 철조망으로 둘러싸여있는 미술관. 그야말로 미군기지에 미술관이 붙어있는 기묘한 위치다. 사키마 관장의 선조가 소유한 땅이 후텐마 기지의 일부가 되고 사키마 관장이 그 땅의 일부를 받아낸 뒤, 평화를 말하는 미술관을 지어올린 까닭이다.

미술관 옥상에선 후텐마 기지를 훤히 바라볼 수 있다.
후텐마 기지를 바라보다가 『오키나와전쟁도』를 떠올린다. 눈앞에 펼쳐진 군사기지는 또다른 ‘가마’, 지옥같은 전쟁도다.

▲ 사키마 미술관 옥상에서 바라본 후텐마 미군기지. [사진-오삼언 통신원]
▲ 오키나와 평화감성여행에 참가한 일행들. [사진-오삼언 통신원]

(오키나와 여행기④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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