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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아닌 일본, 오키나와평화가 마음에 차오르는 길- 오키나와 여행기①
오키나와=오삼언 통신원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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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3.11  15: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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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하와이’로 불릴 만큼 오키나와는 아름다운 해변과 따뜻한 기후를 뽐냈다. 오키나와에 발을 디딘 1월 25일에도 오키나와는 봄날 같은 햇살과 바람으로 일행을 맞았다.

   
▲ 평화기원공원에서 바라본 정경 [사진-오삼언 통일뉴스 통신원]

(사)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에서 기획한 이번 오키나와 평화기행은 인권ㆍ평화 운동가이자 동아시아 연구학자인 서승 일본 리츠메이칸대 석좌교수가 직접 안내하고 동행하는 일정.

때문에 서 교수를 만나기 위해 이번 기행을 신청한 이도 적지 않았다.

이튿날부터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 임재경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부회장 등이 서 교수와 함께 하기 위해 합류했다. 평화기행 일행은 존경받는 선생님들과 함께 여행한다는 사실에 환호성을 지르기도 했다.

팔순에 가까운 선생님들은 3박 4일 일정 내내 해박한 지식과 유머로 20, 30대에게 웃음과 감동을 함께 선사했다.

오키나와에서 과연 무엇을 배우고 돌아오게 될까. ‘평화기행’으로 이름 붙여졌으니 평화로움을 마음에 담아갈 수 있는 것일까. 나리타공항에 마중 나온 서 교수가 화상 투성이 얼굴에 환한 웃음으로 인사를 건네는 순간, 짧고도 강렬한 평화기행은 시작됐다.

   
▲ 일행 단체사진 [사진-오삼언 통일뉴스 통신원]

조선 사람과 함께 학살당한 오키나와 사람들

오키나와는 ‘일본이 아닌 일본’이었다.
첫날 방문지였던 해군사령부 참호와 평화기원공원은 오키나와가 과거는 물론 현재까지도 일본이 아닌 일본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었다.

오키나와는 1945년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땅에서 유일하게 지상전이 벌어진 곳이다. 미군의 일본 본토 상륙을 막기 위해 오키나와는 ‘버린 돌’이 됐다. 3개월간 25만여 명이 희생, 주민 3분의 1이 목숨을 잃었다고 집계된다. 오키나와는 온통 피로 얼룩진 섬, 버린 돌이 됐다.

해군사령부 지하 참호로 들어가는 입구 전시실에는 오키나와 해군 지휘관인 오타 미노루 소장이 일본 본토에 보낸 오키나와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전보문이 비중 있게 전시돼있다.

   
▲ 해군사령부 참호 전시실 입구 [사진-오삼언 통일뉴스 통신원]

“현 상황을 그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기에 (현 지사를)대신하여 긴급히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오키나와에 적의 공격이 시작된 이래 육해군 모두 방위를 위한 전투에 전력을 다하느라 정작 현민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현민들은 청년이나 장년 할 것 없이 모두 방위에 동원되었으며, 남은 노인과 아이들과 여자들만이 쉴 새 없이 이어지는 포격으로 집과 재산이 불타버려 간신히 남은 맨몸 하나로 군의 작전에 방해가 되지 않는 장소에서 궁핍한 생활을 감내해 왔습니다. (…) 오키나와의 실정은 말로 형용할 수가 없습니다. 한 그루의 나무, 한 포기의 풀조차도 모조리 타버려서 먹을 식량도 겨우 한 달만 버틸 것만 있습니다. 오키나와 현민은 이와 같이 싸웠습니다. 현민에 대해서는 후세에 특별히 배려해 주시기를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오타 소장의 전보문 발췌

“오타 소장의 노력을 평가하는 오키나와 사람들의 시선을 알 수 있다”라는 서승 교수님의 말처럼 오키나와의 희생과 비극이 어떠했을지 오타 소장의 전보문으로나마 바라보라는 주문 같았다.

오키나와 전투(전쟁)에서 위안부를 포함한 1만 명 이상의 조선인이 일본군의 학살과 미국의 공격으로 죽음을 당했는데 오키나와인 또한 학살을 피할 수 없었다. 오키나와인은 조선인과 같이 일본군에게 간첩으로 몰려 희생당했으며 ‘집단 자결’을 강요당해 가족이 가족을 죽이는 끔찍한 지옥을 겪었다.

일본어와 오키나와어가 다른 이유로 의심을 거두지 못한 일본군의 만행이었다. 일본군에게 오키나와인은 국민이 아니었던 셈이다.

항복 선언 없는 사령관의 자결… 이어진 무고한 죽음

해군사령부 참호는 천연 동굴이 아니라 삽과 곡괭이로 판 지하 참호로 전체 길이는 450m에 달한다. 작전실, 의료실 등이 미로와 같이 연결돼있다. 지하 참호 벽에 총탄 자국같은 흔적이 보였는데 실은 수류탄 파편 흔적, 바로 자결의 흔적이었다.

   
▲ 해군사령부 참호 내부 모습 [사진-오삼언 통일뉴스 통신원]

오타 미노루 소장은 전보를 보낸 뒤 미군의 공격으로 더 이상 전투를 벌일 수 없는 지경에 이른 1945년 6월 13일 권총으로 자결했다. 일본군 사령관 우지시마 미츠루 중장 또한 6월 23일 할복자살했다.

일본군의 패배가 명백해졌지만 항복 선언이 없었다. 잔존 일본군들과 민간인들은 최남단 해안지역까지 도망쳐야 했고 이 과정에 강요된 자결, 참극이 빚어졌다. 해군사령부 참호 벽에 남아있는 선명한 자결의 흔적은 오키나와 전역에 씻을 수 없는 고통으로 남아있어 곳곳에서 목도하게 된다.

“오키나와에서 학살당할 당시, 조선이 아닌 대한민국 사람이었나?”

“분단의 비극은 오키나와 전쟁 당시 사망한 분들에게도 씌워져 있다.”

오키나와 평화기원공원에는 평화의 초석이 세워져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희생된 이들의 이름이 새겨져있다. 일본인, 조선인, 대만인, 미국인까지. 현재 23만 명의 이름이 있고 앞으로도 확인 되는대로 추가한다고 한다.

“가해자와 함께 이름이 새겨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럴 수 있는 일이죠.” 서승 교수의 어조는 어느새 낮아졌다. 

평화의 초석엔 ‘조선인’이 아니라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구분돼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 분이 돌아가실 때, 대한민국 사람이었습니까?”
일행 가운데 한 사람이 질문 아닌 질문을 하며 한탄한다.

공교롭게도 초석에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희생자들의 이름이 날카로운 모서리로 구분돼있었다. 오키나와에 끌려와 참혹하게 희생당한 조선인의 넋은 과연 평안해진 것일까?

   
▲ 평화초석에 새겨진 이름 [사진-오삼언 통일뉴스 통신원]

평화기원공원 입구엔 자료관이 별도로 지어져 있는데 이곳엔 ‘일본이 아닌 일본인’, 오키나와의 ‘평화’가 전시돼 있었다. 평화를 기원한다는 의미로 ‘기념’(祈念)을 쓰는 평화기원공원의 자료관에는 일본이 아닌 오키나와의 역사, 사라진 그들의 언어와 이름, 문화가 전시돼 있었다.

   
▲ 평화기원공원 평화초석 [사진-오삼언 통일뉴스 통신원]
   
▲ 평화기원공원 모습 [사진-오삼언 통일뉴스 통신원]

 

오키나와 전투(전쟁)란?

오키나와 전투(전쟁)은 일본의 패색이 짙어진 1945년 3월 23일 미군의 포격으로 시작됐다. 4월 1일 미군이 상륙, 6월 23일 일본군의 조직적 공격이 종결되기 전인 3개월간 이어졌다.

6월 22일 최고 지휘관이던 우시지마 중장이 자결했으나 유언으로 계속 항전할 것을 명령했으며, 이로 인해 미군이 작전 종결을 선언한 것은 7월 2일이다.

일본은 미군을 가능한 오키나와에 붙잡아 두기 위해 지구전을 펼쳤으며 오키나와 현민 중 1/4이 목숨을 잃었다.

오키나와현 자료에 따르면 오키나와 전투에서 죽은 사람은 모두 20만 명으로 미군 전사자 1만 2,500명, 일본군 약 9만 4,000명이며 주민 사망자 수도 이에 달한다.

군의 명령으로 말라리아 지대에 강제로 이주당해 사망한 사람 등을 포함하면 사망자 수는 몇만 명이 더 늘어날 것으로 추정된다. - ‘미래를 여는 역사’ 참조.

 

서 승 교수

서승 교수는 1945년 일본 교토에서 출생, 1968년 도쿄 교육대학 졸업 후 서울대 사회학과 석사를 마치던 1971년 '재일교포 학생학원침투 간첩사건'에 연루되어 육군 보안사로 연행, 고문에 저항하다 분신을 시도했다.

1심 사형, 2심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서승 교수는 1974년 엠네스티 '세계의 양심수'로 선정됐으며 1990년 2월 석방될 때까지 비전향정치범으로 19년간 투옥됐다. 이후 1998년 일본 리츠메이칸대 법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2011년 3월 정년퇴임했다.

제 1회 ‘진실의 힘’ 인권상에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고통 속에 신음하는 많은 이들에게 일어설 수 있는 용기와 격려를 주는 서승 선생의 삶은 열정적인 실천 과 헌신을 통해 자신의 고통을 극복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위한 희망으로 승화시키는 인간 정신의 고귀함을 보여준다”는 이유로 선정됐다.

수사 과정에서 입은 화상은 한국 정부의 폭압성을 상징하는 자국으로 세계인들의 뇌리에 각인됐으며, 출옥 후 학자로서 비교인권법을 강의하며 평화운동에 참여해오고 있다.

○ 출생 : 1945년 일본
○ 학력 :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석사
○ 수상 : 2011년 제1회 진실의 힘 인권상
○ 경력 : 1998~ 일본 리츠메이칸대학 법학과 특임교수,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캠퍼스 사회학과 객원연구원
○ 저서 : <서승의 옥중 19년>, <서승과 함께하는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 <서승의 동아시아 평화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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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은소나무 (qnseksrmrqhr) 2014-03-13 13:35:35
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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