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남쪽의 이토만시에 자리한 마부니는 태평양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언덕이다. 일몰 시간에는 언덕을 비추는 햇살과 바다 색이 어우러져 곱디 고운 빛을 낸다.

마부니 언덕 60만평의 너른 땅에 조성된 평화기념공원의 경치가 몰고 오는 평화로움이 더욱 생각에 잠기게 만들었다. 태평양 전쟁 최대 규모의 전투이며 일본에서 유일하게 주민을 총동원한 지상전의 최후 격전지였던 장소가 몰고 오는 평화로움이란.

▲ 평화기념공원 모습. 평화의 초석이 물결처럼 세워져있다. [사진-통일뉴스 오삼언 통신원]
▲ 오키나와 건축양식으로 지어졌다는 평화기념자료관의 모습. [사진-통일뉴스 오삼언 통신원]

일본 창씨개명 강요받은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 내에 오키나와 건물 양식으로 지어진 평화기원자료관에선 조선의 역사를 닮은 오키나와 역사를 만났다. 130년전 류큐왕국이었던 오키나와는 1879년 일본으로 강제 병합된다. 일제 식민지 기간 창씨개명 등을 강요당했던 조선처럼 오키나와 또한 그러했다. 창씨개명, 이른바 ‘개성개명’을 강요당했고 오키나와 토속어를 쓰면 처벌받았다. 오키나와 비극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자료관 제1전시실에는 오키나와 토속어를 쓰면 목에 표(방언패)를 걸게 했던 사진 등 당시 자료가 전시돼있다. “오키나와 사람들 이름이 세 개가 된 것입니다. 본래 이름, (개명한)본토 이름, 중국식 이름인 거죠. 약 120년 동안 오키나와 말을 쓰지 못했고 현재는 오키나와 (고유)말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현황입니다.” 서 승 교수가 한국어 번역이 없는 전시물을 짚어가며 설명을 덧붙여줬다.

오키나와인인 동시에 일본인. 이 정체성의 균열과 혼란은 계속되고 있지 아닐까. 아니면 오키나와 고유의 말을 잃으면서 함께 덮어진 것일까. 평화기념자료관에서 생긴 의문은 여행 전 기간에 따라붙는 궁금증이 됐다.

▲ 평화기념공원에 세워진 한국인위령탑. [사진-통일뉴스 오삼언 통신원]
▲ 한국인위령탑. [사진-통일뉴스 오삼언 통신원]
▲ 한국인위령탑에 새겨진 문구. [사진-통일뉴스 오삼언 통신원]

전쟁의 기억을 끊임없이 되살리다

오키나와 사람들이 일본 본토를 위해 오키나와 전투(전쟁)에서 ‘총알받이’가 된 건 오키나와가 본래 독립된 류큐왕국의 역사를 가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료관의 전시 또한 의도치 않았더라도 이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자료관 제1전시실이 오키나와 전투의 실상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류쿠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2전시실부터 6전시실은 주민이 본 오키나와 전투가 전시돼있다.

특히 3전시실은 일본이 오키나와를 ‘버린 돌’, 희생양으로 만들면서 결국 군인과 주민들이 뒤죽박죽돼 참극이 빚어졌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어 번역 설명서에는 ‘방공호 안에서는 일본군에 의한 주민학살과 강제적인 집단사와 기아, 밖에서는 박격포, 화염방사기 등에 의한 살육이 있어 마치 아비규환의 지옥과 같은 세계였다’라고 적혀 있다.

4전시실의 이름은 ‘증언’이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에 마음을 닫은 사람들의 무거운 입으로부터 후세에 전하려고 계속 이어지는 여러 가지 증언은 역사의 진실이다’라는 설명 문구가 있다. 한국어 번역본이나 자막이 따로 없어 영상과 자료 등 오키나와 주민들의 증언 기록은 제대로 보기가 힘들었다.

때문에 어느새 (사)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평화기행에서 처음 만난 이들도 일본어를 조금이라도 읽을 수 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삼삼오오 짝을 이뤄 자료관을 둘러보고 있었다.

▲ 평화기원자료관 내 제4전시실의 모습. [사진-통일뉴스 오삼언 통신원]

“전세계 사람들에게 우리들 마음을”

평화기념자료관의 설명서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있다.

“전쟁의 체험이야말로 곧 전후 오키나와 사람들이 미국의 군사지배의 중압에 저항하면서 쌓아온 오키나와 마음의 근원입니다.
‘오키나와의 마음’이라는 것은 인간 존엄을 무엇보다도 중요시하고 전쟁으로 이어지는 일체의 행위를 부정하며 평화를 추구하며 인간성의 발로인 문화를 각별히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우리들은 전쟁의 희생이 된 많은 영혼을 달래며 오키나와전의 역사적 교훈을 바르게 다음 세대에 전하고 전세계 사람들에게 우리들의 마음을 전하여 더욱더 영구적인 평화를 심는데 기여하기 위하여 여기에 현민 개개인의 전쟁 체험을 모아 오키나와현 평화기원자료관을 설립하였습니다.” -1975년(2000년 4월 1일 일부수정) 오키나와현

‘오키나와의 마음’은 자료관을 나와 바다를 앞에 두고 탁트인 중앙광장에 형상화돼있었다. ‘평화의 초석’이 바로 그것이 아닐까. 서승 교수는 ‘평화의 초석이 파도 물결 모양으로 세워진 것은 평화의 염원이 세계로 물결쳐서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오키나와의 마음은 어디까지 퍼져나가고 있을까.

‘평화의 초석’을 지나 언덕을 오르는 길에는 일본의 각 현에서 세운 오키나와 전쟁 위령비가 줄 지어있다. 각 현에서 위령비를 경쟁적으로 세운 것이며 그 의미 또한 제각각이라는 서승 교수의 설명이 뒤따랐다. “일본군을 영웅적인 전쟁 영웅으로 추모하는 곳도 있는 것이죠.” 그래서일까. 위령비는 규모도 크고 잘 가꿔져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그에 못 미치는 것 등 각양각색이었다.

▲ 언던길에 세워진 어느 현의 위령비. [사진-통일뉴스 오삼언 통신원]

위령탑에서 본 붉은 빛의 바다

언덕 꼭대기에 이르자 ‘여명의 탑’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키나와 전투 당시 일본군 사령관, 1945년 6월 23일 할복 자결한 우시지마 중장의 위령탑이다. ‘위령탑은 상징적으로 평화기념공원이 평화가 아니라 전범을 기념하는 곳으로 보이게 한다’는 서 교수의 설명이 뒤따랐다.

▲ 언덕위 위령탑. [사진-통일뉴스 오삼언 통신원]

깍아내리는 바다 절벽을 앞에 두고 세워진 위령탑. 서 교수는 바라를 가리키며 덧붙였다. “최남단인 이 곳까지 도망친 주민들의 주검으로 이 바다가 그야말로 붉은 피로 물들었다고 합니다.” 바다는 짙푸른 색으로 잔잔히 출렁거리고 있었다. 일행은 바다가 마치 붉은 색이라고 된 것 마냥 난간에 달라붙어 바다를 응시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위령탑을 지었을까요?” 위령탑을 둘러보며 모 대학 교수가 일행들에게 물었다. 먼저랄 것 없이 일행들은 한마디씩 했다. ‘중장의 자결을 영웅적인 희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이렇게 탑을 지어놓고 추모한다는 것이 소름이 돋는다’, ‘일본인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등.

▲ 오른쪽이 위령탑, 바로 옆 바다가 보인다. [사진-통일뉴스 오삼언 통신원]
▲ 언덕위 위령탑에서 바라본 바다. [사진-통일뉴스 오삼언 통신원]

언덕을 다시 내려오는 길에 한 위령비 앞에서 일본인 남녀가 합장을 하고 있었다. ‘무엇을 빌고 있는 걸까?’ 한동안 눈을 뗄 수 없었다.

마부니 언덕의 아름다운 일몰과 함께 오키나와 첫날 일정이 마무리되고 있었다.

▲ 평화기념공원에 노을이 지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오삼언 통신원]

오키나와의 실상을 접할 때마다 전쟁이라는 것은 이토록 잔인하고 이렇게 오욕투성인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생생한 체험 앞에서는 어떠한 사람도 전쟁을 긍정하고 미화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분명히 인간입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전쟁을 용납하지 않는 노력을 할 수 있는 것도 우리들 인간이 아닐까요.

전후 이래 우리들은 모든 전쟁을 원망하며 평화로운 섬을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이것이 너무나도 큰 대가를 치르고 얻은 확고한 우리들의 신조입니다.

- 평화기념공원 내 평화기원자료관 설명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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