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강성주 (KAL858기 사건 연구자)

 

KAL858기 사건 연구자인 박강성주 박사가 2010년 호주 정부를 상대로 정보공개 청구를 시작한 지 한참이 지난 최근 호주 외무부로부터 2차로 추가 비밀문서를 제공받았다. 2011년 공개된 1차 입수자료에 이어 2차 입수자료를 분석한 글을 연재한다. /편집자 주

[ 1차 입수자료 관련 기사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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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란 많이, 또는 적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은 바로 지금이다. 네가 존재하고 있는 그 순간, 그것이 시간이다.”

네덜란드 드라마 <아담과 에바>에 나오는 대사다. 주인공인 에바가 큰 병에 걸린 자신의 가족을 방문했을 때 들은 말이다. 시간은 그 누구도 소유할 수 없다. 그렇다. 시간은 양의 문제라기보다, 존재 자체 또는 그 지속의 문제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시간이 멈춰버렸다”같은 표현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어느 순간, 어떤 존재들의 시간이 갑자기 증발해버린 경우.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른다. 다만 멈춰버린 시간만이 존재할 뿐.

멈춰버린 115명의 시간

대한항공 858기 사건도 마찬가지 아닐까. 1987년 11월 29일, 누군가의 시간이 멈춰버렸다. 그렇게 멈춰버린 115명의 시간은, 다른 존재들의 시간에도 영향을 준다. 예컨대 어느 실종자 가족은, “저는 지금 살지 않고 그때 남편하고 같이 죽지 않았나 생각해요”라고 말한다(박강성주, <슬픈 쌍둥이의 눈물>, 189쪽).

이 가족의 시간 역시 사건 당일 멈춰버린 것이다. 물론 이 정도는 아니지만, 연구자인 나의 시간 역시 끊임없이 영향을 받는다. 이 사건에서 내 자신이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버겁고, 부담스럽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니다. 어느 순간 대한항공기 사건은 내 존재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됐다.

그렇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한 일 가운데 하나가 호주 정부에 대한 정보공개 청구다. 최근 나는 호주 외무부와 벌인 행정심판을 통해 사건 관련 비밀문서를 추가로 얻어낼 수 있었다.

여기까지의 과정은 복잡했다. 정보공개를 처음 청구했던 때는 2010년. 외무부는 2011년 문서의 일부만을 공개했고 나는 곧바로 이의 신청을 했다. 그 결과가 좋지 않아 2012년 정보공개 업무를 담당하는 호주의 독립기관으로 사건을 가져갔다.

시간이 좀 걸렸지만 이 기관은 (내 느낌에) 비교적 성실하게 조사를 했다. 그런데 2014년 호주 정부가 이 기관의 폐지 계획을 발표했고, 나는 해당 기관의 권고에 따라 2015년 마지막 수단으로 행정심판을 청구했다. 그리하여 이번에 외무부와 ‘합의’에 이르게 되었고, 문서를 추가로 받을 수 있었다. 몇 년에 걸친 마라톤이다.

▲ KAL858 사건 연구자 박강성주 박사가 2010년 호주 정부를 상대로 시작한 정보공개 청구 결과, 최근 호주 외교부로부터 추가 비밀문서를 확보했다. [자료제공 - 박강성주]

새로 공개된 문서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증거’와 관련된 내용이다. 먼저 미국 주재 호주대사관에서 작성된 문서를 보자.

1987년 12월 7일 호주 관계자는 토마스 던롭 당시 국무부 한반도 업무 담당자를 만났다. 미국 쪽 설명에 따르면, 사건 원인과 관련된 증거는 “정황적”(CIRCUMSTANTIAL)이며 원인을 밝혀내고 책임을 묻는 일은 “불가능”(IMPOSSIBLE)했다(74쪽).

12월 21일에는 서울 주재 호주대사관 관계자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눴다(누구와 만났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은 지워져 있다). 이 논의에 따르면 당시 김현희와 북한을 연결해주는 “유일한 구체적 정보”(THE ONLY CONCRETE INFORMATION)는 그녀가 자살 시도에 이용한 캡슐뿐이었다(118쪽). 1983년 버마 아웅산 사건에서도 북쪽 공작원들이 똑같은 방법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뉴질랜드 정부의 비밀문서 역시 주목된다. 일본 주재 뉴질랜드대사관에서 12월 15일에 작성된 이 문건은 우메모토 가즈요시 당시 일본 외무부 동북아시아 부과장과의 대화 내용을 담고 있다.

일본 쪽은 “구체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에”(AS THERE WAS NO CONCRETE EVIDENCE), 그때까지 북쪽에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밝힌다(104쪽). 이는 일본이 적어도 초기에는 증거 문제에 신중했다고 일러주는 대목이다.

이 논의들은 모두 김현희의 자백이 있기 전(공식수사 결과에 따르면 1987년 12월 23일)에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당시 남쪽 정부와 대한항공사는 사건 발생 직후부터, 특히 하치야 마유미(김현희)가 바레인 공항에서 체포된 12월 1일을 계기로 이 사건이 북쪽의 테러라고 확신했다.

대표적인 예는 안기부가 대한항공기 사건이 “북괴의 공작임을 폭로, 북괴만행을 전 세계에 규탄하고 국민들의 대북 경각심을 고취시킨다는 목적”으로 12월 2일부터 추진한 ‘무지개 공작’이다(자세한 내용은 박강성주, <KAL858, 진실에 대한 예의>, 242∼246쪽).

이는 위에서 살펴본 “정황적”, “불가능”, “구체적인 정보가 없기 때문에” 등의 표현과는 차이가 있다.

분명하지 않은 증거

그렇다면 김현희의 자백이 이루어진, 또는 남쪽의 공식수사 결과가 발표된 뒤의 상황은 어땠을까? “증거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as evidence not yet clear) 북쪽을 비난하기는 어렵다(177쪽). 바로 1988년 1월 18일 빌 헤이든 당시 호주 외무부장관의 말이다.

이와 같은 우려와 신중함은 1월 20일에 작성된 문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호주 정부는 공식수사 결과를 지지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폭파”를 원인으로 간주하기에는 “오직 제한된 증거”(only limited evidence)만이 있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하기로 한다(231쪽).

여기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남쪽의 수사 결과에 조심스러워하던 호주가 사건에 대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논의(1988년 2월 16∼17일)를 앞두고 입장을 바꾸었다.

2011년에 공개됐던 문서에 따르면, 호주는 1988년 2월 16일 기준 북쪽과 사건의 연관 가능성에 대해 “설득력 있는 증거가 있는 듯하다”고 판단했다. 이처럼 호주 정부의 입장은 종합적인 맥락에서 검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안기부가 발표했던 수사 결과는 (위에서 호주 정부가 지적했듯이) 여러 가지로 문제가 있었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1988년 1월 18일 캐나다 주재 호주대사관에서 작성된 문서를 보자. 캐나다 정부 역시 남쪽의 수사 결과 지지에 대한 요청을 받았는데, 당시로서는 북쪽을 비난하기에 어려운 위치에 있다고 밝힌다. 왜냐하면 “북쪽에 대한 혐의들은 자백에 바탕을 두고 있다”(THE ALLEGATIONS AGAINST NORTH KOREA ARE BASED ON A CONFESSION)고 봤기 때문이다(173쪽).

결국 ‘물증’이 중요하다는 뜻으로, 캐나다 역시 안기부가 1월 15일에 발표한 수사 결과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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