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일 / 전 한신대학교 교수


지난번 글 ‘할아버지를 동지라 부르는 세습도 있나’를 두고 지금 난타중이다. 심지어는 골수 통일운동을 한다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난타에 가세를 하고 있다. 국내에서보다는 해외, 특히 미국 쪽 기독교인들이 이 난타의 중심에 서 있다.

미국식 민주주의를 지상의 가치로 알고 있는 골수 통일운동가들 가운데는 북의 김정은 등장을 요상하게 여기고 비판도 서슴지 않는다. 이들 가운데는 북에서 귀빈 대접을 받는 사람들도 있다.

기독교 신약성서 마태복음 1장 1절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족보는 이러하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로 시작하여 예수 이전 28대를 대를 이어 소개하고 있다.

예수의 조상들 가운데는 왕들을 비롯한 당대의 최고 지도급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예수를 두고 ‘세습’을 했다고는 하지 않는다. 요한은 예수를 두고 천지창조 태초부터 있었던 로고스라 했고, 바울은 아담부터 시작하여 예수를 제 2의 아담이라고까지 한다. 예수를 우주적 그리고 역사적 시원에서부터 자리매김을 하려는 시도라 볼 수 있다. 그럼, 이런 시도가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되나? 어느 나라 민족 것은 되고 우리는 안 되나, 하고 묻는다.

어떤 한 위대한 시기의 시대정신과 이념과 이상의 계승자로 이렇게 과거의 맥에 연관시키는 것은 통례적이다. 그래서 용비어천가도 나온 것이다. 현대 정치사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한 나라의 정통성을 계승하기 위해서 아직 대부분의 나라들이 왕조와 황실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북은 그야말로 혁명으로 나라를 세웠다. 혁명의 전승과 계승은 필수 과제이다. 그것도 사면초가와 같은 상황에서 혁명이란 신생아를 보호하고 지키기란 차라리 모성애적인 것 이상이어야 할 것이다. 어느 어머니인들 자기의 갓 태어난 애기를 몸을 바쳐 지키지 않으려 할 것인가. 지금 북의 지도자들과 인민과 군인들은 이런 모성애적 열정을 가지고 자본주의로부터 혁명을 결사수호하려 하고 있다.

예수를 세습했다고 하지 않듯이 김정은에게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말해 보자. 기독교에서 예수를 두고 세습이라 하면 어색하듯이 북의 김정은에 대해서도 그렇다.

만약에 북이 세습을 하고 있다면 예수도 세습을 한 것이 분명하다. 복음서 기자들 자신들이 예수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대를 이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예수를 ‘세습’이라고 하는 데는 누구도 동의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를 봉건 왕조의 세습이라 하지 않는 이유는 예수를 사랑의 화신으로 보고 그 사랑의 정신이 계승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세습이란 ‘권력+핏줄’ 공식을 적용할 수 있다. 마태는 왜 예수의 핏줄을 말하면서 그를 성령으로 잉태했다고 하는가? 그것은 예수를 정신적인 가치의 계승자로 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북에서도 혁명의 ‘계승’이라고 하지 ‘세습’이라고 하지 않는다. 김일성이 김정일을 낳고 김정일이 김정은을 낳았지만 이런 핏줄의 대와 함께 혁명정신의 계승을 함께 말하고 있다.

북은 지난 1938년 12월부터 1939년 3월까지 100여 일 간 고난의 행군 동안 백두산을 먼발치로 바라보면서 남패자에서 장백까지 행군을 해 오면서 세운 나라이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부활과 계급 없는 사회를 꿈꾸며 모진 싸움을 하면서 세운 나라이다.

최근 연구 보고에 의하면, 예수의 30세까지의 생애가 지하에서 로마에 저항해 싸운 혁명 투쟁 기간으로 보는 것이 유력하다고 한다. 유격활동을 한 것이다. 유격대들은 이름을 숨겨야 하고 위치를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30여 년의 예수 생애가 감쪽같이 비밀에 가려져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다. 혁명의 세례 말이다. 그는 나머지 3년 동안 이런 혁명적 성령 체험을 실천에 옮기다 잡혀 죽은 것이다.

예수 믿는 자들은 바로 예수의 이러한 민족해방과 가난한 자의 계급투쟁을 해야 하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지독하게 편견을 가진 분이라고 몰트만은 말했다. ‘하나님의 편견’이란 가난한 자만을 편애하는 편견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런 편견을 안 가진 자들은 예수를 따를 자격이 없다. 가짜 목사, 가짜 신자를 판별하는 방법이 바로 이런 편견을 가진 자이냐 아니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런 예수의 혁명 정신을 계승하지 않고 ‘주여 주여’하는 행위는 완전 미신이고 대중의 아편이다. 기독교회가 이런 미신행위와 아편주사 놓기 행위를 그만두지 않는 한 저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 있는 마야 신전과 하나 다를 것 없이 돌 하나에 놓을 돌 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나는 예수를 가장 좋아한다. 그는 세계의 한 중심을 관통해 걸어 간 분이기 때문이다. 나는 예수 같이 세상을 피하거나 에둘러 가지 않고 세상의 한 복판을 질러가는 인물 이외에 그 누구도 존경하고 따르지 않는다. 예수같이 세상의 중심을 관통하는 것이 예배요, 기도요, 설교이다.

신은 모든 인간들에게 민족이라는 것을 선물로 주었다. 생명은 신이 준 제일 큰 선물이기 때문에 자살은 죄악이다. 생명 이상으로 귀중하게 준 선물이 민족이다. 그래서 민족을 사랑하지 않고 민족을 배신하는 행위는 자살행위 이상의 죄악이다.

그래서 일제라는 시대에 조선 땅에 산 인간들 가운데 세상의 중심을 관통해 나가지 못하고 친일 매국행위를 한 자들은 가장 용서받지 못할 자들이다. 이들이 예수 제자 운운 하는 것은 하늘의 개도 웃을 짓이다.

군인, 경찰, 법조계, 교육계, 종교계 그 어느 한 구석에도 항일 혁명정신을 찾아 볼 여지도 없는 곳이 남한이다. 이들이 모여 한일 군사 동맹을 체결하려고 했다. 정신 제대로 박혀 있는 종자들의 씨를 말리고 있는 곳이 남한이다. 최근 종북 운운하는 것도 모두 씨말리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기독교인들이 가장 앞장 서 씨말리고 있다. 이런 기독교는 사대주의의 화신이며, 미국이 저무는 날 황혼에 잠깐 있다 사라질 노을에 불과하다. 시간문제이다.

건전하고 올바른 정신은 계승되어져야 한다. 아무리 좋은 제도를 가져도 그것을 담고 있는 정신이 잘못되면 그것이 바로 세습이다. 남한은 그런 의미에서 지독하게 악질적인 세습을 정치, 경제, 종교, 교육 할 것 없이 모든 곳에서 하고 있다.

‘습’이란 버릇을 의미한다. 대를 이어 나쁜 버릇을 이어갈 때에 나라는 망한다. 남한은 자본주의와 친일매국이란 나쁜 버릇에 몸 내놓은 상태이다. 이런 나쁜 버릇을 이어가는 나라치고 망하지 않은 예란 없다. 파산 직전의 배 안에서 서로 먹을 것을 놓고 아귀다툼하는 곳이 남한이다.

노동자들이 벌어들인 돈으로 자유민주주의 선거 한답시고 수천억 원씩 퍼 부어야 당선이 되는 정치를 두고는 한마디 질타를 하지 못하면서 북을 향해 세습 운운한다고 씨알이 먹혀들겠는가. 이런 따위 자유민주주의는 전 세계적으로 조종을 치고 있는 데 무슨 세습 타령이냐.

거듭해서, 나는 예수를 어느 성인보다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그는 세상의 한 복판을 걸어 간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세기와 더불어, 세기를 넘어, 대를 이어 사랑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한 복판을 달린 모든 인간들이 예수이다. 오늘날 교회가 ‘개독’ 소리 듣지 않으려면 예수를 닮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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