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수 (통일맞이 정책실장)


민주주의 믿으면 보수 진보의 대북정책 접점 있어

20세기는 극단의 시대

20세기는 ‘전쟁의 세기’였다. 사라예보에서 울린 한발의 총성으로 세계 1차 대전이 시작되었고 이후 2차 대전,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중동전쟁 등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20세기는 전쟁의 세기답게 1999년 코소보 전쟁으로 한 세기를 마무리하였다.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고 문명이 파괴되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핵무기가 사용되기도 했다. 군사과학기술의 발전은 20세 이전의 오랜 인류역사가 파괴한 것보다도 더 많은 파괴를 20세기 100년 동안에 가능하게 만들었다.

20세기는 석기시대 이후에 일어난 사회적 변화 가운데 가장 폭발적이고 놀랄만한 성장을 가져온 시대이기도 하다. ‘전쟁’과 폭발적인 ‘성장’은 20세기가 ‘극단의 시대’였다는 영국 역사학자 에릭 홉스본의 말을 의미 있게 만들고 있다.

20세기가 놀랄만한 진보를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Distopia)’라는 ‘암흑의 세계’를 뜻하는 단어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20세기가 전쟁의 세기였기 때문이다. 전쟁이 없는 기간에도 ‘냉전(Cold War)’이라는 전쟁 아닌 전쟁이 벌어졌다. 이 극단의 시대가 유토피아라는 인류가 오랫동안 꾸어온 꿈을 담고 있는 단어를 흐릿하게 만들어버렸다.

20세기 3대 유제- 식민지, 분단, 독재

20세기의 경험은 21세기에 인류가 추구해야할 보편적인 가치가 평화라는 것을 말해준다. 평화는 전쟁이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인간과 국가, 국가와 국가가 서로 어울려서 조화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전쟁이나 폭력은 이런 조화를 파괴한다.

우리는 20세기 전반기에 식민지시대를 겪었고 그 후 분단과 전쟁을 거치면서 남북대결과 갈등으로 얼룩진 20세기를 보냈다. 청산되지 않은 식민지 유제와 분단의 잔재는 한국사회 내부에서 강고한 독재체제를 구축하는 자양분이 되었다. 식민지, 분단, 독재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21세기를 맞이한 것이다.

세계사의 냉전체제는 한반도에 강력한 분단체제를 만들었고, 분단체제는 남북한 내부에서 권위주의적 강권체제가 작동하게 만들었다. 분단체제를 만든 세계사의 냉전체제는 1980년대말부터 90년대초 사이에 이미 허물어졌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분단체제는 아직도 건재하다. 두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이 분단체제를 흔들었지만 이명박 정부를 거치면서 역사는 거꾸로 달렸다.

냉전체제의 한 축이었던 미국은 냉전 해체 이후 9.11테러를 겪으면서 알카에다 같은 테러집단을 상대하는 것을 우선적인 국가전략으로 삼았다. 그러나 최근 중동에서 발을 빼기 시작했다. 중국의 부상으로 맞이한 G2 시대에 세계를 어떻게 경영할 것인지에 대한 국익중심의 전략수립에 몰두하고 있다.

‘블랙아웃’이 일상을 불안하게

냉전시대의 이념대결은 사라지고 ‘열전’도 ‘냉전’도 아닌 국익 중심의 외교전쟁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 세계추세이다.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한 노력과 전쟁을 수행했던 국가의 속성을 평화로운 것으로 변화시켜보기 위한 논의도 국제무대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2차대전 이후 분단된 독일, 베트남, 예맨도 통일국가를 이루었다. 우리만 아직도 구태의연하게 냉전시대 이념대결에 사로잡혀 있고, 우리만 아직도 분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세기 세계사가 ‘폭발적 성장’과 ‘파괴적 전쟁’이라는 극단의 시대였다면, 20세기 한국사도 극단의 시대이긴 마찬가지이다.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루면서도 한편에서는 북한과 대결과 갈등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21세기를 ‘극단의 세기’에서 ‘평화의 세기’로 바꾸기 위해서는 20세기의 유산을 청산해야 한다. 식민지, 분단, 독재라는 20세기 3대 유산을 청산하는 것이 21세기를 평화의 세기로 만드는 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식민지 잔재청산은 종군위안부 문제나 태평양전쟁 희생자 문제 등 아직 미해결된 사안을 해결하는 것이다. 식민지 잔재청산이 안되고는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이 있을 수 없다는 국민여론에서도 이 사안의 중요성을 실감할 수 었다.

독재청산은 20세기 군사독재정권에 뿌리를 둔 세력의 집권을 막는 것이다. 분단은 식민지 잔재와 독재정권이라는 20세기의 부정적 요소를 아직까지 유지하게 만든 구조적인 요인이다. 분단체제를 극복하는 것이 20세기가 물려준 부정적 잔재를 청산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21세기를 평화의 시대로 만드는데 기여하는 길이다.

20세기 잔재가 지속된다면 전기가 일순간에 꺼져버리는 것 같은 ‘블랙아웃(Black out)’ 상태에 언제든지 빠져버릴 수 있다. 평화로운 환경속에서 자유롭고 행복하게 사는 삶이 상시적으로 위협 받게 되는 것이다.

진보가 할 것, 보수가 하면 안될 것

우리 국민들은 한국정쟁이라는 DNA에 아픔이 새겨질 정도의 비극을 겪었다. 남북의 군사충돌 속에서 북한에 대한 배신감과 불신을 키워오면서도 다른 한편 남북화해와 협력이 민족의 미래를 평화롭게 가꾸는 길이라는 것을 터득해왔다. “남과 북은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 통일은 대화를 통해서 평화적으로 추구해야 한다, 성급한 통일보다는 교류협력을 꾸준히 진행하여 평화를 유지하면서 통일연습과 준비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것들이 수치화할 수는 없지만 분단체제 속에서 민초들이 체험적으로 익혀온 ‘암묵지’이다.

민초들은 이런 상식을 가지고 있지만 편을 갈라서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에 연연해온 일부 정치세력들은 분단을 정치적으로 악용하였다. 정치적 반대편을 ‘빨갱이’, ‘좌경 용공’, ‘종북’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민족사를 자신들의 집단적인 사익을 위해 희생시킨 야만적이고 우둔한 행위이다. 20세기를 ‘극단의 시대’라고 한다면 바로 그 부산물이다.

이제 민초들이 터득하고 있는 ‘암묵지’로 돌아가서 냉전적인 대결에서 벗어나서 21세기 평화와 번영의 기반을 만드는 대북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북한과 한 핏줄이지만 전쟁을 하고 수많은 충돌을 하면서 서로 간에 불신은 불신대로 크게 자라났다. 진보는 특히 남한사회에서 북한에 대해 불신하는 여론이 커졌다는 점을 직시해야한다. 보수는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 보수와 진보가 이런 태도를 견지한다면 민족의 화해를 위해서 얼마든지 손을 잡고 대화하고 협력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이는 6.15공동선언 이후에 검증된 바 있다.

남북관계의 이중성

북한은 화해와 협력의 대상이고 통일의 동반자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정전체제 아래서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적대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화해협력이라는 측면을 강조해서 바라볼 수도 있고, 또는 군사적 대치를 우선해서 바라볼 수도 있다. 이 양자의 시각 차이를 해소하는 것은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군사적 대치가 완전히 해소되고 남북의 신뢰가 굳건해지기 전까지는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이런 시각차를 해소하는 일은 뒤로 미뤄야 한다. 즉 ‘북한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에서 파생되는 논란은 장기적으로 해결해야하는 과제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북한에 대한 시각이 다를 수 있지만 북한을 잘 다루지 않는다면 평화도 화해도 불가능하다. 진보와 보수는 ‘북한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가지고 갈등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를 가지고 협력해야 하는 것이다. 깊은 산 오솔길 옆에 있는 ‘작은 연못’을 기억해보자. 서로 싸워 한 마리가 죽고, 그놈 살이 썩어 들어가 물도 따라 썩어 들어갔다. 결국 연못 속에는 아무 것도 살 수 없게 되었다.

민초들은 이런 삶의 지혜에 익숙하다. 그래서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대북포용정책을 펼쳐도, 이명박 정부가 대북 강경정책을 펼쳐도 국민들의 70%정도는 꾸준하게 화해협력을 지지해온 것이다.

‘사상의 자유시장’을 신뢰해야

보수와 진보의 대화 능력은 우리 사회 민주주의의 척도이다. 일부 수구세력의 발언이나 행태는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이지만 건강한 다수의 보수와 합리적인 진보는 민주주의를 우리사회의 기본 원리로서 굳게 믿고 있다. 얼마 전까지 뜨거운 논란이 되었던 ‘종북논란’도 민주주의의 원리에 충실하다면 대화를 통해서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 생각에 대해서는 ‘사상의 자유시장’에서 얼마든지 후유증을 두려워하지 않는 찬반 토론을 보장해야 한다.

잘못된 생각은 보수나 진보나 모두 ‘사상의 자유시장’에서 국민들에게 외면당하게 될 것이다. 국민들이 심판할 수 있게 하면 된다. 처벌해야할 명백하고 현존하는 행동이 있을 경우에는 그 행동에 대해서 사법적으로 처리하면 된다. 법정에서 죄를 입증하고, 또 죄보다 무거운 벌을 내리지 않는 사법정의도 민주주의이다. 대선을 앞두고 새누리당이 다시 종북논란을 벌인다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새누리당을 먼저 심판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종북 시비거리를 제공하는 세력들 역시 국민들의 지탄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대북정책을 가지고 진보가 분단현실을 인정하고 보수가 분단을 정치적으로 악용하지 않는다면 보수와 진보는 민족의 미래를 향한 위대한 ‘평화의 약속’을 할 수 있다. 이번 2012년 대통령 선거는 보수와 진보가 바로 이런 평화의 약속을 하는 선거가 되어야 한다. 20세기의 유제 청산, 남북이 군사대결에서 벗어나 평화롭게 공존하면서 민족의 에너지를 공동번영의 길로 이끌어내는 비전, 북한을 상대하기 위한 전략, 국제사회의 발전에 공헌하고 존경받는 매력 넘치는 국가를 만들기 위한 전략, 이러한 것을 뒷받침하는 21세기적 신안보에 대해서 협력하고 경쟁하는 평화의 약속이 필요하다.

‘평화의 약속’이 새로운 ‘플랫폼 정치’를 가능하게

이것이 국민의 삶을 편안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기반을 조성하는 현대사회에서 필요한 ‘플랫폼(plafform) 정치’이다. 인터넷의 기반 장치를 플랫폼이하고 한 것에서 유래되어 이제 플랫폼은 국가, 사회 전반에 걸친 기반이 되는 것을 통용하는 용어로 의미가 확산되고 있다. 평화의 약속을 하는 것은 국민들에게 플랫폼을 만들어주자는 것이다. 21세기에는 그 플랫폼에서 국민들이 자유롭게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운용하는, 즉 백성(民)이 주인(主)인 튼튼한 나라(國)를 만들자는 것이다.

리더십의 변화가 이것을 가능하게 한다. 과거에 강력하게 이끌고 가는 것이 훌륭한 리더십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제는 과거 권위주위 시대처럼 일방적으로 이끄는 리더십이 필요한 시대가 아니다. 헤겔은 “여기에 장미가 있다. 여기에서 춤춰라”고 했다. 플랫폼을 잘 만들어서 백성들이 거기서 먼저 춤추게 하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이제 우리도 20세기 극단의 시대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1988 평화연구소 연구원
1995 민족회의 정책실장, 통일맞이 정책실장
1998 민화협 정책실장
2003 청와대 NSC 정책조정실 국장
2006 민주평통 전문위원
2009 존스합킨스대학 국제관계대학원 방문연구원
2012 통일맞이 정책실장, 한반도 평화포럼 정책연구팀장


(수정, 21일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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