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열 (중국 청화대학교 초빙교수, 영문 제4언론 책임주필)

 

중국 ”청년영웅” 라오진의 새로운 “조선관”: <四月网그룹> 회장 조선처녀에게 매혹되다

“김일성 주석 탄생 100돌 기념축전행사” 참가 도중 “중국청년영웅” 라오진이 참으로 아름다운 눈을 가진 미모의 아리따운 조선처녀에게 푹 빠진 사건이 발생했다. 체류 이틀 째 행사 때다. 국제친선대표단이 해외동포대표단과 함께 만수대 언덕에서 거행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첫 동상 제막식”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행진을 하고 있던 때다.

당시 대표단은 만수대 지역에 최근 새로 개관되어 세상에 소개된 둥근 원통형 모양의 대규모 유리건물 “인민극장” 앞을 지나고 있었다. 바로 옆에 “약 1만세대가 입주를 기다리고 있는” 새로 우뚝 솟아오른 현대식 만수대 아파트단지 옆 바로 옆에 우뚝 솟은 건물이다. 천여 명에 가까운 해외동포들과 국제대표단은 “보안검사”를 마친 뒤 만수대 방향을 향해 행진 중이었다.

행진 도중 들은 “김정일 국방위원장 동상” 관련 일화를 잠깐 먼저 소개한다. 그의 “동상제작 건은 생전 인민들로부터 수도 없이 제기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허락되지 않아 생전에는 세우지 못했다.” 심지어 김 위원장은 생전 “허락없이 동상을 제작하는 간부들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책임을 묻겠다!”고까지 자신의 동상제작을 엄히 금했다고 한다.

생전 “허락되지 않아 세우지 못했다”는 바로 그 “첫 동상”이 2012년 4월 13일 만수대언덕에 건립됐다. 김 위원장 동상은 만수대 언덕에 있던 기존의 동상을 새롭게 고친 김 주석 동상 바로 옆에 세워졌다.

국제친선대표단 속에는 군데군데 “조선옷”을 곱게 차려 입고 해외동포들과 타민족 대표단을 돕고 있던 조선사람들, 특히 아리따운 조선처녀들이 눈에 띄었다. 그들 가운데 특히 한 처녀에게 행진하고 있던 라오진 단장이 계속 눈길을 돌렸다. 눈치가 이상해 물었다: “관심이 있는가? 대화하고 싶은가?”고.

활짝 웃으며 좋아 어쩔 줄 몰라하는 라오진을 뒤로 한 채 서로들 “좋은 인연이 되어보라!”고 처녀에게로 다가갔다. 양국의 “전통적인 친선우의 혈맹관계가 자자손손 대대로 이어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래서였다. 조선처녀에게 간단하게 중국대표단과 특히 20대 후반의 중국청년영웅 <四月언론그룹> 라오진 회장을 소개했다.

“수백 만 평양시민” 가운데 중국어를 하는 사람들이 얼마인지 모른다. 이번 축제 참가 기간 알게 된 사실이다. 조선청년들 가운데 영어, 중국어를 하는 젊은이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이것은 오늘 남녘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통일조국의 미래를 내다볼 때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참으로 신기하다 싶었다. 라오진이 눈길을 떼지 못하던 바로 그 처녀가 그들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중국어를 아주 잘 하는. “21살의 리은희는 평양외대 중문과 출신”으로 중국어를 꽤 잘했다. 그날 그는 중국과 무슨 특별한 인연이라도 있는 듯 또 다른 중국대표단을 안내하고 있었다. 은희는 “평양인민봉사총국” 소속으로 <중국은행대표단> 통역이었다. 그렇다. 그날 그는 아무래도 중국과 특별히도 인연이 많은 조선처녀였던 것 같다.

“은희 동무”는 몹시 인상적이고 아름다운 눈을 가졌다. 아마도 라오진이 푹 빠졌던 이유가 아닐까 싶다. 행진 도중 마련된 “하늘이 주신 기회”를 마치라도 놓칠세라 그는 대단히 적극적이었다. 주변 눈치는 아랑곳 없는 듯 “조선처녀와의 생애 첫 가슴 두근거린 대화”에 라오진이 깊이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행진 도중 일종의 “민간차원의 조중친선우의”가 활짝 꽃피웠던 순간이었다고나 할까? 아니면 “평범한 조선처녀에게 한 눈에 반한 중국청년영웅의 새로운 조선인연이 시작된 순간이었다”고 할까?

국제대표단은 수십 만 평양시민과 함께 만수대 언덕으로 오르는 제일 밑 아래 계단에서 “동상제막식” 시작 전까지 약 1시간 정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시간이 라오진에게는 아마도 대단히 고마웠을 것 같다. 우리와 조금 떨어진 곳에 중국은행 대표단과 함께 서 있던 “조선처녀”와 계속 대화하고 싶은 눈치를 보이던 “중국청년”을 위해 안내선생에게 특별부탁을 했다.

조금 후 은희가 다시 라오진 쪽으로 다가왔다. 두 청년의 대화가 다시 이어졌다. 멀리서 웃는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던 중국은행 대표단에게 눈치가 보일 정도였다. 두 청춘남녀는 다시 깊은 대화에 빠져든 것 같았다.

놀라운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필자는 라오진과 2년 가까이 인연을 맺고 있다. 그의 부친과 필자는 거의 동년배다. 오히려 그의 부친이 한 살 어리다. 라오진과의 관계는 1년이 넘으면서부터 이젠 거의 부자지간처럼 됐다. 그와 사귀고 함께 일한 지난 시기 그가 조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 느낌 등을 거침없이 말한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조중친선” 등 동북아에 대한 기본적인 전략적 이해를 공유한 것 외에 달리 특별히 이야기한 것이 없다. 그냥 예의를 갖추어 조선을 대하고 존경을 표하는 정도였다.

한편 “수줍어하면서도 해야 할 말을 거침없이 또박또박 그것도 몹시 아름답게 말하는 것으로 소문 난 거의 모든 조선처녀들처럼” 리은희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 같다.

우리나라의 남남북녘(南男北女)란 말 뜻을 라오진도 들어 안다. 북경에서 여행 떠나기 전날 오리엔테이션을 하며 들려준 말이다. 바로 그 “北女” 아리따운 조선처녀에게 홀딱 반해 대화에 열중했던 중국청년이 얼굴이 상기가 되어 돌아왔다.

그리곤 난데없다 싶은 즉석발언이 시작됐다. 그가 조선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아마도 생애 처음 거침없이 털어놓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도 부탁한 것이 아니었다. 주변에 생면부지의 사람들도 모여 있었는데 괘념치 않았다. 평소 성격이 지나치리 만치 신중해 때로 “애늙은이” 소릴 듣는 라오진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마치도 무엇엔가 홀린 사람 같았다. 이전에 보지 못했던 갑작스런 모습이었다. 가까이 있던 해외동포 지인들 몇몇도 갑작스런 그의 발언에 귀 기울인 이유다. 주변 사람들을 향해 마치 무슨 중요한 선포라도 하듯 잔뜩 상기된 채 조선에 대한 자신의 새로운 이해를 거침없이 발표한 라오진의 즉석발언 내용은 대강 다음과 같다:

“세상에 이처럼 맑고 깨끗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처음 만난다. 자신은 물론 제 나라, 제 민족에 대한 자신감과 신심이 이리도 넘치는 사람들과 나라를 본 적이 없다. 제 나라와 민족은 물론 자신의 ‘최고영도자’에 대해 이리도 깊은 존경과 애정, 믿음, 자신감을 가진 사람들을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세상, 사물, 역사, 현실을 보고 깨닫고 이해하는데 있어 혹은 사람의 생각, 판단, 경험, 기준 등등이 때로 단번에 바뀔 수 있는 계기와 과정에 남녀간의 연애, 사랑, 감정 등이 끼칠 수 있는 일종의 신비스런 영향력에 대해 새삼 다시 생각케 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남달리 좋은 기억으로 뇌리에 남은 사건이었다.

이틀 뒤인 4월 15일 저녁 그들은 대동강가에서 다시 만났다. “김일성 주석 탄생 100돌 기념 경축축포야회”에서다. 김정은 제1비서를 비롯 당, 정, 군의 국가최고영도들을 위해 마련된 주석단 우측 바로 옆에 운집한 국제대표단 속에서다. 그들은 뜻밖에(?) 다시 만났다.

대단한 인연(?)이다 싶었다. 은희를 우연히 발견한 라오진 눈이 마치 빛을 발하는 듯싶었다. 또 다시 주위를 의식함 없이 환호하는 중국청년영웅을 평범한 조선처녀에게 맡기고 우린 군중들 속으로 파묻혀 들어갔다.

1시간 가량 진행된 축포야회 내내 다시 대화에 빠져든 그들 청춘남녀는 그날 이후 다시 만나지 못한 채 헤어졌다. 그들의 인연이 미래 언제 다시 어떻게 이어질지 아직 모른다. “건국 이후 최대최고의 축포행사”였다는 뜻깊은 “경축축포야회”에서 다시 이어진 그들의 대화와 인연이 언젠가 다시 이어질 수 있기를 꿈꿔본다.

그날 저녁 대동강가에서 진행된 경축야회는 세상에 흔히도 흔한 일반 불꽃놀이가 아니었다. 평양의 아름다운 밤하늘을, 특히 대동강가를 아름답게 수 놓았던 그날 저녁의 경축야회는 아마도 지구촌 딱 한 곳에서만 가능할 북녘동포들의 “일심단결”의 넋과 혼으로 쓰고 그린 하나의 대서사시였고 대화폭이 아니었을까 싶다. “불꽃놀이/축포”를 도구로 활용하여 북녘동포들이 집단으로 창조해낸 하나의 위대한 예술작품 그 자체였다고 평가해서 틀리지 않을 것 같다. 남녀노소를 불문코 대동강가에 모여든 해내외 군중들 속에 감동, 환호소리, 감탄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평범한 조선처녀에게 “홀딱 반한” 중국청년영웅이 그날 저녁 한 폭의 아름다운 예술 그 자체였던 경축야회을 온전히 즐기고 감상했을지 아니면 청춘남녀의 가슴 두근거린 대화에 또 다시 넋을 잃고 불꽃놀이 축포야회는 건성으로 보았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들만이 알 일이다. 분명히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아무래도 둘 다는 아니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중국항일항미전쟁영웅자녀모임”과 “조중친선우의강화”

앞 글 <방북기1>에서 밝혔듯 중국대표단엔 중국인민지원군 장성 출신으로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战争) 당시 역사에 유명한 “철원전투”를 승리적으로 지휘, 결속하여 혁혁한 공로를 세워 중국의 “국가영웅칭호”를 받은 차이창유안(蔡长元) 장군의 아들도 참가했다.

그는 아버지 영향인지 조선에 대한 “존경심”이 남달랐다. 글쎄 “뜨겁다”고 표현해야 옳을지 모르겠다. 그는 체류 내내 틈만 나면 필자를 껴안았다. 특히 뒤에 이야기할 부친의 조선친구를 찾아준 뒤 더욱 그랬다. 그는 기본적으로 “반제자주사상”에 기초해서 어제와 오늘의 북 역사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오늘 중국의 많지 않은 항미원조전쟁사가들 가운데 하나다. 그는 최근 코리아전쟁 관련 책(중문)을 출판했다.

체류 도중 그가 자신이 출판한 책과 함께 부친과 관련한 몇가지 문서들 그리고 오래된 사진(사본) 한 장을 북녘당국에 전해줄 것을 부탁했다. 특히 전쟁 때 아버지와 악수를 나누고 있던 사진 속의 당시 “조선의 장군”을 꼭 찾아 뵙고 이미 세상을 떠난 아버지 대신 꼭 “인사를 드리고 싶다”는 부탁을 했다.

순안비행장에서 찍은 듯싶은 사진 속에는 높은 지위로 보이는 양국 장성들이 손을 맞잡고 환하게 웃으며 찍은 모습이 담겨 있었다. 안내하는 분들을 통해 급히 부탁했다. 먼저는 사진 속의 그분이 누구이며 혹 살아계시다면 그분을 찾을 수 있는지도.

이틀 뒤 답이 왔다. 사진 속의 당시 그 장군은 “항일빨치산” 출신으로 왠만한 사람은 이름 석자만 들어도 익히 아는 “리을설 원수”였다. “아직 살아계시다”는 소식도 들었다. 문제는 90을 훨씬 넘기신 그 분의 “건강이 몹시 좋지 않다”는 소식과 함께 “바깥 거동을 못하신 지가 오래 됐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차이(蔡)가 뛸듯이 기뻐했다. 그의 눈에 눈물이 글썽할 정도였다. 그가 또 껴안았다. 평양방문을 마치고 돌아가기 전 그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이번 대표단에 참가한 <四月网> 군사문제평론가 가오양후이 선생도 함께 한 제안이다. 가오의 부친 또한 차이 부친처럼 항미원조전쟁에 참전했던 분이란 사실은 그때 알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북경에 와서 만나 알게된 가오의 부인도 항미원조전쟁 참전 중국인민해방군 장령의 딸이다.

그들이 공동으로 한 제안이다: “만약 허락된다면 중국의 항일항미전쟁영웅자녀들과 조선의 항일항미영웅자녀들과 친선교류를 시작하고 싶다. 선대 영웅들에 의해 시작된 양국의 전통적인 친선우의혈맹관계를 이어가고 싶다.”

그들 또한 작년 10월 후 주석이 지적한 “중국사회의 서방화 문제”를 염려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다. 중국사회의 급격한 “자본주의화” 곧 “서방화/미국화”가 중국사회에 야기하고 있는 온갖 형태의 정치사회경제문화종교사상문제들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체류 내내 “단 한곳이라도 항미원조전쟁 전적지를 방문하고 싶다”며 무척이나 필자를 졸랐다. 참고로 올 김 주석 100돌 기념4.15축전행사에는 약 천여 명의 국제친선대표단과 해외동포들이 참가했다. 그들을 도와 수고한 북녘동포들 가운데 행사 뒤 몸져 눕지 않은 사람들이 몇이나 될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들 모두는 참으로 수고가 많았다. 그들 모두는 축전기간 내내 잠시 쉴 짬이 없이 바빴다. 그들이 밤낮으로 뛰어다닌 기억이 새롭다. 봉사요원, 차량, 숙소, 통역요원들도 손이 모자라 애썼던 모습들도 기억난다.

한 예로 우리 대표단 통역을 맡아 수고한 30대 후반 두 사람도 북경대에서 학위를 끝내고 돌아와 평양외대 중문과에서 가르치는 교수들이었다. 이번 축제기간 북녘동포 거의 모두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그들이 대학교수건 통역요원이건 운전수건 접대원이건, 봉사원이건 안내원 선생이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되어 밤낮으로 분주히 뛰어다녔다. 국제친선우의대표단과 해외동포들을 위해 잠도 제대로 못잔 채 밤낮으로 수고했던 그들 모두가 특히 생각나서다.

북녘동포들 말처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역사상 최대최고의 민족대축제행사”가 연일 밤낮으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봉사안내요원들을 따로 빼어 달리 짬을 내 중국대표단을 “최소 하루가 옹글게 걸린다”는 “항미전쟁전적지”로 데려 갔다 돌아온다는 것은 시간관계상 사실 당시 거의 불가능했다. 미래를 약속하며 그들 모두를 달래느라 진땀을 뺐던 이유다.

그들 이야기 관련 북경에 돌아와 알게된 사실이 하나 있다. 중국에 항일항미전쟁영웅자녀들의 전국단위 모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것이다. 북경에 돌아간 뒤 차이와 가오가 그들 모임의 전국회장 격인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인사와 함께 사무실을 찾아왔다. 그 역시 1950년대 초 항미원조전쟁에 참전했던 중국인민해방군 장령의 아들이다.

앞에 간단히 소개했듯 우리는 “자자손손 대대로 조중친선우의관계”를 이어가기 위한 목적으로 “양국 전쟁영웅자녀들 간의 교류가 이어질 수 있기를” 바라는 내용들을 갖고 주로 대화했다. 언젠가 그들의 귀한 뜻과 꿈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중국언론대표단의 “MB시대 한국觀-조선觀”

여행 도중 대표단 성원 대부분과 나눈 “한국, 조선이해”에 대한 이해가 남달라 굳이 소개한다. “MB사대매국시대”가 빚어낸 이웃나라 사람들의 우리 민족의 비극적인 분단현실에 대한 하나의 비판적 비교분석이었다. 특히 오늘 남북의 차이가 참으로 서로 다른 그것도 거의 완벽하게 다른 현실에 대한 비판적 비유다. “남과 북이 서로 달라도 너무 다른, 하여 서로 다른 극과 극에 위치해있다”는 비유다. 그들은 주저없이 MB시대를 “친미친일사대매국에서 보기 드문 하나의 극단적 경우”라고 평한다. 반면 북은 국가를 세운 때로부터 오늘 이 순간까지 “반제자주노선” 측면에서 남녘과는 “극단적으로 다른” 그리고 “대단히 예외적인 경우”라고 평한다.

그들은 그러니까 남녘의 보수언론시각 특히 “조중동” 잣대와 표현으로는 아마도 “대단히 친북적”인 입장의 소유자들인 셈이다. 그들과 평양 체류 내내 대화한 내용을 한두 문단으로 정리하면 대강 다음과 같다:

“조선은 한국, 일본을 앞세운 미국주도의 제국주의연합세력과의 대결에서 세계반제화자주투쟁의 주요 국가로 자리매김한, 하여 오늘 세계에서 특히 많은 제3세계나라들에서 존경 받는 위치에 오른 대단히 예외적인 경우다.” “미국을 비롯 제국주의자들에게 한치의 물러섬 없이 싸우는 조선의 모습이 때로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신기하고 부럽기까지 하다.”

“조선의 그런 모습이 자신들에겐 많이 부족한” 모습이라며 바로 그것이 자신들이 “조선을 존경하게 만드는 주요 이유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정도다. 그들은 여행 말미에 특히 “남북이 어떻게 같은 민족인데 그리도 다를 수 있는지 의문스럽다”는 말도 덧붙였다. 물론 6.15시대가 아닌 MB시대에 있는 차이다. “6.15자주통일시대”와의 차이를 말함이 아니다.

특히 그들은 북이 자신의 “철천지 원수라는 제국주의미국과 일본 같은 나라들과 견결히 싸우는” 모습은 자신들에게 한편 “익숙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친선우의국가로 전통적인 혈맹국가”들인 중국, 러시아 그것도 “자원, 인구, 군사, 경제대국들인 이웃국가들”에 대해서도 때로 “반제자주독립” 같은 원칙적인 근본문제들에서 이해가 다를 때 당당히 “아니다!”고 말하는 “조선”의 모습은 때로 “생소하기도 하고 동시에 일종의 경외감 같은 것도 경험하게 된다”고까지 말한다.

위에서 요약해서 소개한 내용들은 중국대표단 성원 대부분과 여행 도중 내내 대화한 내용들이다. 새삼스러울 정도로 신선하게 들은 이야기들이라 종합해서 요약, 소개한 이유다. 그들의 생각과 고민, 꿈, 희망들을 종합한 내용이다. 친선우의관계에 있는 아무리 가까운 이웃이라도 근본문제들에서 서로 동의할 수 없을 때 어떤 대가와 희생이 따르더라도 자신의 반제자주노선을 굽히지 않는 “조선”에게 그들이 어떤 생각과 이해를 갖고 있는지 깊이 이해하게 된 계기가 됐다. 그들과 하루가 더할수록 더욱 깊게 대화하게 된 배경이다.

익히 잘 아는 <四月网>의 젊은 편집인들, 기자들은 물론 이번 처음 만난 사귄 쓰마난, 장지에 같은 사람들과도 서로 깊이 이해하고 가깝고 뜨겁게 사귀게 된 주요 배경이다.

매주 화요일 오후에 있는 청화대 정기 강의 때문에 5월 19일 떠나는 대표단을 나두고 17일 화요일 이틀 먼저 평양을 떠나야 했다. 축전공식행사가 끝난 16일 저녁 북녘정부는 해외동포들을 만찬에 초대했다. 한 500명은 넘직한 사람들이 들어가 앉을 수 있는 대연회장에서였다.

남녘과 세상이 익히 잘 아는 김양건 통전부장 등 북녘의 당과 정부 등 국가의 책임 높은 인사들이 주석단에 참가했다. 김정은 조선노동당 제1비서를 대신해 참가한 그들이 저녁만찬을 주최했다. 같은 민족은 아니지만 중국언론대표단도 저녁만찬에 초대됐다. 대단한 예외였다.

저녁만찬 뒤 술이 모두 거나해 고려호텔에 돌아왔다. 로비에서 “먼저 떠나 미안하다”며 중국대표단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다 순간 그들 모두에 의해 헹가래를 당했다. 덩치가 산만한 <환구재정> 장지에 총부편집인이 앞장섰다. 술도 취한 데다 졸지에 헹가래를 당해 정신없는 필자를 껴안고 수염까지 덥수룩한 그가 볼을 부비고 난리였다. 호텔로비에 있던 사람들 특히 서양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그들이 특히 재밌는 듯 웃으며 우리를 쳐다 봤다. 혹 그들 눈에 우리가 무슨 “게이”(?)들로 보인 것은 아닐까 싶기도 했다.

여행을 마치면서 중국대표단 거의 모두와 더 깊어지고 더 가까워지고 더 친해진 배경들이다. 중국대표단 성원들의 북에 대한 일정한 존경심과 함께 그들이 마음 깊이 간직한 “조선”에 대한 애정, 경외심 같은 것들을 깊이 들여다 보게된 여행이었다.

이번 여행은 몹시 힘들고 바빴지만 “조중혈맹관계의 전략적 중요성”과 “조중친선우의관계의 지속, 확대, 강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함께 공유한 여행이었다. 중국체류 7년째 되가며 과거와 달리 양국관계에 대해 더 이상 일희일비하지 않게 된 이유다. 양국관계가 때로 시련에 처하더라도 중국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해를 더할수록 깊어지며 갖게된 긍정적 변화 가운데 하나다.

그들은 조중관계를 논할 때 “순망치한”(脣亡齒寒)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이다. 순망치한이란 말 자체가 “양국관계가 상호적”이라는 뜻이다. 그들은 양국관계가 세상이 흔히 오해하듯 “일방적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아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다.

그들은 “조중관계”가 영토, 인구, 경제력의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상호대등한 관계라는 역사적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특히 양국관계가 “상호존중, 신뢰, 평등, 반제자주정신에 기초한 가장 가까운 혈맹관계”여야 한다는 “동북아의 군사전략적 이해관계”를 잘 알고 있는 많지 않은 중국지식인들 가운데 하나다.

이번 중국언론대표단에 참가한 사람들 대부분은 그러니까 “미국 국무성, CIA 등이 파견한 사람 혹은 비공식 대변인”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미국정부 입장과 거의 같아 보인다”는 비평/비판/의심을 안팎으로 받는 북경대 주펑 교수같은 인물과 생각이 많이 다르다. 특히 그의 대북관과 천지차이다. 그가 최근 서울에 다시 나타나 발언한 내용이 언론에 소개됐다. <통일뉴스>에도 그의 발언이 소개됐을 정도다.

주펑은 인민대 국제관계학원 쓰친홍 교수, 중공당교 장리엔구이 교수 등과 함께 중국의 대표적 “친미파/서화파” 그룹에 속하는 인물이다. 그들은 가끔 미국, 일본, 서울에 나타나 자신들이 마치 무슨 중국정부 대변인이라도 되는 듯 발언하고 행동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들은 때로 동북아 관련국가들 사이에 불필요한 오해, 혼란, 논란을 야기시키는 발언들로 그 배경이 늘 의심스러운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들에게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들의 대북관이 예외 없이 거의 모두 “대단히 친미적이다”이라는 공통점이다. 그들이 중국에서 “서화파”로 불리는 배경 외에도 한미일 보수언론에 툭하면 자주 등장하는 주요 배경이다. 최근 주펑 교수의 서울발언은 4월 13일 북의 ‘광명성 3호’ 발사 관련 4월 16일 유엔안보리 만장일치 의결과 관련해서다. 기고만장해진 MB 같은 사람들이 대단히 좋아하고 조중동 같은 친미사대보수지들이 두 손 들고 환영할 만한 발언이었다. 앞에 언급했듯 그들이 한국 보수언론매체들에서 유명세를 타는 주요 이유다.

주펑, 쓰친홍, 장리엔구이 등의 북에 대한 생각은 이번 방북한 중국언론대표단과 아주 많이 다르다. 주펑과 달리 이번 축전에 참가한 중국대표단 성원 대부분은 “30년 개혁개방이 가져온 전반적 경제발전”에 대해 한편 높이 평가하면서도 동시에 다른 한편으론 “중국사회의 급격한 자본주의화” 곧 “서방화, 미국화”가 빚어내고 있는 정치, 사회, 문화, 교육, 언론, 종교, 사상부문의 온갖 폐해들에 대해서도 깊은 염려와 함께 비판적인 생각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중국언론대표단 방북기 마지막 글이 될 <방북기 3>에서 그들의 일종의 “대북관” 혹은 “조선관”을 독자들에게 소개하려는 이유다. 특히 평양 체류 나흘 내리 그들이 “가까이 지근거리에서 보고 듣고 열광한 김정은 ‘조선노동당 제1비서’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정리해서 소개하려는 배경이다. 특히 그의 “4.15 첫 육성연설”에 대표단이 보인 반응, 생각, 해석 등을 소개하려는 이유다. 그들이 주펑, 쓰인홍, 장리엔구이 교수 등으로 대표되는 “서화파” 혹은 “친미파” 학자, 전문가들의 대북관과 얼마나 어떻게 다른지를 상호비교해보기 위해서다.

(중국언론대표단 방북기 III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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