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사 김양희 기자가 개인적인 이유로 지난 9월 26일부터 10월 28일까지 미국을 방문했다. 월가 시위와 애플사의 스티브 잡스 추모 현장을 보는 등 주로 미국의 동부지역을 여행하면서 느낀 생생한 소식을 몇 차례에 걸쳐 소개하고자 한다. / 편집자 주

100년 모습 지키고 있는 대한제국 공관

▲ 대한제국공관, 지붕 창문 모양 등 100년전 그 모습 그대로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기자]

대한제국 공관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박보균 기자가 쓴 ‘살아 숨 쉬는 미국역사’를 읽고서였다. 그는 2004년 우리 언론에 처음으로 대한제국의 공관을 발굴해 소개했다.

책에는 ‘살아있는 구한말의 비극’이라는 제목으로 “100년 전 고종의 밀명으로 설치한 주미 공사관, 가난한 약소국의 설움과 처절한 독립의지가 서려 있는 곳. 백악관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그 건물은 기적처럼 고스란히 남아있다”고 전한다.

그의 말대로 그곳은 자체만으로도 기적이었다. 여행자 가이드북에도 전혀 소개가 되어있지 않고 우리 교포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그곳을 책에 나와 있는 주소, ‘15 Logan Circle NW Washington DC’만 가지고 무작정 찾아 나섰다.

백악관 뒤편 걸어서 10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로간서클. 서클이라는 말대로 가운데 공원을 중심으로 한 바퀴 돌도록 길이 만들어져 있다. 공원은 흑인 노숙자들이 모여 있는데 이곳은 흑인들이 주로 찾는 구역이라고 한다.

길을 따라 한 바퀴 돌면서 대한제국 공관을 찾았다. 미국은 주소만 가지고도 집을 잘 찾을 수 있도록 구획정리를 잘 해놓았다고는 하지만 쉽진 않다. 그렇게 한 십 여분을 헤맨 뒤 한 집이 눈에 들어온다. 책에 나와 있는 100년 전 대한제국 공관과 지붕과 창의 모양 등이 영락없이 똑같다.

대한제국 공관은 미국에서 문화재도 아니고 특별한 보호를 받는 건물도 아니다. 게다가 워싱턴의 연방 의회 의사당의 높이 이상 고층건물을 지을 수도 없고 재개발이 아주 까다롭다는 이유로 문화재로 지정이 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불도 한 번 나지 않은 채, 100년 전 모습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14년간 짝사랑 외교, 비참한 최후

▲ 로간서클 15번지.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기자]

대한제국 공사관 건물은 조선 왕국이 1891년 1월 당시 거금인 2만5000달러에 구입해 청나라에 대한 간섭을 벗어나고자 대미 외교를 시작한 곳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해외공관이다.

1882년 있었던 임오군란으로 청의 영향력은 새삼 커져 1882년부터 청일전쟁이 일어났던 1894년까지 12년 간 조선의 외교는 청나라로부터 벗어나려는 절규였다고 한다.

당시 조선이 미국에 공관까지 설치한 데에는 1880년 경 주일청국 공사관인 황준헌이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위해 조선의 책략을 제시한 책으로 개항기 한국이 당면한 국제적 지위를 논하고 그 대외책을 시사한 외교의견서인 ‘조선책략’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에서 미국은 강대(强大)·공명(公明)·정의(正義)의 나라로 조선에 대해서 이를 얻을 욕심은 없고, 오히려 조선을 이롭게 할 것이라 하여 미국과 수호통상조약(修好通商條約)을 체결할 것을 권했고 고종이 이를 수락한 것이다.

조선은 1882년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맺었으나 조약 체결 후 바로 서울에 상주 공사관을 설치한 미국과 달리 돈이 없어 보빙 사절단이라는 외교단을 보내는 것으로 만족했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사절단 파견조차 쉽지 않았다고 한다. 중국은 조선이 사절단을 파견할 경우 속방으로 묶은 동북아의 관리 구도가 깨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1)조선 공사가 미 국무부에 갈 때 중국 공사와 함께 갈 것 2)연회에서 조선 공사는 중국 공사 뒤에 앉을 것 3) 주요 외교 교섭 사항이 있으면 먼저 중국 공사와 긴밀히 협상을 한 후 그 지시에 따르라는 조건을 내세우는 등 끊임없이 방해를 했다.

그런 방해 속에서 공관을 설치하고 1888년 첫 주미 공사 박정양이 워싱턴에 부임하면서 전세를 내 3년간 사용하다가 1891년 1월 드디어 로간 서클 15번지의 건물을 매입한 것이다. 당시 워싱턴에는 전 세계 31개국 공사관이 있었다고 한다.

14년간 미국에 짝사랑 외교를 한 곳이지만 1905년 9월 포츠머스 조약으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확보했고 포츠머스 조약 두 달 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됐다.

그해 11월 24일 미국정부는 서울에 있는 미국 공사관의 철수를 지시했다. 워싱턴의 훈령에 따라 서울에서 미국 공사관은 폐쇄됐다. 구미 열강 중 가장 먼저 조선과 조약을 맺었지만 공사관 철수도 제일 빨랐다고 한다.

1910년 한일합병에 즈음해 공사관은 정식으로 처분됐고 그해 6월 워싱턴의 우치다 공사와 양도증서를 교환, 단돈 5달러에 강제매각된 것이다.

더욱 가슴 아픈 사실은 소유권을 강탈하다시피 한 일본이 두 달 뒤 10달러를 받고 ‘풀턴’(Fulton)이라는 이름의 미국인에게 팔아버린 것.

워싱턴DC에 대한제국 공관 건물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담담하게 방문을 했으나 건물을 보는 순간부터 가슴 한켠이 아파온다. 건물은 서글펐던 100년의 역사를 온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복권에 당첨되면 제일 먼저 사야지”

▲ 로간서클에 위치한 공원 내 동상.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기자]

무작정 벨을 누르자 안에서 인기척이 나면서 “누구냐”고 묻는다. “혹시 이곳이 옛 대한제국의 공사관이 맞냐”는 질문에 “맞다”고 대답한다.

짜증스러운 그의 반응을 봐서는 관광 가이드 책자에 나오지는 않았지만 이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귀찮게 했음을 짐작케 한다.

미국에는 집 주소만 알면 현재 소유주가 누구인지, 이전에는 누가 소유를 했었는지 등을 누구나 볼 수 있다고 한다. 대한제국 공관의 지금 현 소유주는 티모시 젠킨스 씨로 그는 1977년 이 집으로 이사를 왔다고 한다. 이 집을 구입할 당시엔 몰랐지만 나중에 집문서를 자세히 살펴본 결과 한 때 대한제국 국왕이 소유주였던 시기가 있어 이 건물이 대한제국 공관이었음을 알게 됐다고.

물론 100년이 지나면서 흔적이 남아있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안을 좀 들여다 볼 수 있냐”는 부탁을 단호히 거절한다. 대신 그는 “밖은 마음대로 사진을 찍어도 좋다”고 허락한다. 눈물이 왈칵 나는 순간이다.

아직까지는 대한제국 공관에 대한 정부의 관심은 미흡한 상황. 중국 상해에 위치한 임시정부의 복원 등에는 관심을 갖지만 미국에 위치한 대한제국 공관은 그 역사적 가치가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외면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인사회가 적극 나서며 대한제국 공사관 건물을 사기 위해 여러 차례 시도했으나 집 주인이 시세의 두 배가 넘는 돈을 요구하곤 해 협상이 결렬되곤 했단다.

2009년 우리 정부도 문화관광부에서 30억원의 예산을 잡고 워싱턴 주재 외교관들이 맡는 등 대한제국 공관의 구매를 추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역시 집주인이 50억원 정도의 가격을 불러 흥정이 깨지고, 정부가 포기하며 30억원을 예산불용액으로 처리, 반납했다고 한다. 그 이후로는 예산 책정도 하지 않았다고 하니 언제 되찾을지 모르겠다.

주인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집값을 계속 비싸게 부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정도로 많은 돈을 요구할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그 돈을 마련해도 또 더 많은 돈을 요구할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든다.

억울한 마음에 고모는 복권에 당첨이 되면 개인적으로라도 꼭 대한제국 공관을 사겠다고 했다.(우리의 이런 마음은 다른 관광을 하면서도 종종 나타났다. 워싱턴DC 관광을 하면서 방문한 인쇄국-이곳은 우리나라로 하면 조폐공사로 매일 수백만 달러 이상, 매년 200억 달러 이상의 지폐와 우표를 찍어내는 인쇄소, 전시실이 있으며 투어를 통해 종이에 찍혀 나오는 지폐의 인쇄 과정을 볼 수 있다-에서 지폐뭉치를 보고 “저거 한 덩어리면 대한제국 공관 사고도 남겠다”라고 얘기하기도 했다.) 과연 고모의 복권 당첨이 빠를지, 우리 정부의 대한제국 공관 구입에 대한 관심이 빠를지 관심 있게 지켜봐야할 사안이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

▲ 한국전쟁추모공원.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기자]

다음으로 방문을 한 곳은 한국전쟁 추모공원. 내셔널몰 끝에 위치한 링컨 기념관을 사이에 두고 한국전쟁추모공원과 베트남 참전용사비가 위치해 있다.

한국전쟁 추모공원은 한국전쟁에 참여한 전사자들을 기리는 곳으로 우리에게는 더욱 의미가 깊은 곳이다. 비석에는 전사자들의 이름이 일일이 새겨져 있고 푸른 잔디밭이 펼쳐진 공원 한 가운데에 총을 든 19명의 군인을 묘사한 동상들이 서 있다. 잔디밭 사이의 대리석은 우리의 밭이랑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한국과 관련되어서 인지 이곳에는 외국인들보다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다. 한 편에는 한 대학교 모임에서 조화로 된 화환을 갖다 놓기도 했다.

▲ 베트남전쟁을 형상화한 조형물.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기자]

▲ 베트남참전비에 놓여있는 손편지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기자]

그러나 실제 전쟁에 대한 아픔을 느낀 것은 베트남 참전용사비에서였다.

이곳은 베트남 전쟁에서 전사하거나 부상 또는 행방불명된 병사들을 위해 만든 기념탑으로 검은 대리석 기념비에 거의 6만 여명에 달하는 전몰장병의 이름이 1959년부터 1975년까지 연대순으로 새겨져 있다.

한국 전쟁에 비해 비교적 최근의 전쟁이다 보니 유가족도 많이 살아있고 또 실제 참전한 군인들도 이곳을 많이 찾고 있다.

내가 방문했을 때는 휠체어를 탄 당시 베트남 전쟁에서 부상을 당했던 할아버지 한 분이 군복을 입고 이곳을 찾아 “전쟁은 어떤 이유로도 안 된다”고 외치고 있었다.

또 한 병사의 어머니는 아직도 기념비를 쓰다듬고 울고 있으며 기념비 곳곳에 손으로 쓴 편지, 선물 등이 놓여 있다. 어떤 가족들은 아이를 데려와서 이것저것 설명하면서 이곳을 산교육의 장으로 삼고 있다.

눈을 어디로 돌리던, 전쟁은 끝났을지 몰라도 아직까지 슬픔은 계속되고 있다. 이곳의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직도 많은 군인들이 각종 전쟁들에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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