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환(6.15남측위원회 집행위원장)


남쪽의 문제도 ‘진정성’이다

지금 ‘진정성’이란 말이 남북을 넘어 국제무대에서조차 널리 회자되고 있다. 사적 관계에서나 이야기될만한 ‘진정성’이란 단어가 냉엄한 국제정치 무대에서 이렇게 널리 사용되는 것은 참으로 ‘희귀한’ 일이다. 이는 그만큼 남북간 혹은 북미간의 불신이 심각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남이 북에 대해서 ‘진정성’이란 말을 사용할 때, 응당히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된다. 다른 어떤 사례보다도 연평도 포격사태는 북에 대한 남의 불신을 크게 확대하였다. 게다가 “만약 한국 정부가 주장하는 대로 천안함 사건이 북의 소행이라면” 북에 대한 남의 불신은 단순한 몇 마디 말로는 해소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반복되는 북의 언술 번복들도 이러한 불신에 일조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 임기 기간 당국간 대화와 접촉을 하지 않겠다”던 북이 7개월여 만에 “우리는 현 남조선당국이 임기 5년을 북남대화 없이 헛되이 흘려보내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입장을 바꾸는 것은 그 사정이야 어떻게 되었던 ‘말의 진정성’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진정성’이란 단어로 시험대에 올라야 할 대상은 북한만이 아니다. 사실 이명박 정부야말로 진정성과 관련하여 근본적인 문제제기 앞에 서있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혼란을 거듭하면서도 일관되게 하나의 방향으로 달려온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의심할 바 없이 ‘흡수통일’과 ‘북한 정권교체’의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고, 그 바탕에 있는 정세인식은 북한 급변사태 가능성이다. 그래서 정부 대북정책의 근저에 깔려 있는 핵심키워드는 ‘북한 (정권의) 변화’였다. 그리고 정부는 이러한 정책 변화에 대해 지금까지는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기보다 ‘치고 빠지는’ 식의 이중적 언술을 구사해왔다. 지난해 이명박 대통령의 8.15경축사는 사실상 ‘흡수통일’의 공식화였으나, 통일부는 곧바로 ‘흡수통일은 아니다’라며 부정하였다.

그러나 올해 통일부 업무보고 내용은 사실상 흡수통일을 전제로 한 ‘북한 정권교체’ 프로그램의 공식화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판단된다. 한반도 평화관리에 중점을 두었던 2010년과 달리 통일부의 2011년의 대북정책 기조는 한마디로 “북한 정권의 변화 없이는 모든 것을 중단”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북한의 근본적 변화 견인’ ‘북한 주민 우선의 대북정책 구현’ ‘북한변화(급변사태) 예측 시스템 강화’ ‘인권문제 등 북한 취약요소 정면 거론’ ‘5.24조치(남북관계 중단) 지속’ ‘개성공단 활성화보다 신변안전 최우선’ 등의 언술에 나타나 있는 정책목표는 ‘정권교체’를 위한 대북압박임이 분명하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가 한국의 올해 통일정책에 대해 “남한이 몰래 흡수통일을 꿈꾸고 있는 것은 세계가 모두 알고 있다”며 “국제사회가 이를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고 우려하고 있는 것은 결코 오해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상대에게 비수를 들이대면서 ‘우리는 대화하지 않겠다고 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정부의 태도야말로 ‘진정성’의 시험대에 올라야 할 상황인 것이다.

진정성 있는 대화를 위한 ‘제언’

그리고 ‘진성성’의 시험은 이미 시작되었다. 신년공동사설에서부터 남북관계 개선을 강조하던 북은 연일 남북대화 재개 제의를 하고 있고, 지난 10일에는 당국 간 회담을 위한 국장급 실무접촉과 적십자회담 개최, 개성공단의 경제협력협의사무소 동결해제 및 판문점 적십자채널 복원 등의 구체적 내용을 남측에 제안해왔다. 이에 대해 정부는 “남북 간 진정한 대화가 이뤄지려면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도발에 대한 책임있는 조치 및 추가 도발 방지에 대한 확약, 비핵화에 대한 진정성 확인이 필요하다”며 이를 위한 남북 당국 간 만남을 역제의하였다.

정부의 의도는 분명해 보인다. 우선 구체적 사안에 대한 남북간 협의 이전에 핵심문제에 대한 협의를 먼저 진행해야 한다는 ‘단계적 접근’이 하나이고, 또 하나는 천안함.연평도 사건 처리 및 비핵화 진정성 확인을 남북대화 재개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 역제의에 대해 지금 단계에서 성급히 ‘진정성’의 시비를 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것이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내외의 압력을 회피하고 대화 무산의 책임을 결국 북에 떠넘기려는 술책이라고 지금부터 공격을 가하는 것은 성급하다. 그것은 새해 들어 계속되는 북한의 대화공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만나지도 않고, 북한의 대화공세를 “국제사회에 대한 위장평화 공세이자, 우리 사회를 분열시키기 위한 상투적 전술”이라고 단정하는 정부의 발표는 매우 성급하다.

지금은 어떤 내용, 어떤 형식으로든 남북 간의 대화가 재개되는 것 자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물론 어렵게 실마리를 만든 남북 간의 대화가, 남북관계를 악화시키고 분단체제의 벽을 더 높이는데 활용되는 것으로 끝나서는 결코 아니 될 것이다.

우선 북은 남의 역제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천안함과 연평도 사태는 남이든 북이든 피해갈 수 없는 문제이다. 특히 연평도 사태는 남의 민간인이 북의 포격에 의해 희생되었을 뿐만 아니라, 향후 서해상의 군사적 충돌 방지책을 논의하는 출발점이 된다는 점에서, 북은 전향적으로 이 문제 논의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지점이 바로 북의 ‘진정성’을 확인하는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남쪽은 자신이 내건 ‘전제조건’에 대해 유연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북핵문제는 그야말로 ‘말 대 말’ 차원에서 포괄적으로 북의 ‘비핵화’ 입장을 확인하는 것 이상의 구체적 조치를 요구하는 것은 현 단계에서는 무리이다. 북핵은 북이 가진 ‘최고 최후의 카드’이며, 따라서 이것을 포기하게 하려면 남쪽 역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할 각오가 있어야 한다. 만약 정부가 북핵문제를 엄격한 전제조건으로 삼아 대화의 진전보다 북 압박에만 관심을 둔다면, 북한 정권교체가 정책목표일 것이라고 의심받고 있는 정부는 다시 한번 그 ‘진정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천안함 사건은 어떻게 할 것인가

마지막으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는 천안함 사건이다. 그 이유, 원인이야 어찌되었건, 천안함 사건은 이미 남과 북은 물론 국제정치적 수준에서 매우 심각한 ‘정치적 사건’이 되었다. 남은 북의 소행이라는 조사결과를 발표했으며, 북은 그에 맞서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정부의 천안함 조사결과에 대해서는 과학적으로도 많은 반증이 제시되고 있고, 많은 이들이 “폭발의 원인은 여전히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정부의 발표는 많은 지점에서 틀렸다”는 결론을 내놓고 있다. 중국은 물론 러시아도 정부 발표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조사결과 발표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여전히 ‘결정적 증거’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정부 조사 발표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과는 무관하게, 북한이 안했다는 단정도 현재로서는 내릴 수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남과 북은 어떤 식으로든 천안함 문제를 논의할 수밖에 없다. 해법은 단순하다. 우선 남과 북이 공동조사를 합의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북의 소행이라고 확신하는 남이 공동조사를 거부할 이유가 없고, 또한 자신의 소행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북도 ‘혐의’를 벗기 위해 ‘실질적인’ 조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적극 나서야 한다. 천안함 사건과 관련된 남의 진정성은, 이 사건에 대해 북의 사과와 책임을 요구하는 일방적 ‘공세’가 아니라, 오히려 ‘공동조사’ 등을 통해 천안함의 진상이 드러나도록 북한의 적극적 협력을 이끌어내는 노력을 얼마나 하느냐로 증명될 것이다. 북은 자신이 주장한 대로 천안함 사건 조사에 필요한 적극적 조치를 수용하고, 원인 규명 노력과는 별개로 사망한 천안함 장병들에 대한 북 나름의 성의 있는 위로와 유감의 표명도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미 사건 발생 이후 8개월이 지났고, 또 공동조사가 민감한 군사적 갈등을 더욱 확대시킬 수도 있다. 더구나 조사와 관련된 접근의 한계가 분명하여 진상 규명보다는 오히려 논란만 가중시킬 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동조사의 합의는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남북 간의 유사 사건에 대한 대응은 남북의 공동조사, 혹은 관련국을 포함하는 확대 공동조사 외에 객관성을 인정받기 어렵다는 점에서, 이는 중요한 선례를 만드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공동조사에 대한 합의는, 만약 정부의 발표대로 북이 천안함을 공격한 것이라면 이 합의 자체가 북에게는 향후 유사 사건의 재발 방지 서약이나 마찬가지의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2010년 들어와 한반도의 시계는 2000년 6.15체제에서 53년 정전체제로 사실상 후퇴하였다. 지금 한반도는 모처럼 만들어진 남북대화의 기회가 상대에 대한 공격의 기회로만 이용될 것인가, 아니면 2000년 체제 위에 새로운 협력적 평화질서를 창출하는 계기가 될 것인가의 기로에 서있다. 그런 점에서 남과 북은 바야흐로 ‘진정성’의 시험대에 서있다.

이승환 (6.15남측위 집행위원장)

이승환은 1958년 경북 포항에 태어나, 고려대 경제학과, 경남대 북한대학원(정치학 석사)을 거쳐 경남대 대학원 정치외교학 박사 과정을 수료하였다.

이승환은 통일맞이 정책위원장, 열린정책연구원 정치아카데미 소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시민평화포럼 공동대표이며, 또한 민화협 집행위원장,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다. 그는 지난 15년여에 걸쳐 남북 민간교류 활동을 전개해왔으며,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6.15남북공동행사 등을 진행해왔다.

그가 쓴 글로는 “문익환, 김일성 주석을 설득하다”(창작과비평, 통권 143호, 2009), “6월항쟁 20년, 남북 및 북미 관계의 변화와 통일담론”(창작과비평, 통권 137호, 2008), “2000년 이후 대북정책담론 연구”(북한대학원, 2008) 등이 있다.

개인 블로그 http://blog.naver.com/lsh2k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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