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릿고개(춘궁기)를 전후한 절량농가의 범람이 결코 처음 듣는 「뉴스」가 될 수 없음은 두말 할 필요조차 없거니와, 해방 후 두 번째 가는 최고 수확고를 올렸다는 1960 미곡년도에 있어서는 아직 3월에도 접어들지 못 한 현재, 절량농가의 호수가 정부당국의 부정확한 통계만으로도 43만호, 농업전문가들의 추계로는 90만 호를 넘을 것이라는 사실이 서울의 각 신문에 보도되고 있다.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하냐하는 것은 제2공화국 수립 후 장면정권이 최초로 소집한 지방장관회의에서 도백들이 한결같이 국토개발사업보다도 절량농가에 대한 구호를 호소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비록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였지만, 극동굴지의 미곡수출국가였고 특히 한반도 중에서도 곡식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남한에서 직접 곡물을 생산하는 농민들이 해마다 기아선상에서 헤매어야하는 이 기막히는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하여야 할 것인가? 먼저 우리가 분명히 해둬야 할 것은 이 나라의 농민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이유가 결코 그들이 게으르기 때문이라든가 우리네의 농업총생산량이 국민전체를 먹여 살리기에 부족하기 때문이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면 과거 이승만 정권이나 현재의 집권당이나 또는 전후군사원조를 제외하고서도 30억불 이상의 원조를 베풀어 온 미국정부당국은 땅을 자기손으로 갈면서도 굶주려야 만하는 한국농민들의 고질적 불행을 덜어주기 위해 무슨 대책을 수립, 실시해왔단말인가? 한마디로 말해서 부정적인 대답밖에 할 수 없음을 우리는 슬퍼한다. 아니, 농민들의 생활조건이 해를 거듭 할수록 악화해왔다는 것이 오늘의 냉엄한 현실이다.

2천억원에 가까운 농촌고리채가 이를 웅변적으로 입증하고있으며, 순백한 농민의 귀여운 딸들이 오로지 먹을 것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고향을 등지고 도회지의 식모나 매음부가 되지않을 수없다는 비극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으며, 소위 농지개혁을 실시한지 불과 10년도 못되어 「벼락지주」들이 다시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그것에도 견디지 못하여 땅을 팔지 않을 수 없는 슬픔이 이의 좋은 예가 아닐 수 없다.

해마다 수천만 불어치의 외국 비료를 사들여야만하면서(1961년도 비료도입자금 2천5백여 만불) 비료공장하나 제대로 세웠다는 말을 우리는 아직 듣지 못했으며 농업기술의 향상을 위해 이렇다 할 대책이 강구됐다는 말을 우리는 아직 듣지 못했으며, 경작면적이 괄목할 만큼 늘었다는 말도 우리는 아직 듣지 못하고 있다. 결국 미 원조당국이나 한국의 집권당은 농민들의 현실적 생활향상을 위해 일해왔다는 실속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으며 그렇게 하겠다는 성의나마 가지고 있는지 조차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장면내각은 상기한 농민들의 기아상태를 구제하기 위한 유일한 희망을 소위 국토개발계획이라는 것에만 걸고 있는 모양이며 또 그것을 과장해서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그 계획의 유일한 밑천인 미국 잉여농산물은 아직 선적도 되지않고 있다는 소식이고보니 장면정권은 도대체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려는 것인지 묻고 싶다.「4월 농민봉기를 이북괴뢰가 지령」운운 따위의 위협적 담화로 억압할 생각만을 앞세울 작정은 아닌가?

국토통일에 대한 이승만 정권 및 현 정권의 부정적 태도, 소위 농촌개혁의 기만성 그리고 해마다 들여오는 미 잉여농산물문제 등이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한 핍박한 농촌경제사정의 현명한 개선이 있을 수없다는 것은 새삼 되풀이할 필요조차 없을 줄 믿거니와, 장면내각은 속수무책으로 방관만 하지말고 무엇이든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 아닌가?

우선 농민이 잘 못사는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인 농촌고리채 문제를 과감하게 정리하는 입법조처라도 취할 용의가 없는가? 이것이 너무 급진적이라고 여긴다면 농촌고리채를 일정한 기간동안 동결하는 「모라토리움」제라도 제안해 볼 의사는 없는지, 그 태도를 밝혀두는 것이 집권당으로서의 떳떳한 길일 것이다.

[민족일보 1961년 2월 20일자]

絶糧農民들의 慘相을 傍觀할셈인가?
-執權黨의 果敢한 施策을 促求한다-

보릿고개(春窮期)를 前後한 絶糧農家의 氾濫이 決코 처음듣는 「뉴스」가 될 수 없음은 두말할必要조차없거니와, 解放後두번째가는 最高收穫高를 올렸다는 一九六○米穀年度에 있어서는 아직 三月에도 접어들지못한現在, 絶糧農家의 戶數가 政府當局의不正確한 統計만으로도 四十三萬戶, 農業專門家들의 推計로는 九十萬 戶를 넘을것이라는 事實이 서울의 各新聞에 報道되고 있다.
이問題가 얼마나 深刻하냐하는 것은 第二共和國樹立後 張勉政權이 最初로召集한 地方長官會議에서 道伯들이한결같이 國土開發事業보다도 絶糧農家에對한 救護를呼訴했다는事實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비록 日本帝國主義者들의 植民地였지만, 極東屈指의 米穀輸出國家였고 특히 韓半島中에서도 穀食으로 自他가 共認하는 南韓에서 直接 穀物을 生産하는 農民들이 해마다 饑餓線上에서 헤매어야하는 이 기막히는 現像을우리는 어떻게 理解하고 說明하여야할것인가?먼저 우리가 分明히 해둬야 할 것은 이나라의 農民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理由가 決코그들이 게으르기 때문이라든가 우리네의 農業總生産量이 國民全體를 먹여살리기에 不足하기때문이아니라는 事實이다.
그러면 過去 李政權이나 現在의執權黨이나 또는 戰後軍事援助를除外하고서도 三十億弗以上의援助를 베풀어온 美國政府當局은땅을自己손으로 갈면서도 굶주려야만하는 韓國農民들의 固疾的不幸을 덜어주기위해 무슨對策을 樹立, 實施해왔단말인가? 한마디로 말해서 否定的인 對答밖에 할 수없음을 우리는 슬퍼한다. 아니, 農民들의 生活條件이 해를거듭할수록 惡化해왔다는 것이 오늘의冷嚴한現實이다.
二千億園에 가까운 農村高利債가 이를 雄辯的으로 立證하고있으며, 純白한 農民의 귀여운 딸들이 오로지 먹을것이 없다는理由만으로 故鄕을 등지고 都會地의 食母나 賣淫婦가 되지않을수없다는 悲劇이 이를 뒷받침하고있으며, 所謂 農地改革을 實施한지 不過十年도 못되어 「벼락地主」들이 다시 小作農으로 轉落하고 그것에도 견디지못하여 땅을 팔지않을 수 없는 슬픔이 이의 좋은例가 아닐수 없다.
해마다 數千萬弗어치의 外國肥料를 사들여야만하면서(一九六一年度肥料導入資金 二千五百餘萬弗) 肥料工場하나 제대로세웠다는말을 우리는 아직 듣지못했으며 農業技術의 向上을위해 이렇다할 對策이 講究됐다는말을 우리는 아직듣지 못했으며, 耕作面積이 刮目할만큼 늘었다는말도 우리는아직 듣지못하고 있다. 結局 美援助當局이나 韓國의 執權黨은 農民들의 現實的生活向上을 위해일해왔다는 實續을 보여주지 못하고있으며 그렇게 하겠다는 誠意나마 가지고있는지조차 疑心하지않을 수 없다.
지금張勉內閣은 上記한 農民들의 饑餓狀態를 救濟하기爲한 唯一한 希望을 所謂 國土開發計劃이라는것에만 걸고있는 모양이며또 그것을 誇張해서 宣傳하고 있다.
그러나 그計劃의 唯一한 밑천인 美國剩餘農産物은 아직 船積도되지않고있다는 消息이고보니 張政權은 도대체 이問題를 어떻게다루려는 것인지 묻고싶다.「四月農民蜂起를 以北傀儡가 指令」云云 따위의 威脅的 談話로 抑壓할생각만을 앞세울 作定은 아닌가?
國土統一에對한 李政權 및 現政權의否定的態度, 所謂農村改革의欺瞞性 그리고해마다 들여오는美剩餘農産物問題등이 根本的으로 解決되지않는限 逼迫한農村經濟事情의 賢明한改善이 있을수없다는 것은 새삼되풀이할 必要조차 없을줄믿거니와, 張內閣은 束手無策으로 傍觀만하지말고 무엇이든對策을세워야할것이 아닌가?
우선 農民이 잘못사는 가장큰 原因中의 하나인 農村高利債問題를 果敢하게 整理하는 立法措處라도 取할 用意가없는가?이것이 너무 急進的이라고 여긴다면 農村高利債를 一定한期間동안 凍結하는 「모라토리움」制라도 提案해볼意思는 없는지, 그態度를 밝혀두는 것이 執權黨으로서의 떳떳한 길일 것이다.
[民族日報 1961年 2月 20日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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