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죽게됐다 집어쳐라”야...
내 살아생전 통일 없을 듯
학생들은 기특하나 조직없어

『그런 걸 물어 뭣 합니까 소원이 있다면 살아생전에 평안도 용강 땅을 밟고 싶은거죠』

이옹의 말이었다. 망국의 설움을 안고 중원의 산천에 통곡을 보내며 춘풍추우 4~50개 성상을 해외에서 보낸 노옹의 ○원(해석불가-편집자 주)이었다.

『일제치하에서 해방되면 고향산천을 밟을 줄 알았죠 밤낮을 가림없이 광복의 그날을 빌고 빌었죠. 이국○○○○은(해석불가-편집자 주) 처량하였습니다. 조국없는 설움에 통곡은 몇 번이었고 나라잃은 울분에 치를 떨긴 몇 번이었던지...스물여섯에 고국을 떠나 나이일흔에 돌아와 보니 삼팔장막은 굳게 닫히고 고향땅 갈 길은 끊겼습니다』

아득한 옛날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60년전-평안도 용강의 산천을 그리며 가슴을 태우는 노옹의슬픔이었다

『당신과 같이 젊은사람들에게는 남북통일이 틀림없이 있겠지만 나와 같은 늙은사람에게는 통일이 없을 것 같아요. 나이 여든넷이라면 벌써 갈 날 정해 놓은 것 아닙니까. 그래도 몇 년 더 살면서 통일되는 그날을 맞는 것이 내 소원의 전부이지만 아무래도 몇 년 안으로는 통일이 없을 것같아 민족적인 주체세력이 이렇게도 약한 마당에 통일이란 무슨 통일이란말입니까?』

문 밖 출입만을 겨우 할 수 있게 끔 극도로 노쇠한 이옹은 정릉 한 모서리의 조그마한 후생주택에서 가쁜 숨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허술한 「유엔」잠바를 걸친 옹은 이따금 얼굴에긴장을 더했다.

『그래도 요새 학생들은 기특한 점이 있읍디다. 자주적인 교육을 받지 못 한탓으로 민족의식이 공백상태에 있는 줄 알았더니 무척제법이야. 신문을 보니 통일운동에 열정적이던데 그렇지만 학생들의 그 숭고한 열정이 얼마나 주효할 것인지 나는 별로 기대하지 않아 학생들에겐 열정적인 정의는 있지만, 성과를 바랄만한 조직이 없어 조직없는 정의는 무능한 것이기에 말이야 당신(기자를 가리키며) 도 보았을 테지만, 바로 그 4․19 말야,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중국사람이 받는 이치지. 원 그럴 수가 있어. 4․19, 4․19 하지만 혁명의 보람이 도대체 뭐냐말이야. 이젠 못 살겠다 갈아보자가 아니라 죽게됐다 집어치워라데. 여기저기서「하와이」영감님을 다시 모셔와야 한다는 원성뿐이니 이걸 어떻게 수습할 작정인지』

80평생을 조국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한 옹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멀건한 시선을 천장에 주고 말없이 누워있던 와석의 이옹은 한참만에야 말을 이어 다음과 같이 끝맺는 것이었다.

『자주성의 확립으로 국기를 튼튼히 하는 것이 뭣 보담도 초급 한 문제야. 장면 씨에게 보내고싶은 말은 위급한 조국의 현실에 비굴하지 말란 말이야. 미국과의 우의도 좋지만 내 조국 내 민족의 앞날을 먼저 생각해야해. 파쟁을 그만두고 일치단결하여 이 난국에 대처하는 것 만이 우리의 활로야』

이강 씨 약력

▲ 평남 용강 출신 (당 80세)
▲ 1903년「하와이」에 이주
▲ 1908년 대동공보사 주필
▲ 1925년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의장
▲ 1928년 중경에서 일경에 피체 옥고 2년
▲ 1946년 대만교포 선무단장
▲ 1946년 망명 40년만에 귀국

[민족일보 1961년 2월 19일자]

<해설>
오산 이강은 1878년 4월 평안남도 용강에서 출생하였다.1903년 미국 하와이로 이주하여 도산 안창호를 만나 1905년 항일운동 조직인 공립협회를 창설, <공립신문>을 창간하였다.
1906년 귀국, 신민회 조직에 참여하였고, 1908년 <해조신문>을 창간, 독립운동과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그러나 얼마후 <해조신문>이 운영난으로 폐간되자 다시 <대동공보>를 창간, 편집장을 맡았다.

1910년 <대동공보> 정간으로 러시아 시베리아 치타로 건너가 <정교보>를 발행, 1919년 강우규 의사 의거에 연루되어 일본 헌병에게 체포, 본국으로 압송되었으나 곧 풀려나 상해로 가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1945년 광복이후 중경 임시정부의 명령으로 1946년 대만 교포들의 선무단 단장이 되어 대만으로 갔다가 귀국하였다.

이후 흥사단, 한중협회(여기서 중국은 대만을 지칭) 간부를 역임하고 남산고교 교장을 지냈으며 1964년 10월 사망, 독립훈장 건국장에 추서되었다.

曠野의 소리(7)

이젠 “죽게됐다 집어쳐라”야...
내 살아生前 統一 없을 듯
學生들은 奇特하나 組織없어

『그런걸물어 뭣합니까 所願이있다면 살아생전에 平安道龍岡땅을 밟고 싶은거죠』
李翁의말이었다. 亡國의설움을 안고 中原의 山川에 痛哭을보내며 春風秋雨 四五十個星霜을 海外에서보낸 老翁의 ○願이었다.
『日帝治下에서解放되면 故鄕山川을 밟을줄알았죠 밤낮을 가림없이 光復의 그날을 빌고 빌었죠 異國○○○○은 凄凉하였습니다. 祖國없는 설움에 痛哭은 몇 번이었고 나라잃은울분에 치를떨긴 몇 번이었던지...스물여섯에 故國을 떠나나이일흔에 돌아와보니 三八帳幕은 굳게닫히고 故鄕땅갈길은 끊겼습니다』

아득한 옛날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六十年前-平安道龍岡의 山川을 그리며 가슴을태우는 老翁의슬픔이었다

『당신과같이 젊은사람들에게는 南北統一이 틀림없이 있겠지만 나와같은 늙은사람에게는 統一이 없을 것같아요. 나이여든넷이라면 벌써 갈날정해놓은 것 아닙니까. 그래도 몇 년더 살면서 統一되는 그날을 맞는 것이 내所願의 全部이지만 아무래도 몇 년안으로는 統一이없을것같아 民族的인 主體勢力이 이렇게도弱한 마당에 統一이란무슨統一이란말입니까?』

門밖出入만을 겨우할 수있게끔 극도로 老衰한 李翁은 貞陵 한 모서리의 조그마한 厚生住宅에서 가쁜숨에괴로와하고 있었다. 허술한 「유엔」잠바를 걸친 翁은 이따금 얼굴에긴장을 더했다.

『그래도 요새學生들은기특한점이 있읍디다. 自主的인敎育을 받지못한탓으로 民族意識이 空白狀態에 있는줄알았더니 무척제법이야. 新聞을보니統一運動에 熱情的이던데 그렇지만學生들의그崇高한熱情이얼마나 奏効할것인지 나는 別로 期待하지않아學生들에겐 熱情的인 正義는 있지만, 成果를바랄만한 組織이없어 組織없는 正義는無能한것이기에말이야당신(記者를 가리키며) 도 보았을테지만, 바로 그四․一九말야, 재주는 곰이넘고 돈은 중국사람이 받는 이치지. 원 그럴수가 있어. 四․一九, 四․一九하지만 革命의 보람이 도대체 뭐냐말이야. 이젠 못살겠다 갈아보자가아니라죽게됐다 집어치워라데 여기저기서「하와이」영감님을 다시모셔와야 한다는 怨聲뿐이니 이걸 어떻게 收拾할作定인지』

八十平生을 祖國과함께 運命을같이한 翁의 얼굴에 愁心이가득했다. 멀건한視線을 천장에주고 말없이 누워있던臥席의 李翁은한참만에야 말을이어 다음과같이 끝맺는것이었다.

『自主性의 確立으로 國基를튼튼히 하는 것이 뭣보담도 焦急 한 問題야. 張勉氏에게보내고싶은 말은 危急한祖國의 現實에 卑屈하지말란말이야. 美國과의 友誼도 좋지만 내祖國 내民族의앞날을 먼저생각해야해. 派爭을 그만두고 一致團結하여 이難局에 對處하는것만이우리의活路야』

李剛氏 略歷
▲平南龍岡出身(當八十世)
▲一九○三年「하와이」에移住
▲一九○八年 大東共報社主筆
▲一九二五年 上海臨時政府 議政院議長
▲一九二八年 重慶에서 日警에 被逮 獄苦二年
▲一九四六年 臺灣僑胞宣撫團長
▲一九四六年 亡命四十年만에歸國

[民族日報 1961年 2月 19日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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