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률 (평화경제미래포럼 대표, 전 615남측위 공동대표)

오는 6월 26일은 백범 김구 선생이 서거한 날로부터 61주년을 맞이하는 날이다. 60여년 전 분단 당시의 정세를 돌아보자면 백범이 남북의 합작을 위해 마지막으로 심혈을 기울였던 1948년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60여년 전 4월, 1948년의 4월은 일제로부터 해방된 조국이 남북으로 나뉘어 서로 다른 길을 걸으면서도 38선이라는 분단선을 없애고 나라의 완전한 독립에의 열망이 결실을 맺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중대 분기점에 서있던 시기였다.

이승만, 처칠보다 먼저 ‘동구권 철의 커튼(Iron Curtain)’ 주창

해방정국에서 이승만은 정통성은 물론 신망도 상해 임정세력의 그것만큼도 못했으며, 누구보다 먼저 미국의 배경으로 귀국을 했으나, 처음부터 미군정의 선택받은 인물도 아니었다. 따라서 이승만은 미국인보다도 한술 더 떠서 미국식 냉전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고 미국의 신임을 받기 위해 앞장서 나갔던 사람이었다.

동서 냉전의 상징으로 떠오른 동구권에 대해 처칠보다 먼저 “발트해의 슈테친으로부터 아드리아해의 트리에스테에 이르기까지 ‘철의 커튼’(Iron curtain)이 드리워져 있다”라고 주창한 것이 이승만이다.

1945년 해방된 조국에 돌아온 김구, 김규식을 비롯한 여러 정치세력들은 형식상으로는 이승만을 끼고 정치 합작을 하려고 했다. 여운형을 비롯한 중도 및 좌파세력도 처음에는 그랬다.

그러나 이승만과 그 추종세력은 미군정 하에서 득세하는 세력이면서 편향된 길을 갔기에, 폭 넓은 합작, 좌우와 남북을 아우른 합작에는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냉전의 골이 깊어지는 와중에서 민족 자주적 역량의 결집에 장애를 조성함으로써 민족이 분단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했다.

김구 등, 동족 분단에 맞서 최초의 남북 정치협상회의 성사

해방된 조국의 남과 북에서 다수 대중의 지향과 요구는 남과 북에 통일된 정부를 세우고 이 정부가 완전한 독립을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 대세였다.

미군정이 인정치 않은 임시정부 간판을 갖고 들어온 여러 인사들도 차츰 ‘단선, 단정’을 부르짖는 이승만과 그 추종세력, 이를 비호하는 내외 분열주의세력에 반대하여 민족자주역량의 결집에 호응하는 국면으로 발전되고 있었다.

해방 3년사의 되돌이킬 수 없는 분수령을 맞이하는 이러한 시점에 북으로부터 하나의 제안이 서신으로 왔다. 그것은 남북의 지도자들이 회동하여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연석회의(남북연석회의)”를 갖자는 남북 정치협상회의의 제안이었다.

남쪽의 여론이 들끓었다. ‘단선 단정’을 반대하는 민족주의자들이 북에 가기만 하면 잡혀 갇힐 것이라는 유언비어까지 유포되었다.

“‘신탁통치’ 자체를 반대하고 반공의 일선에 있었던 김구는 ‘단선 단정’이 결국 민족사에 동족상잔의 전쟁이라는 참화를 불러올 것으로 예견하고, 북행을 결심하면서 자기의 이와 같은 심중을 ‘3천만에게 읍고함’이라고 밝혔다.” (송남헌, 해방 30년사 1권)

“이제껏 조국의 독립을 연합국(미,소)이나 유엔에 희망을 두었으나...지금에 와서는 죽거나 살거나 우리 민족 자력으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다.” (당시 <서울신문> 기사)

“북쪽의 공산주의자들도 결국 우리와 말이 같고 마음이 같을 뿐 아니라 피가 서로 맥맥히 흐르고 있지 않나...38선이라는 국경 아닌 국경으로 말미암아 외국인의 턱밑만 쳐다보고 말을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담판을 해보아서 안되면 차라리 38선을 베개삼아 베고 죽더라도 가는 것이 마땅하다.” (당시 <자유신문> 기사)


전쟁, 그리고 민족 분단의 장벽을 더욱 높여 온 한미관계 축 일변도

최초의 남북 정치협상회의인 1948년 4월의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한 사람들이 우려한 바와 같이 국토의 분단, 국가의 분단은 1950년 전쟁의 참화를 불러왔고, 전쟁의 참화는 동족끼리 대결을 더욱 부추켜 민족분단을 심화시켰다.

정전협정이 권유하고 있는 남북의 통일을 위한 고위급 정치회담은 열리지도 않은 채, 곧 이어 한미 상호방위동맹을 체결한 것은, 냉전 최첨단에서 대결의 장기화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긴장과 대결을 부추키는 세력이 득세할수록 한반도 정세는 분단 장벽을 높여 왔고, 법적으로 오래 끌 수 없는 정전상태, 준전시상태의 상시화로 인한 군사적 대치는 동서 냉전 해체 이후에도 '구 소련을 대신하여 북을 미국의 가상 적국의 한축으로 해서'(서재진, 2007년 10월 통일연구원 발표문 인용) 신냉전시대를 만들어 오고 있다.

그간의 분단사에, 6.15공동선언, 10.4선언의 합의는 서로가 '적대시와 대결조장'을 그만 두며 무력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단결과 통일을 지향하는 데서 남북 정치협상회의의 정신을 이어 반세기 만에 살려낸 귀중한 성과물이었다.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실현하고자 하는 6자회담, 북미 간의 정세도 반전을 거듭해 왔다. 입장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6자회담이 반복을 거듭하던 당시 정세에서 이해하기 힘든 것으로 미국이 보여준 자기 정책상의 이중성을 간과할 수 없다.

2007년 10.4 선언 하루 전에 당시 교착 상태에 있던 6자회담 2단계의 돌파구로서 북미 간에 10.3 합의가 있었다. 남북 사이에 정상 선언이 있게 되는 하루 전에 10.3합의 내용을 좋다고 한 것이 부시였다. 이후 미국이 들고 나오는 '되돌이킬 수 없는' 북핵 폐기라는 귀절은 이 10.3합의문에는 없다.

미국의 부시는 10.3합의에 나중에 그렇게 강조할 것이 빠졌다면 그 합의를 늦추었어야 했지 않을까? 부시가 그 임기 내에 남, 북, 미 사이에 한반도 종전선언을 못할 것도 없다고 노무현 정부를 끌었기에 더더욱 그렇다.

노무현 정부로부터 이명박 정부로의 교체기와 겹치는 부시 정부 말년의 행보는 이전까지의 합의를 접어버리고 명문화 되지 않았던 새로운 선행 조건을 제시하는 것으로 이후 6자회담에 교착의 계기를 만든 것뿐이었다.

여기에 이명박 정부 인수팀과 부시 오바마 정부 인수팀의 일정한 교감이 오고 가는 형태까지 끌어안고 있었다. 2008년 이명박 정부 초기 부시 정부에 내민 '한미동맹 미래비전'에 2007년 10.4 남북정상선언의 이행과 배치되는 정세를 불러올 것으로 예감되는 대목이 있었다.

예감은 '비핵 개방 3000'의 제시와 아울러지고 있었다. 상대가 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소득을 3000달러로 만들어 줄 테니 핵프로그램 신고 단계에서 무기급의 '가진' 핵을 먼저 내놓으라는 이명박 정부 방식은 적어도 상대방을 인정해야 한다는 기본전제를 무시한 것이 아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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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측에 들어가는 현금성 대가와 지원만 철저히 봉쇄하면 압박이 굴복을 가져 올 거라고 공언하는 바람에, 금강산관광이 서너 푼의 돈으로 보이냐는 반격과 함께 남북교류관계의 상징적 창구가 폐쇄된 측면도 있다.

북을 '절대로 힘으로 굴복시킬 수 없다'는 학습을 미국 역대 정부가 하기까지의 우여곡절은 다시 돌아볼 것도 없이 그만하면 충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이 이러한 학습 효과까지 무시한다면 미국에도 인식차원에서 뒤지는 것이 되지 않을까 묻고 싶다.

천안함 침몰 사건으로 몰려오는 광풍 앞에 국민 다수의 인내심은 한계를 넘어섰다고 투표로 보여주는 상황에 까지 와버렸다. 그런데도 남북 대결을 부추기는 대북심리전 확성기며, 서해상에서 더욱 첨예화된 한미합동 군사훈련을 벌리며 남북 대결 정세의 위험한 수위를 무릅쓰고 질주해 간다면 불안한 국민의 가슴은 생명과 재산의 안녕을 다짐한 헌법정신을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가?

이명박 정권, 6.15정신으로 돌아오고, 전쟁의 위기를 불러오지 말라

2010년 민족 분단 60년을 맞이하는 이 해에 전쟁의 위기 앞에 직면하느냐 마느냐 하는 초유의 막다른 골목에 국민이 몰리지 않길 바라는 바람은 너무도 간절하다.

집권 초부터 달려온 역주행이 국제조약이나 다름없는 남북정상회담 합의 정신의 파탄을 결과했다. 이명박 정부의 일방통행식 '원칙' 강조는 이미 보아온 부시 정부의 '근본주의' 교리만큼이나 상대방에게는 일관된 '비원칙'의 강요나 다름없다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중국의 유명한 시인 두보가 설파한 바와 같이 고래로 전란의 먹구름이 몰려오면 살아남는데 힘든 것은 오로지 힘없는 다수의 대중이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한때 이명박 정부가 6.15선언도 10.4선언도 뛰어 넘어 남북 사이 합의의 전범처럼 추켜세웠던 그(노태우 정부) 시기 남북기본합의서의 제 1장에 들어가기에 앞서 전문에서 “남북 사이의 관계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한 관계”라는 규정을 어느 정도나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 의아스럽게 느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상호 비방 중지는 1991년의 남북기본합의서 조문에도 들어가 있는 것이고, 실제로 서로 경계선에서 비방 방송을 중지한 것은 김대중 정부에 들어와서였다. 수없이 쌓고 쌓았던 신뢰조성의 역사적 노력들이 굴복 강요를 유일하게 밀고 가는 이명박 정부에서 거의 물거품으로 되고 말면 후일 이를 어떻게 다시 채워 놓을 것인가?

그런데도 일촉즉발의 남북 대결을 부추키는 대북 방송 확성기며, 서해상에서 더욱 첨예화된 한미합동군사훈련이 항공모함과 잠수함을 앞세우고 실제 작전을 상정해 질주해 나간다면 국민의 불안한 가슴은 생명과 재산의 안녕을 다짐한 헌법정신을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가?

1948년 4월 최초의 남북 정치협상회의-남북연석회의의 정신이 관철되었더라면 우리 민족은 더 이상 민족 분단의 시련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민족의 분단을 벗어나기 위해 '무력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협상에 의해 단결을 실현해 나가자고 한 것은 1972년 7.4 공동선언에서도 확인된 것이다.

남북이 정치협상 방식으로 나가자는 것만이 전쟁의 참화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도를 올바르게 제시한 것이라는 데 무슨 이견이 있을 것이며, 사족이 붙을 필요가 있는가?

문제는 실천으로 이행해 가는 길에서 성패가 좌우될 뿐이라는 것이 6.25를 다시 맞는 이 시점에서 대다수가 공감하는 교훈이 아닌가?

60여년 전 남북 최초의 정치협상회의 정신으로 돌아가자

남북이 분단 60여 년사에 한 단계, 한 단계 신뢰를 더 높여나가기 위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거쳐 왔는가? 한 단계씩 성과를 높여 나가는 데 대개 10년에서 20년의 터울을 거쳐서 가까스로 어떤 작은 봉우리에 겨우 올라갈 수 있었지 않은가?

이제 한 시기마다 한 구절씩만 보기로 하자.

“서로 다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민족적 대단결을 실현한다.” (1972년 7.4남북공동선언)

말은 그랬지만 초월하는데 동서 냉전 종식까지 15년여를 더 경과해서야 조금 초월할 수 있었다. 현실 사회주의권이 몰락하고 나서야 대학에서 마르크스를 포함한 정치경제학 과목이라는 것이 가능했지 않은가?

“서로 다른 체제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인정하여 나간다.”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얼마나 존중하고 얼마나 인정했는지 물어 보고 싶다. 그 이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평양을 방문해서 맺은 7.4공동선언을 즈음해서 이후로 북쪽의 것을 남쪽에 내려오게 해서 선전하고, 남쪽의 것을 북쪽의 전시장에 놓고 선전하고 팔자고 했다.

금강산 관광 피격 사건 하나로 남북 사이 민간 내왕 중단이라는 초강경 대책에 앞서, 서로 다른 제도와 서로 다른 이념의 차이를 존중한다는 것이 기본합의였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자기 주장만 내세우지 않기로 한 것이 아닌가?

금강산 가본 사람도 많지만 더 풀리면 가보려고 안 가본 사람이 더 많고, 북쪽이 피해 받은 것보다 남쪽 기업이 피해 받은 것이 줄잡아도 몇 배 많을 것이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과 기회균등은 골고루 보장해야 하는 것이 정부의 의무이다.

“우리 민족끼리 자주적으로 나라의 통일 문제를 풀어나간다.” (6.15남북공동선언)

미국으로부터의 무기 수입액 3위에 랭크되고 있는 것이 한국이다. 전시작전권 반환 시기를 다시 논의하자고 하면 미국으로부터의 무기 수입액은 더 늘어날 것인가? 줄어들 것인가?

대치 상태를 완화해서 복지 예산을 더 늘려야 하고, 교육 예산을 더 늘려야 21세기 지식기반 사회에서 우리의 2세들이 뒤떨어지지 않을 사회적 자본을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세계사적으로 이미 종식된 냉전 시대라는 한 시대를 그냥 아물게 하라. 적대하는 세력과 협상이 민주주의의 요체라고 정치학 교과서는 가르치고 있지 않는가? 오늘의 위정자들은 말로만 교과서를 배우라고 하지 말고, 실천으로 민주주의의 정신을 실현해야 한다.

민족 분단 60년사의 교훈을 살린다면 한층 더 성숙한 자세로 뒤집어엎어진 것을 본래의 지어진 역사성을 이어서 옳게 세워 놓아야 한다. 남북 사이에 대결이 아닌, 상대방을 압박해 죽이기가 아닌 남북 상생의 정치협상 기조로, 진정한 정치협상 기조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

서로의 반쪽이다. 남북 사이 더 이상의 대결, 일촉즉발의 적대시는 안 된다. 이것이 6.25 민족분단 60년사가 가르치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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