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적 결례는 맞지만 외교를 넘어선 정치의 영역에서 벌어진 일이다."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의 방한 일정을 미국이 아닌 한국에서 먼저 공개한 것은 외교적 결례가 아니냐'는 질문에, 지난 15일 경주 제4차 한.중.일 외교장관회의 계기에 만난 외교통상부 당국자의 답변이다.

지난 3~7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방중 전후 중국의 '천안함 거리두기'가 확인됨에 따라, 현 정부는 믿을 곳은 미국 밖에 없다고 보는 듯 하다. 지난주 청와대 핵심 관계자가 클린턴 장관의 25일 방한을 전격 공개하고, 18일 오전 이명박 대통령과 오바마 미 대통령의 전화통화를 청와대가 비중있게 홍보하는 등의 행보는 모두 같은 맥락이다.

이른바 '천안함 외교'는 오는 20일 민.군합동조사단의 중간조사결과 발표를 기점으로 정점으로 치달을 전망이다. 이 대통령이 대국민담화를 발표하고 군이 대북성명을 발표하고 외교부는 유엔안보리 의장에게 서한을 보내 안보리 회부를 요청할 예정이다. 중국이 한 발 뒤로 빠진 데 따른 공백을 클린턴 장관의 방한으로 메울 복안도 세워뒀다.

문제는 20일이라는 시점이다. '6.2 지방선거' 공식선거운동 첫날이다. 야당이 선거용 북풍기획이라고 반발할 이유가 넘치도록 충분한 셈이다.

현 정부의 의도를 선해해서, 북한을 압박하기 위한 국제공조 구축 외교라고 치자. 그러나, 가장 중요한 중국이라는 축이 이미 무너졌다. 김 위원장의 방중을 통해서다. 장위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6일 '천안함 사건과 김 위원장의 방중은 별개'라고 선을 그었다.

이어 지난 15일에는 양제츠 외교부장이 유명환 외교부 장관과의 양자회담에서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조사가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17일 민주당 정세균 대표를 예방한 장신썬 주한중국대사는 "지금까지 공개된 자료들을 보면 누구의 소행인지 확실한 증거가 없는 것 같다"면서 "확실한 증거가 나오기 전에는 억측을 자제해야 한다"고까지 나갔다.

지난 4.30 상하이 한.중 정상회담과 15~16일 한.중.일 외교장관회의 등을 통해 현 정부가 진행중인 천안함 조사결과를 중국측에 설명했음에도 중국측이 이같은 반응을 보임에 따라 국제공조, 6자회담 틀 내에서의 5자 공조라는 현 정부의 구상은 좌절됐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 정부가 '중국 끌어들이기'를 멈출 것 같지는 않다. 15일 밤 한 당국자는 "우리가 어떻게 할지가 중요하다"면서 "중국의 입장이 100% 불가변적이라고는 보지 않는다"고 했다. 다른 관계자는 "유 장관이 장관직을 걸었다"고 외교부 분위기를 전하기도 했다. '외교안보라인 물갈이설'이 거론되는 상황에서 선거와는 다른 의미의 '정치논리'도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또 청와대는 오는 28일 원자바오 중국 국무원 총리의 방한과 이어지는 제주 한.중.일 정상회의에 기대를 거는 분위기다.

그러나, 이같은 정부 분위기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가진 당국자들도 적지 않다. 한 당국자는 "현 정부가 천안함 출구전략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중국의 입장이야 이미 확인된 것이고, 미국이 한.미동맹 배려 차원에서 상당기간 기다려줄 수 있겠지만 언제까지 천안함이 6자회담 재개를 가로막도록 방치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인식에서다.

외교소식통은 "미국은 내부적으로 단기적으로 천안함 사건을 마무리 짓고, 2~3개월 후 6자회담 프로세스를 재개하는 일정표를 가지고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 지난달 29일과 지난 11일 클린턴 장관과 다이빙궈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간 통화에서 이같은 공감대가 확인됐으며 오는 24~25일 미.중 경제 및 전략대화를 통해 가닥을 잡을 것이라는 관측도 곁들였다.

미국의 향후 행보 결정에는 중국, 더 정확히 말하면 중국을 통해 전달된 북한측의 입장이 영향을 주고 있다는 분석이다.

한 소식통은 지난 북.중 정상회담에서는 천안함 문제가 거론되지 않았으나 강석주 북 외무성 제1부상과 다이빙궈 국무위원간 실무 수준에서 이 문제가 논의됐다고 전했다. 이 자리에서 강 부상은 격앙된 어조로 '남측이 계속 근거 없이 북측 소행으로 몰고 간다면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는 것이다.

강 부상은 특히 한국측의 요청으로 김계관 부상에 대한 비자발급을 보류한 미국측의 무성의와 천안함 정세 등을 지적하면서 6자회담 재개에 강한 회의감을 피력했다고 이 소식통은 전했다. 이에, 중국이 장시간 공을 들여 북한을 달래서 '6자회담 재개에 유리한 정세를 조성하기를 희망한다'는 북한측 발언을 이끌어냈다는 설명이다.

이번 한.중.일 외교장관회의에서, 중국측이 천안함에 '올인'하는 한국을 애써 무시하고 '조속한 6자회담 재개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심지어 '북.미대화-6자 예비회담-6자 본회담'으로 이어지는 6자회담 재개 프로세스를 다시한번 강조한 이유이기도 하다.

주변 초강대국들이 한반도를 두고 각기 전략적 우선순위에 따라 계산에 분주한 상황에서, 한반도 정세를 주도적으로 관리해야 할 정부가 국내정치에 눈이 멀어 폭주할 때가 아니라는 말이다. 지금이야말로 냉정하게 천안함 이후를 대비한 '출구전략'을 짜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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