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영화배우 출신의 탈북자 김혜영의 증언내용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북에서 최고의 영화인 양성소라고 할 수 있는 평양연극영화대학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았다(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82564).

거기서 김혜영은 평양연극영화대학에서는 “노동자를 비롯한 최하층에서는 학생들이 선발되지 않는다.”고 증언하였고, 필자는 그것에 대한 의문을 실제 몇몇의 유명 영화배우들의 이력을 통하여 검증함으로써 그의 증언에 대한 진정성은 더욱 의심된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그럼 이번에는 북한영화계에서의 신인진출에 관한 남쪽 북한영화 연구자의 연구결과를 보도록 하겠다. 제2세대 북한영화 연구자 그룹가운데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이명자는 그의 최근 저서『북한영화사』(2007)가운데 ‘선군혁명영화기’라는 목차에서 선군영화의 하나로 ≪녀병사의 수기≫(2003)를 뽑아 분석하며, 그 영화를 분석하는 이유로 신인 작가와 배우 그리고 평양연극영화대학의 작품이기 때문이라고 하며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녀병사의 수기≫(2003)는 신세대 작가 김희옥이 쓴 영화문학(시나리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신세대 스타 김윤미(향순 역)을 발굴하며 평양연극영화대학에서 내놓았다는 점에서 특별하다.(밑줄 필자) 직업상의 경력을 중요시하는 북한에서는 신세대 작가나 스타가 부상하기에 어려운 영화산업구조를 가지고 있는데(밑줄 필자) 그런 점에서 이 영화의 변별성이 눈에 뜬다."

≪녀병사의 수기≫(2003)가 여러 선군영화 가운데 이러한 이유로 선택되었다면, 이 글을 통하여 상상할 수 있는 북의 영화계란 기성세대들의 장벽이 공고하게 둘러쳐진 보수적 분위기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의 변별성은 더욱 눈에 띄는 것이고, 또 그러한 이유로 이명자가 자신의 글에서 ≪녀병사의 수기≫라는 영화를 선택한 것은 나름대로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신세대들의 관심과 지향 등을 알아 볼 수 있는 좋은 선택이 되는 것이다.

위와 같은 연구 선택이유로 위의 분석 글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필자는 나름대로 이 영화를 관람하고 관련자료 등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이 영화 화면 속에서 필자는 너무도 황당한 장면을 보고 말았던 것이다. 위에서 이명자는 나름대로 이 영화의 영화문학이 신인 작가에 의하여 쓰여졌고, 신인 배우가 주연을 맡았고, 또 이러한 것을 총괄적으로 평양연극영화대학의 ≪청소년창작단≫이 책임지고 제작하였기 때문에 변별성이 있다고 판단되어 자신의 연구 주제로 선택된 것이라고 이 영화의 선별이유를 설명하고 분석하였는데, 필자가 이 영화를 관심 있게 관람하고 마지막으로 본 이 영화의 장면은 아래와 같은 장면이었던 것이다.(아래 사진 참조)

▲ 예술영화≪녀병사의 수기≫(2003) : 이 영화를 창작한 곳이 조선인민군 소속의 ≪조선인민군4.25예술영화촬영소≫임을 알리는 영화 마지막 화면.
즉 위의 사진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녀병사의 수기≫는 ≪청소년창작단≫의 작품이 아니라 북의 항일혁명 내지는 전쟁관련 등 군사물을 주로 창작하는 ≪조선인민군4.25예술영화촬영소≫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 영화문학을 쓴 김희옥과 주연배우를 맡은 김윤미는 다른 영화 속에서는 보여지지 않았던 새로운 인물이었던 것은 맞다. 하지만 영화제작의 주체가 틀렸다는 것은 학술연구자료로써는 큰 실수가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간단히 해당 영화를 소개하는 과정에서 그 제작주체를 밝히는 문제였다면 그것은 작은 실수로 인정되며 이해가 되지만, 안타깝게도 저자는 이 영화의 제작 주체가 신세대 영화인들의 집단인 ≪청소년창작단≫이라고 하며, 이것 역시 이 영화를 분석하게 된 근거로 삼았기 때문에 이러한 오판은 커다란 문제인 것이다.

이제 저자의 위와 같은 실수는 그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마치고, 이 영화를 통해 북의 영화계에서 신인들의 영화계 진입문제를 분석하고자 하였으니 이에 대한 필자의 분석 결과를 서술하기로 하자.

필자의 북한영화에 대한 접촉 경험으로 볼 때 이명자의 설명처럼 ≪녀병사의 수기≫는 보기 드문 신세대들의 유별난 영화인가 그리고 북쪽 영화계에서 신인들의 진입은 얼마나 어려운 것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이로 인해 필자는 북에서 신인양성과 그들의 기성 영화계 진입 과정 등에 대하여 자료를 분석해 보았다.

먼저, 김일성 주석은 1951년 12월, 당시 세계청년예술축전에 참가하는 예술인들을 보내는 자리에서 대중들 사이에서 솟아 올라오는 신진예술인들을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가를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에게는 우수하고 로숙한 예술인들도 있으며 재능있는 신진예술인들도 많습니다. 이 청년신진예술인들은 우리가 세심히 보살펴주고 키워야 할 유망한 싹들입니다. 장래는 청년들의 것입니다. 우리는 노력과 시간을 아끼지 말고 신진예술인들을 키우며 그들을 대담하게 등용하여야 하겠습니다.”(「우리 예술을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키기 위하여」, 1951.12.12)

또한 김정일 위원장은 1966년 2월 영화예술부문 창작가, 예술인들 앞에서 한 연설에서 ‘혁명적 영화창작에 새로운 전환을 일으키자’며 신인 문학예술인들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지금 영화문학을 쓰는 작가가 너무 적습니다. 창작경험과 생활체험이 풍부한 유능한 작가들의 역할을 높이는 한편 신인작가들을 많이 받아들여 그들이 한 몫하도록 적극 도와주어야 합니다”(「혁명적 영화창작에 새로운 전환을 일으키자」, 1966.2). 라고 하였다.

또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신인의 발굴과 육성에 힘쓸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사실은 아래와 같은 이후 여러 문건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신진발굴과 육성에 관한 지속적인 언급들은 결국 1973년『영화예술론』에서 체계적인 이론으로 정비되게 이른다.

김정일 위원장이 신진 문학예술인 양성의 중요성을 언급한 문건들

 

「혁명적영화창작에서 새로운 전환을 일으키자」(1966.2.26)
「조선영화문학창작사에 대한 지도사업을 잘하기 위한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1967.6.30)
「문학예술작품에 당의 유일사상을 구현하기 위한 사업을 실속있게 할 데 대하여」(1967.8.16)
「예술인들과의 사업을 정치적 방법으로 하여야 한다」(1969.4.20)
「작가들은 아는 것이 많아야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다」(1970.1.16)
「영화창작사업에서 나서는 몇 가지 문제」(1971.2.12)
「예술작품은 창작가의 열정과 탐구의 열매이다」(1971.10.16)
「영화예술교육사업에서 사회주의 교육학의 원리를 철저히 구현할 데 대하여」(1971.7.8)
「주체시대에 맞는 새로운 혁명연극을 창작할 데 대하여」(1972.11.7)

한편 위와 같이 신인의 발굴과 양성에 대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의 교시는 교시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과 기관에 의하여 그것을 위한 실질적 방식이 구체화되었다.

이것을 위하여 북의 문학예술조직은 전문작가들과 대중문예활동으로 나뉘어지는데 이에 대하여 문학평론가 김재용는 “전문작가들에 의해서 전문예술이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대중에 의해서 문학예술도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전문창작가들과 더불어 대중문예활동에도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다”고 설명하며, 또 미술평론가 최열은 북의 경우 “신진발굴사업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데, 각 작가동맹의 신인지도부와 노동당 중앙위원회 문학예술부, 이 두 부분에서 신인들을 배출한다”고 그 구체적인 경로를 설명한다(「북한의 주체문예, 60년을 점검한다」,『역사비평』1989년 봄호, 통권 6호).

이처럼 북의 문학예술분야에서의 신인 발굴과 육성에 대한 당의 방침은 강력한 것이며, 이러한 당적 방침은 그대로 영화계에도 그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추측된다.

▲ 출처 : 임헌영 외, 「북한의 주체문예, 60년을 점검한다」,『역사비평』1989년 봄호(통권 6호)
그럼 이제 북의 문학예술 분야에서 신진세력의 발굴과 양성에 관한 검토는 이 정도로 줄이고, 그럼 구체적으로 영화부문에서의 신진들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에 대하여 필자의 북한영화 접촉 경험과 자료를 통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이 글에서 검토되는 것은 예술영화에 국한된 것임을 밝혀둔다. 북의 예술영화는 『조선영화년감』을 비롯하여 영화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는 각종 자료를 분석해 보면 이명자가 예로 드는 ≪청소년창작단≫에 의하여 제작된 영화는 아래와 같이 상당히 많다.  

≪평양연극영화대학의 ’청소년창작단’에 의하여 창작된 북의 예술영화≫

제작년도

청소년창작단 제작영화

1986

≪산정의 처녀기사≫

1987

≪우리 영심이≫,

1988

≪14번 나사≫, ≪누구를 닮았는가≫

1989

≪우리 선생님≫, ≪아름다운 기슭≫

1991

≪키우는 마음≫, ≪태어나 아홉해≫, ≪류다른 모자≫, ≪꼬마세대주≫, ≪령길에서 만난 세 청년≫

1992

≪내가 사랑하는 처녀≫, ≪방목지의 새 세대≫

1993

≪도시처녀 시집와요≫

1994

≪우리 할아버지≫

1995

≪렬차는 정시에 달린다≫

1996

≪노래여 너와 함께≫

1997

≪학생민견대 앞으로≫, ≪끝나지 않은 편지≫

1998

≪소중히 여기라:종소리≫, ≪붉은 넥타이≫, ≪소녀유술강자≫(텔레비죤예술영화:4부작)

1999

≪따뜻한 눈송이≫

2000

≪나의 가정≫, ≪심장으로 보는 처녀≫(텔레비죤예술영화:3부작)

2001

≪뽕따는 처녀들≫, ≪삶의 미천≫(텔레비죤예술영화:3부작)

2003

≪첫번째 희망≫

2005

≪내 고향의 바다≫

년대미상

≪나의 집≫(2부작:텔레비죤예술영화)

위의 표를 보면 매 해 영화제작 편수에 있어 약간의 차이가 있고, 특히 경제적으로 무척 힘들었던 1990년대 중 후반에는 예술영화 제작편수가 현저히 줄었다.

가장 많이 제작한 해인 1988년 단편영화를 포함하여 총 제작편수가 36편이며, 가장 적은 해는 1998년 16편이다. 이러한 조건들을 고려해 보았을 때 위에서 보여지듯 대학생들로 구성된 청소년창작단이 제작하는 영화는 결코 적은 수가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이들 청소년창작단은 최근에 이르러서는 ≪소녀유술강자:4부작≫(1998), ≪심장으로 보는 처녀:3부작≫(2000), ≪삶의 미천:3부작≫(2001) 등 텔레비죤 영상물의 제작에도 참여하고 있다.

한편 일반 인민대중의 문학예술적 소양을 발굴, 조장하기 위하여 군중창작현상공모에서 당선된 영화문학을 기초로 예술영화가 제작되기도 한다. 군중현상공모 작품의 경우 북의 자료에서 쉽게 확인하기 어렵다. 설령 그 작품이 공모에 의하여 당선된 작품일지라도 관련 자료에는 창작자의 이름이 표기되기 때문에 그것이 현상공모에 의하여 창작된 것인지를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현상공모에 의하여 창작된 작품을 확인하기 위하여서는 직접 영상물속에서 대게 영화 시작 첫 장면에서 노출되고 있는 “군중창작현상모집”라는 문구를 봐야 확인 할 수 있다. 하지만 북한영화를 많이 접한 사람이라면 이러한 작품들이 그리 희귀한 것 만은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영화문학이 군중창작현상모집에서 당선된 작품으로 제작된 영화. 예술영화≪정다운 거리에서≫(1974)와 ≪운행길에서 만난 처녀≫(1983)
이러한 영화는 ≪기막힌 사실≫, ≪아버지가 받은 대접≫(1983)같은 단편영화뿐만 아니라 ≪정다운 거리에서≫(1974), ≪더 높은 곳으로≫(1982), ≪운행길에서 만난 처녀≫(1983), ≪하나의 생각≫(년대 미상) 등 장편영화들이 지속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평양연극영화대학의 영화제작소인 ≪청소년창작단≫이란 남쪽의 기준으로 볼 때 영화학과 학생들이 모인 아마추어 창작단에 불과한 것인데, 그들이 창작하는 영화가 일반 기성 창작단이 창작하는 영화와 동급으로 나열된다는 것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위에서 간단히 살펴본 바에 의할 때 이명자가 언급한 북한영화계에서 신인들의 지위와 처지에 대하여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고 판단된다. 물론 이 글에서 필자 역시 북의 신인진출에 관한 명쾌한 자료를 갖고 있지는 못하다. 하지만 이명자의 글처럼 그리 쉽게 결론 내릴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하여서는 좀 더 많은 조사와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 아닐까 생각해 보며 이에 대한 의문을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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